시 / 응 - 문정희
햇빛 가득한 대낮
지금 나하고 하고 싶어?
네가 물었을 때
꽃처럼 피어난
나의 문자(文字)
“응”
동그란 해로 너 내 위에 떠 있고
동그란 달로 나 네 아래 떠 있는
이 눈부신 언어의 체위
오직 심장으로
나란히 당도한
신의 방
너와 내가 만든
아름다운 완성
해와 달
지평선에 함께 떠 있는
땅 위에
제일 평화롭고
뜨거운 대답
“응”
- #문정희 의 시 「#응 」전문
손 위에 분 누가 의사를 물어 왔을 때 대답에는 ‘네’ 와 ‘예’ 가있다. 내가 어릴 적에는 충청도 사투리로 ‘야’ 하고 길게 대답하기도 했다. 나이가 비슷한 사람이나 손아래 사람의 물음에는 ‘어’ ‘그래’ ‘응’ 등의 대답이 있다. 이 중에서도 매력적인 대답이 ‘응’ 이다. 이 ‘응’은 그 특이한 정감 때문에 손윗사람에게도 가끔은 사용된다. 엄마에게도 아빠에게도 오빠에게도 남편에게도 자식에게도 여자는 ‘응’ 한 마디로 통하기도 한다. 이 ‘응’ 자 하나로 기상천외의 시를 쓴 문정희 시인의 시「응」이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 중의 하나다. 뭔가 일이 뜻대로 잘 안 풀릴 때, 요즘처럼 코로나 사태로 꼼짝도 못하여 답답할 때 이 시를 읽으면 얼굴에 가벼운 미소가 일고 마음이 밝아진다.
이 시는 샤워를 하다가 급하게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얻은 착상이라 한다. 아마 농담으로 시와 유사하게 문자가 오고 갔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1연은 이시의 서론에 불과하다.
‘응’자 하나 놓고
‘동그란 해로 너 내 위에 떠 있고/동그란 달로 나 네 아래 떠 있는/이 눈부신 언어의 체위’ 란 얼마나 놀라운 발상인가. 요즘 같은 평등시대에 너를 ‘해’ 나를 ‘달’로 표현한 겸손도 감칠맛이 난다. 시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응’자는 ‘오직 심장으로/나란히 당도한/신의 방’이란다.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해와 달/지평선에 함께 떠 있는/땅 위에/제일 평화롭고/뜨거운 대답’ 으로 까지 간다. 여기 까지 오면 정신이 멍해 진다.
뜻 문자가 아닌 소리글자 한자를 놓고 ‘너와 내가 만든 아름다운 완성’ ‘땅위에서 가장 평화롭고 뜨거운 대답’ 으로 까지 확대하는 시인의 상상력은 놀랍기만 하다
문정희 시인은 ‘내가 사랑한 우리 말’(조선일보 2. 27일자)에서 “<몸>이라는 우리말을 사랑한다. 몸! 따스한 살 냄새가 나고 피와 뼈와 눈물이 스며오는 말이다. 신체(身體) 혹은 보디(Body)라는 말로는 느낄 수 없는 뭉클함이 있다.” 고 했다. 그리고 “몸! 우주를 하나로 모아 주는 우리말이다. 모든 생명은 한 탯줄로 이어진 한 몸인 것은 아닐까. 동체 대비랄까. 너의 몸이 나의 몸이다?!” 라고 끝을 맺었다.
문정희 시인이 좋아하는 우리말 ‘응’ ‘몸’ 에는 모두 ‘너의 상위’와 ‘나의 하위'가 존재 한다. 눈부신 언어의 체위가 있다. 동체 대비이며 너의 몸이 나의 몸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한 겨울 차가운 얼음장 갈라지듯 '너'와 '내'가 갈라져 간다. 이 갈라진 틈은 앞으로 봉합될 수 없으리 만큼 더욱 크게 벌어질 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는 ‘한 탯줄로 이어진 한 몸’ 라는 본질을 가슴에 담고 살았으면 한다. 이 나라가
‘오직 심장으로 나란히 당도한 신의 땅
너와 내가 만든 아름다운 완성
해와 달이 지평선에 함께 떠 있는
땅 위에 제일 평화롭고 뜨거운 나라’
로 되어졌으면 하는 소망을 담아본다.
발칙한 재미있는 시를 읽었습니다. 문정희 님의 '응' 입니다. 유쾌한 말장난이 돋보이는 언어유희의 시입니다.
안도현님의 시를 쓰는 법에 대한 수필집 해설에 의하면 ' 시를 시작하자마자 거두절미하고 대낮에 '하고싶어? 라는 문자가왔다고 '대담하게' 밝히는건 무슨 뜻일까? 이것 역시 독자를 시 앞으로 잡아당겨 두려는 시인이 노련한 유인술이다. 들어보나마나 외설은 아닐것이다 (하지만 독자인 우리는 시인에게 넘어가 줄 준비가 되어있다)-라 쓰여 있습니다
참 재기 발랄하고 유쾌한 시입니다. 문정희 시인은 이렇게 우리 글이 주는 모양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합니다. 몸이라는 글자도 그렇고요.
시인은 세상을 그렇게 자세히 봅니다. 사물뿐 아니라 무심코 적어놓는 글자 하나에서도 저 많은 이야기를 끌어냅니다
태양을 부르고 , 달을 부르고
당신을 부르고 나를 부르고
우리의 긴 사랑 이야기를 불러냅니다.
쉽지 않은 글쓰기의 길을 생각하며
쓰다 만 시구절을 슬며시 덮어 놓습니다.
오늘은 그저 '응' 하나만 생각날듯 합니다.
그치? '응'
세상 모든 이들이 비밀스럽고 발칙한 유쾌한 하루가 되길 기원해봅니다. -사노라면
문정희시인의 몸
"몸이라는 우리말을 사랑한다."
몸! 따스한 살 냄새가 나고 피와 뼈와 눈물이 스며오는 말이다. 신체, 혹은 보디(body)라는 말로는 느낄 수 없는 뭉클함이 있다.
몸은 치명적 아름다움과 욕망과 독을 지닌 신비한 복합체라고 대담집 '여자의 몸'에서 말한 바 있다. 에로스와 모성으로서 몸, 생명 주체로서 몸을 주제로 한 책이다. 오늘날 우리 몸이 타자의 시선에 날조되었는가 하면, 자본주의 유행에 따라 수시로 뜯어고쳐지는 옷감 취급을 당했음도 지적했다.
그동안 나는 유난히 몸이라는 시어에 집착했다. 시를 쓴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시를 울었던 것 같다. 그만큼 몸은 내게 가깝고 절실한 주제였다. 특히 생명 창조 주체로서 몸을 노래한 시가 많은데 이는 출산을 경험하고 난 후 몸 이외에는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장 깊고 가장 비밀스러운 몸의 근원을 열고 고통의 극을 통하여 한 생명을 낳는 일은 진정 성스러운 슬픔이요, 동물적 저주의 경험이었다.
출산 후 탯줄로 연결된 어미와 새끼를 보며 하늘 아래 이보다 더한 확증은 없다고 생각했다. 환속한 성자처럼 분만실을 어기적거리며 걸어 나오며 여성으로 태어난 결핍을 비로소 털어버렸다. 오직 존재로서의 나와 존귀한 어미로 새로 태어난 나를 느꼈다.
우리말로 여성의 경도를 "몸 한다" 하고, 해산을 "몸 푼다"고 한 것은 다시 생각해 보아도 절묘하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를 비롯하여 우리 시조에는 여러 종류의 몸이 등장하고, 현대시 또한 다양한 몸을 노래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몸 안에 창조의 궁을 가지고 태어난 생명 주체로서 몸을 노래한 시는 드물다.
몸! 우주를 하나로 모아 주는 우리말이다. 모든 생명은 한 탯줄로 이어진 한 몸인 것은 아닐까. 동체 대비랄까. 너의 몸이 나의 몸이다?!
몸이 큰 여자 / 문정희
저 넓은 보리밭을 갈아엎어
해마다 튼튼한 보리를 기르고
산돼지 같은 남자와 씨름하듯 사랑을 하여
알토란 아이를 낳아 젖을 물리는
탐스런 여자의 허리 속에 살아 있는 불
저울과 줄자의 눈금이 잴 수 있을까
참기름 비벼 맘껏 입 벌려 상추쌈을 먹는
야성의 핏줄 선명한
뱃가죽 속의 고향노래를
젖가슴에 뽀얗게 솟아나는 젖샘을
어느 눈금으로 잴 수 있을까
몸은 원래 그 자체의 음악을 가지고 있지*
식사 때마다 밥알을 세고 양상추의 무게를 달고
그리고 규격 줄자 앞에 한 줄로 줄을 서는
도시 여자들의 몸에는 없는
비옥한 밭이랑의
왕성한 산욕(産慾)과 사랑의 노래가
몸을 자신을 태우고 다니는 말로 전락시킨
상인의 술책 속에
짧은 수명의 유행 상품이 된 시대의 미인들이
둔부의 규격과 매끄러운 다리를 채찍질 하며
뜻없이 시들어가는 이 거리에
나날이 오염되고 황폐화 되어가는
나는 한 마리 산돼지를 방목하고 싶다
몸이 큰 천연 밀림이 되고 싶다
♣ 詩 들여다보기 :
우리에게는 매일을 시간의 반복으로 볼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새것으로 바라보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늙은 나이, 늙은 시간이란 영원히 없을 것이다. 매순간이 다 눈부시고 새로운 시간인 것이다. "태양은 날로 새롭다." 이 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다. 시인이 오래도록 가장 아끼는 잠언이다.
여성은 자궁을 지닌 거룩한 존재이다. 싱싱한 생명력을 품고 있다. 생명을 낳고 보육하는 모태로서의 근원이다. 하지만, 여성의 본성에 담겨 있는 신성한 기운이 상업주의와 실용주의에 밀려 변모되었다. 여성이 근원적으로 신성한 존재라고 인정하는 태도는 여성적인 힘에 대한 자기 긍정이라 할 수 있다. 시인은 진정한 여성의 힘을 원시적 자연성에서 찾고자 한다.
이러한 원시적 이미지는 피상적으로 원시를 동경하는 것과 다르다. 산업화와 도시화된 자본주의 사회로 인해 여성의 자연성이 억압되고 있다. 시인은 '저울과 줄자'로 여성이 '규격'화되고 있다고 본다. 인위적으로 만든 수의 법칙에 따라 규격화로 만들어 인간의 삶을 종속시킨다. 자본주의의 상업 전략으로 규격화는 대량생산과 자본의 증식을 위한 방법이다. 그것에 맞춰지지 못한 사람은 시대의 감각에 뒤처지는 자가 된다. '눈금으로' 재고, '무게를 달'며 여성들은 자본의 상품으로 길들여진다. 이같은 사회 체제 속에서 시인은 '비옥한 밭이랑의' '왕성한 산욕(産慾)'을 몸 속에 품고 '산돼지를 방목하고 싶'어 하고, '몸이 큰 천연 밀림이 되고 싶'다고 찬양한다. 여성의 몸에 있는 자연성을 훼손시키고 물질만능주의로 전락시키는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시인이 지향하는 것은 자연적인 고유의 여성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것은 건강한 생명을 낳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생태적 삶의 조건을 만드는 일이다. 시인이 보여주는 사유는 여성이 지닌 생물학적 본성을 신성한 것으로 인식함과 동시에 남성과 적대적 관계를 드러내는 페미니즘 시의 일반적인 경향과 달리 여성과 남성의 나눔 의식을 강조하는 독특함을 보여주고 있다.
삶에 대해서, 현실에 대해서 그리고 꿈에 대한 시인의 소망이 원초적인 정감과 만나 누구도 갖지 못하는 감각적인 정서의 영역을 확보하였다.
[신간] “여자들이여, 알몸으로 살라!”
문정희 시인과 유인경 기자 ‘여자의 몸’을 말하다
‘햇살 가득한 대낮/지금 나하고 하고 싶어?/네가 물었을 때/꽃처럼 피어난/나의 문자/“응”//동그란 해로 너 내 위에 떠 있고/동그란 달로 나 네 아래 떠 있는/이 눈부신 언어의 체위//오직 심장으로/나란히 당도한/신의 방//너와 내가 만든/아름다운 완성//해와 달/지평선에 함께 떠 있는//땅 위에/제일 평화롭고/뜨거운 대답/“응” - 문정희 시 <“응”> 전문
● ‘여자의 몸’, 얼마나 아시나요? 의학서가 아닙니다
여자의 몸은 미스터리다. 반세기 가까이 여자 몸을 봤지만 여전히 난 여자의 몸을 알지 못한다. 나체를 탐험(?)한 지가 25년을 넘었으니 이제 알만도 한데 여전히 물음표이고 느낌표다. 궁금증이 풀릴 만도 한데 여전히 궁금하고 싫증이 날 만도 한데 여전히 끌어당기는 자석이다. 그렇다. 여자의 몸은 미스터리다.
남자라 그런 가 싶었는데 아닌가 보다. 여자는 마찬가지인가 보다. 여성의 언어로 생명을 노래하는 대표시인 문정희 씨와 입담으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워 할 유인경 기자도 (두 분 모두 나이보다는 연세라는 말이 어울리는 ‘지긋한 여인’이시다) 그런가 보다. 문정희 시인과 유인경 기자. 기센 두 여자가 본 여자의 몸은 이렇다.
‘여자의 몸은 성전이자 지옥이고, 꽃밭이자 폐허다. 생명이 쏟아지는 방앗간이기도 하고 욕망이 포탄처럼 터지는 전쟁터다. 모든 여자의 몸은 신의 선물이라고 하지만 때론 신의 슬픔, 신의 저주 같기도 하다.’ 그렇다. 여자의 몸은 여자가 봐도 복잡함 그 자체인가 보다.
● 문정희 시인과 유인경 기자의 유쾌한 수다
여기 ‘여자의 몸’에 관한 두 여자의 유쾌한 수다가 있다. 복잡한 여자의 몸과는 달리 책 제목은 ‘여자의 몸’(문정희 유인경 지음 l 여백 펴냄)으로 단박하다. ‘여자의 몸’은 문정희 시인과 유인경 기자가 여자의 몸을 주제로 나눴던 대화다. 때론 유쾌하고 때론 철학적이고 때론 진지하기도 하다. 에로틱한 생각을 하기 쉽지만(아니 좀 에로틱하다) 결코 경박하거나 가볍지 않다.
책은 여자의 몸을 네 가지로 벗겼다. ‘성과 에로스’ ‘모성’ ‘억압대상’ ‘생명주체’가 그것이다. 여자의 몸을 통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여성의 현실과 주체성을 고민한다. 비너스서 창녀까지, 여성학자는 물론 할리우드 스타까지 여성의 몸과 관련된 모든 것을 거침없이 내뱉는다. 또 문학사 사회학 미술사들 넘나들며 여성의 몸과 예술 삶 시 그리고 열정을 토로한다.
● 여자는 왜 알몸으로 살아야 하는가
책 ‘여자의 몸’의 큰 끌림은 시(문정희의 시)를 통해 여자의 몸을 해부한다는 것이다. 무거울 만하면 주옥같은 시로 입안을 박하사탕처럼 만들어준다. 무려 27편의 시가 키워드로 등장한다. 시만 읽어도 ‘본전’을 뽑고도 남는다.
그래서 ‘여자의 몸’을 어쩌란 말이냐고? 결론은 ‘알몸으로 살라’는 것으로 귀결된다. 문정희 시인은 말한다. “제가 알몸으로 살라는 것은 처녀다운 몸을 유지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가치를 인식하고 그걸 회복하라는 뜻입니다. 당당한 알몸으로 자신의 재능에 대한 의구심이나 몸에 대한 열등감, 자괴감을 떨쳐버리고, 남의 시선에 주눅 들지 말고 오로지 자신답게 살라는 겁니다”라고.
여자 못지않게 남자들에게도 참 괜찮은 책이다. 딸딸이 아빠인 필자는 별 네 개 반, 강추! 딸들에게 선물해 주고 싶은 책이다. 두 딸아 ‘알몸으로 세상을 살아 가거라!’ | 연제호 기자 so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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