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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철전집4-태항산록-균렬(龟裂) -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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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균렬(龟裂)

 

1

누런 털이 보수수 난 송아지가 왼뭄에 하나 가득 따스한 해빛을 받고 누워가지고 등어리에서 아지랑이가 뭉게뭉게 피여오르는것도 모르고 까무락까무락 졸고있다.

 

못(池)은 말간 하늘과 솜과자보다도 더 하얗고 더 가벼워보이는 구름을 반영(反映)하고 그리고 고요하다. 저쪽 밭사이 길을 괭이를 메고 건드적건드적 걷고있는 농부의 그림자가 아주 짧다. 언덕밑 집에서 닭이 울었다.

 

기지개를 쓰고 하품을 하고싶은것을 그렇게 하는것조차도 노력이 들어서 못하겠다는듯싶은 게슴츠레한 눈을 반쯤이나 감은 게으름보 머슴이 양지바른 돌각담밑에 지직을 펴놓고 앉아서 이를 잡다말고 끄떡끄떡하면서 고무풍선 같은 코방울을 물었다 쭈그렸다 하고있다.

 

바람은 없다. 그러나 복숭아꽃이파리는 파리파리한 잔디우에 소리도 없이 지고있다.

 

그 분홍색꽃이파리가 아까운 기색도 없이 담뿍 뿌려진 못가 잔디밭에 정성들여 깨끗이 빤 빨래를 널어놓고 그것이 마르는 동안-여기저기서 여러가지 빛의 꽃을 꺾어다가 그 옷임자에게 주고싶은 꽃다발을 만들고있는 처녀는 얼마전에 친(琴)이라고 부르라고 그 옷임자(김학천, 조선의용군 제X지대 제X대 대장)에게 말한 일이 있다.

 

꽃다발을 다 만들어가지고 들었다놨다하면서 모로 옆으로 우로 아래로 앞으로 뒤로 고개를 갸웃갸웃해가며 보고난 친의 두뺨에는 방싯 웃음이 떠올랐다. 그는 꽃다발을 잔디우에 살며시 내려놓고 일어나 가서 널어논 빨래를 만져보았다.

 

옷은 아직 채 마르지 않았다. 그는 도로 돌아와 앉았다..

 

그리고는 꽃다발을 만들고 남은 꽃가운데서 손 닿는대로 한송이를 집어서 못 푸른 물우에 던져주었다.

 

못은 가느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수면(水面)에 비친 하늘도 구름도 쭈굴쭈굴하게 주름이 잡혔다. 꽃을 동동 띄우고 동요하다가 도로 조영해졌다.

 

친은 또 한송이 꽃을 던져주었다.

 

그 순간 <<쿵 우루릉->>하고 지진같이 땅이 흔들며 멀지 않은 곳에 포탄(炮弹)이 날아와 터졌다.

 

못은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고말았다.

 

졸고있던 송아지가 놀라서 <<매->>하고 울며 뛰여 일어났다.

 

친은 두손바닥으로 귀를 가리고 잔디우에 폭 엎드렸다.

 

<<쿵 우루릉->>또 터졌다.

 

못의 물이 출렁하고 파도를 일으키고 둥둥 떠있는 두송이의 빨간 꽃이 그우를 데굴데굴 굴렀다.

 

송이자가 <<매->> 소리를 지르며 밭가운데로 뛰여 달아났다.

그리고는 그만 조용해졌다.

 

벌이 한마리 윙-하고 가는 날개소리를 내며 날아와서 꽃다발우에 앉았다가 그속으로 파고들어갔다.

 

친은 살며시 일어나 하늘을 쳐바보았다. 파란 하늘은 여전히 맑았다.

 

복숭아꽃이파리가 또 팔팔 날아와 흩어졌다.

 

친은 꽃을 또 한송이 집어서 못우에 던졌다.

 

그때 누가 발자취도 없이 살짝 뒤로 와서 그의 두눈을 꼭 가렸다.

 

친은 조용히 두손으로 자기의 눈을 가린 손을 만져보았다. 그것은 까칠까칠한 나무끌커리 같은 손이였다.

 

<<알았어요, 누군지...>>

 

친은 눈가린 두팔목을 꼭 잡으며 낮게 말했다.

 

<<......>>

 

등뒤에서는 말이 없다. 그러나 숨소리가 들렸다.

 

<<학천.>>

 

친의 입가장자리에 웃음이 스쳐갔다.

 

<<아냐.>>

 

등뒤의 사나이가 말했다.

 

<<그럼 누구?>>

 

<<맞쳐봐 어디.>>

 

<<맞췄는데 뭘.>>

 

<<정말?>>

 

<<정말.>>

 

<<틀리문 어떡할래?>>

 

<<안 틀려.>>

 

<<그래두 틀렸으문.>>

 

<<그럼 맘대루 해.>>

 

<<아.>>

 

하고 친이 승낙을 하니까 그제서야 눈을 가렸던 손이 스르르 풀렸다.

 

친이 돌아다보았다. 거기에는 회색군복의 청년사관(士官)이 눈에 가득히 웃음을 띠우고 말없이 내려다보고 서있었다.

 

김학천이였다.

 

조선의용군 제X지대가 주방(驻防)하고있는 난링(南岭)은 적진(敌阵)을 떨어지기로 5킬로 약(弱). 산지(山地)와 평야가 많다는 곳이다.

 

적아(敌我)의 진지(阵地)사이에 전답(田畓)이 있고 거기에서는 역시 농부들이 일을하는것을 볼수 있었다.

 

농민들은 포탄 같은것에는 무관심하게 되여버렸다. 그것은 뉘집 어린아이가 유리병을 깨뜨린것만큼도 자극을 주지 못했다.

 

전쟁은 그들의 정상적신경(正常的神经)과 평상상태(状态)의 심리를 마비시켰던것이다.

 

항일전쟁은 지구전의 양상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따금 포탄이 날아와 터져서 여기저기 밭가운데 커단 구뎅이를 파놓고는 했다.

 

그러면 구뎅이는 처음에는 우물을 자주 팔 때 같이 흐린 물이 고였다가 그것이 맑아지면 거마리도 생겼고 물뱀도 떠돌아다녔다.

 

밤이 되면 달도 비치고 더운 때가 되면 개구리도 울었다.

 

학천이 숙영(宿营)하고있는 조그마한 농가의 주인 로양(老杨)은 귀밑에 흰 머리털이 드문드문하고 허리가 굽은 순박한 농부였다.

 

그는 자기 집에 들어있는 이 외국사람 군대(军队)의 젊은 사관에게 모든 일에 있어서 거짓없는 친절을 보여주었다. 그 딸 친도 그러했다.

 

전장(战场)은 이따금씩 날아오고 날아오고 하는 포탄과 부분적이고 극히 적은 충돌을 제외하면 이렇듯 평화스러워보였다.

 

2

정면(正面) 적의 거점(据点)에 병력이 집결된다는 경보가 들어왔다.

 

전선은 갑자기 긴장했다.

 

비상경계가 발령되고 좌우량익(左右两羽)의 우군(友军)진지와 긴밀한 련락을 취해놓고 지대부(支队部)에서는 작전회의(作战会议)가 열렸다.

 

적이 말하는 춘기공세(春季攻势)가 막 시작되려는것이였다.

 

우군은 막반의 반격준비를 다 갖추고 대기했다.

 

적진을 정찰하고 돌아오는 정찰대는 시시각각으로 익어가는 전기(战机)를 알리였다,

 

이리하여 늦어도 래일저녁까지는 공격이 개시되리라고 추단(推断)을 내린 날 밤 캄캄하고 흐린 하늘에는 별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오전 령시(零时) 5분이 조금 지났을즈음. 우군 경계구역을 순찰하고있던 이동보초가 작전지휘부 뒤산 서낭당(城隍堂)에서 훅하고 별안간 불길이 솟아오르는것을 발견했다.

 

적에게 포격목표를 줄것을 념려해서 담배를 함부로 피질 못하는 긴장된 전선의 밤이였다.

 

깜짝 놀란 이동보초가 멈칫 서서 바라보려니까 불은 또 이어서 훅훅 하고 타올랐다. 이동보초는 당장에 그 불길이 솟아오르는 현장(现场)으로 몰켜갔다.

 

그러나 그들이 미처 그곳에 가닿기도전에 적의 포탄이 날아와 터졌다.

 

우뢰 같은 포성과 함께 검붉은 화약연기를 안은 화광이 번뜩하고 일어서 어둠속에 잠겼던 불꽃으로 물들여서 눈앞에 드러냈다.

 

한발(发) 또 한발. 60초(秒)씩의 정확한 사이를 두고 열두발의 포탄이 그 부근에 날아와 터졌다.

 

이 적의 폭격은 우군진지에 적지 않은 손실을 주었다.

 

포격이 끝나기를 기다려서 서넝당으로 쫓아간 이동보초는 거기에 얼빠진 사람같이 멍하니 뻐까르고 서있는 늙은 농부 하나를 발견했다. 그의 주위에는 타다남은 지푸래기가 어수선하게 흐러져있었다. 그것은 친의 아버지 로양이였다.

 

이동보초는 이 군령(军令)의 위반자(违反者)를 체포해가지고 끌고 내려왔다.

 

다음날 작전지휘부에서 로양은

 

<<...그래 그 밀정(密侦)도 다 불었으니까 똑바른대로 숨김없이 자세하게 다 말을 해봐. 어디 어떻게 된 일이야? 대체...>>

 

하는 심문에 대해서

 

<<네! 숨김다니요. 온 무슨 말씀입니까. 죄다 말씀 드립죠.>> 하고 머리를 숙이고 한숨을 섞어가며 토막토막 끊어서 이야기했다.

 

<<이 늙은 놈이 아마 죽을 때가 됐나봅니다. 그러찮구야 어디 이런-아니 그런데 어제저녁때 말씀입니다. 제가 밭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려니까 저 건너마을에 살던 그 노름군 아 이름이 뭐랬더라요. 도무지 생각이 나야죠. 여하튼 그 곰보녀석 말씀입니다. 아 그 녀석이 저를 붙잡구 제 어머니 병환이 중한데 복술(卜术)에게 물어보니까 저 그 산 서넝당에 밤중 자정(子正)때 가서 앓는 사람의 손톱허구 머리카락을 백지(白纸)에 꼭꼭 싸서 벼짚단속에 넣어서 살르문 병에 낫는다구 해서 지금 이렇게 령감님을 찾아왔는데- 단 두식구에 제가 밤중에 없으면 누가 앓는이의 병구완을 할 사람이 있어야죠. 그러니 어려우신대루 령감님께서 오늘밤 좀 수고를 해주시우. 이건 변변치 못한겁니다만 허면서 양(洋)비단으로 만든 담배쌈지를 하나 내주겠죠. 그래 저는 그 효성(孝诚)이 하두 기특해서 아니 이건 뭘 이러시우. 그러케 자당께서 병환이라시니 사람의 정(情)으로 의례껏 도와드려야 헐껀데. 어서 그럴랑 념려말구 돌아가서 병구완이나 잘허시우. 내 오늘자정때 꼭 정성을 들여서 그렇게 해올리리다, 허구 사양을 했습니다만 하두 그러기에 정 그렇다면 허구 그만 그 담배쌈지를 받었습니다그려. 온 천만뜻밖에 이런 일을 저질러놀줄야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그만 깜빡 그놈한테 속았습니다그려. 그놈이 일본허구 내통을 헌줄 알기만 했더문야 어디 그냥... 온 이 일을 어쩝니까?>>

 

하고 이 선량하고도 어리석은 농부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며

 

<<이게 그 담배쌈집니다.>>

 

하고 자주빛 양비단으로 만든 예쁘장스러운 담배쌈지를 꺼내서 원망스럽게 들여다보았다. 이리하여 이 사건은 즉시 림시(临时)군법회의에 회부되였다.

 

3

<<...아니 이것은 일종의 과실(过失)입니다. 과실과 고의(故意)와 그 사이에는 엄격한 구별이 있어야 할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지(无智)한 농민들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도 이번 사건은 관대한 조치(措处)를 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학천은 말을 끊었다.

 

<<농민들의 그 무지가 무엇보다도 무서운것입니다. 나는 아까도 말한것 같이 학천동지의 의견과는 정반대의 의견을 가졌습니다.>>

 

하고 김시광(제X대 대장)이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림시군법회의는 이 두개 정반대의 주장(主张)이 대립(对立)되여서 끌어내려갔다.

 

간부들은 묵묵히 두 사람사이에 벌어진 불꽃이 툭툭 튀는듯한 론쟁을 듣고있었다.

 

학천의 주장하는것은 고의가 아니고 모르고 한것이니까 관대한 처분을 해야 한다는것이였고 시광이 주장하는것은 모르고 한것이라고 해서 관대한 처단을 내린다면 이 모르는것뿐만인 농민들틈에서 군대가 그 작전임무(作战任务)를 다할수 없다는것이며 또 이 사건의 결과는 막대한 피해(被害)로 보아서나 민중에게 교훈을 주기 위한것으로 보아서나 엄중한 처치를 해야만 한다는것이였다.

 

회의를 하는 동안 학천의 모리속에는 불쌍한 늙은 위법자(违法者)의 실신(失神)한것 같은 쭈글쭈글한 얼굴과 친이 애타게 옷자락을 쥐여뜯으며 울던 눈물에 어지러워진 얼굴이 겹쳐서 나타나서 사라지지않고 핑글핑글 돌았다.

 

학천은 열(热)에 떴다. 시광의 리지(理智)는 점점 더 싸늘하게 식어갔다.

 

<<학천동무의 주장은 단적으로 말하자면 소자본계급적감상에서 오는것이라고 규정할수 있다는것입니다. 그것은 철두철미 소부르죠아적 인도주의적 극히 값싼 동정인것입니다. 만약 이것을 부정한다고 하면 그럼 그밖에 반드시 또 다른 어떤 인원이, 즉 사적(私的)감정 같은것이 그 리면에 잠재(潜在)해서 활동하고있지나 않은가 의심하지 않을수 없는것입니다.>>

 

시광의 이 한마디는 상대자를 침묵시키기 충분하다.

 

회의는 급전직하로 위법자의 사형을 결정하고 그리고 끝이났다.

 

회의실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 학천의 눈은 빨갛게 충혈했다.

 

시광이 그 늘씬한 몸집에 긴 다리로 침착하게 저벅저벅 걸어가는것이 보였다.

 

학천은 뚫어지게 그 뒤모양을 쏘아보고 서있었다. 그리고 속으로 이렇게 웨쳤다.

 

<<이 랭혈의 짐승, 말뚝, 제국주의관료. 공식(公式)주의자.>>

 

4

여름이 왔다. 우거진 록음이 방어공사(防御工事)를 뒤덮었다.

 

적의 정찰기는 우군진지 상공을 헛되이 비잉잉비잉잉 선회하다가는 얻는것 없이 그냥 달아나버리거나 혹 그러찮으면 이따금씩 시탐(试探)의 폭탄을 얼토당토않은 곳에 두어개씩 던져보기도 하고 기관총을 소사(扫射)해보기도 하고 했다.

 

군복저고리를 벗어서 나무가지에 걸어놓고 새파란 이파리가 겹치고겹치고 해서 뜨거운 광선을 가리고있는 그 나무그늘에 비스듬히 누워서 오카리나를 불고있는것은 학천이였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속삭이는것 같은 소리를 내며 나무잎이 흔들리고 가지에 걸린 군복저고리가 펄렁했다. 그림자도 따라서 움직였다.

 

피리바람소리 같은 오카리나가 엘레지의 애조(哀调)를 연거퍼 두번 불렀다.

 

그러나 주위의 생물이 모두다 그 슬픈 곡조에 취해서 잠잠해진것 같던 그것도 잠시... 별안간 가까운 곳에서 수풍금(手风琴)이 베-쓰를 넣어 대군행진곡(그레이트 쏠줘스 마...취)을 소란하게 떠댔다.

 

학천은 입에서 악기(乐器)를 뚝 떼고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그 소리나는곳을 노려보았다. 그것은 보지 않아도 시광일것을 그는 잘 알고있었다.

 

지난봄... 군법회의에서 충돌한이래 두 사람의 사이는 극도로 나빠졌다. 대립과 마찰이 그들사이에 끊임없이 계속됐다.

 

시광은 학천의 오카리나를 귀신 우는 소리, 계집아이 취미, 소극적, 감상적, 이런 말로 배격했다.

 

학천은 시광의 수풍금을 칠그릇 깨지는 소리, 마차(马车)가 자갈밭을 가는 소리, 미친놈 취미, 저돌적, 이런 문구로 비난했다.

 

시광이 오리알을 맛있다고 하면 학천은

 

<<그것도 입이냐? 저급취미.>> 이렇게 타기(唾弃)했고 학천이 짜장면이 맛있다고 하면

 

<<그것도 입이냐? 이단경향.>>

 

하고 시광이 반격했다.

 

변증유물적세계관(辩证唯物的世界观)만을 제외하면 기타의 모든것은 모조리 정반대의 대립상태였다.

 

대장(队长)들의 사이가 그러니까 그 부하들도 자연히 그것을 본받아서 매사에 대립형세를 이루었다.

 

제X대와 제X대는 부득이한 공사(公事)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절교상태(绝对状态)가 되여버렸다.

 

딴 지대(支队)에서는 이 지대를 불러서 대립물(对立物)의 통일(统一)지대라고 했다. 그래서 이것이 지대내의 합동동작과 단결에 지장이 될가 념려한 간부들은 여러번 중간에 나서서 두 대립된 대(队)사이에 협조를 알선했다. 그러나 두 대는 동시에 똑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이러한 대립상태는 사사(私席)에 한(限)해서만 있는것이다. 이상의 리유로써 우리는 중간에 제3자가 출마(出马)해서 협조 전선을 할 필요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각(各) 대 대항(对抗)의 실탄사격, 총검술, 풋물, 기타의 운동경기 같은것이 있을 때마다 그 대립은 점점 더 격화(激化)해갔다.

 

각 대의 대원들은 그 음악에 대한 취미도 자기 대 대장의 그것에 공명(共鸣)했다. 시광이 거느린 대의 대원들은 수풍금이 아니면 악기가 아니라고까지 극언(极言)했고 학천의 부하들은 오카리나밖에는 사람의 가슴을 울리는 악기가 없다고 절찬(绝赞)했다.

 

반목(反目) 대립한 두 대는 서로 상대편을 골려주려고 기회를 노렸다. 그리고 터럭만한 기회라도 있기만 있으면 서슴치 않고 진공(进攻)을 하는것이였다. 그래서 그것이 성공하면 쾌재(快哉)를 불렀다. 그러면 패배한 편은 후일의 보복(报复)을 맹세했다. 골리고 곯고 하면서도 그들은 공동(共同)의 적 일본군대와 항쟁하는것만은 잊지 않았다.

 

그날 밤 학천은 기회를 엿보고 몰래 시광의 침실에 들어가서 테블우에 치장삼아 놓여있는 시광이 나의 <<유일한 애인>>이라고 이름지은 수풍금을 단도(短刀)로 푹푹 찢어서 환전히 못쓰게 만들어놓고 살짝 자기 침실로 돌아와서 너털웃음을 웃으며 혼자서 한참동안 엉덩춤을 추고 돌아갔다.

 

그러나 다음날

 

<<이번에야 어디 맘 푹 놓고 한번 본때있게 불어봐야지.>> 하고 싱긋 웃으며 오카리나가 들어있는 상자갑을 연 그는 <<앗>> 소리를 지르고는 그만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상자갑속에서 그 보중(宝重)한 악기가 산산 조각이 나서 가루가 되다싶이 돼있었다.

 

시광도 수풍금에 대해서는 입을 봉하고 말이 없었다.

 

학천도 가루가 돼버린 오카리나에 관해서는 아무 내색도 보이지 않았다.

 

5

8월 13일 상해사변 기념일 오전 령시 30분을 기(期)해서 항일군의 전(全) 전선은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게 되여있었다.

 

그 바로 전날 제X지대 최부지대장(崔副支队长)이 말에서 떨어져서 팔을 다치고 후방의원(后方医院)에 입원을 하게 되였다.

 

석차(席次)대로 로간부(老干部)인 제X대 대장 김시광이 그뒤를 이어 승급해서 부지대장의 직권을 시행하게 되였다. 그러나 간부의 결원(缺员)으로 원 대의 제X대 대장을 당분간은 겸임하게 되였다.

 

진지에서는 비밀리에 그러나 아무래도 어딘지 좀 어수선하게 모두들 공격준비에 바빴다. 이런 때면 언제나 리발병(理发兵)이 제일 녹아났다.

 

<<래일아침엔 시체가 돼서 적의 진지에 가 드러누워있을는지두 모르니까 예쁘게 수염이나 좀 깎구.>>

 

하는것을

 

<<이 녀석 죽을 놈이 얼굴단장은 웬 얼굴단장이야.>>

 

하고 옆에 섰던 딴 한 병정이 가로막으니까

 

<<내버려둬... 지옥에 가서나 한번 련애를 해보려나봐 그렇지?>>

 

하고 딴 병정이 말리니까

 

<<하하하하...>>

 

<<하하하...>>

 

면도칼을 든채 리발병까지도 따라서 웃었다.

 

학천이 군수처(军需处)에 갔다오다가 이 부하들이 웃고 지껄이고 하는 소시를 듣고 혼자 비죽이 웃으며 발걸음을 돌리려 할때

 

<<보고(报告)! 김대장동지.>> 전령병(传令兵)이 거수경례를 하고

 

<<지대부에서 곧 오시랍니다.>> 했다.

 

<<나를?>>

 

하고 학천이 물었다.

 

<<옛.>>

 

<<무슨 일이야?>>

 

<<모르겠습니다.>>

 

<<?...>>

 

학천은 전령병을 따라서 지대부로 갔다.

 

그러나 거기에는 빨간 연필자국이 헝클어진 실뭉테기같이 얽혀져있는 군용지도를 펴놓고 시고아이 기다리고있었다.

 

<<?>>

 

<<앉우.>>

 

거기에는 응하지 않고 학천은 선채

 

<<지대장동무는?>>

 

하고 물었다.

 

<<진지시찰(阵地视察).>>

 

하고 시광이 짤막하게 대답했다.

 

<<나를 오란것은?>> 하고 학천이 또 물었다.

 

시광이 대답했다.

 

<<작전임무전달.>>

 

<<어떤?>>

 

<<김학천대장은 제X대를 인솔하고 선발(先发)하야 적전 좌익 소고지(小高地)를 기습공격할것.>>

 

<<?>>

 

<<출반시간은 오늘밤 열한시 정각(正刻). 이 작전의 임무는 적의 주의(注意)를 한곳에 집중시키기 위한 양동전(阳动战).>>

 

<<께 꼬우 츠디!(给狗吃的=개가 물어갈것)>>

 

학천은 이렇게 웨치며 구두발로 <<탁>> 걸상을 걷어찼다. 걸상이 나가 떨어지며 들창옆에 놓여있는 조그만 탁자(桌子)를 쓰러뜨렸다. 탁자우의 근무병(勤务兵)이 꽃을 꺾어다 꽂아논 꽃병이 마루바닥에 철컥하고 떨어져 깨져서 물이 좌르르 쏟아지고 그우에 꽃잎이 뜨고 버물리고 했다.

 

시광이 벌떡 일어나며

 

<<무슨 폭행이야?>>

 

했다.

 

<<어쨌든.>>

 

학천은 손바닥으로 군용지도를 <<탁>> 때리며

 

<<난 안 간다.>>

 

하고 잘라서 말했다.

 

적진의 좌익 소고지는 적의 포병진지였다. 그것은 막기는 쉽고 뺏기는 어려운 곳이였다. 자연(自然)의 지형(地形)도 그렇고 방어공사도 그랬다. 그것은 제일 뚫기 어려운 요점이였다.

 

학천은 그것을 잘 알고있었다. 게다가 더구나 양동전이라는것은 적에게 우군의 정말 기도(企图)하는 공격목표를 알리지 않기 위해서 딴 곳으로 그 주의를 끌어모은 작전이다. 양동하는 부대는 전 작전의 리익을 위해서 희생(牺牲)되는 부대다.

 

시광이 지금 자기에게 그 희생의 임무를 둘러씌우려는데 대해서 학천은 이렇게 반항했다.

 

<<안 가?>>

 

시광은 물었다.

 

<<그래 안 가.>>

 

학천은 대답했다.

 

<<왜?>>

 

시광이 또 물었다.

 

<<왜?>>

 

하고 학천이 반문했다.

 

<<왜 안 가?>>

 

<<그렇게 가구싶거던 네가 가라!>>

 

<<내가?>>

 

<<그래.>>

 

<<안된다. 그건 네가, 반드시 네가 가야 한다.>>

 

<<뭐야? 건방지게 네가 뭔데 날더러>>> 하고 학천이 한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시광이 천천히 말했다.

 

<<나는 너의 상사(上司)다.>>

 

<<......>>

 

학천이 추춤했다.

 

<<나는.>>

 

하고 시광이 엄숙하게 말을 이었다.

 

<<부지대장 김시광 그리고 아까 전달한것은 상사의 명령.>>

 

학천은 하는수없이 발뒤꿈치를 모아서 억지로 부동자세(不动姿势)를 취(取)했다.

 

시광이 위엄있게 불렀다.

 

<<김대장.>>

 

<<넷.>>

 

이렇게 대답한 학천의 가슴속에서는 이글이글하는 시뻘건 분노(愤怒)의 불덩어리가 쿡 치밀어올랐다.

 

<<이놈의 자식 어데 두고보자.>>

 

그는 속으로 이렇게 웨치며 이를 악물었다.

 

<<지금 전달한 명령에 충실히 집행할것. 그만 물러가.>>

 

하고 시광이 의자에 가 걸터앉았다.

 

<<넷.>>

 

학천이 경례를 했다. 그러나 시광은 고개만 끄덕여보이고는 테블우의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학천은 한참 그 옆얼굴을 노려보다가 그만 돌아서 나가버렸다.

 

학천의 저벅저벅하는 성난 구두소리가 차차 멀어져서 들리지 않게 되였을 때

 

<<흥!>> 하고 시광은 코웃음을 치고 의자등받이에 반듯이 나자빠져 기대고 두다리를 들어서 테블우에 얹고 군복바지주머니에서 화성탕(花生糖-콩엿의 일종)을 한조각 꺼내서 입에 넣고 <<와지작>> 소리를 내며 깨물었다. 그리고 만족한듯이 또 웃었다.

 

6

총공격(总攻击)이 개시(开始)되였다.

 

적은 중포(重炮)의 일제사격으로 이것을 맞이했다.

 

적과 우군 사이에 서로 주고받고하는 중포탄이 공기를 가르고 지나갈 때는 마치 기차가 지나갈 때 내는것 같은 소리를 냈다.

 

기관총이 매초 열한발 이상의 속도로 간단(间断)없이 불을 뿜었다. 총구에서는 독사의 혀바닥 같은 불길이 날름거렸다.

 

방어군(防御军)의 진지우에, 공격군의 머리우에 곳을 가리지 않고 날아와 터지는 폭탄의 화광, 번쩍할 때마다 굵게 높게 자주빛 섞인 검붉은 연기와 불길이 맹렬한 속도로 솟아오르고는 했다.

 

연기와 불길은 방어공사의 부서진 조각과 파손된 무기와 찍겨진 사람의 몸뚱이의 각 부분을 안고 올라갔다가 공중에서 흩어져 버렸다.

 

전장(战场)은 초연(硝烟)이 자욱하게 끼여서 호흡이 곤난해졌다. 달도 흐려졌다.

 

오전 네시. 전장은 혼란상태에 빠졌다.

 

적진의 몇 부분이 돌파되여 공격군이 그 돌파구(突破口)로 조수(潮水)같이 밀려들어간것이다.

 

우군이 적을 포위하면 또 딴 적이 우군을 포위했다. 서로 에워싸이고 앞에도 적, 뒤에도 적, 갈피를 찾을수 없게 되였다.

 

어두운 전야(战野)에는 혼전란투(混战乱斗)가 벌어졌다. 도처에서 처참한 백병전이 일어났다. 이리하여 날샐녙까지 맹렬한 싸움은 계속되였다.

 

동이 텄다. 포성이 차츰 가고 기관총이 입을 다물었다.

 

격전이 끝났다. 여기저기서 부상당한 전사들의 신음하는 소리가 들리였다. 상처의 고통을 못이겨서인지 우는 소리도 들렸다.

 

아직도 채 개이지 않고 낮게 전장우에 떠돌고있는 초연을 뚫고 해살이 뻗쳐왔다.

 

검붉은 피에 끈적끈적하게 젖은 풀잎에 메뚜기가 툭툭 튀여다녔다.

 

땅이 여기저기 거북잔등같이 금이 가서 쩍쩍 갈라져있었다. 마치 맹렬한 지진이 지나간 때와 같았다. 중포탄이 땅속깊이 파고들어가서 터질 때 생기는 균렬(龟裂)이였다. 그것은 림시참호(堑壕) 대신으로 쓸수 있는것이고 교통호(交通壕) 대신으로도 쓸수있는것이였다.

 

학천은 란투속으로 전부 흩어져버리고 겨우 여섯명밖에 남지않은 부하를 데리고있던 균렬속으로 적의 눈을 피해서 기여들어갔다. 거기에는벌써 칠팔명의 군인이 들어있었다. 우군의 병정들이다. 그러나 선두(先头)의 학천은 추춤했다. 그것은 그 병정들이 제X대의 즉 시광의 부하들이였던것이며 또 현재 거기에 그 대 대장 시광이 섞여있었기때문이였다.

 

두 대장의 시선이 부딪쳤다. 잠시 그렇게 서로 마주 쳐다보고 있다가 시광이 저쪽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학천은 말없이 기여서 들어갔다.

 

앞에서도 뒤에서도 기관총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서로 노리고있는 이러한 경우에는 날이 밝아서 시야(视野)가 열리면 목표가 드러나서 꼼짝도 할수 없는것이였다.

 

학천은 옆의 부하가 가진 총을 달래서 받아가지고 그 총끝에 자기가 쓰고있던 강모(钢帽)를 벗어서 씌웠다. 그리고 그것을 삐죽 균렬우로 내밀었다.

 

<<뻥>>하고 내밀기 무섭게 어디서 탄환이 날아와서 강모에 들어 맞았다.

 

<<이크>>

 

그는 목을 움츠러뜨리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리고 강모를 조사해보았다.

 

구멍이 하나 빼꼼하게 뚫려져있다.

 

그는 고개를 흔들며

 

<<당최 어림도 없다.>>

 

하고 부하들을 바라보았다.

 

학천은 시광과 같이 한곳에 있기는 무엇보다도 싫었지만 하는수 없었다.

 

시광도 학천과 같이 있기 싫은것은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하들끼리 서로 말없이 노려보고있다. 그 좁은 균렬속에서도 두 대사이의 간격(间隔)은 가능한 범위내에서 최대한도의 공간(空间)을 이루었다.

 

오월동주(吴越同舟). 머리우로는 탄환이 <<위잉위잉>> 날카롭게 공기를 가르며 지나갔다. 균렬밖에 나가볼수가 없으니 적정판단(敌情判断)을 할수가 없다.

 

우군도 그랬고 적도 그랬고 서로 구멍속에들 처박혀서 날이 어두워지기만 기다리고있는것 같았다. 그러나 아직도 해가 땅우에서 겨우 한아뼘이나 기여올라왔을가말가할 때였다.

 

대륙(大陆)의 살인적혹서(酷暑)-해가 하늘복판에 거의 오니까 그렇지 않아도 채 식지 않았던 땅이 후끈 화덕같이 달기 시작했다.

 

풀 한포기도 그늘도 없는 땡볕아래서 군인들은 마치 뭍에 끌려나온 메기 모양으로 늘어져서 헐떡거렸다. 땅 갈라진 좁은 틈바구니에 여럿이 겹쳐서 쪼그라뜨리고있으니까 땀냄새, 흙냄새가 질식할 지경으로 호흡을 압박했다. 강모속의 머리는 흡사 뜨끈뜨끈한 떡시루를 들쓴것 같았다. 입술이 바작바작 탔다. 그러나 바람은 없다.

 

그때 정면의 적이 어떠한 기도(企图)밑에서인지 갑자기 균렬을 향하여 공격을 개시했다.

 

균렬속의 열세명은 즉시 화망(火网)을 구성(构成)하고 그것에 응전(应战)했다.

 

실상 이 균렬은 적의 련락선을 차단(遮断)하는 위치에 가로놓여있었던것이다. 그래서 적은 이 지점을 탈회(夺回)하려고 맹렬한 공격을 반복한것이였으나 균렬속에서는 시광도 학천도 그 부하들도 그 당시에는 자기네가 점령하고있는 위치가 그런 중요한 그리고, 그렇게 위험한 곳인것을 알지 못했던것이다.

 

적의 공격은 기관총의 엄호사격(掩护射击)을 받아가지고 돌격으로 옮겨졌다.

 

눈이 부신 여름 한낮 해볕아래 총칼이 번쩍번쩍 빛났다. 위협(威胁)하는 고함소리가 이어서 일어났다.

 

한줄로 가로 흩어져서 엎드렸다가는 일어나서 뛰고 엎드렸다가는 뛰고 하며 적이 점점 가까이 몰려들어왔다.

 

균렬속의 열세 사람은 기관총과 소총과 권총으로 전력을 다해서 적의 돌격을 저지하려 했다.

 

죽음에 직면(直面)했을 때 사람은 엄숙해지고 진지(真挚)해지는것이다. 그들은 더운것과 목마른것을 잊어버렸다. 두 대 사이의 공간이 어느 틈에 메꿔졌는지 알지도 못했다.

 

적의 잔인스러운 눈깔과 이발이 눈앞에 다닥쳤다. 고함소리가 고막(鼓膜)을 때렸다.

 

균렬속에서 기관총수(机关手)가

 

<<악!>>

 

하고 뒤로 나가 떨어졌다. 적탄을 맞은 두눈사이에서 시커먼 피가 쏟아져나왔다. 즉사였다.

 

<<오!>>

 

하고 시광이 사수(射手)가 없어진 기관총으로 달려들었다.

 

<<아니 그건 내가.>> 하고 학천이 손에 들었던 권총을 집어던지고 그것을 뺏으며

 

<<동무는 전체(全体)의 지휘를...>>

 

하고 일초의 지체도 없이 몰려드는 적에게 탄환의 우박을 퍼부었다.

 

시광은 원래 위치에 돌아가자마자 벼락같은 소리를 질러서 호령했다.

 

<<제일기관총-목표-좌전방(左前方)->>

 

비록 적은 병력이지만 통일된 지휘아래 쇠덩어리같이 뭉쳐진 그 힘은 무서운것이였다.

 

적이 물러가기 시작했다. 도저히 이 지점을 탈회할 가능성이 없는것을 깨달은것이다.

 

달아나는 놈의 뒤잔등은 좋은 과녁이였다. 꽁무니를 쫓아가는 탄환에 픽픽 나가 쓰러지는것이 마치 활동사진을 보는것 같다.

 

단결(团结)-단결이 적을 물리쳤다.

 

초약(硝药)냄새가 코를 찌르는 균렬속에서 사람들은 <<후유->>하고 한숨을 내뿜었다. 그리고 땀과 흙에 짓이겨져서 새까맣게 된 얼굴을 서로들 쳐다보고 빙그레 웃었다.

 

학천과 시광도 서로 쳐다보고 말없이 빙그레 웃었다.

 

부하들은 그 대장들이 웃는것을 보고 따라서 또 한번 서로들 마주 쳐다보고 웃었다.

 

시광이 허리에 찼던 수건을 뽑아서 전사자(战死者)의 얼굴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머리를 숙이고 묵도(默祷)를 했다.

 

학천도 병정들도 따라서 머리를 숙였다. 아무도 말하는 사람은 없다.

 

머리우에는 싸움터에 늘비한 시체를 파먹으려는 까마귀떼가 날아가고 날아오고 한다.

 

구름 한점 없는 하늘에는 한낮 조금 지난 해가 이글이글 타고 있다.

 

누가 <<후>> 하고 한숨을 쉬고 입맛을 쩍쩍 다시였다.

 

사람들은 펄석펄석 주저앉아버렸다. 잊어벼렸던 기갈(饥渴)이 또다시 더욱 맹렬하게 목구멍을 조이고 찌르고 했다.

 

7

적의 공격은 또 언제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균렬속의 열두사람은 다 쓰러져서 헐떡헐떡하고있다.

 

물은 한방울도 남지 않았다. 그러나 목구멍은 화저가락으로 쑤시는것 같이 아프다.

 

해는 쨍쨍 내려쪼였다.

 

학천이 문득 죽은 사람의 허리에 매달려있는 물통을 생각했다. 그는 슬그머니 기여가서 시체의 허리를 더듬어서 물통을 찾았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흔들어보았다. <<찰랑찰랑>> 소리가 났다.

 

<<오! 물, 물이다.>>

 

하고 그는 기쁨에 넘치는 소리를 쳤다. 누웠던 사람들이 벌떡 일어났다.

 

<<물?>>

 

<<어? 물!>>

 

<<어디?>>

 

<<여기!>>

 

하고 학천이 눈앞의 물통을 내들었다. 통속에서 <<촐랑촐랑>> 소리가 났다.

 

<<오!>>

 

열한 사람이 감격에 넘치는 소리를 질렀다.

 

<<자! 돌아가며 한모금씩.>>

 

하며 학천이 물통의 마개를 <<풍>>하고 잡아뽑았다.

 

목젖을 울리고 입술을 핥으며 열한 사람이 그리로 시선을 집중했다.

 

물통아구리에 입을 대고 물을 들이키려던 학천이 멈칫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반통도 못되는 물. 혼자 다 마셔도 시원치 않을것을... 열두사람이...>>

 

그러나 목젖은 타는것 같이 아프다.

 

<<그래도 나는 참을수 있다.>>

 

그는 목이 말라서 헐떡이고있는 전우(战友)들의 얼굴을 또 한번 다시 쳐다보았다. 그는 눈을 딱 감고 그리고 슬며시 물통을 옆에 있는 부하에게 내주었다.

 

물통은 한 사람 차례로 한모금씩 돌아서 마지막으로 시광에게까지 갔다. 그리고 시광의 손에서 다시 학천에게로 돌아왔다. 학천이 그 물통을 받았다.

 

해빛은 점점 더 뜨겁게 내려쪼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말이 없다. 헐떡거리지도 않았다. 쓰러지지 않았다.

 

학천의 손에서 텅 비였을 물통이 <<촐랑촐랑>> 소리를 냈다. 물통속의 물은 단 한모금도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었던것이다.

 

머리우에서는 까마귀떼가 시끄럽게 <<까욱까욱>>거리며 몰켜서 날으고있다.

 

이런채로 밤이 되였다.

 

우군이 엊저녁에 하다가 날이 밝아서 중단했던 공격을 다시 계속했다.

 

전장은 다시 혼란을 일으켰다.

 

균렬속의 열두 사람도 밖으로 뛰여나왔다. 그리하야 그 지점까지 진출한 우군부대에 합류(合流)하려 했다.

 

벌써 어떤 곳에서는 백병전이 벌어졌다.

 

<<앗!>>

 

하고 앞에서 총을 놓으며 뛰여가던 학천이 활같이 휘여지며 쓰러졌다.

 

<<여!>> 하고 시광이 쫓아가서 안아 일으키며 급하게 물었다.

 

<<어디야?>>

 

<<다리 대퇴부.>>

 

학천이 대답했다.

 

<<좀 참어, 아퍼두.>>

 

하고 시광이 부상자(负伤者)를 어깨에 둘러멨다.

 

<<아! 으-음.>>

 

학천이 고통을 참느라고 이를 악물며

 

<<가만 좀 가만있어.>> 했다.

 

<<뭐야?>>

 

<<좀 가만... 음- 난 괜찮으니 내버려두구 동무나 어서 무사히...>>

 

<<무슨 미친 소리야. 좀 참어 아퍼두.>>

 

이렇게 말하고 학천을 둘러업은채 몇걸음 앞으로 걸어나가던 시광이

 

<<앗! 응...>>

 

하고 왼팔을 내려드리웠다.

 

누릇누릇하게 마른 잔디우에 빨갛고 노랗고 한 나무잎들이 바삭바삭 소리를 내며 날아와 떨어졌다.

 

해말간 하늘은 무던히도 높아보였다.

 

소리개가 한마리 유유히 공중에 커-단 원(圆)을 그리며 떠돌고있다.

 

봄볕같이 따뜻한 해볕이 내리쪼이는 잔디우에 두 젊은 사람이 비스듬히 누워있다. 한 사람은 팔이 하나 없었다.

 

<<어 이럴 때 수풍금이 있었으면 좋겠는걸.>>

 

이렇게 말을 건넨것은 다리가 없어진 학천이였다.

 

<<음 그렇지. 오카리나가 더 좋지.>>

 

이렇게 대답한것은 팔이 떨어진 시광이였다.

 

<<허- 내가 잘못헌걸.>>

 

학천이 탄식하며 사죄하듯 말했다.

 

<<뭘 피차일반이야..>>

 

시광이 뉘우치듯이 말을 받았다.

 

두 사람은 잠잠했다. 생각하면 감회가 깊은 일이였다.

 

<<여, 인젠 2인 3각(脚)일세.>> 하고 학천이 또 말을 건넸다.

 

<<아니 2인 3완(腕)일세.>> 하고 시광이 받았다.

 

<<3각이지.>>

 

<<3완이래두.>>

 

<<허- 이 사람 또 우기나?>>

 

하고 학천이 옆에 놓여있는 지패마대(松叶杖)를 끌어 잡아들이니까

 

<<임자 고집(固执)은?>> 하고 시광이 막는 형용을 했다.

 

두 사람은 우로 얼굴을 마주 쳐다보았다. 그리고

 

<<아하하...>>

 

<<어허허.>>

 

하고 한바탕 크게 웃었다.

 

공중에서 빙- 빙- 떠돌고있던 소리개가 무엇을 발견했는지 갑자기 홱 하고 몸을 제치더니 쏜살같이 저편 숲속으로 떨어져갔다.

 

<<어, 시광, 아니 김시광동지, 우리 불구자동맹(不具者同盟)을 결성하는게 어떻소? 단, 이것은 정식으로 제의함이요.>>

 

하고 학천이 제의했다.

 

<<좋지, 김학천동지 제의에 정식으로 찬동함- 어때?>>

 

하고 시광이 찬동했다.

 

<<하하하...>>

 

<<허허허...>>

 

두 사람은 마주 쳐다보고는 소리를 높이여 또 한바탕 웃어제쳤다.

 

그들의 가슴은 희망(希望)으로 불룩해졌다.

 

등어리에 내려 쪼히는 해볕은 여전히 뜨거웠다.

 

<<신문학>>(1946. 4) -서울

 

부록

创作合评会

<<신문학>> 1946. 6호

 

때 4월 20일 오후 6시

곳 취산장(翠山庄)

송영(宋影), 윤세중(尹世重),

채만식(蔡万植) 본사

김남천(金南天), 리흡(李洽)

리원조(李源朝), 박영준(朴荣浚)

 

리흡-8.15 이후의 창작에 대해서 될수 있는대로 작자를 중심한 작품명을 말씀해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특히 작가 여러분을 오시라고 한것은 작가의 립장에서 본 진지한 작품평을 원했기때문입니다.

 

<<龟裂>>(新闻学 1호) 金学铁作

 

채만식-나는 <<과정>>을 읽지 못했습니다만 그것은 그만하고 감학철씨의 <<균렬>>을 이야기합시다. 내가 이 작품을 읽을 때 순수 문학이니 통속소설이니 하던 일인(日人)의 작품과 꼭같은감을 줍디다.

 

김남천-일인의 아무개가 쓴것이란 생각과 달리 의용군(义勇军)의 한 사람으로 일본과 싸우다 다리 하나까지 잃고 돌아온 작가를 생각한다면 보는 면이 넓어질것입니다. 의용군이 썼다는것이 중대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리원조-그것은 작품평이 아닙니다. 작품은 어디까지나 작품을 보고 평해야 할것입니다. 전번 문학가동맹 소설부 간담회때에도 이 작품이 론의되였는데 그때 리태준씨는 이 작품을 작가의 손아귀에 넘어가지 않는 작품이란 말을 했습니다. 즉 르포르타즈라고 했습니다. 그 반면 김남천씨는 너무 째였다고 즉 너무 작위적(作为的)이란 말을 했습니다. 나는 두분의 말이 다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리유는 리태준씨가 한 말은 상반부(上半部)를 보고 한 말이요, 김남천시는 하반부(下半部)를 보고 한 말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이 작품의 중심이 처음과 마지막에 있는것이 아니라 가운데 있다고 봅니다. 즉 시광과 학천 두 지대장(支队长)이 싸우는 장면이 이 작품의 생명이라고 봅니다. 물론 작품의 계기는 <<친>>이란 녀자로부터 시작되는데 그 장면은 문장도 서툴지만 <<친>>의 소행을 구명시키지 않았는데 리태준씨로 하여금 르포르타즈란 말을 하게 한것입니다.

 

김남천씨가 작위적이라고 한것은 그 반대로 마지막 장면을 말함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어디까지나 이 작품의 중간에 중점을 두고 또 그 장면을 좋게 봅니다. 소설이란 언제 끝났는지를 모르고 읽을수 있도록 써야 합니다. 읽다가 싫증이 나서 맨마지막 장면을 들쳐보고 읽게 하는 소설은 좋은소설이 아닙니다. 나는 이 작품을 언제 끝났는지 모르고 읽었습니다. 이 작품가운데서 두드러진 장면이란 이제 말한것처럼 두 지대장이 싸우는것 그리고 균렬속에서 물을 나누어 먹는 곳입니다. 그러나 물 나누어 먹는 장면은 조금 과장한듯했습니다. 전쟁의식과 산 개성을 좀더 그리였더면 아래우가 없어도 좋을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채만식-나는 이 작품이 인간성을 떠난 인간을 그린것처럼 느껴집니다

 

김남천-포탄이 터지는 장면은 아름다왔습니다. 마치 내 고향에 포탄이 떨어지는듯한 느낌을 줍디다.

 

리원조-전번 간담회때 이 소설평이 있은 뒤 작가가 문학하는 리유를 일장 연설했으나 그때 나는 그를 작가라기보다 의용군의 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작품을 읽어보니 작가는 확실히 작가로서의 력량을 가지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입니다. 목가적(牧歌的)인 맛도 있기는 합디다.

 

송영-작가 자신은 허구가 아니라 생각할는지 모르나 나오는 현실은 목가적인듯한데가 많습니다.

 

리원조-르포프타즈는 아닙니다.

 

김학철전집4-태항산록-담배국

소설

담배국

 

1

<<전쟁할 때>>라는 별명을 가진 문정삼이는 조선의용군 제X지대에서 소문난 느리배기이며 또 게으름뱅이였다. 그는 1일 16시간 수면제의 제창자였다. 그가 입을 열어서 말을 하는것은 막부득이한, 정 할수 없는 경우에 한해서였는데 그 말하는 속도는 흡사 태엽이 거의다 풀린 축음기와도 같았다.

 

군관학교시절의 일이다. 일요일날 외출을 하기전에 복장검사를 하고있던 소대장-직일관이 그의 때가 다닥다닥한 얼굴을 들여다보며

 

<<도대체 얼굴은 씻는가 안 씻는가? 아주 안 씻고 사는거 아니야?>>

 

한즉

 

<<천만에 말씀. 달마다 빼놓잖고 꼭꼭 씻는걸요.>>

 

하고 그는 태연스레 대답을 하는것이였다.

 

군사교련의 강도가 너무 높아서 받아내기가 힘이 드니까 그는 학교병원에 입원을 좀 해볼 생각으로(입원만 하면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서 뒹굴어도 되므로) 꾀병을 앓았다가 군의에게 간파되여 피마주기름 한 고뿌를 선자리에서 들내게 되는 바람에 혼쌀을 먹고 병이 전쾌했다고 즉석에 선언을 한적도 있었다.

 

그에게 영예로운 칭호-<<전쟁할 때>>가 수여된 력사를 더듬어보면 다음과 같다.

 

역시 군관학교시절. 야외연습에서 분대단위의 공격이 시행되였는데 그날의 과목은 <<산병반군(散兵半群)의 형성>>이였다. 교실에서 교관이 한번, 교련장에서 중대장이 한번,그리고 소대장이 되풀이해서 또 한번 떠먹듯이 설명해들리기를

 

<<적전 200메터 거리에까지 박근하면 각 분대는 대형을 이내 산병반군으로 변환하고 기관총조와 보총조가 엇갈아 엄호하며 전진하다가 일제히 수류탄을 투척하고 그것이 작렬하는 틈을 타서 적진에 돌입하여 백인전을 벌인다.>>

 

연습이 무사히 끝이 나서 전 중대 3개 소대를 강화대형 즉 한쪽이 트인 입구자형으로 정렬시켜놓고 중대장이 강평을 하게 되였다. 한데, 이것은 잘되였으나 그것은 잘못되였다. 이것은 이렇게 해야지 그렇게 해서는 아니된다... 하는 식으로 분석, 비평, 훈시를 하던 중대장이 별안간

 

<<제2소대 전렬... 끝으로 세번째!>>

 

하고 소리를 질렀다. 지적을 받은것은 바로 문정삼이가 점령하고있는 위치였다.

 

불시에 기습을 당한 그 위치의 점유자는 깜짝 놀라서

 

<<아, 녜?...>>

 

하고 눈이 휘둥그래졌다.

 

<<어때, 대답을 할만한가?>>

 

<<? ...>>

 

<<산병반군은 어떤 때 쓰는거지?>>

 

중대장이 강평을 하면서도 문정삼이가 한눈을 팔며, 강평을 귀전으로 흘려들으며 무슨 딴 생각을 하고있는것을 보아내였던것이다.

 

<<...? ...>>

 

총을 잡고 차렷자세를 한 문정삼이는 입을 함봉하고 두눈으로 중대장을 주시한채 장승같이 서있기만 하였다.

 

<<어째 대답이 없지?>>

 

전 중대의 시선을 해살같이 한몸에 받으며 문제의 주인공은 초인적인 속도로 기억의 창고를 아래우로 발깍 다 뒤집어보았으나 그 가장 절박하고 가장 요긴한 산병반군이란 물건은 종시 나타나주지를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벌써 여러달전부터, 찍어서 말하면 일본공군 폭격기편대의 남경공습에 크게 자극을 받은 그때로부터, 그는 장갑항공기를 발명하려고 연구에 골몰하고있었던것이다. 한데 불행하게도 99퍼센트 완성이 된 지난밤부터 그 괘씸한 장애물을 제거하려고 온갖 정신을 다 거기에 집중시키고있었던것이다. 그것은 지난 몇달 동안의 고심참담한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느냐 안 돌아가느냐 하는 요긴목인 동시에 또 발전하는 현대과학의 정수를 모아서 립체화한, 항일전쟁의 승패에 관계되는 문제라고 생각되였기 때문이다.

 

7.9밀리 강철판으로 장갑된 그 항공기는 어떠한 고사포탄이나 속사기관포에도 끄떡 안하는 공중의 요새였다. 그리고 그 비행속도와 항송력과 적재량은 단연 전세계에서의 그 류례를 볼수 없는 최첨단의것이였다. 하기에 바로 그 점이 그의 발명의 열정을 맹렬히 불러일으킨 원인이였던것이다. 그 완성을 목전에 두고 그는 거의 침식을 잊다싶이 하였다. 그러던것이 이런 난관에 부닥치다니-하늘도 무심하지-그는 눈앞이 다 캄캄하였다.

 

한데 그 난관이란 무슨 별다른게 아니였다. 그 완전무결한 초특급공중요새의 완성품이 자체의 중량이 원인이 되여 단 한센치도 땅에서 뜰수가 없는것이였다.

 

(어떻게 하면 뜰수가 있을가?)

 

이 한가지 일만을 골똘히 생각하다나니 그는 눈으로 무엇을 보아도 보이지를 않고 귀로 무엇을 들어도 들리지를 않을 그런 정도였다. 하니 그따위 산병반군쯤이야 애당초에 문제도 될리가 없었다.

 

<<어째서 대답이 없지? 말이 들리지를 않는가?>>

 

중대장이 다시한번 이렇게 채근을 하자 이 수산의 발명가는 비장한 결심을 내린듯 눈을 내리깔고 느릿느릿 대답을 하였다.

 

<<산병반군 말입니까? 그건... 전쟁할 때 쓰는겁니다.>>

 

이 엉뚱한 대답을 듣고 중대장은 웃음보가 터지려는것을 겨우 참으며 짐짓 률기를 하고 다시 묻기를

 

<<밥 먹을 때 쓰는건 아니구?>>

 

한즉, 문정삼이는 내리깔았던 눈을 바로 뜨며 정색을 하고

 

<<천만에 말씀. 틀림없이 전쟁할 때 쓰는겁니다.>>

 

하고 천연덕스럽게 대답을 하였다.

 

이 명답을 듣자 전 중대가 일시에 폭소를 터뜨렸다. 정제하게 줄지어섰던 대렬이 다 꿈틀거릴 지경으로

 

장갑항공기의 연구는 여기에 이르러 땅뜀 한번 못해보고 그만 책장을 덮고말았다. 문정삼이는 여러달 밀리고 쌓인 수면부족과 과로가 일시에 덮치는 그날 밤부터 아주 몸져누워버렸다.

 

2

<<전쟁할 때>> 문정삼이가 조선의용군 제X지대에서 치중 즉 수송을 맡아보게 된 리유는 다음과 같다.

 

그는 눈을 감지 못한다는 특이한 생리적인 결함을 가지고있었다. 두짝 눈을 다 감지 못하는것이 아니라 한짝 눈만을 감지 못하는것이다. 눈을 감으려면 두짝 눈이 다 감기고 눈을 뜨려면 두짝 눈이 다 뜨이는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일상적인 생활을 영위하는데는 별로 불편한것이 없는 결함이였다. 무론 불구자는 아니였다. 하나 그는 혁명을 하는 사람이였다. 더구나 전쟁을 하는 사람이였다. 아무때나 수시로 총을 쏘아야 하는 사람이였다. 한데 총이란 그저 탄약을 재워서 방아쇠를 당기기만 하면 되는것이 아니다. 멀든가깝든간에, 크든작든간에... 목표를 들이맞혀야 한다. 총을 쏘는 의의가 바로 거기에 있는것이다. 한데 목표에 명중을 시키려면 총을 겨누어야 한다. 겨누려면 한쪽 눈을 감아야 한다. 해도 두눈을 다 감아서는 아니된다. 물론 두눈을 다 떠도 아니된다. 이 점에서, 가장 요긴한 이 점에서, 그는 불행하게도 그 불구 아닌 불구로 하여 적임자로는 되지를 못하였다. 하나 군인이란 반드시 총을 쏘아야만 되는것이 아니다. 총을 못 쏘아도 얼마든지 군인으로 될수는 있다. 례컨대 치중따위, 찍어서 말하면 말몰이따위. 이런건 소경만 아니면 누구나 다할수 있는것이다.

 

문정삼이는 타고난 천성으로 하여 모든 동작이 매우 느리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열성을 다하여 맡은바 직무에 충실하려고 애를 썼다. 하긴 때로는 엄청난 연착사고를 빚어내서 전대의 행동계획을 뒤죽박죽을 반드는 일이 있긴 하였지만.

 

어느 별빛 하나 보이지 않은 흐린 날씨의 침침칠야의 일이다. 이날 전대는 야행군에다 강행군까지 겹친 긴급하고도 먼 장거리 행군을 하게 되였다. 하여 문정삼이는 군량 실은 마바리를 몰고 대렬의 꽁무니를 청처짐하게 따라갔다. 산길에 접어들면서부터 마바리의 걸음이 더욱 더디여져서 처음에는 10메터, 20메터... 조금씩 사이가 벌어지던것이 나중에는 아주 동떨어져서 대오는 대오대로 저는 저대로 따로따로 길을 가게 되였다. 샐녘에 그는 방광에서 보내오는 방수신호를 받았다. 하여 고삐를 말잔등에 뿌려 얹어서 말을 앞세워놓고 저는 혼자 뒤에 떨어져서 잠간 볼일을 보았다. 연후에 슬렁슬렁 걸어서 그뒤를 따라갔다. 이때였다. 앞서가던 말이 험한 비탈길에서 갑자기 발이 미끄러지며 한쪽으로 휘뚝하는것 같더니 이어 <<히힝!>> 소리를 지르며 걷잡을 새 없이 낭떠리지아래로 굴러떨어져내려갔다. 크게 놀란 <<전쟁할 때>>가 달아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밀가루포대를 거의 만부하로 짊은 말은 그리 높지 않은 낭아래 좁은 골짜기에 벌렁 나자빠져서 네다리를 버둥거리고있었다. 워낙 직무에 충실한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비탈을 타고 내려가서 가엾은 짐승에게 서슴없이 구원의 손길을 뻗쳤다. 젖먹은 힘을 다하여 북두끈을 끄르고 가까스로 짐들을 다 푼 뒤에 말을 부축해 일으켜세웠다. 하나 사태는 자못 심각하였다. 말이 걷지를 못하는것이다.

 

<<허, 이를 어쩐다? -야단이났군!>>

 

그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동이 트기 시작하였다. 해도 도와줄 사람은 나타나주지를 않았다. 그는 길 없는 길을 더듬어서 혹시라도 근처에 인가가 있나 찾아보기로 하였다. 골안에는 아침안개가 자옥해졌다. 하나 온갖 군데를 다 찾아보아도 인가는 그림자도 없었다. 설령 인가가 있다손 치더라도 이 란리판에 피난을 아니 가고 집에 그대로 남아있을리 없다. 그렇다면 빈집, 빈집은 이런 경우에 아무러한 도움도 되지 못하는 무용지물이다. 이윽고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였다. 해도 역시 인간의 그림자는 나타나주지를 않았다.

 

<<허, 이거 정말 야단났군!>>

 

그는 한숨이 또 절로 나왔다. 락심천만. 락심을 하니까 갑자기 맥이 빠졌다. 맥이 빠지니까 또 갑자기 시장기가 났다. 그러자 불현듯 밤새도록 아무것도 먹지 않는것이 생각났다. 하여 그는 일단 마바리를 부려놓은데로 돌아가 요기를 하고나서 다시 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그가 발길을 돌이켜 한마장이나 걸었을가... 홀제 어디서 <<매->> 하는 연약한 애기의 울음소리와 같은 물소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어? 저건 틀림없는 물소다.>>

 

그가 급히 걸음을 멈추며 귀를 기울이니 또 <<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이 문정삼이를 살리는 모양이다!>>

 

하고 <<전쟁할 때>>는 너무도 기쁜김에 제 손바닥으로 제 볼기짝을 철썩 때렸다. 그리고는 부지런히 그 소리나는쪽으로 쫓아갔다.

 

회색털빛과 서양낫같이 휘인 커다란 두뿔, 틀림없는 물소였다. 코에 꿰인 고삐를 질질 끌며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문정삼이는 뒤로 돌아가서 땅바닥에 끌리는 그 고삐를 발로 꽉 밟았다. 란리판에 주인을 잃은, 순하고 어리석은 그 부림짐승은 낯 모르는 사람에게 아무러한 저항도 할 생각을 않고 그저 순순히 끌려왔다. <<전쟁할 때>>가 말잔등에서 부린, 한바리 잔뜩 되는 태짐을 그 물소등에 갈아실어놓고 대충 요기를 하고났을 때는 이미 해가 두어발이나 잘 올라왔었다.

 

<<내가 이거 너무 늦었다.>>

 

허나 다음 순간 그는

 

<<이 가엾는 녀석(다리 부러진 말)은 어떻건다?>>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애원하는 눈으로 자기를 바라보는 말을 한동안 물끄러미 마주보고 섰다가 머리를 설레설레 젓고

 

<<용서해라. 내게는 지금 너를 구원할 힘이 없다.>>

 

하고 사과를 하였다.

 

문정삼이는 늦어진 길을 조이려고 연신 채찍을 휘둘렀다. 그러나 논밭갈이업에서 운송업으로, 제 맘이 내켜서 하는것도 아니게 급전환을 한 그 부림짐승은, 묵은 직업의식에 사로잡혀서 시종일관하게 쟁기를 끌던 때와 똑같은 보조로-견실하고도 완만한 보조로-걸음을 떼여놓는것이였다.

 

한낮때가 거의 되여 산길이 끝이 나면서 평지길이 시작되였다. 문정삼이는 채찍질을 아무리 해도 소용이 없는것을 알고는 빨리 갈 생각은 아예 단념을 해버렸다.

 

(늦든 어쨌든 목적지까지 가는것만은 대견하지.)

 

이렇게 생각하고 그는 고삐를 소잔등에 뿌려얹고 슬렁슬렁 그 뒤를 따라갔다. 두서없이 이런 생각을 하면서... 길섶의 풀잎을 훑어소 손바닥에 올려놓고 비벼서는 버리고, 또 훑어서 비벼버리고 하면서... 한데 별안간 앞서가던 물소란 놈이 급한 걸음으로 길에서 벗어나더니 엉뚱한 곳을 내닫는것이였다. 문정삼이가

 

<<아, 저놈의 소가!>>

 

하고 놀라는 동안에 벌써 그 회색의 부림짐승은 맑게 개인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송이가 선명하게 비친 못속으로 <<철거덕, 첨벙... 첨벙, 철거덕...>> 뛰여들어가버렸다. 눈과 귀와 코 그리고 밀가루포대의 일부만을 물우에 내놓고 그놈의 덩치 큰 몸뚱이는 가뭇없이 다 물속에 잠겨버렸다. 그리고는 그 큰 눈을 끔벅끔벅하며 멀거니 못가에 서있는 새 주인의 감주 먹은 고양이상을 바라보는 것이였다.

 

그 동물의 그러한 습성을 모르는 문정삼이가 아니였다. 허나 그동안 줄곧 말만을 부려온 까닭에 그 동물과 물 사이에 얽힌 고무줄 같은 당길심을 깜박 잊고 소홀히 대하였던것이다. 발을 굴러도, 욕을 퍼부어도, 돌맹이질을 해도 다 막무가내-소용이 없었다. 물속에 들어엎드려서 버티기내기를 하는 그 물소놈은 그런것쯤은 데시큰하게도 여기지 않았다. 한식경이 좋이 지나서, 밀가루가 물을 흠씬 먹었을즈음에야 비로소 자기의 생리적인 욕구를 만족시킨 동물은 자진하여 소란스러운 물소리를 내며 뭍으로 올라왔다. 이리하여 락오를 한 치중병의 부림소는 한동안 운동장에다 긋는것과 같은 흰 줄을 길우에다 끝이 없이 길게 그으며 가게 되였다.

 

치중대에서의 문정삼이의 력사는 여기서 막을 내리게 되였다.

 

그날 밤 지대장의 명령은 <<문정삼을 취사대에 조동한다>> 였다. 그것은 취사대에서 문정삼이를 필요로 해서가 아니였다. 다만 치중대에서 그를 몹시 주체궂어해서였다.

 

3

전대의 장거리행군은 문정삼이 개인의 부서이동과는 하등의 상관도 없이 계속되였다. 이튿날밤 초경머리에 부대가 설영을 하게 된 곳은 어느 한길옆 텅 빈 마을이였다. 주민들은 란리를 피하느라고 있는 살림을 모두다 메고 지고 끌고 밀고 산지사방으로 흩어져가버렸었다.

 

<<문정삼, 어디 가서 국 끓일 푸성귀를 얼른 좀 구해오라구.>>

 

일이 너무 바빠서 팽이처럼 팽글팽글 돌아가던 취사위원이, 무었을 했으면 좋을지 몰라서 멀거니 서있기만 하는 문정삼이를 보자 이렇게 말을 이르며 커다란 마대 하나를 집어던져주었다.

 

<<푸성귀를?>>

 

<<그래. 닥치는대로 아무 밭에나 들어가 캐오거나 뜯어오면 돼. 지금은 임자고 나발이고 다 없어.>>

 

<<어떤 푸성귀를?>>

 

<<아무거나 다 좋아. 다다익선이야. 많이만 구해오라구.>>

 

문정삼이는 마대를 집어들고 밖으로 나왔다. 역시 캄캄한 밤. 그는 회중전등으로 길을 비추며 임자 없는 채마밭,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채마밭을 찾아나섰다. 한참을 이렇게 더듬어가노라니까 회중전등이 내비치는 불빛에 피뜩 초록색으로 뒤덮인 남새밭 같은것이 드러났다.

 

<<이키, 살판났구나!>>

 

그는 다짜고짜 밭으로 뛰여들었다. 먹음직스러운 푸성귀포기를 한손으로 덥썩 거머쥐고 한손으로는 회중전등을 비추며 힘을 들여서 쑥 잡아뽑았다. 뿌리에 흙이 묻어올라왔다. 그는 제 즈꾸신은 발등에다 대고 그 흙묻은 뿌리를 탁탁 쳤다. 그리고는 회중전등을 허리에 찬 잡낭속에 쑤셔넣은 뒤 마대아가리를 벌리고 그 속에다 흙을 털어버린 푸성귀를 집어넣었다. 그는 그 뽑아서는 털어넣고 또 뽑아서는 털어넣고 하는 동작을 기계적으로 자꾸 되풀이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허리가 뻑적지근해지며 지근지근 아파났다. 하여 허리를 펴고 주먹쥔 손을 뒤로 돌려서 아픈데를 자끈자끈 두드렸다. 별 하나 반짝이지 않는 밤하늘에다 길게 숨을 한번 몰아쉬였다. 또 한동안 일손을 다그친 뒤에 두손으로 마대를 한번 들어보니 꽤 묵직하다. 실수없이 하느라고 회중전등을 꺼내서 비추어보니 상당히 만족할만한 상태다.

 

<<이만하면... 근사하겠지.>>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그는 그 불룩해진 마대를 이영차 어깨에 둘러메였다. 그리고 논틀밭틀로 걸어가며 속으로 궁리하기를

 

<<내게는 치중보다 취사가 적임인가본데...>>

 

이어 또

 

<<치중에서는 실패를 했으니까 이번엔 명예회복을 톡톡히 좀 해야지.>>

 

이렇게 타산하고 그는 어둠속에서 만족한 웃음을 혼자 싱긋 웃었다.

 

<<이거 좀 보라구, 한마대 이렇게 꼴딱 뽑아왔다니까.>>

 

메고 온 푸성귀마대를 취사위원앞에다 털썩 내려놓으며 문정삼이가 자랑스럽게 말하였다. 속으로는

 

<<내 솜씨가 어떠만해?>>

 

하면서.

 

그러나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취사위원은 문정삼이의 대단한 공로는 아랑곳하지 않고

 

<<어, 푸성귀... 됐어 그럼. 얼른 썰어 씻어서 저 가마솥에 쏟아 넣고 불을 지피라구. -자, 이건... 소금!>>

 

하고 소금자루를 집어던져주고는 부리나케 저쪽으로 가버렸다.

 

문정삼이는 흥이 빠져서 맥이 났으나 할일없이 취사위원이 시키는대로 대충 썰고 또 대충 씻어서 행군용가마솥안에 쏟아넣고 물을 부었다. 연후에 눈대중으로 소금을 두고 휘휘 저은 다음 뚜껑을 눌러덮고 불을 지폈다. 국이 끓을 동안 그는 내처 불앞에 앉아서 꼬박꼬박 졸았다. 기분 좋게 꿈나라려행을 하는중에 불시에 누가 등뒤에서

 

<<이봐, 어떻게 됐어, 국은?>>

 

하고 어깨를 탁 치는 바람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어? 뭐? 국? 아, 됐어, 다됐어!>>

 

<<그럼 어서 퍼야지! 다들 배가 고파 죽겠다는데...>>

 

<<퍼야지, 물론...>>

 

<<자, 여기 있어, 국통.>>

 

<<아, 거기 놓으라구.>>

 

잠이 덜 깨여서 흐리터분한 문정삼이가 솥뚜껑을 열어젖히니 훅 솟구치는 뜨거운 김과 함께 이상한 무슨 역한 냄새가 코를 쿡 찔렀다. 해도 그는 허기증이 난 전우들을 생각하고 여념없이 부지런히 국을 퍼담았다. 한통 또 한통... 국통들은 즉시 식사 당번들이 각 분대로 날라갔다.

 

시장끝에 밤참 쇰직한 늦은 저녁식사가 시작이 되였다. 문정삼이도 맨나중에 제 몫의 국 한그릇을 양재기에 퍼담아가지고 훌훌 불며 막 한모금 마시려는 참이였다. 훌제 각 분대에서

 

<<아!>>

 

<<이게 뭐야?>>

 

<<에퉤!>>

 

소동이 일어났다.

 

문정삼이는 손에 들었던 국그릇을 도로 내려놓고 무슨 일이 났나 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걸 사람이 먹으라고 갖다주는거야?>>

 

하고 투덜대는 소리.

 

<<취사위원 어디 갔어?>>

 

하고 시비를 붙어보려는 소리.

 

<<잠간만...>>

 

하는 사정하는 소리.

 

<<도대체 어찌 된 셈판이야?>>

 

하고 게먹는 소리.

 

<<잠간만... 내 가서 물어보고 올게.>>

 

하고 소인을 개여올리는 소리.

 

해도 어찌된 영문을 모르는 문정삼이는 그저 멀거니 앉아있기만 하였다. 저하고는 하등의 관련이 없는것으로 알고. 취사위원이 쫓아왔다.

 

<<이봐, 문정삼! 그 국...>>

 

<<국? 국이 어째?>>

 

하고 되물으며 문정삼이는 제 국양재기와 취사위원의 얼굴을 반반씩 갈라보았다.

 

<<도대체 맛은 봤나 안 봤나?>>

 

<<무슨? 국맛을?>>

 

<<그래여.>>

 

<<아니.>>

 

<<그럼 빨리 맛을 봐!>>

 

<<어째, 뭐가 잘못됐을가봐?...>>

 

말을 하며 국양재기를 입에 갖다대고 한모금 죽 들이마신 문정삼이는 대번에

 

<<으악!>>

 

하고 국그릇을 떨어뜨리고... 입안의 국물을 게워내느라고 왝왝하였다. -그것은 담배였다. 아니 담배국이였다!

 

그날 밤 지대장의 명령은 <<문정삼을 련락원으로 조동한다>>였다. 그것은 려락원이 부족해서가 아니였다. 단지 취사대에서 문정삼이라면 모두 도리머리를 흔들기때문이였다.

 

문정삼이가 취사대에서 근무한 력사는 1주야 하고 2시간-도합 26시간이였다. 하여 이튿날 전대가 다시 행군길에 오르면서부터 일대 결심을 내린 련락원 문정삼이의 눈부신 설치의 대활약은 시작되는것이였다.

 

4

수마(睡魔), 이것을 이겨내는 장사는 없다. 적의 철조망밑에 쓰러져서 코를 골며... 꿈까지 꾸어가며... 깊은 잠이 들었다가 날이 밝아서 오도가도 못하는 쩔쩔매는 일이 전장에서는 없지 않다.

 

문정삼이도 장사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따라서 그도 역시 수마를 이겨내지 못한다는 약점-이라느니보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만 말해서는 듣는 사람에게 명확한 인식을 주기 어려우므로 이 글의 서두에서 이미 서술한것을 다시한번 되풀이하기로 한다.

 

<<<전쟁할 때>라는 별명을 가진 문정삼이는 조선의용군 제X지대에서 소문난 느리배기이며 또 게으름뱅이였다. 그는 1일 16시간 수면제의 제창자였다.>>

 

이번 행군도중에서만도 치중대에서 한번, 취사대에서 또 한번 거의 불가항력적으로 저지른 과실에 대하여 책임을 느끼고 또 자극을 받은 문정삼이는 비상한 결심으로 련락원의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려고 뼈물었다. 명예회복, 설치, 이 두 단어가 잠시도 그의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그는 긴장하였다. 시위 당긴 활처럼 탱탱하였다. 하나 그도 인간이였다. 24시간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 그렇게 긴장해있다는것은 불가능한 일이였다. 과도의 긴장끝에 필연적으로 올것이 이 련락원에게도 바침내 드디여 오고야말았다. 전비행군중에 중요한 련락임무를 맡은 문정삼이가 꼬박꼬박 졸기 시작을 한것이다.

 

역시 캄캄한 밤이였다. 전쟁을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잘 알고있듯이 행군중의 수면 즉 걸으면서 자고 자면서 걷는것... 그것을 지금 문정삼이는 하고있는것이였다. 해도 이건 몽유병자의 그것과는 성질이 다르다. 몽유병자는 교묘하게-의식을 하든 안하든-장애물을 피한다. 뿐만아니라 곡예단의 줄타기 같은 아슬아슬한 모험까지도 식은 죽 먹기로 해내뜨린다. 하나 그와는 달리 행군중의 수면이란 위험천만한것이다. 낭떠러지라든가 개울이라든가 혹은 지뢰라든가 하는 따위에 잘못 부닥뜨리기만 하면 잠을 깨기도전에 목숨을 잃거나 분신쇄골 가루가 나버린다.

 

과로에서 오는 이러한 참극은 방지하기가 어렵다. 유일한 예방대책이라면 전쟁을 안하는것이다. 하나 전쟁은 계급사회가 가지고있는 골머리 아픈 홍역이다. 이 인류사회의 참극을 근절하는 방법은 정의의 혁명적전쟁으로 반동적략탈전쟁을 극복하는것이다. 전쟁은 전쟁으로 압도해야 한다. 과거 수천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뜨거운 눈물로써 전쟁방화자들의 량심에 그 죄악을 호소해왔다. 그들의 자비심을 불러일으키려고 무진 애를 썼다. 해도 전쟁은 그치지를 않았다. 그치지 않을뿐아니라 점점 더 잔혹하게 잔인하게 더 크게 빈번하게 늘어만 갔다. 문정삼이가 종사하는 전쟁은 그 참혹한 전쟁을 근절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전쟁, 즉 정의의 혁명적전쟁이였다. 그는 인류의 불행에 대하여 뜨거운 동정의 눈물을 뿌리는 혁명전사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또 인간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는 졸았다. 졸면서 걷고 걸으면서 졸았다. 한동안 그렇게 본능적으로 타성적으로 흔들흔들 걸으면서 졸았다. 한동안 그렇게 본능적으로 타성적으로 흔들흔들 걸어가다가 별안간 무엇엔가에 탁 부닥뜨려서

 

<<앗!>>

 

하고 놀라서 뒤로 벌렁 자빠졌다.

 

잠이 깨여 눈을 번쩍 떠보니 천만다행하게도 그것은 낭떠러지도 개울도 또 지뢰도 다 아니였다. 그가 부닥뜨린것은 담장이였다. 어떤 그럴듯한 사당을 에워싼 높도낮도 않은 돌각담이였다.

 

살가죽이 벗겨진것 같은 이마와 얼얼한 무릎을 번갈아 만지며 그는 한숨을 쉬였다.

 

<<젠장, 옹이에 마디로군!>>

 

어디가 어딘지 알수가 있어야지. 하늘을 쳐다보니 어느새 별들이 총총히 나있었다.

 

<<어, 그렇지...>>

 

하고 그는 중얼중얼하였다.

 

<<저게 북두칠성이니까... 조기서 다섯배사... 옳지 저게 틀림없는 북극성이로구나.>>

 

그는 똑바로 북극성을 향하고 서서 두팔을 쩍 벌렸다.

 

<<오른쪽이 동, 왼쪽이 서... 뒤가 남... 그러니까...>>

 

하고 그는 왼쪽으로 45도각 돌아서서

 

<<이게 서북... 그렇지, 이 방향으로 곧장 가면 되렷다.>>

 

하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를 않았다. 별빛아래 바라보니 앞길을 가로막아선것은 나무가 빼곡이 들어앉은 시커먼 숲이다.

 

<<아이구, 저런데를 어떻게 지나간다?>>

 

생각을 하니 그는 온몸에 소름이 끼치며 머리칼이 곤두서는것을 느꼈다. 괴담에 나오는 마귀와 그 마귀가 산다는 소굴이 련상되였다. 바람이 불었다. 숲이 술렁거렸다. 귀신, 도깨비가 <<쉬!>> 소리를 지르며 달려나오는것 같았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 숲속을 꿰고 나갈 일이 곧 저승만 하였다.

 

문정삼이는 허리에 찬 권총과 수류탄을 만져보았다. 해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송곳하고 딱총을 들고 곰사냥을 가는것만큼이나 자신이 없었다.

 

<<어떻건다?>>

 

마음을 결정하지 못하였다.

 

<<갈가? 말가?>>

 

해도 그는 곧 어렵지 않게 자기를 납득시킬 구실을 찾아내였다.

 

<<날이 밝은 연후에 행동을 하는게 온당하지. 공연히 어두운데 천방지축 날뛰다가 길이라도 잃으면 더욱 랑패지.>>

 

하여 결심을 해택하기를

 

<<밝기를 기다리자!>>

 

결심을 채택하자 그는 긴장이 풀린탓인지 걷잡을수없이 또 졸음이 왔다.

 

<<에라, 여기서... 이 특등호텔에서 일박하기로 하자.>>

 

하고 그는 혼자 싱긋 웃고 문을 더듬어서 돌각담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덩실 높은 사당집의 돌층계를 색시걸음으로 조심조심 더듬어 올라갔다. 사당안에를 들어서보니 한쪽 구석에 벼짚이 두둑이 깔려있었다.

 

<<허, 내가 마수걸이 손님은 아니구나.>>

 

앞서간 군대인가? 아니면... 거지일는지도 모르지. 아무튼 사람이 자고 간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그는 드러눕기가 무섭게 가진바의 특기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계속되는 긴장과 간난한 도보행군에 몸과 마음이 다 피로할대로 피로한것도 사실이였다. 그는 샐녘까지 세상 모르고 단숨에 내리잤다. 동창이 훤이 밝아올 때

 

<<엉?>>

 

하고 눈을 번쩍 떴다. 두런두런하는 사람의 말소리가 들리는것 같아서였다. 그는 본능적동작으로 권총의 자루부터 거머쥐였다. 그리고 벼짚자리우에 납작 배를 붙이고 엎드려서 귀를 도사렸다. 귀에 설은 말소리가 분명히 돌층계밑에서 들려왔다. 그는 용기를 내여 살금살금 포복전진을 하였다. 문짝 없는 문어귀까지 그렇게 가서는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어 아래의 동정을 살피였다.

 

<<아!>>

 

하고 튀여나오는 경악의 웨침을 그는 겨우 도로 삼켰다. 가슴에서는 두방망이질을 하였다.

 

돌층계밑 마당에서 마른 나무가지를 주어다 모닥불을 피워놓고 알루미니움남비에다 무엇을 끓이고있는것은 두놈의 적병이였다. 2대1-조우전의 막은 열렸다.

 

그 두놈은 서로 마주 대하고 앉아서 한놈은 나무가지를 꺾어서 불을 지피고 또 한놈은 이따금 남비뚜껑을 열고 저가락으로 휘휘 젓기도 하고 또 꾹꾹 찔러보기도 하였다. 문정삼이는 직감적으로 판단하기를

 

<<오. 네놈들도 길을 잃었구나!>>

 

하고는 가장 거센체

 

<<까짓거 두놈쯤이야!>>

 

해도 가슴에서는 여전히 두방망이질을 하였다.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심호흡하는 흉내를 한번 내였다(포복한 자세로 해야 하므로). 그리고 허리에 찬 잉크병형수류탄을 떼여서 뚜껑을 탈아열었다. 이런것도 모르고 모닥불앞에 마주앉은 두 적병놈은 태평으로 지껄거리고있었다.

 

문정삼이는 수류탄의 도화선을 잡아뽑았다. 사이다의 병마개를 땄을 때와도 같은 식식 식식 소리가 났다. 그는 속으로

 

<<하나아, 두울, 세엣...>>천천히 세고나서 그 폭발을 반초 앞둔 수류탄을 모닥불을 겨냥하고 집어던졌다. 수류탄은 면바로 남비뚜껑에 가 떨어지는 순간 폭발을 하였다. 남비고 국이고 나무가지고... 그리고 이쪽 놈이고 저쪽 놈이고 다 일순간에 박산이 나버렸다. 문정삼이는 너무도 흥분하여 벌떡 뛰여일어나 만세를 부르려 하였다. 하나 이때 별안간 돌각담밖에서 생각지 않은 왜병 한놈이 또 뛰여들어왔다. 느닷없는 폭발성에 놀라서 허둥지둥 달아들어온 그놈은 눈앞에 벌어진 의외의 참상을 보고 무슨 영문을 몰라서 잠시 어리둥절하였다. 동무병정의 시체를 내려다보고 기가 막혀서 얼이 빠진 모양이였다. 이것을 본 문정삼이는 살그머니 권총을 빼들었다. 하나 다음 순간, 그의 머리속에 피뜩 떠오른것은 자기의 형편없는 사격명중률이였다. 하여 그는 얼른 권총을 도로 넣었다. 그리고 잽싸게 수류탄을 떼내였다. 이번에도 또 조금전과 마찬가지의 순서를 밟아서 파렬직전의 폭발물을 그 세번째 적병놈의 발밑에 안겨주었다.

 

이라하여 <<전쟁할 때>> 문정삼이는 적병 세놈을 여유작작하게 료정내였다. 해도 만일을 념려해서 아까처럼 후닥닥 뛰여일어날 생각을 아니하고 그대로 엎드린채 주위의 동정을 살폈다.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고 또 15분이 지나도 아무 기척이 없었다.

 

<<옳다, 됐다!>>

 

그는 비로소 안심을 하고 일어나 조심조심 돌층계를 내려왔다. 가로세로 나둥그러진 3구의 피투성이시체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만 발길을 담밖으로 나왔다. 밖에 나서자

 

<<헉!>>

 

하고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거기에는 적군치중대에서 부리는 카키색즈꾸로 턴넬형의 풍을 친 쌍두마차 한대가 서있었던것이다. 그는 추측하기를

 

(필시 세 녀석이 마차를 몰고 오다가 길을 잃고 배들이 고프니까 두 녀석이 내려서 때를 끓이고 한 녀석은 남아서 마차를 지켰던게지. 있음즉한 일이야.)

 

그는 갑자기 담이 커져서 마차에 올라가

 

(도대체 무얼 실었나?) 점검을 해보았다.

 

권연이 2상자, 술이 3상자, 통졸임이 5상자, 그외에도 여러가지... 모두가 군대의 식료품이다.

 

<<내가 간밤에 꿈을 잘 꾸었나보다. 이런 호박이 떨어지는걸 보니.>>

 

그는 한손으로 고삐를 잡고 또 한손으로는 적병이 두고 간 채찍을 집어들어 말궁둥이를 신바람나게 휘둘러 때렸다. 마차가 달리기 시작하였다. 숲사이로 난 구불구불한 길을 덜커덩거리며 제법 빠른 속도로 서북간을 향하여.

 

5

<<보고! 지대장동지, 식사준비가 다됐습니다!>>

 

<<오.>>

 

지대장은 피우던 담배의 불을 얼른 꺼버리고 의자에서 일어나 취사위원의 뒤를 따라나왔다.

 

숙영지의 점심식사, 기실은 아침식사였다. 밤새도록 행군을 하고나서 해가 뜬 연후에 설영을 한 부대는 한낮때가 거의 되여서야 비로소 이날의 처음 식사를 하게 되였다. 하나 오랜 전란에 황페할대로 황페해진 이 지방에서는 식량난이 우심하여 부식물의 공급은 백판이였다. 그래서 항일하는 각 부대들은 례외없이 부식물의 기근상태에 놓여있었다.

 

반찬이라고는 맨소금밖에 없는 밥-이는 전장에서 먹는것외에는 아무 락도 없는 군인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난감한 일이 아닐수 없었다. 한데 조선의용군 제X지대의 오늘의 아침 겸 점심 식사가 바로 그 맨소금밥이였다. 식사를 알리는 나팔소리가 힘차게 울려퍼지자 대원들은 일시에 우 하고 그러나 질서정연하게 모여들었다.

 

<<동지들, 오늘 우리 취사원들은 전력을 다해서 우리의 급양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이 지방의 형편이 너무나 마련 없는탓으로 유감스럽게도...>>

 

지대장의 말을 그 이상 더 듣지 않아도 대원들은 모두 눈앞에 놓여있는 돌소금그릇을 보고 충분히 리해할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들 혁명군인은 마땅히 이러한 고난을 극복하고...>>

 

지대장이 말을 잇는데 여기저기 에헴 하는 기침소리가 났다. -그만하셔도 인젠 다 알았습니다 하는 뜻일것이다. 지대장은 싱긋 웃고

 

<<그러나 이 소금에는 인체에 절대로 필요한...>>

 

하고 소금의 영양가치를 강조하려 하였다. 바로 이때다.

 

<<보고, 지대장동지!>>

 

이렇게 소리치며 마당으로 뛰여들어온것은 보초장.

 

<<<전쟁할 때>가...>>

 

<<?>>

 

<<아닙니다. 저 저 문정삼이가... 돌아왔습니다!>>

 

<<문정삼이가?>>

 

<<예, 그렇습니다.>>

 

<<어데?>>

 

보초장이 대답을 올릴 사이도 없이 요란한 말발굽소리와 덜커덩거리는 수레바퀴소리와 날카로운 채찍소리를 앞세우고 카키색즈꾸로 턴넬형의 풍을 친 일본군치중대의 쌍두마차 한대가 들이 닥쳤다. 아가리에 게거품을 문 말대가리 둘이 지대장의 턱밑에 와 멎어서며 더운 김을 내뿜었다. 지대장이하 전체 대원이 다 놀라서 눈들이 휘둥그래졌다. 보고를 하려던 보초장은 제가 설명을 하는것보다는 직접 눈으로들 보는게 더 효과적이고 또 간단명료하겠기에 그만 입을 다물고 뒤로 물러났다.

 

마차에서 사람이 내렸다. 그것은 문정삼<<전쟁할 때>>인것을 알자 사람들은 또 한번 놀랐다. 문정삼이는 천천히 걸어서 지대장앞에까지 오자 법식대로 거수경례를 하며

 

<<보고, 지대장동지! 련락원 문정삼 방금 도착했습니다.>> 라고 했다.

 

<<오.>>

 

<<전리품을 피로하겠습니다.>>

 

하고 그는 손을 들어 마차를 가리킨 뒤 다시 부동의 자세로 돌아와서

 

<<식료품 도합 열두상자. 그중...>>

 

하다가 전우들앞에 놓여있는 돌소금그릇을 눈결에 보고는 목청을 돋우어

 

<<통졸임... 소고기통졸임 다섯상자.>>

 

하고 웨쳤다. 하나 그 순간 담배국으로 실패를 하던 일이 피뜩 머리에 떠올라서 저도 모르게

 

<<권연 두상자... 이건 지금 말고... 있다 나중에 식사후에...>>

 

하고 군더더기 주를 달았다.

 

<<아하하하하!>>

 

<<허허허허...>>

 

<<하, 저 친구...>>

 

<<담배국!>>

 

<<사람 웃긴다. -아이구 배야!>>

 

<<저 자식이 우릴 염소따위로 잘못 아는게 아니야?>>

 

<<일등 희극배우다!>>

 

소금밥의 우울을 날려버리려는듯이 모든 사람이 일시에 유쾌한 웃음보를 터뜨렸다.

 

소고기통졸임에, 마사무네(正宗)술에, 은사(恩赐)권연에 또 무엇무엇에... 졸다가 락오를 한 덕분에 문정삼이는 대단한 공로를 세운것이다. 그는 보고를 계속하였다.

 

<<마차 한대, 말 두필... 그런데 지대장동지...>>

 

<<?>>

 

<<이놈들은...>>

 

하고 그는 손을 들어, 앞발로 땅바닥을 득득 긁는 말을 가리키며

 

<<물을 보고도... 련못인지 늪인지 두군데나 지나왔는데도... 뛰여들념을 안합니다.>>

 

<<물? 련못?>>

 

<<예, 그 저...>>

 

대원들 틈에서 또 한바탕 웃음보가 터졌다.

 

<<하하하하!>>

 

<<어허허허...>>

 

<<저 작자가 물소한테 골탕을 먹어도 단단히 먹은 모양이지.>>

 

<<히히히히...>>

 

<<안 뛰여드는거야 당연하지... 말인데!>>

 

<<저 머저리.>>

 

문정삼이는 보고를 계속하였다.

 

<<지대장동지, 저는... 저는...>>

 

<<?>>

 

<<조 졸려서... 죽을것 같습니다.>>

 

-- 1946년 서울

 

부언(附言): 이 작품은 해방 직후의 서울에서 좌익작가들에 의하여 결성된 문학가동맹의 기관지 <<문학>> 창간호에 실린것으로서 후에 즉 1974년에 일본에서 일어로 번역 출판한 <<현대조선문학선>>에 수록된것을 원문이 잃어졌으므로 작자가 다시 우리 말로 옮겨놓은것이다. 원문에서는 당시 당지의 철자법대로 <<하였습니다>>가 <<하였읍니다>>로, <<되였다>>가 <<되었다>>로, 또 <<련락원>>이 <<연락원>>으로, <<률기>>가 <<율기>>따위로 적혔었다.

 

--1982년 연길

 

김학철전집4-태항산록-구두의 력사

소설

구두의 력사

 

이것은 내가 짝짝이신을 신은 어느 젊은 생산대장에게서 들은 이야기이다.

 

오른발에다는 말짱한 커피색의 체스꼬단화를, 그리고 왼쪽발에 다시 다 떨어진 검은색운동화를 그는 신고있었다. 신바닥의 높낮이가 같지 않는 까닭에 그는 걸음을 걸을 때 좀 절룩절룩하였다.

 

해도 그는 조금도 어줍어하는 기색이 없이 나에게 그 짝짝이 신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피력하는것이였다-

 

<<제 이 신발을 보고 물론 괴이쩍어하실겝니다. 누구나 다 유심히 보니까요. 해도 기실 알고보면 뭐 그리 괴이쩍을게 없습지요. 여기에는 우스우면서도 산산한 한토막의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구태여 이름을 짓는다면 구두의 력사라고나 할가요.

 

저는 이 마을에서 나서 이 마을에서 자란 말하자면 토배기입니다. 해방전까지는 가난하기짝이 없는 소작농의 아들로서 어느 한해 먹을것 입을것이 푼푼해본적이 없이 살았습니다. 해도 우리 부모님네는 그 아들을 까막눈이를 만들지 않겠다고 학교에를 보냈지요. 그 덕에 저는 소학교를 4학년까지 다녀봤습니다. 하나 몸에 걸친것이라고는 단벌 누데기옷 바지저고리뿐이였으므로 한동삼 옷이란걸 갈아입는 법이 없었습니다. 하니 잡아도 잡아도 끝이없이 생겨나는 이때문에 온몸이 가려워서 죽을 지경이였지요. 밤낮없이 긁어서 살가죽이 성한데라고는 없었습니다. -이의 종자란 어째 그리도 많았던지!

 

하지만 어린 제 마음을 그보다도 더 괴롭힌것은 신발이였습니다. 신발! 지금도 어떻게다 불현듯 그때의 일이 머리속에 떠오르기만 하면 속이 얼얼해나군 합니다.

 

워낙 입에 풀칠을 하기도 어려운 살림이다보니 짚신 한컬레 얻어신는다는게 여간만 큰일이 아니였습니다. -그리고 그놈의 짚신이 해지기는 또 왜 그렇게 쉬이 해지던지! 그래서 바람이 찬 겨울날 아침에는 학교를 가는데 잘게 묶은 벼짚 두단을 들고 집을 나섰습니다. 눈 깔린 길우에다 그 벼짚 두단을 번갈아 옮겨놓으며 맨발로 그우를 디디고 걸었습니다. 말하자면 그건 벼짚으로 만든 무한궤도 같았습니다.

 

그때는 어린 시절이라 봄날 학교에서 가는 원족이 여간만 즐겁지를 않았습니다. 음식들을 싸가지고 단체로 10여리 떨어진 진달래산기슭에 가서 맘껏 뛰논다는게 어찌 그리 즐겁던지! 벌써 며칠전부터 눈만 감으면 꾸는것은 원족 가는 꿈뿐이였습니다. 해도 막상 그날이 닥치고보니 저를 기다리고있는것은 두동강이 난 외나무다리 같은 절망이였습니다. 1년에 한두번밖에 없는 일이라고 어떻든 그날은 닭알반찬을 꼭 만들어서 점심을 싸주겠다던 어머니는 김치무우 한개를 바가지에 담아들고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하나 그보다도 더 큰일은 밤을 새워서라도 짚신 한컬레를 꼭 삼아 주시겠다던 아버지가 갑자기 탈이 나서 자리에 누워버린것이였습니다. 잡순것도 없이 련일 그 고된 밭갈이를 이를 악물어가며 해낸탓이였습니다.

 

맨발로야 원족을 가는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마을뒤의 언덕길을 줄지어 올라가는 동창생들의 유쾌한 행렬을 바라보며 저는 발등에다 눈물을 떨궜습니다. 동창생들의 웃음소리와 지껄이는 소리가 산들바람을 타고 제 귀에까지 들려왔습니다. 선생님들과 학부형들도 함께 가는 그 행렬이 고개너머로 사라질 때 저는 땅바닥에 펄썩 주저앉아서 엉엉 울음을 내놓았습니다.

 

그나마 4학년까지를 겨우 다녀보고 저는 학교와 인연을 끊었습니다. 가정형편이 도저히 허락하지를 않아서였습니다. 학교를 그만두자 저는 그렇게 가보고싶던 진달래산기슭에를 아주 가서 살게 됐습니다. 거기 새로 생긴 목장에 소몰이로 들어간것이였습니다. -해도 친구 없는 그 산기슭의 생활이란 왜 그다지도 고적하던지! 그때 제 나이 열두살이였습니다.

 

이런 외아들을 그런데 보내놓고 그 어머니의 마음은 또 어떠했겠습니까. 어머니는 나물을 캐러 나오시면 일부러 먼길을 에돌아서 목장까지 저를 보러 오군 하셨습니다. 불시에 그런데서 어머니를 만나게 되면 저는 손에 든 채찍을 얼른 내던지고 달려가서 어머니 치마자락을 눈물로 다 적셨습니다. 꺼칠꺼칠한 손으로 제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어머니도 따라 우셨습니다. 이 목덜미에 따뜻한 봄비 같은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지던 그때의 정경을 저는 지금도 잊을수가 없습니다.

 

그해 여름 어떻거나 제에게 소가죽 한쪼각이 생겼습니다. 목장에서 병든 소 한마리를 잡은것입니다. 저는 그 소가죽을 두쪼각을 내가지고 뱅 돌려가며 구멍을 뚫었습니다. 송곳을 불에 달궈서 뚫었습지요. 그리고는 그 구멍들에 노끈을 꿰여서 오그랑망태 같은 가죽신 한컬레를 만들었습니다. 발에 신어보니 제딴에는 그것이 얼마나 훌륭한 구두로 보이겠습니까. 저는 너무도 대견하고 좋아서 어쩔줄을 몰랐습니다. 평생 처음 신어보는 가죽신인데 어째 안 그렇겠습니까. 비록 서툰 솜씨로 만들어서 자라껍데기같이 볼꼴없는 구두명색이기는 했지만서도.

 

자, 이제부터가 야단입니다. 그 자라껍데기모양의 구두는 원래 다루지 않은 생가죽으로 만든것인 까닭에 일단 마르기만 하면 가랑잎처럼 줄어들고 오그라들어서 신을수가 없게 됩니다. 발이 들어가주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루에도 몇번씩 소들이 물을 마시는 개울에 뛰여들어서 적셔야 했습니다. 아무데라도 물웅뎅이만 눈에 띄면 달아가서 발을 잠가야 했습니다. 밤에 잘 때는 땅에다 구뎅이를 파고 그속에 묻어두군 했습니다. 그래야 물기를 보존할수가 있었기때문입니다. -아침마다 일어나는 길로 뛰여나와 그것을 파내가지고 두손으로 갈라들고 들여다보는 재미란 참으로 천하일미라고나 할가요... 어떻게 표현을 했으면 좋을지 모르겠습ㄴ다.

 

하나 이건 다 지나간 옛이야기,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옛날의 이야기입니다.

 

아시다싶이 토지개혁후의, 특히는 합작화운동이 시작된후의 우리 생활은 급격히 향상됐습니다. 지난날의 어두운 흔적이라고는 오직 기억속에 남아있는것으로 되고말았지요.

 

재작년 가을 저는 시내 백화점에 들어가서 체스꼬구두 한컬레를 샀습니다. -바로 이 남아있는 한짝이 그것입니다. 이걸 사신고 저는 볼일도 없는데 공연히 사람들이 많이 모임직한데를 찾아 다녔습니다. 일부러 그런데를 골라 다녔습니다. 자진해서 남의 심부름도 적잖이 해주었습니다. 사람이 많이 모인데로 가는 일이기만 하면 무어나 다 해주었습니다. 더 설명을 안해도 짐작을 하시겠지만 물론 구두자랑을 하려고였습니다. 그놈의 구두바람에 사람의 성미가 다 변할 지경이였습니다. 저는 본시 그렇게 쏘다니기를 좋아하는 성미가 아니였습니다.

 

한데 불행하게도 하루밤은-바로 지난 5.1절날 밤이였습니다. 저 마을앞에 놓인 다리밑으로 빠져나간 보도랑을 보셨지요. 거기서 일이 잘못됐습니다. 향인민위원회에 나갔다 돌아오는 길이였습니다. 저는 그 다리 한쪽에 난 발목 하나 빠질만한 구멍을 헛디뎌서 고만 구두 한짝을 그리고 빠뜨렸습니다. 지금까지도 그 구두가 물에 떨어지면서 내던 텀벙 소리가 이 귀에 쟁쟁합니다. -저는 애가 나서 아래우로 달아다니며 찾아보았습니다. 쉰개비도 더되는 성냥 한갑을 다 켜없앴습니다. 손가락까지 데였습니다. 하지만 허사였습니다. 물이 그렇게 많은데 한번 잃어버리면 고작이지 찾기는 어딜 찾아요.

 

저는 락심천만 한짝 남은 구두를 들여다보기만 하면 한숨이 절로 나오군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까와서 그 한짝을-바로 이겁니다만-버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대로 골방 선반우에다 모셔두었습니다. 이튿날오후, 하는수없이 운동화 한컬레를 사신고 그리고 차차 그 잃어버린 체스꼬구두에 대한 아쉬움을 잊었습니다.

 

한데 보시다싶이 지난해 우리 여기는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가을을 다한 뒤에도 저는 새 구두 한컬레 사신을 엄두를 감히내지 못했습니다. 햇곡식이 날 때까지 식량을 댈 문제가 념려돼서였습니다.

 

지난 3.8절날 우리는 강건너마을의 축구팀과 대항시합을 했습니다. 그 결과 5대4로 우리가 이겼습니다. 이기기는 했습니다만 그 바람에 제 운동화 한짝도 거덜이 났습니다. 뽈을 세게 차는 오른쪽이 먼저 판이 나버린것입니다. 워낙 낡은것이였기에 깁고 어쩌고 할나위가 없었습니다. 그래 생각다 못해 골방속에 모셔두었던 외짝 구두를 꺼내다 짝을 맞춰서 신기로 했습니다.

 

그러고보니 인제 이야기가 얼추 끝이 나가는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 이 구두의 력사의 가장 요긴한 대목은 이제부터입니다.

 

저는 지난겨울 즉 3월말 현재로 가마니 600장을 짰습니다. 그리고 집에서는 돼지 두마리를 먹였습니다. 하나는 이달에 팔았고 남은 하나는 래달에 팝니다. 이만하면 보리, 감자 날 때까지 우리집 세식구의 식량문제는 해결이 되고도 남습니다. 며칠전에 셈을 따져보니까 한 40원 여유가 있던걸요.

 

그런데 왜 구두를 사지 않고 그저 짝짝이를 신고 다니느냔 말씀입니까? 햐,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 생산합작사가 올해 농사를 잘 지으려면 거기 필요한 물자를 충분히 갖추어야 합니다. -종자, 비료, 농약 그리고 농구와 부림짐승... 한데 이런건 다 우리 매개 사원들의 생산투자를 가지고 해결하는것들입니다. 대부금 말씀입니까. 그건 상책이 아닙니다. 대부금을 내다쓰는건 지난해에 입은 재해의 어혈을 래년, 후년까지 끌고 나가는 결과를 가져오기 쉽습니다. 가장 총명한 방법은 될수 있는대로 대부금을 내다쓰지 않는겁니다. 그래야 지난해에 입은 재해의 여독을 올해안으로 다스릴수 있게 되니까요.

 

그래서 저는 구두 살 돈을 다른 돈과 함께 몽땅 생산에 투자해버렸습니다. -올해 농사를 잘 지어가지고 가을에 가서 까짓거 더 좋은걸로 한꺼번에 두어컬레 사신지요... 한짝쯤 잃어버려도 문제없게. 하하하! ...

 

색시 말입니까. 색시도 물론 얻어얍지요. 짝짝이신발을 신고 다닌다고 싫다면 어쩌겠느냐구요. 허, 그렇게 단 몇발자국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색시를 얻어서는 뭘 합니까. 그런 색시는 이 편에서 사절입니다. 짝짝이신발을 신고 다녀도 좋다는 색시를 얻어야지요. 아니, 짝짝이신발을 신고 다니기에 더욱 좋아한다는 그런 색시를 얻어얍지요. 짝짝이신발을 신고도 사회주의로 통하는 대로를 자신만만하게 활보하는 젊은이의 심정을 살뜰히 알아주는 그런 색시를 얻어야지요.>>

 

-- 1955년 연길

 

김학철전집4-태항산록-괴상한 휴가

 

소설

괴상한 휴가

 

저명한 소설가 차순기선생이 그의 력작 <<반지>>를 발표하고 수많은 독자들의 찬양을 받던 지지난해 봄의 일이다.

 

그의 공전의 성공이 제 일 같이 기뻐서 충심으로 축하를 하러간 나에게 차순기선생은 말없이 쓴웃음을 웃으며 설레설레 머리를 저을뿐이였다. 그의 성품이 본시 겸손하고 또 과묵한것을 잘아는터이므로 나는 그것을 그의 성공을 거두고서도 드놀지 않는 겸허한 태도로 해석하고 존경의 념을 더한층 가하였다.

 

한데 주지하는바와 같이 지난해 가을 그는 문제의 중편 <<서리>>를 세상에 내놓고 일부 평론가들의 비난을 받았다. 새 시대의 인물들의 형상이 그의 작품가운데서 엄중히 외곡이 되였다는것이였다. 그리고 일부 평론가들은 그의 세계관문제까지 들추면서 이왕의 성적까지를 사정없이 내리깎았다.

 

그때 나는 그의 심사가 우울할것을 헤아리고 위안을 하려고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 하나 그의 집 일각대문안에 한발을 들여놓은 나는 예기하지 못한 광경에 부닥쳐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게 되였다. 그는 네살짜리 막내둥이를 목에다 방울을 단 염소등에 올려태우고 부자가 함께 손벽을 치며 좋아하고있었던것이다. 그에게서는 고민이나 우울 따위는 그림자조차 찾아볼 길이 없었다. 당자의 마음이 그렇게 태평한데 옆에서 위안을 한다는것은 열적은 짓이겠기에 나는 그를 방문한 원래의 의도는 파의를 하고 한시간 좋이 곁다리로 휩쓸려들어서 웃으며 지껄이며 놀다가 돌아왔다. 그때부터 나는 더욱더 그를 존경하게 되였다. 그의 큰 인물다운 도량에 감복을 해서였다. 나도 수양을 쌓아서 그처럼 통이 큰 인물로 되여보리라 심중으로 다짐을 하였다.

 

한데 자고로 인간의 세상이란 엎치락뒤치락인 모양이였다. 지난여름, 차순기선생의 중편 <<서리>>를 혹평한 평론가들의 오유가 시정이 되면서 그 소설의 진가가 드러났다. <<서리>>는 <<반지>> 이상의 성공을 거둔 우수한 작품이라는게 판명이 된것이다.

 

<<그러면 그렇겠지!>>

 

장기간 출장을 갔다가 돌아와서 뒤늦게야 그것을 알게 된 나는 이렇게 소리치며 무릎을 탁 쳤다. 그리고 춤이라도 출듯이 기뻐나서 5월의 맑은 하늘 같이 명랑한 기분으로 차순기선생에게로 달려갔다.

 

한데 이게 웬 일이냐, 의당 남보다 몇배 더 기뻐할줄로 안 당자가-차순기선생이-내 치하를 받고는 구슬픈 얼굴로 쓴웃음을 웃으니.

 

<<아니 왜 그러십니까? 뭐가 또 잘못되기라도 했습니까?>>

 

내가 의아해서 이렇게 물었더니 그는 밭은 한숨 한번을 쉬고나서 우울한 눈으로 나를 보며

 

<<내게는 진정한 의미에서 독자가 없습니다...>>

 

하고는 한손을 들어서 책상우에 수북이 쌓인 우편물을 가리켜보이며 하소연하듯 말하는것이였다.

 

<<저걸 좀 보십시오. 저게 요 며칠사이에 온 독자들의 편지와 읽어보고 간행물에 소개를 해달라는 원고들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정력이란 유한한것인데 어떻게 나 혼자의 힘으로 저 많은 편지에 답장을 일일이 쓰며 또 저 많은 원고를 다 매 사람의 비위에 맞도록 처리를 할수 있겠습니까. <반지>때도 그러했고 또 이번에도 그렇고... 아무튼 <좋다> 소리만 나면 언제나 이 모양입니다. 그러기에 작품이 두들겨맞을 때가 도리여 내게는 즐거운 휴가로 된단 말입니다. -뭐가 좀<나쁘다> 소리만 나면 독자의 편지란 죽을병에 살라먹을 부적으로 쓸래도 없으니까...>>

 

차순기선생의 말은 여기서 갑자기 중둥무이가 되였다. 밖에서 젊은 남자의

 

<<편지... 도장...>>하고 소리가 나서였다. 그리고 잇달아 중년녀자의

 

<<웬 편지가 또 이렇게 뭉텡이로...>>

 

하고 놀라는 소리가 나서였다.

 

-- 1955년 연길

 

김학철전집4-태항산록-고뇌의 표준

 

소설

고뇌의 표준

 

1

저명한 건축설계가 지비운이 마당에 내려와 거닐고있다. 청명을 하루 앞둔 일요일, 날씨가 여간만 화창하지 않았다. 그의 안해가 애완 겸 부업 겸 기르는 단 한마리의 토색암탉이 병아리를 깐지도 벌써 두주일... 털빛이 각기 다른 예닐곱마리의 병아리들이 어미를 따라다니느라고 분주하였다. 오래간만에 설계도와 착잡한 선들에서 해방된 지부운의 눈에 그것은 한폭의 <<춘유도>>로 비치였다.

 

<<옳아, 서우천이를 보러 가야지.>>

 

문득 걸음을 멈추며 그는 입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저명한 소설가 서우천은 그의 중학시절의 동창으로서 그와는 막연한 사이다.

 

지비운이 집안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현관문을 나서려는데 마침 밖에서 그의 막내아들 랑림이가 들어왔다. 랑림이는 예술학교 미술관에 재학중이다.

 

<<어째, 또 무슨 일이 있었니? 울상을 해가지구...>>

 

아버지가 묻는 말에 아들은 대답 대신 고개만 외쳤다.

 

<<벙어리야?>>

 

아버지가 그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채쳐물은즉 그제야 볼에 밤을 문 소리로

 

<<학교... 선생이...>>

 

하고 떠듬거린다.

 

<<학교 선생이 어째?...>>

 

<<맘이 비틀어져서...>>

 

<<선생이 맘이 비틀어져? 어떻게?>>

 

사연을 들어본즉 교내 미술전람에 제가 그린 풍경화가 겨우 3등으로 입선이 되였다는것이다. 줄잡아도 2등은 되는것을 선생이 다른 아이에게 두남을 두어서 제 점수를 깎았다는것이다.

 

<<심사라는건 어느 누가 혼자서 하는게 아닌데 어떻게 그럴수있니? 심사하는 선생이 모두 맘이 비틀어질수는 없잖니?>>

 

아들은 점점 더 앵돌아져서 대답도 안하고 고개도 들지 않았다.

 

<<잘 생각해봐.>>

 

한참만에 아버지가 한결 누그러진 어조로 아들을 타일렀다.

 

<<예술을 하려면 첫째 겸허한 품격부터 길러야 해.>>

 

지비운이 짧으면서도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오는데 그 아들은 낯이 벌개서 아버지 등뒤에다 대고 눈만 흘기였다. 아버지에게서마저 동정을 얻지 못하는것이 못내 분하였던것이다.

 

지비운이 찾아가는 소설가 서운천의 집에서는 이때-

 

2

반백의 머리가 텁수룩한 서우천이 망연자실하여 마당에 서있었다. 그 발밑에는 원고지를 무더기로 사른 재가 수북이 쌓여있다. 이태동안 집필에 심혈을 기울여온 장편소설 <<거짓과 참>>이 끝장이 난것이다. 고골리의 <<죽은 넋>> 제2부의 비극이 되풀이된것이다. 급기야 탈고를 해서 머리를 식혀가지고 다시 몇번 일어본즉 그 <<거짓과 참>>에서는 거짓도 거짓이요, 참도 또한 거짓이라. 작가의 량심을 경매에 붙이기전에도 도저히 발표하고도 허위의 화산이라는 조명을 안 듣게 된다면 그건 기적이랄수 밖에 없을것이다. 하여 여러날을 두고 고민을 한 끝에 그는 마침내 비장한 결단의 한걸음을 내디딘것이다-화장!

 

서우천은 고뇌에 차서 입은 옷 그대로 신은 신 그대로 지비운을 찾아나섰다. 마음의 고통을 호소할 사람을 찾아가는것이다. 그가 막 일각대문을 나서려는데 마침 그의 무남독녀 혜경이가 찾아왔다. 혜경이는 지난해에 시집을 갔는데 그 남편은 세균학을 전공하는 연구생이다.

 

<<어째, 또 무슨 일이라도 있었니? 울상을 해가지구...>>

 

서우천은 사랑하는 딸의 얼굴에 수심이 진것을 보자 자기의 고통을 잠시 잊어버리고 이렇게 묻는데

 

<<엄마는?...>>

 

딸의 입에서 나온것은 대답 아닌 대답이다.

 

<<좀 있으면 올게다. -어서 들어가자.>>

 

어비딸이 집안에 들어와서 자리잡아 앉은 뒤에 근심스럽고도 궁금하여

 

<<어서 말해봐라. 도대체 무슨 일이야?>>

 

아버지가 재쳐물으니 딸은 눈물이 글썽해지며

 

<<아버지., 난 이젠 끝장이예요.>>

 

<<아니, 별안간 그게 무슨 소리냐?>>

 

사연을 들어본즉 남편이 현미경에 미쳐서 안해를 돌볼 사이가 없다는것이다. 제 친구들은 극장이나 영화관 같은데도 다 내외가 함께 다니는데 저만은 외톨로 다니게 되니까 다들 소박데기라고 뒤손가락질을 한다는것이다.

 

<<난 갈라설래요. 아버지, 날 도로 데려와주세요. 난 못살아요. 죽어도 못살아요. 그따위 인간은 현미경하구나 같이 살라지요. 내가 왜...>>

 

서우천은 어안이 벙벙하여 눈만 끔벅끔벅하였다. 이윽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난 또 무슨 큰일이라도 난줄 알았구나.>>

 

하고 담배 한대를 꺼내 무니

 

<<그럼 이게 큰일 아니고 또 뭐가 큰일이예요?>>

 

딸은 발끈 성이 나서 애매한 아버지에게 대들었다.

 

<<글쎄 그렇게 성부터 내지 말고 천천히 내 말을 좀 들어.>>

 

하고 천정에다 연기를 길게 뿜고나서

 

<<과학자가 제 연구사업에 몰두하는게 그래 무슨 잘못이라고 너는 그러니? 밤낮 제 계집이나 떠받들어 모시고 다녀야 그게 리상적인 남편이냐, 네 생각엔?>>

 

<<떠받들어 모시긴 누가 떠받들어 모시랬어요. 사람이 그래도 어느 정도 좀...>>

 

<<늬 엄마가 나 원고지에 파묻혀 산다고 시비하는것 너 들어본적 있니?>>

 

<<엄마는 엄마고 나는 나지! 구식하고 신식이 어떻게 같아요?>>

 

<<여보, 당신 어서 와서 이 벽창호 좀 떠맡아가우.>>

 

때마침 문을 열고 방안에 들어서는 안해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이렇게 말하고 서우천이 자리에서 일어서니

 

<<넌 또 왜?>>

 

하고 그 안해는 불시에 찾아온 딸에게 먼저 한마디를 던진 다음 다시 남편을 보고

 

<<그런데 저 마당에 재더미가 웬 일이예요?>>

 

라고 물었다.

 

서우천은 모든것이 다 귀찮은 생각이 들어서 잠자코 그대로 나와버렸다. 파김치가 되여서 엇갈아 디디는 제 발등만 내려다보며 지비운의 집쪽으로 몽유병처럼 걸어갔다.

 

3

<<어, 자네 이거 어딜 가는 길인가?>>

 

하는 귀에 익은 목소리가 함께 누가 어깨를 툭 치는바람에 서우천이 꿈에서 깨여난 사람처럼 고개를 들어본즉 앞에 서있는것은 지비운-바로 자기가 찾아가는 사람이라.

 

<<어, 자넨가.>>

 

<<어딜 가느냐고 물었어.>>

 

<<아, 자넬 찾아가는 길이야.>>

 

<<그럼 마침 잘됐군.>>

 

서로 찾아가다가 도중에서 만난 두 친구는 길거리에서 마주서서 잠시 의논을 하였다.

 

<<날씨도 좋고 한데 우리 오래간만에 공원에나 한번 가볼가?>>

 

<<좋겠지.>>

 

<<남호의 금잉어가 요새도 볼만한지 모르겠군.>>

 

<<글쎄, 아무튼 가보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는 두 친구는 키들이 다 보기 좋게 후리후리하다. 중학시절에는 둘이 다 롱구선수였었다. 그러나 현재는 같은 쉰넷이라도 소설가쪽이 건축설계가보다 퍽 더 겉늙어보인다.

 

<<자네 그 <거짓과 참> 인제 거의다 돼가나?>>

 

<<음... 아니...>>

 

<<공력이 무척 드는가보군그래.>>

 

<<아...>>

 

소설가의 대답은 요령부득이다. 무리도 아니겠지. 그는 바야흐로 파산을 선호한 기업주의 절망감, 허무감 비슷한것을 체험하는중이였으니까.

 

일매진 가로수가 멋지게 늘어선 문화궁전앞의 대통로-남호거리를 따라서 곧장 가면 두 친구가 목적하는 이름난 공원-남호공원이 나선다. 문화궁전 퍽 못미쳐 네거리가지 왔을 때 지비운이 불쑥

 

<<여보게 우천이, 우리 저 길로 둘러서 가세.>>

 

하고 소설가의 팔꿈치를 잡아끌었다.

 

<<둘러서? 왜?>>

 

서우천이 눈을 들어 먼곳까지 촘촘히 줄지어선 가로수들을 바라보며 괴이쩍은듯이 물었다. 시내에서 가장 우아한 남호거리를 거니는것은, 동방의 샹젤리제라고 문인들이 칭찬해부르는 남호거리를 거니는것은-일종의 향락이였다.

 

<<그저...>>

 

<<그저라니?>>

 

서우천은 친구가 더 긴말을 하려 하지 않는것을 보고는

 

<<괴상한 성미로군.>>

 

군소리를 하면서도 순순히 그가 끄는대로 따라갔다.

 

둘러서 가는 길은 거의 곱절이나 멀기도 하거니와 운치없이 번잡하기만 해서 그러잖아도 염세증에 걸린 지경인 서원은 어지간히 기분이 상하였다.

 

4

호수가에 띠염띠염 늘여놓인 장의자들. 그중 한겻진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서 지비운과 서우천 두 친구는 거울 같은 호면을 바라보며 오래간만에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였다. 인간이란 번잡한 일상생활에서 벗어나서 이런 아늑한 품속에 안겨보는 시간이 과연 얼마나 되는가.

 

<<담배 예 있네.>>

 

<<아.>>

 

두 친구는 한개비 성냥불에 담배 한대씩을 사이 좋게 노나 붙이고나서 이야기의 실꾸리를 이리저리 굴리며 천천히 풀어나갔다.

 

<<자식은 아예 응석으로 기를게 아니라니까.>>

 

<<누가 아니래.>>

 

<<우리 막내녀석은 글쎄 제 그럼이 3등으로 입상이 됐다고 심사한 선생들을 모두 맘이 비틀어졌다는 판일세.>>

 

<<흐흥... 우리 집 혜경이란 년도 마찬가지야. 외동딸이라고 너무 귀엽게 길러놔서 이 세사엔 저 하나밖에 없는줄 안다니까.>>

 

 

<<그래도 우리 집 그년은 제 사내가 저를 떠받들어 모시지 않는다고 울고불고 야단이야. 현미경에 미친 인간하고는 같이 살수 없다고 리혼을 하겠대.>>

 

한동안 잠잠하다가 지비운이 다시

 

<<그러고보면 우리가 다 부모노릇을 잘못했나보이.>>

 

탄식하는조로 말을 한즉

 

<<동감이야.>>

 

서우천도 감회 깊은 어조로 대꾸하였다.

 

<<우리는 젊었을 때 그렇지들 않았던것 같은데...>>

 

하고 건축설계가가 기억을 더듬으니

 

<<안 그렇다마다. 우리야...>>

 

하고 소설가가 맞장구를 쳤다.

 

또 한동안 무료하게들 담배만 피우다가 지비운이 불쑥

 

<<자네 그 <거짓과 참>에서는 주인공의 결말이 어떻게 나나? 죽나, 사나? 아니면...>>

 

하고 궁금증을 나타내는데 서우천은 손을 홰홰 내두르며

 

<<화장, 화장. 화장했어!>>

 

<<화장? 화장이라니?>>

 

<<다 살라버렸어.>>

 

<<살라버리다니... 뭘?>>

 

<<원고, 원고. 이태동안 쌓은 공이 십년공부 나무아미타불이 돼버렸어!>>

 

<<아니, 그게 웬 소리야?>>

 

<<말 말게. 지금 속이 부질부질 끓어서... 살고싶은 생각도 없네.>>

 

<<저런!>>

 

<<알았나, 인제? 그래서 하소연을 하려고 자네를 찾아오던 길이야.>>

 

<<도대체 어떻거다 그런 일이 생겼나? 어서 속시원히 얘기나 좀 하게.>>

 

<<청맹과니노릇을 하던 작가의 량심이 눈을 떴어. 거짓말로 저 자신을 속여온 전비를 뉘우쳤단 말이야. 독자들을 우롱한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쳤단 말이야.>>

 

<<......>>

 

<<나의 허위의 화신이였어. 알겠나? 허위의 화신!>>

 

<<여보게.>>

 

하고 동정을 금치 못하는 건축설계가가 친구의 어께에 손을 얹으며 부드러운 말로 안위를 하였다.

 

<<자네의 그 심정은 나도 충분히 리해하네. 하지만 너무 그렇게 격동할건 없어. 생각해보게, 한 자가가 자기의 공력들인 작품을 부정한다면 그건 그 작가의 일보 전진을 의미하는게 아니겠나?>>

 

절망감에 사로잡힌 소설가는 아무러한 반응도 보이지를 않았다. 지비운이 잠시 끊긴 말을 다시 이었다.

 

<<나는 자네의 이번 그 결단을 정상적인 성장과정에서의 한 전환점으로 보네. 다시말해서 자네는 보다 높은데로 한번 크게 뛰여 오른거란 말일세. 자네의 이번 실패는 십년공부 나무아미타불인게 아니라 실상은 공든 탑이 무저지랴일세. 다음에 쓸 작품의 성공을 위해서 미리 튼튼한 터닦이를 한거란 말일세. -이왕 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기실 나는 자네가 여간만 부럽지 않네.>>

 

소설가는 의아한 눈으로 자기를 부럽다는 친구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왜, 곧이들리지 않나?>>

 

하고 건축설계가는 자조하듯 쓴웃음을 한번 웃고나서

 

<<나도 크게 공력을 들인 제 설계도가 막상 철근과 콩크리트로 완성이 돼갈 때 왕왕 뒤늦게 결점을 발견하고 자기의 미숙함을 깨닫는 일이 있다네. 그러나 어떻거나? 자네처럼 결단을 내려서 살라버리겠나? 그것은 원고지가 아니라 철근콩크리트야, 그 결점은 내 일생 살아생전에는 지워버리지를 못해. 내가 죽어도 그 건물은 그대로 남아있어. 나는 백년을 살지 못하네. 하지만 내 그 작품들의 수명은 백년, 이백년, 길고도 또 길거든. -그래서 나는 자네같은 작가들을 부러워한다는 말일세, 맘에 안드는 원고는 아무때고 살라버릴수 있으니까. 화가나 조각가도 다 그렇지. 그들도 맘에 안 드는건 아무때고 찢어버리고 깨버리고 할수 있거든. -자네. 알아듣겄나, 내 이 말하는 뜻을?>>

 

소설가의 얼굴에 놀라와하는 빛이 현연히 떠올랐다.

 

<<내가 왜 아까 자네를 끌고 문화궁전을 피해서 먼길을 에돌아왔는지 아나? 내가 그 문화궁전의 설계자인걸 자네도 알지. 그런데...>>

 

홀제 등뒤의 아주 가까운 나무에서 딱따구리가 급촉한 <<따다다닥...!>> 소리를 내였다. 두 친구는 일변 놀라기도 하고 또 일변 신기하기도 해서 일제히 뒤를 돌아보았다. 멋지게 생긴 딱따구리 한놈이 나무줄기를 안고 잽싸게 돌다가 파드닥 날아가는것을 보고 서우천이 픽 웃으며

 

<<저놈은 저렇게 몹시 쪼아도 뇌진탕이 안 걸리는 모양이지.>>

 

하고 고개를 흔드니

 

<<익조라서 하늘이 굽어살피는게지.>>

 

하고 지비운이 받았다.

 

웃음의 소리를 하는 두 친구의 얼굴에는 잠시 화기로운 미소가 어리였다.

 

<<그런데...?>>

 

하고 소설가가 딱따구리로 해서 중둥무이된 말이 다시 이어지기를 바랐다.

 

<<그런데,>>

 

하고 건축설계사가 다시 심각한 표정으로 돌아오며

 

<<공사가 거의 준공에 가까왔을 때, 다시말해서 준공전야에 이르러서 나는 자기 설계에서 큰 결함을 발견했네. 그것은 일반사람의 눈으로는 보아내지 못하는 그런거였지만 한 건축예술가로서는 치명적인 결함으로 보지 않을수 없는 그런거였네, 나는 등골에 식은땀이 흐르는걸 어쩌지 못했네. 한마디로 말해서 그것은 진렬장 모양으로 깊이없이 해바라진, 기생처럼 겉치장만 반지레한... 그런 안가한 건물이였네. 내가 숭상하는 미껠란젤로의 풍격과는 천만리 동떨어진 졸작이였네. 거기에는 고시크의 수려함도 없고 희랍의 전아함도 없고 그리고 로마의 웅숭깊음 또한 없었네. 솔직히 말해서 그것은 뉘게다 보이기도 창피할 정도의 실패작이였네.

그래서 나는 병탈을 하고 준공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네. 신문과 라지오가 새로 일떠선 문화궁전을 대대적으로 선전할 때 나는 곧 울고만싶었네. 쥐구멍을 잦고만싶었어. 사람들의 치하를 받을적마다 나는 낯이 간지러워서 몸둘바를 몰랐네. 한데 그 문화궁전으로 날마다 수천명 사람이 드나들거든. 그 숱한 사람들을 우롱하는것 같은 자격지심에 나는 살이 내릴 지경이네. 문화궁전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떨리네. 해서 나는 문화궁전에를 절대로 들어가지 않을뿐아니라 그 근처에도 얼씬을 안하네. 문화궁전앞을 지날 일이 있으면 일부러 길을 에돌아다니네, 아까 자네를 끌고 에돌아온것처럼 그렇게. 내가 자네 같은 소설가라면 그래 이런 평생을 두고 량심의 가책을 받을 실패작을 그대로 놓아두고 밤낮 속을 썩이겠나, 어느 옛날에 벌써 속시원히 살라버렸지. 인제 내가 자네의 처지를 부러워한다는 소이연을 알만한가?>>

 

이야기를 마무리지은 건축설계가의 얼굴에는 서글픈 웃음이 떠올랐다. 소설가는 묵묵하면서도 격정적으로 친구의 손을 꽉 잡았다. 두 사람의 눈에는 끝없는 친애와 신뢰의 빛이 흘렀다.

 

이때 나이 젊은 엄마의 손에 끌려서 남호의 금잉어구경을 온 네댓살짜리 귀엽게 생긴 사내아이가 장난감나팔을 입에다 대고 <<뚜- 뚜- >>불었다. 그 소리가 사람들의 귀에 별나게 우습강스럽게 들렸다. 지비운이

 

<<저 어린 예술가도 지금은 미숙하지만 장래는 훌륭한 트럼페트연주가로 될걸세.>>

 

하고 웃으니

 

<<아무렴.>>

 

하고 서우천도 웃으며 말을 받았다.

 

<<우리처럼 허다한 고뇌의 계단을 거쳐서...>>

 

<<손님들, 기념사진 안 찍으시겠습니까?>>

 

하고 웃는 낯으로 다가와서 권유하는것은 공원사진관의 약삭바른 청년사진사.

 

<<좋겠지.>>

 

두 친구는 호수를 배경으로 나란히 서서 자연스럽고도 기분좋게 웃음을 지었다.

 

<<제사를 넣으시지요? 여기다 적어주십시오.>>

 

젊은 사진사의 서비스가 아주 능란하다.

 

<<좋겠지. -자네가 쓰게.>>

 

하고 지비운이 밀맡긴즉

 

<<글쎄... 뭐라고 쓴다?>>

 

하고 서우천이 선뜻 원주필을 집어들고는 고개를 한번 비튼 뒤에

 

<<고뇌여, 잘 가거라!>>

 

라고 가로썼다.

 

건축설계가와 소설가 두 친구는 서로 마주보며 명랑하고도 통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의 머리우의 사월의 하늘은 여전히 온화하고 여전히 맑았다.

 

-- 1981년 연길

 

김학철전집4-태항산록-네번째 총각

 

소설

네번째 총각

 

천번째

그 총각의 이름은 밝힐게 없어, 근무하는 직장도 밝힐게 없고, 나이만은 밝혀도 무방하겠지... 스물여섯살이였어, 그 당시. 생김생김? 응 생김생김은 그럴듯해. 안 그러면 내 눈에 들었을리 있니 애두 참. 우리 집에도 몇번 놀러 오고 했었는데 엄마도 보고 여간 맘에 들어하지 않았어. 그러기에 대접을 성의껏 잘했지, 닭까진 잡아 대접하지 않았지만서도. 그 총각이 체격이 특히 좋아. 권투를 한다나봐. 내 눈으로 보진 못했지만 아마 상당한 수준인 모양이야. 우리 아버지도 젊어서는 상씨름군으로 가근방에 소문을 놓았었대. 그래서 더구나 그 총각에게 호감을 가졌었나봐, 물론 권투를 씨름만은 못하게 여겼지만서도. 아버지가 저녁에 반주 서너잔 하시고 거나해서 나를 바라보시면서 <<씨름군사위가 아니라서 좀 섭섭은 하다마는 권투선수사위도 해롭잖지. 권투도 잘하면 외국에까지 간다더라, 상도 타고 돈도 벌고. 해롭잖아 해롭잖아.>> 하고 너털웃음을 웃으시는걸 여러번 보았다. 내가 외동딸이라서 아버지 엄마는 어려서부터 무어나 내가 하겠다는건 말려본적이 거의 없어. 자식이라고는 세상에 나 하나뿐인데 왜들 안 그러시겠니. 이들을 두어보지 못한 까닭에 그 총각이 와서 같이 식사를 하면서 무슨 이야기를 할 때는 두분이 다 눈들이 가늘어져서 듣군 하셨지 뭐야.

 

<<우리 거기도 어뜩비뜩한 작자들이 몇이 있습니다. 술이나 마시고 담배들이나 꼬나물고 녀자들을 보면 히룽히룽하면서 잡소리나 줴치구 그러고 공연히 지나가는 사람에게 시비를 걸어서는 치고 달코 하는 그런 너절한것들이 있습니다. 그래 제가 좋은 말로 몇번 타일렀습지요 그러지들 말라구. 했더니 이것들이 도리여 제말을 고깝게 듣고 앙심들을 품었지 뭡니까. 제야 그런 속내를 알 까닭이 있습니까. 그런데 하루는 무슨 하찮은 일로 이것들이 제게 시비를 걸어온단 말입니다. 저는 하도 같잖아서 상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무서워서 피하는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거지요. 그것들이 시비조로 따지는 말을 저는 대꾸도 안하고 그냥 돌아섰습니다. 했더니 그중의 한 녀석이 대뜸 제게다 발길질을 하잖겠습니까. 그리고 한녀석은

 

<비겁쟁이가 사타구니에다 꼬리를 낀다.>

 

하고 비웃고 또 다른 한 녀석은 제게다 침을 탁 뱉지 않겠습니까. 이거야 어떻게 참습니까. 아무리 참을래야 참을수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홱 돌아서는결로 세 녀석을 해제끼는데 개개 다 어퍼커트로 해제꼈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지요. 어퍼커트란 권투에서 쓰는 말인데 주먹으로 상대방의 턱을 올려치는걸 말하는겁니다. 삽시간에 세 녀섟이 늘비하게 뻐드러졌지 뭡니까. 그후부터는 그 자식들 저만 보면 쩔쩔맵니다, 버릇을 톡톡히들 배웠지요.>>

 

그 총각의 이와 같은 무용담을 듣고 나는 가슴이 뛰였지 뭐냐, 이런 호걸남자를 남편으로 삼으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말이야. 엄마 아버지도 싱글벙글하시면서 서로 돌아보고 고개들을 끄덕거리시더라. 사위감이 맘에들 드신다는 뜻이겠지. 이렇게 해서 량쪽집에서 다 약혼을 할데 대해서 초벌의논들을 하는중에 행인지 불행인지 의외의 일이 한가지 생겼지 뭐냐.

 

이야기가 재미있니? 재미있으면 마저 하고 재미없으면 고만두고. 재미가 있다구? 오냐 그럼 마저 하마.

 

어느 노는 날 그 총각이 공원에 놀러 가지고 끌어서 나도 싫단말 않고 따라섰는데 넓은 공원안을 여기저기 구경하며 돌아다니다가 나중에 사자우리에를 와보니 사자 한쌍이 잔디밭에 다리들을 뻗고 한가하게 누워서 볕을 쬐고들 있더라. 우리는 두어길 좋이 되는 관람대우에서 사자들을 굽어보고 사자들은 저밑에서 우리를 쳐다보는데 그중 한놈은 춘곤을 못이겨서 졸리는 모양으로 두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더라. 그런데 이 총각이 사자들을 보더니만 갑자기 기운이 솟아나는지 부리나케 층대밑으로 뛰여내려가서는 주먹덩이 같은 돌을 대여섯개 주어들고 겅정겅정 뛰여올라 오잖겠니. 올라와서는 어떡하는가 보니까 글쎄 가만히 누워있는 수사자의 눈통을 겨냥하고 돌 한개를 힘껏 내려치는구나. 돌이 빗나가서 눈통을 못 맞히고 목덜미를 맞혔다. 총각이 신바람이나서 련주팔매라도 치듯이 가진 돌을 련달아 내려치는데 옆구리와 엉뎅이에 뜨끔뜨끔 돌들이 와 맞는데 사자가 왜 골이 안 나겠니. 수중왕의 존엄을 모독당하고 왜 분이 안 나겠니. 사자가 몸을 뒤치면서 후다닥 뛰여일어나더니 돌 던진 사람을 쳐다보며 으르렁 소리를 냅다 지르는데 공원안에 찌렁찌렁 울리더라. 그러나 어떡하니 올라올수가 있어야지. 사자가 분을 풀지 못해서 안절부절을 못하고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는것을 보자 총각은 더욱 신이 나서 또다시 뛰여내려가서 돌을 주어다가 계속 내려치더라. 거기 분명히

 

<<동물을 사랑합시다.>>

 

<<돌을 던지지 맙시다.>>

 

이렇게 적힌 패찰이 걸려있는데도 아랑곳 않고 그런짓을 하니 내가 그래 민망하겠니 안하겠니. 다른 사람들이 비록 나서서 말은 안해도 모두들 못마당하게 눈살들을 찌프리는게 환히 알리잖고 뭐냐. 그러지만 나는 시집 안 간 처녀의 몸으로 아직도 서먹한 남의 남자를 그러지 말라고 나서서 제지할 용기가 없더구나. 내가 못났지. <<문화혁명>>때 너도봤지, 그전에는 그앞에서 썰썰 기다싶이 하던것들이 일단 로간부들이 공격의 대상이 돼서 저항을 못하고 끌려다니게 되자 앞을 다투어가며 갖은 릉욕을 다하던걸. 얻어맞아서 축 늘어진 사람을 치고 차고 하는것은 가장 비렬한 행위야. 송장을 치고서도 영웅인체 뿜내는 그런 인간을 나는 제일 경멸해. 근본 사람으로 보지 않아. 구리안에 갇혀있는 사자에게 돌질을 하는게 그래 무슨 용사며 무슨 영웅이란 말이냐. 그 총각을 좋게 보아오던 내 마음에 그늘이 지는것은 나로서도 어쩔수가 없더라. 안타깝지.

 

우리에 갇힌 사자들을 타승하고 승리의 쾌감을 만긱한 총각이 상투가 국수버섯 솟둣해가지고 개선장군처럼 나를 끌고 안침진 솔밭속으로 들어가는데 어떻거니 끄느대로 끌려들어갈밖에. 싫다고는 할수가 없거든. 그런데 일이 안될 때라선지 될 때라선지 솔밭모퉁이에서 모자들을 삐딱하게 쓰고 검은 색안경들을 잡순 애송이녀석 셋이 쑥 나서잖겠니. 이 자식들이 우리를 보더니 대뜸 앞을 턱 가로막아서면서

 

<<잘들 한다, 으슥한 구석장이만 찾아다니구.>>

 

<<야야 이 새끼, 넌 뭐 해처먹고 사는 아야, 같잖게.>>

 

<<이봐 아가씨, 우리도 추렴을 좀 들어보자구. 아주 깔끔하게 생겼군그래.>>

 

하고 생판으로 시비를 붙는구나 글쎄. 아주 망나니들이야. 그렇지만 나는 은근히 믿는 구석이 있어서 태연했다. 조금도 겁을 안 냈다.

 

(이놈들 자는 호랑이의 코를 쑤시니? 거센체하다가 눈 깜짝할사이에 늘비하게들 뻐드러지잖나 봐라.)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지 뭐냐. 권투선수 호걸남자하고 같이 온것을 나는 얼마나 다행으로 여겼는지 모른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이냐. 믿는 나무에 곰이 피여도 유분수지! 글쎄 내가 그처럼 믿어온 이 총각이 꿀꺽 소리도 못하고 얼굴빛이 새파랗게 질려가지고 날 잡아잡수하고 서있잖겠니. 서있기만 하면 또 괜찮게, 숫제 나는 놓아두고 저 혼자서 가재걸음을 친단 말이다. 하느님 맙소서! 그 망나니들이 만약 우리안에 갇혀있었더라면 의심할바 없이 사태는 전연 달랐을거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망나니들은 우리밖에 있었거든.

 

너도 좀 생각해봐라, 내가 그래 아무리 쓸개가 빠졌다 한들 이런 권투선수영웅하고 일생을 같이 지낼수 있겠는가. 첫번째 총각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이다. 네가 재미가 있어서 더 듣겠다면 내 두번째 총각의 이야기를 하마. 듣겠니? 좋다 그럼, 나 물 한모금 마시고 숨 좀 돌려가지고 또 다음 이야기를 계속 하마.

 

두번째

이 총각은 말쑥한 총각이야. 얼굴 생김생김만 말쑥한게 아니라 몸 전체가 다 말쑥해. 머리에다 쓴거고 몸에다 입은거고 발에다 신은거고 지어는 타고 다니는 자전거암질러 다 조페국에서 금시 찍어낸 새 은전처럼 반짝반짝해. 몸단장을 웬만큼 해가지고는 그곁에 가 서기도 죄만스러울 지경이야. 그러기에 우리 엄마도 처음 만나보고나서

 

<<껍질 벗겨낸 파같이 해말쑥하더구나.>>

 

하고 웃었지. 아버지도 맘에 드시기에

 

<<어찌나 말쑥한지 수정으로 깎아만든 사람 같더구나. 웬만큼 게으른 녀편네는 들어가서 사흘도 못살고 쫓겨나겠다.>>

 

하고 눈이 가늘어지셨지. 내가 같이 다녀보니까 그 성질이 더 잘 알려. 면도질은 날마다하는지 얼굴에 솜털 하나가 안 보이고 손수건도 언제나 빨아서 다린것처럼 깨끗한게 구김살 하나가 없지 뭐냐. 그런데 한번은 내가 어떤 녀배우의 이야기를 하다가

 

<<"홍루몽"에 나오는 림대옥 같지요?>>

 

하니까 그 총각은 잠시 멍청하다가 얼른

 

<<아 정말 그렇군요. 하하하...>>

 

하고 얼러방을 치는데 내가 피뜩 느낀것은

 

(아하, 이 량반이 "홍루몽"을 못 읽어보셨군.)

 

하는거였지 뭐냐. 그래 내가 슬그머니 이름난 작가들의 작품이야기로 유도를 해보았더니 그 총각이 아는체는 하는데 실상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다 동문서답이였어. 례를 들어서 내가

 

<<아Q나 공을기 같은 인물들은 다 당시 그 사회제도의 희생물이지요.>>

 

하니까 그 총각은 선뜻

 

<<물론이지요, 의당 렬사비를 세워줘야지요.>>

 

하고 대답을 하더란 말이다. 내가 다시

 

<<파금의 "집"이 나온지도 인제 반세기가 넘었어요.>>

 

하니까 그 총각은 서슴없이

 

<<그렇게 되지요. 그렇지만 몇해에 한번씩은 수리를 할테니까 아직은 사람이 살만할거요.>>

 

하잖겠니, 사람이 기구멍이 막혀서. 내가 넌지시 몇번 드레질을 해본 결과 얻어진 결론은 <<책하고는 담을 쌓고 사는 사나이>>였어. 어떤 책이든간에 책명색이 붙은것은 죽어도 안 읽는단 말이야. 자 그렇다면 술을 마시는가? 더더구나 천만에! 그런것들하고는 다 인연이 멀어. 내가 지내보니까 그 총각은 음악이나 미술 같은데 무슨 흥취를 가진 사람도 아니고 영화, 연극에 재미를 붙인 사람도 아니고 또 축구나 낚시질을 즐기는 사람도 아니였어. 그래서 이 사람은 도대체 무슨 취미로 이 세상을 살가 의심을 안할수 없게 됐지 뭐냐. 그전에 어느 대가집에서 사위감을 고르는데 장모될 마님이 외국류학을 한 사위감을 앞에다 불러 앉히고

 

<<자네 술을 조하하나?>> 하고 물으니까 그 사위감이

 

<<아니요, 술은 접구도 못합니다.>>

 

하고 대답하더래. 마님이 대단히 기특히 여겨서

 

<<그럼 담배는 피우겠지?>>

 

하고 물으니까 그 사위감은 고개를 외치면서

 

<<담배연기만 맡아도 골이 아픈걸요.>>

 

하더란다. 그래서 다시

 

<<그럼 외국에랑 가서 살았으니까 녀자친구는 더러 사귀여봤겠지?>>

 

하니까 사위감이 펄쩍 뛰다싶이 하면서

 

<<천만에요, 전 녀자라면 아주 질색입니다.>>

 

하더래. 마님이 괴이쩍게 여겨서

 

<<그럼 자네는 도대체 이 세상을 무슨 취미로 사나?>>

 

하고 물었더니 그 사위감이 히쭉 웃고 대답하는 말이

 

<<녜, 요렇게 가짓부리하는 취미로 삽지요.>>

 

하더란다. 물론 이건 누가 일부러 지어낸 우스운 이야기일거다. 그렇지만 우리 이 총각은 도대체 무슨 취미로 이 세상을 사는지 알수가 있어야지. 그런데 어느날 우리 이모가 오래간만에 놀러오잖았겠니. 식구들이 둘러앉아서 한담들 하다가 이야기가 자연히 그 총각에게로 번져나갔을 때 이모가

 

<<오, 바로 그 총각이냐.>>

 

하고 무릎을 탁 치며 내 얼굴과 엄마의 얼굴을 반반씩 갈라보지 않겠니.

 

<<네 그 총각을 아니?>>

 

엄마가 묻는 말을 이모는

 

<<그 총각은 몰라도 그 큰누이가 나하고 같이 일을 하니까 늘 들어서 그 집 래력이야 잘 알지요.>>

 

하고 대답하더라.

 

<<그 큰누이가 출가를 안하고 그저 같이 있다니?>>

 

<<왜 출가를 안해요, 젖 떨어진 애기까지 있는데.>>

 

<<그래 그 집안 래력이 어떻던?>>

 

<<아이고 언니, 그 총각 말도 마오. 형편이 없소.>>

 

<<어떻게 형편이 없어?>>

 

<<그 집 삼남매중에서 큰딸은 시집을 가고 작은딸은 직장에 다니는데 아버지는 벌써 여러해전에 세상을 떴답니다. 그래 현재 세식구 사는데 그 엄마는 소아과의사래요. 그런데 이 녀석이 어찌나 덜돼먹었는지 홀로 사는 어미를 불쌍히 여길줄은 모르고 도리여 껍질을 벗겨먹으려 든다니요. 저의 누이가 죽을라고 합디다. 속이 상해서. 사내녀석이 몸단장을 어떻게나 류별나게 하는지 새로 나온 무슨 좋은 의복은 꼭 입어야 하고 모자고 양말이고 구두고 언제나 일등 좋고 비싼거라야만 하고 글쎄 뭐 형편이 없대요. 면도칼도 무슨 전기로 돌아가는거라나. 그리고 세수하는 비누만 해도 무슨 단향비누라나 향수비누라나 그런거라야만 된다지 뭐요. 아무튼 제가 받는 월급은 한푼도 집에 들여놓는 법이 없다면서도 밤낮 저의 엄마보고 돈돈 돈내라 돈돈 한다잖아요. 차고 다니는 시계도 외국시계요. 쓰고 다니는 안경도 외국안경이요... 엄마가 칠팔십원 받는 월급으로 집안살림하랴 작은딸 시집보낼 준비하랴 어디 손이 돌아가야 말이지요. 그래 속이 썩어서 혼자 자꾸 운다지 뭐요. 세상에 별 망할 놈이 다 있지요.>>

 

이모의 말을 듣고 나느 비로소 깨도가 됐지 뭐냐. 내 머리속에 늘 걸려있던 의문이 일시에 풀렸단 말이다. 알고보니 그 말쑥한 총각의 세상을 사는 취미는 일편단심 오로지 제몸 하나 단장을 하는거였어. 너절해서. 천생 남첩노릇이나 해먹고 살 인간이지 그따위가 무슨 사내구실을 옳게 하겠니. 그래서 이 혼처도 또 날려버렸지 뭐냐. 어떻냐, 내 팔자도 어지간히 험하지? 그렇지만 팔자 땜은 이걸로 끝이 안 났어. 가만있거라, 속에서 불이 나는데 목이나 좀 추기고나서 다시 이야기하자.

 

세번쩨

우리 이모가 분연히 떨쳐나서서 활동을 한 결과 반계곡경으로 총각 하나를 소개해왔는데 이 총각이 나를 한번 보자 고만 뼈가 다 녹아서 흐늘흐늘해졌지 뭐냐. 그도 그럴것이 지난해 어느 유명한 화가가 나를 모델로 전람회에 출품할 그림을 그리겠다고 애를 애를 쓰다가 우리 아버지가

 

<<시집도 안 간 처녀애를 되기나 할 소리냐, 정신 빠진 놈!>> 하고 야단 치시는 바람에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화가가 길이길 탄식하며 한 말이 있다.

 

<<저 갸름하고 해맑은 얼굴, 저 좁은 입, 저 맑고도 빛나는 두눈, 저 오똑한 코날, 저 날씬한 몸매... 저걸 한번 못 그려보고말다니... 아이구 내 이놈의 팔자야!>>

 

이게 그 화가가 한 말이야. 그러기에 난 언제나 자신이 있어. 혼기를 놓쳐서 시집을 못 가고 처녀로 늙을가봐 걱정한적은 한번도 없단 말이다. 흰소리가 아니야. 일생의 대산데 덤빌것 있니, 신중히 두고두고 잘 골라야지. 안 그러냐. 한데 이번 총각은 키가 큰것은 좋으나 목소리가 좀 가는것이 흠이고 눈이 큰것은 좋으나 코가 좀 낮은것이 흠이기는 했지마는 일반적으로 말해서 외양은 파스 즉 통과란 말이다. 100점 만점에 60점으로 합격이란 말이다. 인제 정신세계를 관찰해야 할 참이지. 그 령혼을 분석해보는 단계란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먼저 주해를 하나 달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 총각은 그저 보통총각이 아니라 세상에서 말하는 이른바 고급간부의 자제다. 그 아버지로 말하면 우리 여기서 령도적지위에서 사업을 하시는분이다. 이름을 말하면 누구나 다 알지만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어서 밝히지 않는다. 그런데 지내보니까 총각이 아주 그럴듯해. 첫째 성품이 선량하면서도 정직해. 로혁명가의 혈통이 다르긴 하더라. 우리 아버지하고 엄마는 높은 간부하고 사돈을 맺게 되는것이 대견해서 입이 한껏들 벌어지는 한편 또 너무 어마해서 송구한 마음도 없지 않은 모양이더라. 한번은 그 총각을 청해다가 저녁 대접을 하는데 자리를 같이하자고 일부러 가서 우리 이모도 청해왔지 뭐냐. 이모는 자기가 나서서 애쓴 보람이 있다고 좋아서 나하고 그 총각을 반반씩 갈라보며 자꾸 싱글벙글하더라. 왜 안 그러겠니. 아버지가 억지로 권하다싶이 하는 바람에 그 총각이 포도주를 서너잔 받아 마시고나서 얼근한김에 이야기 주머니를 풀어놓는데 우리는 모두 처음 듣는 말이라 신기해서 귀들을 기울였다.

 

<<우리 아버지는 항일전쟁시기에 팔로군부대에 있을 때 벌써 대대장이였으니까 그대로 군대에서 사업하셨더라면 지금쯤은 적어도 군단장은 됐을겁니다. 군단장이면 장군이 아닙니까. 그러기에 지금 여기 당내에서도 우리 아버지 말 한마디면 고만이지요. 누가 감히 <아니 불자>를 내놓겠습니까. 그래 우리 아버지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뜨르르하지요.>>

 

이 말을 듣고 아버지, 엄마, 이모 세분은 서로 돌아보며 고개들을 끄덕이더라. 매우 감격들 한 모양이지 뭐냐. 총각이 우리를 한번 둘러보고 다시 말을 잇더라.

 

<<이번에 남산밑에다 굉장한 체육장을 닦은거라든가 늪가에다 전국 일류의 과학관을 지은거라든가 하는것도 다 우리 아버지가 직접 중앙에 올라가서 교섭을 해서 비로소 해결된겁니다. 그러찮으면야 어디서 그런 큰돈이 나오겠습니까. 나올 구멍이 있어야지요.>>

 

이 말을 듣고 세분은 눈들이 둥그래지잖겠니. 무리도 아니지, 그런 신선한 말을 생전 언제 들어들 봤어야지. 총각이 내 눈치를 한번 살피고나서 다시 이야기를 계속하더라.

 

<<우리 학교에서도 천여명 전교 학생이 일시에 들어갈 새 강당을 짓는데 경비가 부족해서 애들을 먹었지요. 교장선생이 나를 보고 말씀 좀 드려달라고 여러번 간청을 하기에 내가 맘먹고 아버지께 말씀을 드렸더니 한달이 채 못돼서 문제가 덜컥 해결이 되잖고 뭡니까. 그래서 교장선생은 지금도 나만 보면 좋아서 어쩔줄 모릅니다. 그렇지만 난 머잖아 이 교원생활을 고만두고 공안국으로 가게 될겁니다. 아버지가 얼마전에 공안국장에게 말을 해놓았으니까 두달을 넘기지 않을겁니다. 우리 아버지의 말 한마디면 다지요. 두고들 보십시오, 내가 앞으로 중앙의 공안부로 올라가잖나. 공안부의 부부장이 항일전생시기 우리 아버지하고 한부대에서 사업을 한 전우거든요. 서로 너나들이를 하는 판인데.>>

 

이 일장 설화를 듣고서는 세분이 다 놀랍고 대견해서 입들을 딱 벌리잖고 뭐냐. 금시 눈앞에 그 대단한 모습을 보는것 같아서 였을거다. 제복을 갖춰입고 승용차에 올라타는 그 총각의 위풍름름한 모습을 눈앞에들 보는것 같아서 그랬을거란 말이다.

 

이때부터 시집을 갈 당자인 나보다도 엄마 아버지가 더 속을 달구면서 자꾸 나를 재촉하잖겠니, 이 좋은 혼처를 또 놓치면 어떡하랴 해서. 두번이나 실패를 한 끝이니까 왜들 안그러시겠니, 무리야 아니지. 내가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서 그 총각과의 교제를 죄는중에 차차차차 한가지 사실이 밝혀졌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 총각이 이 세상을 살아나가는데 최아무라는 제 이름으로 살아나가는것이 아니라 최아무의 아들이라는 신분으로 살아나간다는거였다. 아닌게아니라 그저 최아무라면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도 않지만 그 아버지의 이름을 내대고 그 아들이라면 다들 <<오 그런가>>고 대우를 특별히 잘해주잖겠니. 다시말하면 최아무라는 열쇠로는 어느 자물쇠도 열리지를 않지만 그 아버지 최아무의 아들이라는 열쇠로는 어느 자물쇠나 다 척척 열리더란 말이다. 그러니 이 총각이 거기에 재미를 붙여서 맞지 않는 열쇠는 호주머니속에 넣어두고 맞는 열쇠만을 내들고 다닐 밖에. 그렇지만 아버지 최아무는 아들 최아무보다 나이가 30여세나 우거든. 그러니 아버지 최아무가 세상을 뜬 뒤에도 아들 최아무는 30여년을 더 살아야겠지. 그러면 그 30여년 동안은 최아무의 아들로 행세를 못하고 그냥 홑최아무로 행세를 해야 할테니 이게 난감하지 않으냐. 그 총각은 알고보니 저의 아버지한테 붙어사는 더부살이 같은 존재였어. 저의 아버지의 그림자 같은 존재였어. 저의 아버지가 없으면 독립적으로 살아나가기 어려운 인간이였단 말이다.

 

하긴 세상에는 신랑 당자를 보지 않고 자리에 있는 시아버지를 보고 아무개의 며느리라는 소리가 듣고싶어서 시집을 가는 허영에 뜬 계집애들도 있기는 있더라마는 내야 어떻게 그럴수 있니. 싹 걷어라. 나는 골백번 죽어도 그따위 더부살이그림자하고는 같이 살지 않아, 설혹 처녀로 늙어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래서 잔뜩 부풀었던 고무풍선은 또 터졌지 뭐냐. 최아무의 며느리라는 금빛의 꿈은 깨져버렸단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꼬물도 락심하지 않는다. 세상은 너르고너르고 얘, 설마 10억 많고많은 인구중에서 내 맘에 드는 사나이가 하나도 없을라구. 걱정말아!

 

네번째

우리 바로 뒤집에 건축공사에서 탑식기중기를 조종하는 총각 하나가 살고있는데 나하고는 유치원3년 소학교6년 모두 9년 동급생이다. 중학시절에도 한학교에 다녔고 또 학년도 줄곧 같았지만 반이 달랐다. 실골목 하나를 사이에 둔 앞뒤집에 벌써 20여년째 이웃해 살고있는데 그 애가 학교에 다닐 때도 말수가 적더니 커서도 역시 마찬가지더라. 소학교 1학년 때인가 2학년 때 무얼 어떻게 잘못했다고 갑자기 주먹으로 내 코를 콱 줴박아서 내가 코피를 흘린 일이 있었는데 그때 우리 엄마한테 호되게 야단을 맞은뒤부터는 다시는 내게다 손찌검을 한 일이 없지 뭐냐. 인제 피차에 다 나이를 먹어서 시집장가 갈 때들이 됐건만 묵은 습관이 졸지에 고쳐지지 않아서 그저 너나들이를 하고 지내는 형편이다. 그런데 나는 종래로 그 애를 동창생으로 친구로 이웃집 아이로는 보았어도 이성으로 본적은 없었다. 이건 무슨 까닭인지 나도 모른다. 나는 그 애가 ...아니 총각이라고 하자, 인제 다 커서 수염이 검실검실한데. 나는 그 총각이 양복을 쪽 빼고 나다니는걸 본적도 없고 또 총각이 어떤 녀자하고 좋아한다는 소문을 들은적도 없다. 몸을 사리지 않고 수긋수긋 남의 일을 도와준다고 이웃에서들 칭찬하는 소리는 여러번 들었다지만서도. 소학교 초급학년때의 일이다. 내가 그 총각을 부를 때 지꿎이

 

<<딱쇠야.>>

 

하고 그 별명을 부르면 그 총각은 도끼눈을 뜨고 나를 노려보며

 

<<짱아 같은게.>>

 

하고 아래입술을 빼물군 했었다. 내 어렸을적 별명이 짱아야. 그 총각이 말수가 적은 대신에 노래를 썩 잘 불러. 기타도 잘 타고. 그 총각네 집 일각문하고 우리 집 뒤창문이 가는 실골목 하나를 사이 두고 마주 났는데 그 총각네 집 좁은 마당끝에 실버들 한 그루가 박혔어. 그 총각이 이따금 그 버드나무밑에 앉아서 기타를 타며 갈린것 같은 바스로 <<뜨로이까>>를 부를 때는 곧 눈앞에 눈덮인 씨비리아의 망망한 평원이 펼쳐지는것만 같지 뭐냐.

 

어느날 아침 내가 출근을 하려고 자전거를 밀고 나와서 올라타는데 덜컥 소리가 나더니만 발걸이가 무엇에 딱 걸린것처럼 옴쭉을 안하는구나. 안날 사촌동생녀석이 와서 타고 돌아다니더니 못쓰게 뜨린 모양 아니야. 사람이 짜증이 나서. 난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몰라서 한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또 한손으로 발걸이를 쥐고 앞으로 뒤로 맹탕 돌려보았다. 한창 애를 쓰는중에 바로 등뒤에서 굵고 낮은 목소리가

 

<<어째, 고장이 났니?>>

 

하고 물어서 고개를 비틀고 돌아보니 그 총각이로구나. 내가 속이 상하는 말투로

 

<<발걸이가 무엇에 걸렸는지 떡 걸려서 생전 돌아가주지를 않으니 어떡하지.>>

 

하고 대답하니 그 총각은 제 자전거를 얼른 세워놓고 와서

 

<<어디 보자.>>

 

하고 대들어서 발걸이를 몇번 앞뒤로 돌려보더니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며

 

<<자전거 꼭 붙들어.>>

 

말을 이르고 곧 한손으로 시꺼먼 기계유투성이의 사슬을 거머쥐잖겠니. 내가 미안해서

 

<<아이 저 손.>>

 

하고 일어나서는데 보니 두손이 다 시꺼멓게 기계유투성이로구나. 내가 급한 말로

 

<<잠간만 기다려, 내 얼른 들아가서 손씻을 물 떠내오께.>>

 

하니까 그 총각은

 

<<그런 념려는 고만두고 어서 네 갈길이나 가라, 시간이 어디있니.>>

 

하고 곧 허리춤에서 때묻은 세수수건을 뽑아내서 어지러운 손을 쓱쓱 닦지 뭐냐. 내가 자전걸을 타고 떠나는데 뒤에서 그 총각이

 

<<어떻니?>>

 

하고 소리쳐 물어서 내가 뒤를 돌아보며

 

<<일 없다.>>

 

마주 소리치니 그 총각은 한번 싱긋 웃고 곧 가서 저의 자전거를 잡아타더라. 그날 오후에 내가 퇴근길에 도서관에 들려서 책 한권을 빌어가지고 집에를 오니 그 총각은 벌써 퇴근해 돌아와서 저의 이웃집 지붕꼭대기에 올라가있지 뭐냐. 내가 지붕을 쳐다보고 웃으며

 

<<거기서 뭐 하니?>>

 

하고 물었더니 그 총각 웃으면서

 

<<이 집에서 지붕이 샌다고 해서 지금 지붕을 고치는중이다.>>

 

하고 대답하는거야. 이웃에서들 칭찬을 할만도 하지.

 

석후에 그 총각이 또 저의 집 버드나무밑에 앉아서 으스름달을 쳐다보고 기타를 타며 갈린듯하면서도 부드러운 <<뜨로이까>>를 부르는데 나는 전에없이 공연히 설음이 북받치는걸 느끼잖았겠니. 무슨 까닭인지 나도 모른다. 아마 매친증이 났던거야. 그럲지만 우리 속담에 이웃집 무당 령하지 않고 먼데 무당이 령하다는 말이 있잖니. 바로 그 조야. 그거나 마찬가지란 말이다. 그때까지 나는 동화에 나오는 왕자같이 멋진 신랑감은 아득한 어느 먼곳에 있는것만 같았지 뭐야. 바로 제 눈앞에 있는 신랑감은 늘 보아도 마당비처럼 심상히 여겼어. 그건 이성으로 보이지 않고 그저 <<사람>>으로 보였어. 저하고는 아무 인연도 상관도 없는 그저 사람으로만 보였단 말이다. 시집갈 나이의 처녀들 치고 어느 누가 환상이 없고 허영이 없겠니. 모르긴 하겠다만 이건 아마 백이면 백이 다 있을거다 정도 문제지. 나도 례외가 아니였어. 나도 겉보기에는 들뜬것 같지 않았지만 기실은 들떴었어. 그날 밤에 그 총각이 부른 <<뜨로이까>>는 사실상 내 운명을 애벌 결정했어. 나는 잠자리에 들어서도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도무지 잠을 이루지 못했지뭐냐. 그 총각의 눈에 띄지 않는 수수한 모습이 자꾸 눈앞에 떠오르는걸 어떡하니. 그 총각은 진실한 남자였어. 소박하고 무던하고 웅숭깊은 남자였어. 정말이야. 악기에 비기면 트럼페트가 아니고 튜바였어. 바이올린이 아니고 콘트라바스였어. 남에게 자기를 드러내보이려고 하지 않는 덕성을 지닌 남자였어. 씀바귀나물같이 씁쓸한 남성미의 소우자였어.

 

이튿날낮에 내가 문화궁전에 볼일이 있어서 갔다오다가 새로짓는 4층 아빠트앞을 지나오는데 거기서 탑식기중기란 놈이 그 긴 팔을 늘여서 육중한 철근콩크리트판을 들어올리고있잖겠니. 내가 혹시나 해서 자저거를 내려서 맞은편 가로수밑에 가 서서 고개를 젗혀들고 쳐다보니 아니나다를가 바로 그 총각이 아니겠니. 조종실 유리창속에서 조종간을 잡고 허공 들린 철근콩크리트판을 내다보느라고 여념이 없이. 한참 걸려서 들어올린것을 내려놓고 또 다음놈을 집으려고 긴 팔을 돌려서 내리다가 비로소 나를 보았지 뭐냐. 내가 쳐다보며 생긋 웃으니까 저도 내려다보고 흰 이발을 드러내보이며 한번 싱긋 웃고 고만이야. 그 총각으로서는 그게 아마 최고의 례절인 모양이지. 그렇지만 나는 스물한발의 례포를 울려주는것만큼이나 마음에 좋았다. 그 순간에 내 일생의 운명은 결정이 난거야. 아주 결정이 났단 말이다. 그 총각은 허공 들린 다음 철근콩크리트판에 정신이 쏠려서 나를 다시 내려다볼 생각을 않더라만 나는 그 총각의 맘을 다 알았어. 그 맘을 속속들이 다 알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다시 자전거에 올라탈 때 내 맘은 온 천하를 얻기라도 한것처럼 흐뭇했지 뭐냐. 너도 흐뭇하다구? 고맙다. 그렇지만 난 은근히 걱정되는 일이 한가지 있다. 무슨 걱정이냐구? 글쎄 너 좀 생각해봐라. 여태까지는 서로 야 자, 이랬니 저랬니 했지마는 시집을 가서도 그러겠니. 그랬다간 시어미한테 당장 쫓겨나라구. 그러니 부득불 말씨를 고치기는 고쳐야겠는데 쑥스러워서 여보 당신 소리를 어떻게 하겠니. 정말 걱정이다. 이럴줄 알았더라면 학교를 나오자마자 곧 이랬소 저랬소를 익혀두었을걸. 넨장. 이번엔 그 총각하고 둘이 찍은 사진은 여기 있다, 봐라 존안이 어떠만 하신가. 실물을 한번 보고싶니? 그럼 내 이제 가서 불러올가, 아주 기타도 갖고 오라고 하자. 일 없어, 내 잠간 갔다올게. 앉았어.

 

-- 1982년 연길

 

김학철전집4-태항산록-짓밟힌 정조

 

소설

짓밟힌 정조

 

1

인식이가 고중 3학년생이 되던 해 여름방학때의 일이다. 시내에서 10여리 떨어진 마을에 사는 고모를 보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소나기를 만났다. 옹이에 마디로 제몸에는 우비가 없고 근처에는 비 그을 곳이 없었다. 두주먹 불끈 쥐고 장달음을 놓는수 밖에 없었다.

 

<<비가 올 때는 뛰나 안 뛰나 비를 맞기는 매일반이다. 뛰는 놈이 멍텅구리다.>>

 

누가 하던 말이 언뜻 귀전을 스쳤으나 인식이는 늦추지 않고 그대로 달았다. 창살 같은 비줄기가 억수로 퍼붓는중에

 

<<여보세요, 여보세요!>>

 

곱고 애된 녀자의 목소리가 급히 부르는것 같았다. 피뜩 뒤돌아보니 나팔꽃모양의 비닐양산을 쓴 녀학생이다.

 

<<어서 들어오세요, 어서 이리 들어오세요!>>

 

몰골이 몹시 보기 딱한 모양이였다. 그러나 인식이는 공연히 주눅이 들어서

 

<<아니, 일 없습니다.>>

 

어망중에 이렇게 한마디를 훌 뿌리고 계속 줄달음질을 쳤다. 마치 자기는 이렇게 노박이로 비를 맞으며 뛰는것이 유일한 취미이고 또 최상의 쾌락이라는것을 그 녀학생에게 보여주기라도 하려는것처럼. 그러나 얼마 안되여 그는 자책이 울컥 치밀어올랐다.

 

(이런 멍청이 같으니!)

 

그러자 입밖으로 말이 새여나왔다.

 

<<같이 쓰구 오면 좀 좋아?>>

 

비는 어느새 그치고 해가 나왔다. 여전히 뜨거운 삼복의 여름해였다. 호졸곤한 옷에서 금시로 김이 나기 시작하였다. 자포자기한 기분이 되여 인식이는 물웅뎅이를 골라 디디지 않고 마구 철벅철벅 건느며 그 친절한 녀학생의 얼굴을 눈앞에 그려보았다. 그러나 고대 본 그 얼굴이 잘 떠올라주지를 않는다.

 

(이쁘긴 분명히 이쁘던데...)

 

하지만 그 이쁜 정도가 어느만큼인지... 서시(西施)급이던지 클레어파트라급이던지... 아니면?...

 

풋내기총각으로서는 무리도 아니였다. 제 가슴팍을 겨눈 총구앞에 서있는자가 그 총의 구경이 6.8밀리인지 7.9밀리인지 알게나 무어랄!

 

(그 처녀가 얼마나 무안했을가. <아니, 일 없습니다>는 다 뭐야. 체!)

 

그리하여 그는 속으로 단단히 결심을 다졌다.

 

(이번에 또 어디서 만나기만 하면... 용감히 나서서 말을 걸어 봐야지.)

 

그러나 여름이 다 가고 가을이 와도, 그 가을이 또 가고 겨울이 들이닥쳐도 그 녀학생은 다시 눈앞에 나타나주지를 않았다. 해가 바뀌여도 이따금 생각이 나다가 봄에 꽃들이 피기 시작할무렵에 와서는 잊어버리는줄도 모르게 아주 잊어버렸다.

 

인식이가 대학생이 되였다. 그런데 어찌 알았으리. 같은 교실안에서 그 소나기 퍼붓던 날 우산을 권하던 녀학생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될줄을! 인식이는 잔뜩 벼르고있다가 하학을 하기가 바쁘게 얼른 그녀한테로 다가갔다.

 

<<오래간만입니다.>>

 

<<누구시던가요?>>

 

녀자는 좀 의아쩍은 눈으로 인식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전혀 기억이 없는 모양이다. 인식이는 게면쩍어서 귀밑이 화끈하였다. 하지만 형편이 그대로 물러서기도 어렵게 되였다.

 

<<저 지난해 여름... 소나기 쏟아질 때...>>

 

<<아, 네. 오래간만이예요!>>

 

비로소 알아보고 반가워하는 그녀의 이름은-나중에 알아보니-조봉숙이라고 하였다.

 

대학 3학년이 되였을 때 리인식이와 조봉숙이는 일생을 같이 지내기로 둘이서만 조용히 언약하였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귀결이였다. 둘이 배우는것은 일어였으니까 졸업을 하면 중학교의 일어교원이 아니면 려행사의 안내원으로 일하게 될것이였다. 그들의 눈앞에서는 황홀한 미래가 연분홍색안개속에서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하고있었다.

 

늦은봄의 일요일, 화창한 날씨였다. 두 사람은 시내 가까이에 있는 나직막한 산에 올라가 가는 봄을 즐기고 또 아끼기로 하였다. 그러나 슬프게도 두 사람의 춘홍은 무참히 깨여질 운명을 지니고있었다. 망나니 세놈이 슬슬 그들의 뒤를 따르고있었던것이다.

 

판결서(발취)

수범 XXX(남, 23세)는 공범자 XXX(남,22세), XXX(남,21세)를 데리고 의식적으로 뒤를 따르다가 으슥진 곳에 이르자 피해자 리XX(남,23세)와 조XX녀,22세)를 불러세워놓고 주먹을 내보이며 꼼짝 말라고 위협한 뒤 범행의 목적으로 미리 준비해 갖고 온 바줄로 리XX을 얽어서 나무에 동여매였다. 그런 연후에 그 보는 앞에서 반항하는 조XX을 세놈이 번갈아들며 야수적으로 륜간하였다.

 

이때부터 리인식, 조봉숙 두 남녀의 세계는 지옥 아닌 지옥으로 변하였다. 그윽한 꽃향기와 꾀꼬리 우는 소리속에 내리쪼이는 봄볕이 항시 따사롭기만 하던 <<무릉도원>>에서 까딱 발을 헛디디여 둘이서만 천길나락속으로 떨어져내려온것이 아닌가싶었다.

 

<<그런 비겁쟁이가 세상에 또 어디 있겠어!>>

 

<<누가 아니래.>>

 

<<세놈이 다 맨주먹이였다잖아?>>

 

<<그러게 말이지.>>

 

<<그런 주제에 련애는 다 뭐야!>>

 

<<흥!>>

 

<<그래 눈깔 펀히 뜨구 그걸 내려다보구 섰어? 체!>>

 

<<그런 개코망신을 하구두 낯짝을 들구 돌아다니니... 사람이 참...>>

 

<<차라리 송편으루 목을 따 죽지.>>

 

<<정말이야.>>

 

<<쉬, 온다!>>

 

<<오면 어때?>>

 

이런 소리가 귀속으로 흘러들어올적마다 인식이는 쥐구멍을 못 찾아 성화가 났었다. 태덩이처럼 대항 한번 변변히 못해보고 곱게 묶이운 자기를 동창생들이 그렇게 타박하고 비웃는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와는 반대로 봉숙이의 경우는-

 

동창생들이 무엇을 번화스레 지껄이다가도 자기가 방안에 들어서기만 하면 갑자기-록음테프가 툭 끊어진것처럼-잠잠해지군 하는것이였다. 그럴 때마다

 

(오, 또 내 말을 하더랬구나!)

 

(나는 인제 아주 돌려났구나!)

 

이런 자격지심이 온몸을 덮싸는것을 봉숙이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된서리 맞은 한포기와 꽃나무처럼 날로 달로 시들어만 갔다. 누가 위로를 해주는것도 다 귀찮았다. 그저 가만히 내버려두어주기만 바랐다.

 

(무슨 기적이 일어나서 세상사람이 다 갑자기 기억력을 상실한다면 얼마나 좋으랴.)

 

인식이와 봉숙이는 피차간 다 한교실에서 공부를 해야 하는것이 고된 운명으로 생각이 들어서 몹시 저주로왔다. 죽기만큼이나 싫었다. 서로 얼굴으 맞대지 않으려고 항시 마음을 써야 하였다. 애를 써야 하였다. 서로 얼굴을 마주칠가봐 겁을 내였다. 어떡허다 눈길이 마주치면 질겁을 하였다. 감전이라도 된것처럼 소스라쳤다.

 

졸업장을 타는 날까지 1년 하고 또 한달을-10년 맞잡이, 11년 만잡이로-질감스럽게 그들은 보내야 하였다.

 

인식이는 남자라서 그렇게까지 비장한 각오는 하지 않았으나 봉숙이는 일자리를 분배할 때 자원하여 누구나 다 가기 싫어하는 편벽한 곳을 골라서 중학교 일어교원으로 가게 되였다. 초야에 묻혀 초목과 더불어 썩기를 기하였던것이다. 인식이는 시내에 떨어져서 역시 일어교원이 되였는데 본인이 싫기도 하고 또 좋기도 하였다. 생활이 편리한 시내에 남게 된것은 좋았으나 아는 얼굴이 너무 많은것이 흠이였던것이다.

 

<<봐라, 저치다.>>

 

<<오, 그러냐.>>

 

하는 뒤손가락질이 무서웠던것이다.

 

열석달 동안의 고통스러운 생활, 늘 얼굴을 마주 대해야 되는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수백리 따로따로 떨어져서 서로 잊고 조용히 살수 있게 된것을 두 사람은 다 다행으로 여겼다. 지지눌리웠떤 어깨가 거뜬해지는것 같아서 안도의 숨이 다 후 나갔다.

 

2

봉숙이의 첫 부임길은 그리 순조롭지가 못하였다. 홍수에 다리가 끊어져서 뻐스가 직행을 못하고 건늘수 없는 다리 이편과 저편에서 이어달리기를 해야 하였다. 다리는 한창 복구작업을 하는중이였으므로 사람은 무릎을 지나오는 물속을 바지가랭이 둥둥 걷어올리고 건너야만 하였다. 봉숙이가 큰 가방 둘을 량손에 갈라들고 내가에 서서 아직 채 맑아지지 않은 내물을 망설이는 마음으로 가늠하고있을 때 한차에 앉아온 거머무트름한 젊은이 하나가 가까이 와서 무뚝뚝한 말씨로

 

<<그 가방 하나 이리 주시오.>>

 

하고 가방 들지 않은쪽 손을 내밀었다. 그가 든 가방은 크기는 해도 하나밖에 없었다.

 

<<아니, 일 없습니다.>>

 

<<비쌔지 말구 어서 이리 주시오. 기회라는 동물은 뒤통수에 털이 없다구요. 한번 놓치면 다시 못 붙든다구요. 괜히 후회하지 말구... 자 어서.>>

 

그 젊은이가 싱글벙글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데 봉숙이는 겨우 차리려던 체면이 저도 모르게 무장해제를 당하였다.

 

<<고맙습니다. 그럼 좀 수고해주십시오.>>

 

<<진작 그럴게지.>>

 

봉숙이는 할수없이 웃었다. 좀 게면쩍은 웃음이였다. 사나이의 수수한 거동이 사교적례절을 무용지물로 만들고있다는것을 몸으로 느꼈다.

 

물을 건너서 마중나온 뻐스에 자리잡아앉은 수선이 끝난 뒤에 사나이가 비로소 물었다.

 

<<어디를 가십니까? 초행이지요?>>

 

봉숙이가 가는 곳을 말한즉

 

<<아, 그럼? ...일어선생? ...>>

 

하고 사나이는 흰자위 많은 눈을 크게 떴다.

 

<<아니 그걸... 어떻게 아세요?>>

 

<<들었습니다 교무주임선생님한테서. 나두 그 학교에서 력사를 맡구있는걸요.>>

 

<<그렇습니까, 그러세요?>>

 

<<나 문대성이라구 합니다.>>

 

새삼스럽게 뒤늦게 쑥스럽게 통성명을 하였다.

 

<<저 조봉숙이예요.>>

 

뻐스가 떠났다. 차차 속력을 내기 시작하였다. 차창밖에서는 여름풀, 여름곡식들이 아우성을 지르며 자라고있었다.

 

교무주임의 알선으로 봉숙이가 하숙을 잡은 뒤에 알아보니 력사를 맡고있다는 문대성도 하숙생활을 하고있는 총각선생이였다. 두 하숙집은 상거가 한마장 푼한데 봉숙이의 출근길은 그 총각선생이 들어있는 하숙집옆을 지나게 되여있었다. 어느 일요일날 아침의 일이다. 봉숙이가 일직을 서려고 학교를 나가는데 총각선생이 열려있는 방문으로 내다보고(울타리가 낮아서 지나다니는 사람이 어린아이나 난쟁이만 아니면 다 보였다.)

 

<<조선생, 조선생!>>

 

큰소리로 불렀다.

 

<<무슨 일이세요?>>

 

봉숙이가 발을 멈추고 울타리너머로 총각선생을 바라보았다.

 

<<잠간 들어와 이것 좀 도와주십시오.>>

 

<<무언데요?>>

 

<<넥타이, 넥타이!>>

 

봉숙이가 들어가보니 총각선생은 몸에 잘 어울리지 않는 세비로를 입고 거울을 들여다보며 넥타이를 매는데 그것이 제대로 매지지 않아서 매삼치는중이였다.

 

<<갑자기 웬 일이세요?>>

 

<<양복을 얻어입구 둘러리를 서러 가야겠는데... 글쎄 이놈의 넥타이가 생전 어디 말을 들어줘야 말이지요. 사람 애먹습니다. 조선생 좀 도와주십시오.>>

 

<<면도두 안하시구요?>>

 

<<오 참 그렇지, 이놈의 넥타이때문에 가장 중요한걸 잊었군. 넨장!>>

 

총각선생 문대성이 꾸밈없는 소박한 사람이라는것을 몇번 접촉해보는 동안에 봉숙이는 잘 알았다. 그러나 그저 그뿐이였다. 일생을 독신으로 살 각오를 한 봉숙이에게는 다 꿈에 본 돈이였다. 아무 소용 없는 일이였다. 봉숙이는 모든 잡념 다 떨어버리고 후대들 육성에 있는 정열을 다 기울이리라 마음 먹었다. 그리하여 첫 한 학기가 다 끝나기전에 벌써 좋은 평판이 조선생을 따라다녔다. 봉숙이는 사는 보람을 느꼈다. 번뇌를 날려버리니 마음도 편해졌다.

 

그러나 수백리 떨어진 곳에 있는 인식이는 그렇게 쉽사리 번뇌를 날려버리지 못하였다. 마음도 따라서 편할리 없었다. 인식이가 보내는 나날은 반성의 나날이고 자책의 나날이였다. 도덕적책임을 지지 않는 빚쟁이의 나날이였다..

 

인식이의 외삼촌은 명망있는 교육가였다.

 

<<그때 목숨을 걸구라두 보호를 했어야 할건데... 그렇게 못했거든. 기왕 그리된바에는 그 후과에 대해서나 철저히 책임을 져야 할것인데... 그것두 또 기피를 해? 그럼 그게 대관절 도덕적으루 어떻게 되니? 한번 잘 생각해봐라.>>

 

외삼촌이 이렇게 문제를 엄숙히 제기하는데 인식이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나무에 묶이워 서서 보아야 하였던, 바로 눈앞에서 벌어졌던 그 끔직스러운 광경이 자꾸 머리속에 생생히 떠올라서 인식이는 그 생각만 하면 진저리가 났다.

 

(그런 녀자를 내 안해로 맞아? 오오 안될 말!)

 

정말 도저히 안될 말이였다!

 

<<그건 부정이 아니거든. 행실이 부정한게 아니거든. 불가항력적인거거든. 어째, 그래두 맘이 돌아서잖니?>>

 

<<그렇지만 아저씨...>>

 

<<알만하다, 네 그 옹졸한 결백. 자사자리한 결백.>>

 

<<아저씨!>>

 

<<내 하나 이야기할게... 참고루 들어봐.>>

 

1936년, 영국 런던 버킹엄궁전에서는 국왕 에드워드8세를 둘러싸고 온 세상이 들썩들썩하는 대사건이 벌어졌다. 에드워드8세는 42살 먹은 총각국왕이였다. 왕후를 책봉하는 일이 나라의 대사로 되여있는 마당에 장가를 들어야 할 당자인 국왕이 딴전을 부린것이다. 리혼을 두번씩이나 한 과부-미국녀자 심프슨부인을 왕후로 맞겠다는것이다. 모후(母后)가 크게 놀라 아들-국왕을 불러들여 따지였다.

 

<<너두 우리 황실의 전례(典礼)를 모르지는 않을테지? 대영제국의 지존인 영국국왕이 왕후를 간택하는데 리혼을 두세번씩이나 한 평민의 과부를 골라? 더구나 리혼한 전남편들이 눈이 시퍼렇게 살구있어! 선박업자 심프슨, 그 심프슨이 살기 싫다구 내버린 녀자를 이 나라의 국왕인 네가 얼른 주어가져? 그래 영국국민이 그걸 받아들일줄 아느냐? 련합왕국의 존엄한 국회가 그런 모욕을 잠자쿠 받아들일줄 아느냐? 총리대신과 내각의 각료들은 다 입이 없는줄 아느냐? 이 큰 나라 수천만 인구의 숙덕이 어질구 자색이 아름다운 규수는 얼마든지 있을텐데 홰 하필이면 그런 부덕 없는 과부를 고른단 말이야? 리혼을 두번씩 세번씩 식은 죽 먹기루 하는... 네가 지금 정신이 온전하냐? 어디 말 좀 해봐라!>>

 

<<그렇지만 어머님, 저는 그 녀자가 꼭 맘에 드니 어떡헙니까? 숙덕이구 자색이구 지체구 문벌이구... 저는 다 귀찮습니다. 제 맘에 드는 녀자하구 같이 살겠다는데... 국법은 다 무어구 전례는 다 무업니까. 한 나라의 국왕이 고만한 자유두 없다면 그게 어디 말이 됩니까?>>

 

<<국왕의 체통두 돌보잖구... 네가 지금 열두살 먹은 아이냐? 되지두 않을 소리!>>

 

<<그래두 저는... 어머님 말씀을... 이것만은 순종할수가 없습니다!>>

 

어머니 왕태후와 아들 국왕 사이에 한창 설전이 불꽃을 튕기고있을 때 시종관이 황망히 들어와 아뢴다.

 

<<상원의장, 하원의장, 내각총리대신 그리구 대법원장이 알현을 청하오이다.>>

 

사태는 더없이 엄중해졌다. 원로대신들이 련합하여 결판을 내러 들어온것이다

 

두 의장, 한 원장에 수상, 왕태후까지 합세를 해놓으니 국왕 에드워드8세는 5대1의 렬세로 악전고투를 하지 않을수 없게 되였다.

 

<<여러분이 무어라구 해두 난 꼭 그 녀자를 왕후로 책봉할거니까 그리들 아시오.>>

 

<<부덕이 땅을 쓴 평민의 과부를 우리더러 국모(国母)루 모시란 말씀이오니까 전하? 황차 전남편이 두셋씩이나 살아있는데!>>

 

<<아니될 말씀이외다 전하! 존엄한 영국왕실에는 그런 전례가 력대전으루 없었소이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아니될 말씀이외다 전하!>>

 

<<국왕의 존엄을 돌보시와 그런 도리에 어긋난 타산은 얼른 도루 거두소서 전하!>>

 

<<련합왕국의 5천만 신민은 그런 목욕을 절대루 받아들일리 만무하온즉 전하께옵서 통찰하소서.>>

 

담벼락하고 맞서는거나 마찬가지였다. 당초에 어림도 없었다. 보수성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의 하나인 영국이였다. 닭알로 돌을 치라지! 헌 과부를 주어다가 국모의 성스러운 자리에 올려앉히겟다구?

 

(저 국왕이 잠이 덜 깨서 잠꼬대를 하잖나?)

 

코웃음을 칠노릇이였다. 차라리 국왕을 정신병원에 갖다 가두면 가두었지 헌 과부를 국모로 모시지는 죽어두 않을 영국국회, 영국내각, 영국국민이였다.

 

로총각국왕 에드워드8세는 마침내

 

<<영국이냐, 심프슨이냐?>>

 

바꾸어말하면

 

<<국왕이냐? 과부냐?>>

 

하는 량자택일의 갈림길목에 서게 되였다.

 

전세계의 이목이 버킹엄궁전에 집중되는 가운데 국왕 에드워드8세가 마침내 마이크앞에 다가섰다. 다음 순간, 손에 땀을 쥐고 군침을 삼키며 기다리던 수천만 사람들의 귀청을 때린것은-

 

<<...퇴위를 선언한다...>>

 

미증유의 초특급해일이 섬나라 영국을 들이덮치기라도 한것처럼 도처에서 일대 소동이 일어났다...

 

왕위를 아우(현재의 영국녀왕 엘리자베스2세의 아버지)에게 물려주고 퇴위한 에드워드8세-원저공(公)은 그날 밤으로 영국을 떠나 프랑스로 건너갔다. 그는 심프슨부인과 결혼한 뒤 36년동안 영국땅을 밟지 않다가 1972년에 병이 중해지자 영국에 돌아와서 죽었다. 원저부인(즉 말썽거리의 심프슨부인)은 그 조카딸이 되는 엘리자베스2세가 버킹엄궁전에 데려가서 지금 거기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있다.

 

<<어떠냐 인식아, 나는 너더러 사랑을 위해서 나라르 버리라구 이런 이야기를 해들리는건 아니다. 알았니? 제국주의나라 국왕의 본을 따라구 이런 이야기를 해들리는게 아니란 말이다. <사랑이여/ 그대를 위해서라면/ 내 이 목숨마저 바치리/ 하지만 사랑이여/ 자유를 위해서라면/ 내 그대마저 바치리>... 웽그리아의 애국시인 뻬되피의 이 시... 너두 알구있겠지? 내 본의는 다만 녀자의 정조라는걸 어떻게 보겠는가, 어떻게 대하겠는가... 참고루 삼구... 한번 심사숙고해보란 뜻... 그것뿐이다. 알겠니?>>

 

3

교무실에서 선생들이 제각기 제 볼일을 보고있을 때 력사선생 문대성이 보던 책을 펼친채로 들고 일어나더니 어간에 늘어앉은 선생들을 서넛 지나서 일어선생 조봉숙에게로 다가왔다.

 

<<조선생,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건 조선생의 실력을 떠보는게 아니구 정말 몰라서 가르침을 받자는거니까... 그리 알구 좀 가르쳐주십시오.>>

 

이렇게 큰소리로 머리말부터 앞세우니 동료선생들이 듣고 모두 킥킥 웃었다.

 

<<이제 보니 문선생두 모르는게 있구먼!>>

 

<<그럼 나를 과학원 원장으루 알았어?>>

 

웃으며 한마디 만수받이한 뒤 문대성은 봉숙이 눈앞에다 들고온 책을 펼친채로 내려놓았다.

 

<<도무지 알수가 있어야지. 요거 말이요. 요거...>>

 

<<제가 뭘 알아야지요.>>

 

<<겸사는 생략하시구... 자.>>

 

봉숙이가 책뚜껑을 한번 번드쳐보니 그것은 미국학자가 지은 력사사전을 한문으로 번역출판한것이였다.

 

<<대관절 이 <애다파고호(埃多巴库呼)>란게 무슨 뜻입니까? 애급말인지 페르샤말인지... 나중엔 별눔의 글이 다 많지!>>

 

봉숙이가 문맥을 더듬어보니 그것은 일어를 영어로 음역한것을 다시 한어로 음역한것이였다.

 

<<이건 일본말을 한문자루 음역한거예요. <에도바꾸후(江户幕府)>란 말이예요. <에도>는 지금의 도꾜, <바꾸후>는 군정부.>>

 

<<야, 문선생이 월사금을 바칠 일이 났군!>>

 

<<아닌게아니라 월사금을 바쳐야겠는걸.>>

 

이렇게 지껄이며 문대성은 한손으로는 책을 집어들고 또 한손으로는 뒤통수를 긁직거리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럭저럭 날자가 지나서 첫눈이 내렸는데 희한하게도 첫눈이 라는게 무릎까지 빠지리만큼 무더기로 내렸었다. 꿩들이 먹이를 찾아서 분분히 인가근처로 날아내려왔다. 초겨울 눈란리속에 봉숙이 마음의 상처에도 딱지가 앉았다. 문대성은 노루가 눈에 빠져서 헤여나지 못한다고 굵직굵직한 학생아이 네댓과 함께 설피들을 차려신고 노루사냥을 떠났다. 눈우를 따라다니느데는 스키가 더 좋기는 좋겠지만 그럴 계제가 못되므로 손쉬운 설피로 만족들 한것이다. 전교 선생들중에 력사선생-문선생이 학생들에게 제일 인기가 있다는것은 자타가 다 인정하는바였다. 사람이 워낙 소탈하여 누구나 사귀기가 좋아서 아이들이 잘 따르는데다가 수업시간에 구수한 력사이야기를 재미나게 잘하는 까닭에 력사시간에는 하학종이 나도 아이들이 선생을 놓아주지 않고

 

<<조끔만 더, 조끔만 더.>>

 

시간을 끌기가 일쑤였다.

 

문대성은 아이들을 동독하여 데리고 떠나면서 적어도 서너마리는 꼭 잡아온다고 속으로 뼈물었다. 그러나 다 저녁때 사제 다섯 사람이 기진맥진하여 돌아온것을 보니 그리 크지도 못한 노루가 단 한마디도 못되고 겨우 한마리의 3분의 2정도였다. 저녁때 돌아오면 노루추렴을 하자고 미리 일러둔 까닭에 봉숙이도 문선생네 하숙집에 와서 에프론을 두르고 주인집을 도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있었다.

 

<<아니 이게 웬 일이세요! 노루가 겨우?...>>

 

봉숙이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문대성을 바라보니 노루 쫓기에 너무 지쳐서 떠날 때보다 열살이나 겉늙어보이는 문대성은 크게 바라고 정식으로 에프론까지 두른 녀선생을 대할 면목이 없는 모양으로

 

<<생각밖에 그놈의 노루들이... 거참...>>

 

구렝이 담 넘어가는 소리를 얼버무렸다. 옆에 섰던 제일 어려보이는, 그러나 제일 똑똑해보이는 학생아이가 한발자국 앞으로 나서서 말곁을 달아 선생을 거들어주었다.

 

<<노루는 한마리두 못 잡았어요. 그놈들이 어찌나 빠른지... 저건 승냥이가 뜯어먹는걸 빼앗아온거예요. 승냥이를 쫓아버리구...>>

 

이 말을 듣고 아이들이 모두 킥킥 웃으니 문선생도 할수없이 허허 따라웃었다. 봉숙이는 그 불행한 사고가 있은지 1년 반만에 이날 처음으로

 

<<오호호호!...>>

 

속에서 우려나오는 명랑한 웃음을 웃어보았다.

 

<<아이 선생님두 참!... 오호호호!...>>

 

승냥이아가리에 든 밥을 빼앗은것이기는 해도 이날 밤 노루추렴은 여간 유쾌하지가 않았다.

 

<<그놈의 승냥이 약이 올랐을거야.>>

 

<<아쉬워서 자꾸 뒤를 돌아보잖던.>>

 

<<발이 차마 안 떨어졌을게야.>>

 

<<이를 갈았을게다 분해서...>>

 

이런 웃음의 소리속에 강권에 못이겨 봉숙이도 포도주 두잔을 받아마시고 멀굴이 온통 발개졌다.

 

밤늦게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워서 봉숙이는 혼자 미소를 머금었다.

 

(문선생이 영웅인물은 아니야. 그렇지만 질박한 넋을 지닌 사람... 정직한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어.)

 

문대성이 현교육과에 볼일이 있어 올라갔다가 교육국내에서 내려온 옛친구-동창생 하나를 만나서 둘이 함께 식당에 가 점심을 먹었다.

 

<<너네 학교에 녀선생 하나가 갔지?>>

 

<<어느? ...>>

 

<<일어선생 말이야.>>

 

<<아, 왔어.>>

 

<<조... 뭐라더라?>>

 

<<봉숙... 조봉숙.>>

 

<<응 그래 조봉숙. 그 녀자 래력 너 아니?>>

 

(무슨 래력인데?)

 

하는 눈치로 문대성은 그 친구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너 정말 모르니?>>

 

문대성이 정말 모른다는 뜻으로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네가 아직두 총각위원회 성원이니까 내 말해주는거다. 어디가 말 내지 말아 괜히. -너 혼자 참고루만 삼으란 말이야.>>

 

이와 같이 허두를 떼여놓고 그 친구는 귀속말로 소곤소곤 조봉숙의 그 사건을 죄다 이야기해 들려주었다.

 

문대성은 씁씁한 얼굴로 친구의 이야기를 끝까지 다 들었다. 그러나 아무러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러한 의사표시도 하지 않았다. 검다 희다 말이 없었다. 친구는 주먹으로 봄바람을 친것 같아서 좀 맥살이 나는 모양이였다. 기대가 어그러진것이다. 그는 문대성이 의례 눈을 번득이며

 

<<응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니?...>>

 

하고 대단히 흥미를 가질줄 알았던것이다.

 

<<말귀때기에다 대구 념불을 하잖았니 내가?>>

 

하고 그는 문대성의 어깨를 한번 탁 치고 웃으며 일어났다.

 

<<언제 떠나니?>>

 

문대성도 따라 일어났다.

 

<<래일새벽... 첫차루.>>

 

<<꽤 바쁜 모양이구나?>>

 

<<그럼 안 바빠? 인제 과장나리신데!>>

 

<<이 자식!>>

 

두 친구는 서로 웃고 손을 나누었다.

 

이무렵 리인식이는 외삼촌과 단둘이 마주앉아 끝나지 않은 사연을 잇고있었다.

 

<<어떠냐. 그동안 좀 생각해봤니?>>

 

<<글쎄요.>>

 

<<아직두 해탈을 못한 모양이구나? 낡은 관념에서...>>

 

인식이는 말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좋다 그럼. 내 또 하나 책에서 본 이야기를 할게 들어봐라. 소귀에 경읽기가 되겠는지는 모르겠다만.>>

 

인식이는 얼굴을 들고 외삼촌의 입을 바라보았다.

 

1702년, 로씨야군대와 스웨리예군대가 네바강을 사이에 두고 일대 격전을 벌린 끝에 사상자를 숱하게 내기는 하였으나 결국 로씨야군대가 승리하였다. 당시의 짜리는 저 유명한 뾰뜨르대제였고 그리고 전역을 지휘한것은 년로한 대원수 히리미티예브였다. 그 전역에서 사로잡은 숱한 스웨리예포로들가운데는 그냥 백성도 있고 또 적잖은 수의 녀자도 있었다. 그중의 한 젊은 녀자를 룡기병 소대장 디밍소위가 점유하였다. 디밍은 치중마차밑에다 짚부스레기를 깔고 그 녀자를 앉혀놓았다. 그리고 제 어지러운 외투를 벗어서 그 오돌오돌 떨고있는 녀자에게 덮씨워주었다. 그러나 결국 그 녀자는 어수선한 전장을 순시하던 히리미티예브대원수의 눈에 띄운다. 가련한 녀자의 아름다운 용모에 늙은 마음이 크게 뒤흔들린 대원수는 오매불망 그 녀자포로를 잊을수 없어서... 렴치를 무릅쓰고 부관을 불렀다.

 

<<가 데려오게... 룡기병 소대장 디밍이라던가. 그자한테 가서... 데려오게. 치중마차밑에다 숨겨놓은 그 계집을... 데려오란 말일세. 그 무지막지한 녀석들 손에서 연약한 계집이 죽기라두 하면 가엾잖은가. 옜네, 이 한루블... 내가 보내더라구 가 말하게. 알겠나?>>

 

<<틀림없이 명령을 집행하겠습니다 대원수각하!>>

 

부관은 득돌같이 달려나가 명령을 집행하였다. 불과 반시간후에 그 불쌍한 녀자는 부관을 따라 히리미티예브대원수의 거실에 들어와 꿇어앉아서 머리를 조아렸다. 녀자의 헝클어진 머리에는 지푸래기가 달라붙어있었다. 부관은 한번 싱긋 웃고 슬그머니 물러났다. 히리미트예브는 황홀한 눈으로 그 어여쁘기짝이 없는 녀자를 이모저모로 뜯어보다가 독일말로 물었다.

 

<<네 이름은?>>

 

녀자는 가볍게 한숨을 한번 짓고나서 은방울 같은 목소리로 대답을 올렸다.

 

<<에리나 까또리나라구 해요. 사령관님.>>

 

<<까또리나, 음 그 이름 참 좋구나. 그래 너의 아버지는?>>

 

<<저는 고아예요. 부모가 없에요. 목사님댁에서 안잠자기를 했에요. 식모살이를 했에요.>>

 

<<안잠자기? 거 마침 잘됐다. 그래 너 빨래랑 다릴줄 아니?>>

 

<<그러면이요. 집안살림은 무어나 다 막히는게 없에요. 애기두 볼줄 아는걸요.>>

 

<<오. 그래? 내가 마침 그런 안잠지기를 하나 구하는중이다 지금. 그런데 너 아직... 결혼은 안했겠지?>>

 

까또리나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고 고개를 더욱더 깊이 수그렸다.

 

<<바루 요 한주일전에... 시집을 갔에요.>>

 

<<응! 누구한테?>>

 

<<죤 라이비라는-스웨리예의 장갑기병한테요.>>

 

<<그 죤 라이비가... 지금 어디 있니?>>

 

<<도망쳤네요. 라도가호를 헤염쳐 건너가는걸... 제 이 눈으로 봤에요. 사령관님.>>

 

<<일 없다, 까또리나. 너 아직 새파랗게 젊은데... 또 하나 얻으면되지. 그래 너 배는 고피지 않으냐?>>

 

<<왜 안 고프겠에요. 사령관님. 배가 고파 곧 죽을 지경인걸요.>>

 

<<오 그럼, 우선 요기부터 해야기. -게 누구 없느냐?>>

 

이리하여 스웨리예 장갑기병 죤 라이비의 갓 혼인한 안해 에리나 까또리나는 일단 로씨야 룡기병 소대장 디밍의 소유물로 되였다가 거기서 다시 높직이 뛰여올라 히리미티예브대원수의 하녀겸 애첩으로 되였다. 그러나 거기가 근의 종점은 아니였다. 주책없는 늙은이-대원수가 너무 좋은김에 멘쉬꼬브를 보고 자랑을 한데서 일이 잘못된것이다. 멘쉬꼬브는 뾰뜨르의 가장 신임하는 시종으로서 군함은 소장에 불과하였으나 세력이 충전하여 아무도 감히 맞서지를 못하는 형편이였다.

 

<<한루블을 주구 룡기병한테서 사왔는데... 기가 딱 막히다니까... 인제 만루블에 누가 팔래두 난 안 팔아, 안 팔잖구! 활발하구 유쾌하구... 글쎄 곧 불덩이라니까, 불덩이! 그런 기집은 천명 가운데서 하나를 고르재두 아마 좀 어려울걸!>>

 

늙은이의 자랑바람에 구미가 크게 동한 멘쉬꼬브가 이튿날 히리미티예브 그 저택으로 찾아갔다. 술들이 거나해진 뒤에 멘쉬꼬브가 청하였다.

 

<<어디 한번 좀 구경이나 합시다.>>

 

<<지금 집에 없어. 어디 볼일 보러 나가구... 집에 없다니까.>>

 

<<정말 이러기요? 괜히 그러지 말구... 썩 불러내우! 아 좀 보기만 하잖데두 그러우? 그 령감 거참!>>

 

주책없이 자랑을 한 죄로 늙은이는 아무도 보이고싶지 않은 사랑하는 까또리나를 불러내오지 않을수 없게 되였다. 멘쉬꼬브는 히리미티예브보다 나이가 근 30살이나 아래다. 앞으로 나와서 한무릎 꿇어 절하고 술을 따라올리는 까또리나를 젊은 멘쉬꼬브는 넋놓고 바라보다가 옛날의 례법이라고 하면서-녀자의 입을 한번 쪽 맞추었다. 히리미티예브는 골이 잔뜩 나서 도끼눈을 하고 멘쉬꼬브를 노려보았으나 어찌하랴!

 

<<령감, 저 녀자를 내게 양도하시오. 우리 집을 송두리채 달라셔두 내 다 내주리다. 내 마지막 속옷까지두 벗어내라면 내 다 벗어주리오리다. 령감이 저런 녀자를 어떻게 거느린다구 그러시우? 그 년세에... 되지두 않을 소리! 더구나 령감은 처자가 있지 않으시우. 처자식 보기가 미안한 일을 구태여 하실건 뭐요. 그러구 만약 이 소문이 페하께 청문이라두 되는 날이면... 불벼락이 떨어질걸 왜 모르신단 말씀이요.>>

 

이러한 얼렁수를 써서 멘쉬꼬브는 종내 그 녀자를 빼앗아가고야말았다. 히리미티예브가 눈물코물을 흘리며 비탄에 잠긴것은 더말할것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멘쉬꼬브의 화려한 저택도 종착역은 아니였다. 에리나 까도리나를 또 하나의 운명이 기다리고있는것이다. 종착역까지는 한 정거장을 더 가야 하였던것이다. 빼앗아온 녀자에게 홀딱 반한 나머지에 멘쉬꼬브가 아차실수로 히리미티예브의 복철을 밟은것이다. 짜리 뾰뜨르가 듣는데서 새로 얻은 종첩-까또리나의 자랑을 늘어놓았던것이다.

 

어느 눈보라가 기승을 부리는 밤에 짜리 뾰뜨르의 로부(卤簿)가 멘쉬꼬브네 집에 들아닥쳤다. 뾰뜨르는 객실에서 멘쉬꼬브와 마주앉아 술을 마시고 또 담배를 피우다가 문득 생각난것처럼 입을 열었다.

 

<<네 그 까도리나를 좀 불러라. 어디 보자... 어떤가?>>

 

<<부끄럼을 너무 타서... 나오지를 못합니다 페하. 귀밑머리 풀어준 남편처럼 저를 섬기는걸요. 내외가 뭐 여간 심하지 않답니다.>>

 

<<그럴것 같으면 어째 정식으로 결혼할 생각을 안하느냐?>>

 

<<하지만... 그게 어디 될 일입니까 페하?>>

 

<<어째서?>>

 

<<포로해온 계집종하구 어떻게 그럴수가 있습니까? 그런걸 정실루 들여앉혔다간... 제 꼴이 뭐가 되겠습니까. 그런 개코망신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제야 의당 왕족이나 귀족하구 혼인을 해얍지요, 버젓하게... 그래야 제 미천한 근본두 좀 가리워지지 않겠습니까.>>

 

멘쉬꼬브는 본래 만두를 목판에 담아메고 온 거리를 팔러 다니던 아이였다. 그런것을 어린 놈이 소명하다고 뾰뜨르가 주어다 길러내였었다.

 

<<응 그래. 그래서 정식으루 혼인을 할수 없단 말이구나.>>

 

<<그러면입쇼.>>

 

창밖에서는 눈보라가 점점 더 기승을 부리는듯 집이 다 울리였다. 멘쉬꼬브가 어두운 창밖을 한번 가 내다보고 제자리에 돌아와 앉으며 혼자말로 지껄였다.

 

<<눈보라가 심하긴 해두... 페하께서 환궁하시는데는 별 지장이 없을겁니다.>>

 

<<환궁? 누가 돌아간다더냐? 잔말 말구 냉큼 가서 데려오기나 해... 까또리나. 말은 네가 먼저 냈어, 내가 낸게 아니야!>>

 

멘쉬꼬브의 얼굴은 백지장같이 해쓱해졌다.

 

(사랑하는 까도리나!)

 

그러나 짜리의 어명이 일단 떨어진 이상 아니 데려오지는 못하였다. 이윽고 멘쉬꼬브를 따라들어온 까또리나의 큰절을 받은 뾰뜨르는 한동안 유심히 그 아래우를 훑어보다가

 

<<거기 앉거라, 까또리나.>>

 

우악(优渥)하게 자리를 주었다. 이어 뾰뜨르는 이것저것 말을 둘어보았다. 까또리나가 서투른 로씨야말로 대답하는것을 듣다가 뾰뜨르는 기분이 좋아서 오래간만에-실로 오래간만에-통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뾰뜨르는 어떤 녀자와의 문제가 뜻 같지 못하여 심히 불통쾌한 나날을 보내고있던중이였다.

 

멘쉬꼬브가 앞으로 나와서 술 석잔을 따랐다. 한잔을 뾰뜨르앞에 또 한잔을 까또리나앞에 놓았다. 그리고 서번째 잔을 제가 들었다. 세 사람은 일시에 잔들을 말리였다.

 

이윽고 뾰뜨르가 기지개를 한번 켜고나서 까또리나에게 분부하였다.

 

<<아이 고단하다. 까또리나, 네가 촉대를 들구 안내해라. 침실이 어디냐?>>

 

이리하여 포로되여온 녀종 에리나 까또리나는 마침내 짜리 뾰뜨르의 건즐(巾栉)을 받들게 되였다.

 

후에 뾰뜨르는 까또리나를 정식으로 황후로 삼았다. 뾰뜨르가 붕어한 뒤에 에리나 까또리나는 로씨야 력사상 파천황 처음으로 녀황이 되였다. 예까쩨리나1세가 곧 그녀인데 등극하는 해 그녀의 나이 마흔한살이였다.

 

<<이상으루 내 이야기는 끝났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건 너더러 남의 녀자를 빼앗으라구 하는게 아니다. 그런 비도덕적행위는 우리 사회주의사회에서는 절대루 용인되지 않는다. 내가 말하려는것은 녀자의 정조란걸 어떻게 리해하느냐 하는거다. 사회주의시대에 사는 우리가 봉건제왕보다두 더옹졸한 정조관을 갖구 있다면... 이게 그래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구 무어냐. 부정한 행실이란 배우자가 있는 녀자가 배신적으루 딴짓을 하는걸 말하는게야. 알았니? 잘 생각해봐. 넌 지금 도덕적으루 빚을 지구있어.>>

 

인식이는 팔짱을 지르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나 간다.>>

 

한마디를 던지고 외삼촌이 일어나 나가는데도 인식이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괴괴한방안에서는 탁상시계 가는 소리만 유난히 높아가는것 같았다.

 

4

교무주임이 워낙 남의 일에 발벗고 나서기를 좋아하는 호호인이라 또 일거리 하나를 만들어가지고-과거보러 가다가 홍합을 꺼내본 선비처럼-혼자 싱글벙글하였다. 총각선생과 처녀선생을 짝을 지어주려고 자진하여 중매군노릇을 담당해나섰는데

 

<<두고보지 내 솜씨가 어떠만한가.>>

 

자신이 있었던것이다.

 

<<중매는 잘하면 술이 석잔이구 못하면 뺨이 세개라는데... 당신은 그저 밤낮!>>

 

안해의 잔소리하는 입을 그는

 

<<여보, 암탉이 울어서 잘되는 집안... 당신 언제 보았소? 하필이면 강청이를 본받을게 무어요!>>

 

엉너리를 쳐서 틀어막고 력사선생 문대성의 그 하숙집으로 찾아갔다.

 

<<여보 문선생, 언제까지나 이렇게 홑껍데기루 살 작정이요?>>

 

<<무슨 좋은 수라두 있습니까?>>

 

<<암 있다마다! 내가 그래 아무 구멍수두 없이 이렇게 말을 건넬 사람인가.>>

 

<<그거 참 듣던중 반가운 소립니다.>>

 

<<이봐요 문선생.>>

 

하고 교무주임은-아무도 엿듣는 사람이 없는데도-입을 총각선생의 귀에 가까이 갖다대고

 

<<새로 온 녀선생... 조선생... 어때?>>

 

귀속말로 소곤거리고 의미있게 눈을 슴벅였다. 문대성은 별반 갑작스럽다는 기색도 없이 고개를 비틀고 한동안 생각해보더니 교무주임을 쳐다보지 않고 혼자말처럼 지껄이는것이였다.

 

<<글세요, 저쪽에서 어떨는지요. 이쪽에선 별다른 의견이 없지만서두...>>

 

(일이 이렇게 수월스러울수가 있나!)

 

아주 거저 먹기 흥정이였다.

 

<<념려 말아, 념려 말아. 그걸랑 조금두 념려 말라니까.>>

 

교무주임은 일이 예상외로 순리로운데 사기가 올라서 제 가슴을 탁탁 쳐보였다. 마치 그 가슴속에 제갈량의 <<금낭묘계>>가 들어있기라도 한것처럼.

 

녀선생은 남녀학생 네댓을 데리고 좁은 방에 비좁게 둘러앉아 록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일본말에 귀들을 기울이느라고 방문밖에서 교무주임이 일부러 내는 기침소리도 듣지를 못하였다.

 

<<...창밖에서 봄비가 소리없이 내립니다. 길건너 빌딩앞에는 승용차들이 숱하게 멎어서있습니다. ...>>

 

<<아하 과외수업이 한창이구먼. 조선생. 그럼 내 좀 있다 다시 오지.>>

 

<<아니, 비좁지만 선생님... 어서 이리 들어오세요.>>

 

<<그럼 선생님, 우리 이만 돌아가보겠습니다.>>

 

<<그래그래...>>

 

<<선생님, 안녕히 주무십시오.>>

 

<<안녕히 주무십시오.>>

 

<<잘들 가요.>>

 

학생들이 부지런히 일어나 나간 뒤에 녀선생이 록음기를 끄고 자기앞에 와 모꺾어 앉기를 기다려서 교무주임은 가치담배 한대를 붙여물고 천천히 말을 꺼내였다.

 

<<...내가 두구 지내봐서 잘 알지만... 전도가 유망한 청년이지. 소탈하구 듬직하구... 미더운 사람이라니까. 어떻소, 조선생? 저편에선-내 벌써 타진을 하구 왔는데-yes요 yes. -설마한들 처녀선생이 이 추운 밤에 나를 헛걸음시키진 않겠지?>>

 

고개 푹 수그린 처녀선생의 얼굴에 피가 올리밀리는것을 관찰력이 좀 무딘편인 교무주임은 례사롭게 보았다.

 

(안 저러면 도리여 괴변이지... 처녀가!)

 

20세기의 <<정조대>>를 차고있는 봉숙이는 속내 모르는 교무주임선생의 호의가 거북하고 민망하고 속절없었다. 11세기말에 십자군 기사들은 아시아로 원정할 때, 그 안해가 남편이 없는 동안 정조를 단단히 지키라고, 쇠로 만든 정조대를 그 음부에 채워주고 그리고 열쇠는 자기가 갖고 떠나갔었다. 그러나 봉숙이가 차고있는것은 무형의 정조대, 관념적인 정조대, 전통적편건의 정조대였다. 하지만 결과로 보아서는 900년전의 그 쇠로 만든 정조대나 별반 다를것이 없는 정조재였다. 숱한 십자군 기사들은 전장에서 열쇠를 품에 지닌채 죽어갔다.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뒤에 남은 안해들은 죽을 때까지 그 쇠로 만든, 열쇠 없어진 정조대를 차고 살아야 하였다. 봉숙이도 지금 그 꼴이였다.

 

<<아, 눈언저리에 잔주름살이 가기 시작한 로처녀가 부끄럼을 탈건 뭐야, 햇내기처럼. yes면 yes구 no면 no구... 통쾌하게 태도표시를 할게지!>>

 

재촉을 받고 로처녀가 겨우 얼굴을 들기는 들었으나 교무주임을 바로 보지는 못하고 겨우 알아들을만한 목소리로 대답을 올렸다.

 

<<선생님께서 근념해주시는건 감사합니다만... 전 아직 그럴 생각이 없에요.>>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처녀루 늙겠단 말인가? 당찮은 소리!>>

 

<<후대를 육성하는 사업에 좀더 전심하구싶어서요.>>

 

<<별소릴 다하는군. 결혼을 하면 남편이 일하는걸 방해할가봐? 내가 보증하지, 문선생은 그런 사람이 아니야. 절대루!>>

 

<<아니 그런게 아니라...>>

 

<<그럼? 혹시 어디 정해놓은 자리라두? ...>>

 

<<아니예요 아니예요, 그런건 없에요.>>

 

로처녀가 황망히 부정하는것을 모고 교무주임은 다시 마음을 놓았다.

 

<<조선생, 인제 밤두 늦었는데... 우리 말씨름 좀 고만합시다. 즉석에서 결정짓기가 무엇하거든... 시간적여유를 둡시다그려. 며칠후에 우리 한번 조용히 다시 만납시다. 좋겠소?>>

 

<<아니예요 선생님, 죄송합니다. 다시 더 생각해볼 여지가 없에요. 저 이야기는... 이걸루 고만... 끝을 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허, 이런 량반 좀 봐!>>

 

<<죄송합니다 선생님.>>

 

뒤통수를 치고 돌아서는 교무주임은 쓴입을 다셨다. 이런 봉패를 하리라고는 미처 생각을 못하였던것이다. 소한테 물린 느낌이였다.

 

이튿날 퇴근시간에 복도에서 옆을 스치며 문대성이 조봉숙에게 넌지시 한마디를 속삭였다.

 

<<석후에 문화관 맞은짝에서 기다릴테니까.>>

 

조봉숙이 가타부타 말을 할 사이도 없이 문대성은 회오리바람같이 현관으로 사라져버렸다. 봉숙이는 대단히 난처하였다. 가자니 그렇고 안 가지니 또 그렇고.

 

<<많이 기다리셨지요?>>

 

<<아니 나두 고대 오는 길입니다. 저쪽으루 좀 걸으실가요.>>

 

불 밝은 문화관에서는

 

<<쿵자차, 쿵자차! ...>>

 

과히 서투르지 않은 쥐대기악대가 솜씨를 보이고있었다.

 

<<교무선생한테 이야긴 들었는데...>>

 

봉숙이는 예료한바였으므로 그저 잠자코 발걸음만 옮겼다. 눈우를 불어오는 바람이 꽤 맵짰다.

 

<<언약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게 아니예요.>>

 

<<그럼?>>

 

<<결혼할 생각이 없어서요. 그뿐이예요.>>

 

<<어째서? 무슨 까닭이 있겠지요?>>

 

침묵. 발에 밟히는 눈이 뽀드득뽀드득 기분 좋은 소리를 내였다.

 

<<내가 그 까닭을 말하리까?>>

 

녀자가 흠칠 놀라서 멈칫 서버리니 남자도 걸음을 멈추고 녀자를 향하여 돌아섰다. 봉숙이의 가슴은 두방망이질을 하였다. 둥글어가는 달을 가리였던 구름이 바람에 벗겨져서 눈앞에 아름다운 은세계가 펼쳐졌다. 네 눈이 가까이에서 잠시동안 마주보다가 문대성이 킥 웃고 롱담 비슷이 말을 내였다.

 

<<교무선생은 맘씨만 무던했지 손자병법은 ABC두 모르는분이지요. <지기지피(知己知彼)면 백전불태(百战不殆)>라는 말두 모른단 말입니다. 그러나 나는 알거든요. 잘 안단 말입니다. 그래 봉숙선생은 여태 내가 아무것두 모르구 맹탕 달려든줄 아시오? 천만에! 난 다 알구있어요. 다 알구, 심사숙고해보구, 결심을 채택하구... 그러구 달려든거예요. 아시겠소? 난 케케묵은 관념에서 해탈을 한 새 타이프의 남자라구... 스스루 믿구있습니다. 자랑스럽게 믿구있습니다. 아시겠소 봉숙선생? 봉숙선생이 만약 일생을 독신으로 지낸다면 그건 우리 남자들의 수치라구 나는 생각합니다. 수치가 아니구요! 난 그런 옹생원이 아니란걸 세상에 보여줄 작정입니다. 나는 봉숙선생의 고된 운명에 외면을 할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봉숙선생두 잘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렇게 말하고 문대성은 또 한번 킥 웃고 한마디를 덧붙이는것이였다.

 

<<내 생김생김이 거머무트름해서 보기가 싫다면 그건 물론 또 딴 문제구.>>

 

극도로 긴장한 봉숙이였건만 항거할수 없는 사나이의 야릇한 마력에 끌려들어 무가내하로 한번 따라웃었다. 갈라질 때 문대성은

 

<<며칠두 좋구 몇달두 좋구 기다릴테니... 면대해 말하기가 거북하거든 쪽지를 적어보내시오. 그럼 난 갑니다.>>

 

이런 말을 남기고 눈 깜박할 사이에 사라져버렸다.

 

갈피 잡기 어렵게 뒤섞여 복잡한 마음을 안고 봉숙이가 거처에를 돌아와보니 방안에 꺼져있어야 할 불이 환히 켜져있었다. 의아쩍게 생각하고 방문을 열어보니 주인 없는 방안에 사람 하나가 앉아있다.

 

두 사람은 전등불밑에 한동안 덤덤히 마주보기만 하였다. 뒤늦게야 깨닫고 뉘우친 인식이는 바늘방석에 앉은것 같아서 휴일을 기다리지 못하고 학교에다 핑게로 청가하고 부랴사랴 수백리길을 달려왔었다.

 

<<용서하오 봉숙이, 다 내 잘못이요. 이제라두 늦지 않았으니... 우리 새 가정을 이루어봅시다. 한번 좀 잘살아봅시다.>>

 

격동안 인식이는 이렇게 말하며 앞으로 달려들어 봉수기의 찬 손을 두손으로 덤썩 잡았다. 그러나 봉숙이는 그 손을 마주잡으려 하지 않았다. 슬그머니 가볍게 잡히운 손을 빼내였다. 그리고 나직한 말소리로 똑똑히 말하였다.

 

<<늦었에요. 나는 이미 마음속에 정한 사람이 있에요.>>

 

김학철전집4-태항산록-원수와 벗

 

소설

원쑤와 벗

 

전일 연변대학의 정판룡선생이 전갈해오기를 일본에서 교수 한분이 왔는데 그의 말이 자기는 일본에서 김학철의 작품을 번역 출판한 사람이니까 김학철을 꼭 좀 만나게 해달라고 한다. 어떤가, 한번 만나보는게 좋지 않겠는가 하는것이였다. 그리하여 나는 국경을 격하고 바다를 격하여 피차에 문자상으로만 알고있던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의 교수 오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선생과 첫대면을 하게 되였다.

 

50살 고개를 갓 넘어선 오오무라선생은 대학교수보다는 영화배우가 더 알맞을것 같은 미남자로서 조선말을 상당히 잘하였다. 오오무라선생은 조선문학을 연구하는분인데 남, 북 조선에만 국한되지 않는 전 조선민족의 문학을 연구대상으로 삼는 까닭에 자연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민족의 문학에도 큰 관심을 갖고있다. 그래서 연변을 그 연구기지로 골랐는데 외국인이 우리 대학에 연구원으로 들어가자면 많은 액수의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이 문제를 대학당국과 상의한 결과 약 1년 동안 일어강좌를 담임하는것으로 주고받을 셈을 맞비기자는 원만한 타합이 이루어진것이였다.

 

오오무라선생은 내외동반하여왔는데 알고보니 부인 아기꼬(秋子)녀사는 조선혈통으로서 남편의 연구사업에 없지 못할 조력자였다.

 

우리는 처음에 조선말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던것이 차차 조선말, 일보말 섞어작으로 변하다가 나중에는 아주 일본말을 유일한 사교언어로 쓰게 되였다.

 

대인접물에 능란한 아끼꼬부인이 말참네를 하여 좌중의 분위기를 더한층 화기롭게 만들었다.

 

<<저더러두 무얼 좀 해볼 생각이 없느냐구 묻지 않겠습니까. 그래 <좋습니다. 청소두 좋구 무엇두 좋구 다 좋습니다. 뭐나 시켜주시면 다하겠습니다.> 하구 대답을 올렸습지요. 하니까 <아니, 그런게 아니구, 저 일본에 류학보낼 우리 선생들에게 일어회화를 좀 가르쳐달라는 말입니다.> 하잖겠습니까. 그래 어쩌겠습니가, <좋습니다, 하라시는대루 하겠습니다.> 하구 수락을 했습지요.>>

 

<<그래 아주 결정이 됐습니까?>>

 

<<그러면이요. 그것때문에 우리 저이하구두 한바탕 웃었는걸요.>>

 

그 한바탕 웃었다는 연유를 물은즉 아끼꼬부인은

 

<<남편은 학생을 가르치구 안해는 선생을 가르치구... 을추갑자(乙丑甲子)루 셈판이 잘된다구요.>>

 

하고 또 한바탕 우리를 웃기는것이였다.

 

웃음을 거둔 뒤에 오오무라선생이 좀 신기스러운듯이

 

<<여기는 사무실을 <판공실>이라구 하더군요.>>

 

하고 말을 내여서 내가

 

<<녜, 방석을 <자부동>이라구 하구 옷장을 <단스>라고 하는 사람두 있지요.>>

 

하고 웃으니 아끼꼬부인이 웃으면서

 

<<식료품집 녀점원도 통졸임을 <간즈메>라구 하잖겠어요.>>

 

하고 말곁을 달았다.

 

전에 나는 일본잡지에 실린 오오무라선생의 <<일본>>대학에서의 조선어교육의 현상>>이라는 글을 적잖은 흥미를 갖고 읽어본적이 있었다. 그밖의 오오무라선생이 번역소개한 소설들로는 리기영의 <<개벽>>, <<민촌>>, 박태원의 <<춘보>>, 조명희의 <<락동강>>, 김사량의 <<류치장에서 만난 사나이>>, 유진오의 <<김강사와 T교수>>, <<창랑전기>>, 김동리의 <<무녀도>>, 김학철의 <<담배국>> 등을 들수가 있다. 그리고 그의 <<대역(对译)조선근대시선>>에는 김소월, 한룡운, 리상화, 림화, 김지하, 김순석, 민병균, 김귀련, 백인준, 김조규, 박팔양, 김상오 등 수많은 남,북 조선 시인들의 대표작이 수록되여있다.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하던 끝에 나는 오오무라부부가 바라는대로 내가 알고있는 일본사람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였다.

 

1942년, 내가 석가장 일본총령사관경찰서 류치장에 갇혀있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키가 작달막하고 몹시 약하게 생긴 중년수인 하나가 들어왔다. 당시 감방에서는 새로 들어온자를 변통옆에 앉히고 마구 부려먹기 마련이였다. 범죄자들이 집중되여있는 곳이라 분위기는 언제나 험악하였다. 때로는 살벌하기까지 하였다. 나는 팔로군간부출신의 정치범이였으므로 일반형사범-파렴치범들속에서 자연 우두머리격으로 행세하게 되였어다. 속된 말로는 왕노릇을 한것이다.

 

나는 심심파적으로 그 새로 들어온 수인을 가까이 불러다가 한번 물어보았다.

 

<<이름이 무어야?>>

 

<<구리시게... 구라시게 히사오(仓茂久男)라고 합니다.>>

 

<<나이는?>>

 

<<마흔두살입니다.>>

 

<<흠, 액년(厄年)이구먼, 그래 어디서 뭘 하던 사람이야?>>

 

<<원래는 도꾜에서 택시운전을 했었는데... 작년에 이곳 석탄회사에 취직이 됐습니다.>>

 

<<그래 무슨 죄루 들어왔지?>>

 

알고보니 마음이 약해서 석탄을 실어가는 놈이 전표에 적힌 수량보다 더 퍼담는것을 말리지 못하고 어물어물 눈감아주었다는것이다.

 

<<보아하니 허리를 잘 못쓰는것 같으데... 얻어맞았는가?>>

 

<<아닙니다. 허리앓이루 벌써 여러해째 고생을 하는중입니다.>>

 

그의 악의 없어보이는 선량한 얼굴이 호감을 자아내고 또 그 약하디약한 몸이 동정을 불러일으켜서 나는 다른 수인들에게 지시하였다.

 

<<저 사람의 <변통당번>을 변제해주두룩.>>

 

변통당번이란 아침저녁 두차례 변통을 들고 나가 말끔히 부셔가지고 들어오는것을 말하는것인데 일반적으로 새로 들어온자가 도맡아하는것이 상례로 되여있었다. 나는 마루바닥에 걸레질하는 일도 면제해주라고 하였다. 다른 수인들이 속으로는 불만스러웠으나 내 기안에 눌리워 꿀꺽 소리 못하고 그대로 받아들이는것을 나는 물론 잘 알고있었다. 하지만 제몸 하나도 바로 가누지 못하는 인간을 마구 부려먹는것을 나는 차마 눈앞에 볼수가 없었던것이다.

 

서너달 같이 지내는 동안에 나는 구라시게의 보호자노릇을 착실히 잘하였다. 내 덕에 구라시게는 그 무지막지한자들의 구박을 받지 않고 무사히 그날그날을 보낼수 있었다. 자기가 사람이 변변치 못하여 아이는 죽고 안해는 집을 나가버렸다는 그의 신세타령을 듣고 나는 더욱더 그를 동정하였다. 그는 내가 중국사관학교(군관학교)출신의 장교(군관)로서 사상범(정치범)이라는것을 알고는 나를 굉장히 우러러보았다. 일본군대에서는 군조(중사)나 오장(하사) 따위 하사관나부랭이도 세도를 쓰기때문에 보통평민인 그의 머리속에는 무릇 장교는 다 공경해야 한다는 계급관념이 깊이 박혀있는 모양이였다. 조선에서 국민학교(소학교) 교원으로 근무하고있는 우리 누이동생 성자(性子)에게서 편지가 오면 나는 번번이 다 그에게도 보여주었다(그에게는 편지가 올데가 없었다). 그는 마음이 워낙 여린 사람이라 그 편지들을 읽어보고는 감동되여 눈시울을 슴벅거리며 목멘 소리로 말하는것이였다.

 

<<정말 훌륭한 매씨를 두셨습니다. 정말 훌륭한 매씨를 두셨습니다.>>

 

구리시게는 나보다 나이 열대여섯살이나 맏이였다. 그래도 그와 나는 강도, 절도범, 강간범, 아편장사 따위들이 우글우글하는 감방속에서 아주 친숙한 사이로 되였다. 총칼을 들고 일본침략군과 마주 겨루던 나에게 철창속에서 뜻하지 않은 일본벗 하나가 이렇게 생기였다.

 

서나달후, 구리시게가 무죄석방으로 류치장에서 나갈 때 그와 나는 간수가 보는 앞에서 서로 손을 마주잡고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몸조심...>>

 

<<몸조심하십시오.>>

 

겨우 한마디씩 하는데 구라시게의 눈시울이 붉어지는것을 보고 나는 마음이 언짢아서 얼른 고개를 돌리였다.

 

밤에 잘 때 나는 소슬한 가을바람속에 혼자서 허허벌판에 누워있는것 같은 허전함을 느꼈다. 구라시게가 무사히 풀려나건것은 정말 다행한 일이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생사미복(生死未卜)의 험난한 앞길이 여전히 가로놓여있었다.

 

 

이튿날아침 10시쯤 간수가 와서 감방의 자물쇠를 덜컥 열더니 내 이름을 불렀다. 또 그 빌어먹을 취조겠거니 생각하고 개구멍같은 감방문을 빠져나오니 간수가 싱글거리며 한마디

 

<<차입입니다.>>

 

귀띔해주었다.

 

<<차입? 내게 무슨?...>>

 

나에게는 애당초부터 차입이라는것이 있을수가 없었다.

 

<<나가보면 알아.>>

 

나는 간수의 압송하에 사법계로 나왔다. 수인들에 관한 일반사무는 사법계에서 취급하였었다.

 

<<자, 여기다 서명해.>>

 

사법계순사가 시키는대로 서명을 하고나서 다시 보니 차입인은 뜻밖에도 <<구리시게 하시오>>. 그리고 내앞에 놓여진것은 <<교오야(京屋)>>라는 고급과자점의 생과자 한상자였다. 사법계순사가

 

<<구리시게하구 사이가 좋았던 모양이지.>>

 

하고 웃으며 서명장을 덮을 때, 나는 구라시게와 갈라진 석별의 정이 새삼스레 왈칵 북받쳐오르는것을 느꼈다.

 

(영원히 다시 만나볼 길 없는 나의 벗 구라시게!)

 

몇달후 나는 일본에 압송되여 나가사끼형무소 이사하야(谏早) 본소에서 복역을 하게 되였다. 그러다가 몇해후에 일본이 무조건항복을 한 뒤에 비로소 풀려나서 고국으로 돌아왔다. 나는 10여년만에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만나서 오랜 세월 쌓이고쌓인 회포를 풀었다. 어머니와 누이동생은 울었지만 나는 울지 않았다. 나는 그 험악한 전쟁판과 옥고의 시달림속에서 아주 철석간장의 사나이로 되였던것이다. 누이동생 성자가 눈물을 거두고나서 묻기를

 

<<오빠, 구라시게 히사오라는 일본사람을 알지?>>

 

하는데 나는 너무도 의외로와서 또 한번 가슴이 찡하였다.

 

<<엉? 네가 그 사람을 어떻게 아니?>>

 

<<그 사람이 우리 집에를 왔었지 뭐요.>>

 

<<집에를 와? 집에를 오다니? 구라시게가?>>

 

<<예, 그렇다니까요. 그가 석가장경찰서에서 나와서 일본으루 돌아가는 길에 일부러 차에서 내려서 학교루 나를 찾아왔더라니까요. 이름두 들어본적 없는 일본사람이 느닷없이 찾아와서... 대바람... 나는 당신 오빠의 친구요, 당신의 편지를 다 읽어보았소, 당신 오빠의 신세를 많이 졌소... 이런 소리를 하니 어떡허지요. 난 꼭 헌병대의 끄나불인줄루만 알았다니까요. 그전에두 오빠 일루 헌병대에서 싸이드카 탄 헌병들이 왔다갔었으니까. 그래 속이 자꾸 떨리지 뭐예요. 별도리없이 난 그저 <우리 오빠는 나쁜 사람이예요, 우리 오빠는 나쁜 사람이예요>... 대구 오빠를 쳐서 말했지. 하니까 그는 <아니야 아니야 오빠는 좋은 사람이야, 훌륭한 사람이야.> 하구 기가 나서 오빠를 변호해주지 뭐요.>>

 

<<응, 그래 어떻게 됐니?>>

 

<<집으루 모시구 왔지요. 모시구 와서 엄마하구 둘이서 또 오빠가 어떻게 나쁘구 어떻게 나쁘구 자꾸 곱씹어 말하니까 나중에는 그 량반이 역정을 내겠지... 오빠는 절대루 좋은 사람이라는데 왜들 이러느냐구.>>

 

<<흠, 그런 이이 있었구나... 정말 뜻밖이다.>>

 

<<그런데 그가 허리를 잘 못쓰니 웬 일이죠? 자꾸 앓음소리를 하더라니까요. 경찰서에서 얻어맞아서 그랬던가?>>

 

<<아니야, 허리앓이를 해, 그 사람은 맞지 않았어.>>

 

<<응... 그런걸 난 또... 오빠두 그렇게 맞았을것 같아서...>>

 

(구라시게가 이다지도 살뜰하고 다정할줄이야!)

 

이튿날 떠나갈 때 어머니와 성자가 려비를 좀 보태주려고 하니까 구라시게는 한사코 싫다거라는것이였다. 억지로 호주머니에 밀어넣어주기는 하였으나 그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정체를 알수 없어서 이날 이때까지 모녀는 궁금증을 풀지 못하고있었다는 것이였다...

 

나의 이야기가 일단 끝이 나니 오오무라부부의 얼굴에는 다같이 감동된 빛이 떠올랐다.

 

<<아마 무척 고마웠던 모양입니다. 감방에서 그렇게 보호를 해주는게...>>

 

하는 남편의 말에 그 안해가 동을 달았다.

 

<<왜 안 고마왔겠어요, 몸에 병이 있는 사람이. -정말 아름다운 이야깁니다.>>

 

나는 다시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나는 그때 왼쪽 대퇴부에 관통상을 입었었는데 뼈를 맞았던 까닭에 3년이 다되두록 상처가 어디 나아줘야지요. 나아지는게 다 뭡니까. 점점 더하지! 줄곧 고름을 흘리며 3년을 견지한 끝에 정 안되겠기에 나중에 할수없이 감옥병원 원장이라는자에게 요청을 했습니다...>>

 

<<무어라구요?>>

 

오오무라선생이 웃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재쳐 물었다.

 

<<절단수수를 좀 해달라구요.>>

 

<<저런!>>

 

<<그럼 어떡합니까 사람이 죽겠는데.>>

 

<<그래 어떻게 됐습니까?>>

 

아끼꼬부인이 앞으로 바싹 다가앉았다.

 

<<이 원장이라는자가 하는 수작을 좀 들어보십시오. 소위왈 의사라는 작자가 하는 수작을 좀 들어보십시오. -<너는 비국민이니까... 황국의 적이니까... 내 자의루 수술을 해줄수 없다. 그러니 사법대신의 특별허가를 맡아오너라.>>

 

오오무라부부의 얼굴에 다같이 이름 못할 분격의 빛 같은것이 서리였다.

 

<<도꾜가 미군의 폭격으루 불바다가 된 판에 사법대신의 특별허가란게 되기나 할 소립니까! 그럭저럭 또 서나달이 지났습니다. 고통스럽기짝이 없는 서너달이였지요. 그런데 내가 살 운수가 뻗쳤던지 아니면 하늘이 굽어살폈던지... 그 개만두 못한 원장녀석이 갈려가구 새 원장이 오잖었겠습니까. 그 새 원장의 이름을 나는 영원히 기억하구있을겁니다. -히로다 요쯔구마(广田四熊)!>>

 

<<히로다 요쯔구마... 어떻게 씁니까?>>

 

오오무라선생이 이렇게 물으며 만년필을 집어들어서 나는

 

<<넓은 밭, 네마리의 곰.>>

 

글자를 대주고나서 다시 이야기를 계속하였는데 그 내용을 대강 간추리면 아래와 같다.

 

나는 정치범이였으므로 <<엄정독거(严正独居)>>라는 명목으로 독감방에 수용되여 다른 수인들과의 접촉이 엄격히 금지되여있었다. 한주일에 두번씩 하는 목욕도 독탕에서 해야 하고(여름에는 사흘에 한번 겨울에는 나흘에 한번) 그리고 병원에 입원을 해도 독병실에 혼자 갇혀있었야 하였다. 진찰실에서 진찰을 받을 때도 다른 형사범들과 같이 장의자에 앉지 못하고 혼자 벽을 향하고 따로 서있어야 하였다. 나를 압송하는것은 일반간수가 아니고 간수부장이였다. 다른 간수들은 수인을 한꺼번에 칠팔명씩, 십여명씩 거느리고 다녔지만 나는 언제나 간수부장과 1대1이였다. 이것은 나만이 아니고 무릇 정치범들은 다 그런 <황송한 특별대우>를 받아야 하였다. 페스트환자, 콜레라환자 취급을 받아야 하였다. 정치범외에도 흉악범인 즉 수시로 간수를 습격할 념려가 있는 수인들은 다 그런 대우를 받아야 하였다.

 

새로 부임해온 원장은 50살 가량의 아주 가냘프게 생긴이로서 무테안경을 썼었다. 그는 나를 압송해온 간수부장더러 벽을 향하고 혼자 따로 서있는 나를 가리키며

 

<<이리 데려오시오.>>

 

례사롭게 말하였다. 간수부장이 좀 당황한듯

 

<<저 이건 엄정독거입니다 원장님.>>

 

하고 대답을 올리니 원장은

 

<<응 그래?>>

 

하고 안경너머로 나를 한눈 여겨보고나서 형사범들을 압송해온 간수에게 손짓하였다.

 

<<하나씩 차례루.>>

 

맨나중에야 내 차례가 되여서 나는 비로소 새 원장앞에 나섰다.

 

<<어디가 아픈가?>>

 

나는 옷우로 상한 다리를 가리켜보았다.

 

<<총상... 벌써 3년쨉니다.>>

 

<<총상?>>

 

새 원장은 나를 흉악한 살인강도로 지레짐작한 모양이였다. 그런 기색이 얼굴에 현연히 나타났다. 내 가슴에 붙어있는 번호표를 한눈 보자 그는 부지런히 카르테를 뒤져서 (1454)-나의 번호를 찾아내였다. 다음 순간 그의 얼굴에는 놀라는 기색이 스쳤다. 죄명란에 적혀있는것은 생각지도 않은 <<치안유지법 위반>>-정치범이였기때문이다. 나는 기회를 놓칠세라 얼른 말문을 열었다.

 

<<의술은 인술이라구 합니다. 내 이 다리의 총상이 제대루 치료를 받지 못해서 3년째 이렇게 썩어가는것을 뻔히 보면서두 그전 원장은 사법대신의 특별허가를 맡아오라구 전연 가망성이 없는 난문제를 내세워가지구 내 정당한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절단수술을 해달라는 박부득이한 요구마저 거절했단 말입니다. 과학자적량심이 조금이라두 있는 의사라면 어떻게 환자의 정치적신념이 자기하구 다르다구 해서 의사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게을리하겠습니까. 허떻게 환자를 죽으라구 그냥 내버려두겠습니까.>>

 

나의 이 열렬한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고있던 새 원장-히로다 요쯔구마선생은 내 말이 다 끝나기를 기다려서 담담한 어조로 말하는것이였다.

 

<<말하는 취지는 잘 알았으니... 오늘은 일단 그냥 돌아가두룩. 내 좀더 생각해보구나서 조처할테니까.>>

 

그로부터 닷해후에 나는 설비가 보잘것없는 감옥병원에서 대퇴부절단수술을 받았다. 담당의사는 물론 히로다선생였는데 그 조수노릇을 한것은 젊은 준의사(准医师) 하나와 수인간호원 둘이였다.

 

나는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안심시키려고 수술받은 경과를 곧 집에다 알리였다. 수인들은 한달에 한통씩 봉함엽서로 가족에게 편지를 쓸수 있었다.

 

그런데 불행한것은 히로다선생이 나에게 수술을 베푼 뒤 석주일도 채 못되여 지병인 복막염이 도져서 세상을 뜬것이였다. 히로다선생은 병석에서 우리 누이동생의 감사의 편지를 받고 그 따님을 시켜서 답장을 써보내였었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히로다 요쯔구마선생을 잊을수 있겠습니까.>>

 

<<지당한 말씀입니다. 정말 아름다운 이야깁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아직두 끝나지 않았습니다. 내 수술을 거들던 수인간호원 하나와 내가 맺었던 우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이렇게 허두를 떼여놓고 나는 다시 천천히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25살 먹은 그 수인간호원은 이름은 스기우라 쥰스께(杉浦俊介)라고 하는데 감옥에 들어오기전에는 해군소위였었다. 직속상관인 중위가 공연히 자꾸 트집을 잡아 못살게 구는데 참을 줄이 끊어져서 그는 분김에 차고있던 단검을 뻬서 한번 콱 찔렀다는것이다. 그러니까 상관을 찔러서 부상을 입힌것이다. 그 죄로 그는 군법회의 즉 군사재판에서 7년 징역형을 언도받고 나가사끼형무소 이사하야본소에 와 복역을 하는중이였다.[나가사끼시내에 있는 형무소의 지소(支所)는 그후 원자탄을 맞고 완전히 파멸되였다.] 스기우라는 제국군인의 자존심이 있었으므로 다른 형사범-파렴치범들과 대등으로 추측하는것을 수치스럽게 여기고있었다. 하물며 그는 장교출신이다. 그러던차에 나를 만나게 되였으니 어찌 마음을 트지 않을것인가.

 

스기우라와 나는 곧 가까운 벗으로 되였다. 너나들이를 하게 되였다. 그의 누이동생도 우리 성자처럼 국민학교 선생이였으므로 우리는 집에서 온 편지가 무엇보다도 소중하였다. 스기우라는 병원안에서만은 행동이 어느 정도 자유로운 간호원이고 나느 <<엄정독거>>였으므로 다른 수인들의 눈을 꺼릴것이 없어서 서로 접촉하는데 편리한 점이 많았다.

 

일본감옥병원에서는 환자의 정상에 따라 하루에 우유 한 고뿌를 공급하거나 콩물 한 고뿌를 공급하게 되여있었다. 그런데 직접 그 일을 맡아하는것은 스기우라였으므로 나는 우유도 받고 콩물도 받고 두가지를 다 받아먹었다.

 

<<그까짓 콩물 한 고뿌!>>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잘 모르는 소리다. 먹을것이 극도로 결핍한 수인들에게 있어서 가외로 얻은 한 고뿌의 콩물은 인삼록용 맞잡이로 귀중한것이기때문이다.

 

스기우라가 하루는 의논을 걸어왔다.

 

<<너 나 영어 좀 그러쳐주겠니?>>

 

<<어렵잖지.>>

 

<<앞으로... 영어가 필요하겠지?>>

 

<<필요하다말다... 더 말할게 있나.>>

 

<<그럼 좀 부탁한다.>>

 

<<OK!>>

 

이때는 벌써 대일본제국의 해군소위도 패전의 냄새를 어렴풋하게나마 맡고있었던것이다. 련합군이 상륙하면 영어가 필요하리라는것을 희미하게나마 깨달았던것이다. 이라하여 팔로군의 한 간부가 제국해군의 한 장교에게 감옥안에서 영어를 개인교수한다는 기모한 국면이 벌어졌다.

 

스기우라는 간수 몰래 목욕물 데우는 증기에다 고구마를 쪄서 한 밥통씩 나에게 갖다주었다. 더 말할것도 없이 그것들은 다 훔친것이다. 그 고구마맛을 4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잊지 못한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산해진미였다!

 

어느날 나는 허허실실로 스기우라에게 청을 한번 들어보았다.

 

<<오이, 스기우라, 너 어디서 아무 책이구... 책 좀 구할수 없겠니? 볼 책이 없어서... 정말 죽을 지경이다야.>>

 

<<바보 같은게, 진작 말하지-기다려!>>

 

스기우라는 득돌같이 달려가더니 잠시후에 먼지가 켜켜이 앉은 잡동사니책을 한아름 안고 달려왔다.

 

<<야, 고맙다! 인제 살았다!>>

 

<<창고속에 얼마든지 무져있다. 다 보면 내 또 갖다주마.>>

 

행동의 자유를 완전히 구속당한 철창속에서 정신의 식량까지 이렇게 무더기로 공급해주는 스기우라를 내가 어찌 감지덕지 아니하랴!

 

어느날 스기우라가 식기구(食器口)로 나를 들여다보며 소근소근 묻는것이였다.

 

<<네 보긴... 일본이... 질것 같니?>>

 

<<꼭 진다. 시간문제다.>>

 

내가 확신을 갖고 잘라 말하니 스기우라는 아름이 찬듯 한동안 말을 못하다가 무서운 일 물어보듯 묻는것이였다.

 

<<꼭 진다구? 꼭 지면... 그럼... 우린 어떻게 되니?>>

 

<<어떻게 될것 있니? 더 잘살게 되지!>>

 

<<정말이냐?>>

 

<<두구보렴.>>

 

내가 스기우라에게 단언을 한지 석달만에 일본은 무조건항복을 하였다. 히로히도천황의 그 알아듣기 어려운 반벙어리소리로 항복선언이 방송되던 날 오후부터 감옥안에서는 방공호를 파는 작업이 중지되였다. 어리석은것들이 망하는 그 시각까지 무얼 얻어처먹겠다고 기를 쓰고 방공호를 파고있었던것이다.

 

내가 이야기를 하고있는 중간에 오오무라선생이

 

<<일본이 꼭 진다는 그런 신념을 갖구계셨단 말씀이지요.>>

 

하고 경탄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아서 나는

 

<<녜, 이본필패의 확고한 신념은 시종일관 추호두 동요돼본적이 없었습니다.>>

 

대답한 뒤 한번 싱긋 웃고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히틀러가 패망한 뒤에 난 누이동생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멀지 않아 내가 돌아가서 어머니를 모실테니까 조금만 더 참아달라구 말입니다. 개가 시집을 가게 되면 년로한 홀어머니를 어떡하겠습니까. 그게 걱정이 돼서였지요. 한데 뜻밖에두 그 편지는 전연 엉뚱한 역효과를 가져왔습니다. 물론 이것두 나중에 전쟁이 끝난뒤에 귀국을 해서 안 일입니다만 우리 누이동생은 학교에서 그 편지를 받아보구 눈물을 흘리며 집으루 돌아왔답니다. 그리구 어머니하구 모녀 목을 그러안구 대성통곡을 했답니다. 오빠가 감옥에서 고통을 견디다 못해 정신이상에 걸렸다구 말입니다. 분명히 나올수 없는 오빠가 멀지 않아 돌아오겠다구 조금만 더 참아달라니 이게 그래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 하는 말입니까? 우리 누이동생은 대일본제국을 하늘루 아는, 빈틈없는 <황국신민!>이였거든오! 정치적안광이란게 꼬물두 없었단 말입니다.>>

 

오오무라부부는 이 단락에서 서로 마주보고 혼연해하는 웃음을 웃었다.

 

나의 이야기는 다시 원줄기로 돌아온다. 해군소위 스기우라와 내가 감옥병원에서 환난을같이 겪던데로 돌아온다.

 

<<야, 인제 우리가 정말 나가게 됐다!>>

 

<<집에서들두 아마 굉장히 좋아할게다.>>

 

<<넨장할, 난 인제 다시는 군복을 안 입겠다. 그 지긋지긋한 놈의 군복!>>

 

<<군복은 안 입더라두... 상선 같은거야 탈수 있잖니.>>

 

스기우라와 나는 흥분하여 이런 말을 주고받았다. 우리들의 마음은 벌써 감옥의 높은 담을 거침새없이 날아넘고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스기우라가 와서 나를 들여다보고 킥킥거리며 말하는것이여다.

 

<<야, 네 그 다리 묻어놓은걸... 개들이 들어와 싹 파헤쳤다. 서루 물어가겠다구 쌈질하는걸... 내가 마구 때려 쫓았다. 묻을 때 아마 너무 옅게 묻었었나와. -네 뼈다귀... 한번 보겠니?>>

 

나는 들었다보았다하고

 

<<오냐오냐.>>

 

그를 재촉하였다.

 

<<빨리 가서 가져오나! 어디 좀 보자. 개한테 또 뺏기진 말아!>>

 

스기우라는 해군소위식동작으로 민첩하게 행동하여 물과 몇분후에 내 그 백골화한 다리를 새끼오래기에 매여들고 신바람이 나서 돌아왔다. 무슨 보물이라도 발굴해낸것 같았다. 뼈는 희지않고 거뭇거뭇하였다. 엷게 덮인 흙으로 노상 비물이 스며들어서 썩은 모양이였다. 그래도 무릎마디와 복사뼈와 발가락들은 다 깔축없이 고스란하고 온전하였다. 나는 제 해골의 일부를 눈앞에 보는것이 신기해서 웃고 스기우라는 나에게 희한한 구경을 시켜준것이 대견해서 웃고... 민족이 다른 두 젊은 친구는 잠시 옥중인것도 잊어버리고 유쾌하게 웃음통을 터뜨렸다...

 

나의 이야기가 이 단락에 이르렀을 때 오오무라부부의 얼굴에는 다같이 처참한 빛이 떠올랐다.

 

<<그런 지꿎은짓을...>>

 

하고 오오무라선생이 말끝을 흐리여서 나는

 

<<다들 청춘시절이였으니까요.>>

 

하고 한번 껄껄 웃고 다시 이야기의 원길로 잡아들었다.

 

10월 9일, 일본 전국의 정치범들이 일시에 석방되였다.(도꾸다 규우이찌(德田球一), 시가 요시오(志贺义雄), 미야모도 겐지(宫本显治) 등도 다 같은 날 석방되였다.) 련합군사령부의 명령이 떨어진것이다. 나가사끼형무소의 근 2천명 수용자들가운데서 정치범이라는것은 겨우 넷밖에 없었다. 그 넷가운데서도 일본사람은 하나밖에 없고 나머지 셋은 다 조선사람이였다. 그 조선사람 셋중에도 공산당원은 나 하나뿐이고 나머지 둘은 다 민족주의자 김구선생의 부하였다.[그중의 한사람 송지영(宋志英)은 후에 한국방송공사-KBS의 리사장으로 되였다.]

 

출옥할 때 신문기자들이 와서 취재를 하였는데 이튿날-10월 10일 <<나가사끼신붕>>에는 조선독립이 투사 아무개가 어찌고어찌고하는 기사가 실렸었다. 바로 어제까지도 <<비국민>>이라고 죽일놈 살릴 놈 하던것이 하루밤사이에 <<조선독립의 투사>>로 변하는것을 보고 우리는 쓴웃음을 웃었다. 일본신문기자들의 손바닥을 뒤집은것 같은 둔갑술에 <<경탄>>을 한것이다.

 

나는 극도의 영양부족과 결핵균의 감염으로 수술한 자리가 몇달이 되도록 아물지를 아니하여 출옥할 때 감옥병원에서 림시처치할 알콜 한병과 탈지면 한봉지를 얻어가지고 나왔다. 스기우라는 간수부장이 지켜보는 앞에서 알콜병과 탈지면봉지를 내 량쪽 호주머니에 하나씩 넣어주었다.(나는 송엽장을 짚었으므로 아무것도 손에다는 들고 다닐수가 없었다) 그리고 눈물이 글썽하여 작별인사를 하였다.

 

<<몸조심... 잘 가라.>>

 

그의 실심한 얼굴을 보자(그도 나랑 함께 석방이 될줄 알고있었던것이다) 나는 너무도 언짢아서 그와 함께 감옥에 떨어져있을가 하는 미친 생각까지 났다. 나는 남을 동정하면 자기라는것을 잊어버리는 성질이였다.

 

<<너두 곧 풀려나게 될거니까... 안심하구... 견지해!>>

 

이것이 내가 스기우라에게 한 마지막 말이였다.

 

그때로부터 4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나는 옥고를 같이 치른 나의 친구 스기우라 쥰스께가 어떻게 되였는지 그 소식을 감감히 모르고있다.

 

감옥의 철문을 나서기전에 저장고에 보관되여있던 곰팡내 풍기는 보따리를 찾아서 펼쳐보니 헌옷가지속에 헌 신발 두짝이 들어있었다. 나는 그 필요없게 된 한짝을 콩크리트바닥에 동댕이치고 나머지 한짝만 발에 꿰고 나왔다.

 

오오무라부부는 나의 이야기가 끝이 나자 긴장감에서 풀려난듯 가볍게 숨을 몰아쉬였다. 일본에는 내가 미워하는 원쑤도 있고 또 내가 사랑하는 벗도 있다는것을 그들은 똑똑히 알았을것이다.

 

내가 가는 인사하고 일어나니 오오무라선생은 얼른 앞서나가 내 신발을 신기 좋게 돌려놓아주었다. 그러나 신발이 한짝만 있고 다른 한짝은 보이지가 않아서 그는 어찌할바를 몰라하였다. 내가 웃으면서

 

<<본래 한짝뿐입니다.>>

 

하고 일깨우니 오오무라선생은 비로소 깨도가 되여서

 

<<오 참 그렇지!>>

 

하고 내외 같이 거뜬한 웃음을 웃는것이였다.

 

김학철전집4-태항산록-죄수의사

 

소설

죄수의사

 

1

내과의사 현덕순이 반혁명현행범으로 징역 10년의 판결을 받고 감옥이란데를 오고보니 참으로 기가 막혔다. 사단은 이렇게 났었다. 동료 너덧이 모인 술좌석에서 취중진정발(醉中真正发)로

 

<<하지만 그가 쓴 "공산당원의 수양"은 잘못이 없잖은가.>>

 

한마디를 한것이 어느 고자쟁이의 밀고로 무시무사한 어른들귀에 입문이 된것이다. 그는 젊은 안해와 어린 자식이 보는 앞에서 수갑을 채우고 등을 밀리워 찌프차에 오르던 일이 고대 있었던 일처럼 새삼스럽게 생생히 머리속에 떠올랐다.

 

(내 일생두 인제 끝장이 났구나!)

 

이런 절망감이-저기압으로 내는 아궁이의 내굴처럼-그를 사정없이 휩샀다.

 

사람을 달달 볶는 두달 동안의 입감대(入监队) 생활이 겨우 끝이 나서 각 중대에 편입들이 되는데 현덕순이 편입된것은 제3중대-로약대(老弱队)였다. 로약대란 로쇠자, 병약자, 불구자들을 따로 모아놓은 중대였다. 로쇠도 병약도 불구도 다 아닌 현덕순을 로약대에 편입시킨것은 까닭이 있었다. 궐이 나는 중대의사로 배치한것이다. 죄수 150명으로 편성되는 각 중대에는 의사 하나씩이 배치되는데 그 의사는 반드시 복역중의 죄수가 담당해야 하므로 중대의사란 곧 죄수의사였다. 죄수의사의 소임은 <<범(犯)>>자가 찍힌 위생모, 위생복을 쓰고 입고 그리고 구급가방을 메고 작업을 나가는 중대를 따라다니는것이다.(<<범>>은 죄수라는 뜻이다) 전임의사가 감옥위생소로 승급되여가는 까닭에 현덕순이 그 빈자리를 메우는 판인데 인계인수를 하면서 신구의사는 간단하게 말마디를 주고받았다.

 

<<당신 무얼루 들어왔소?>>

 

<<반혁명으루.>>

 

<<반혁명? 반혁명은 본래 중대의사를 시키지 않는 법인데... 아마 당신은 특별히 잘 보인 모양이구려.>>

 

<<글쎄 모르겠소.>>

 

<<얼마 먹었소?>>

 

<<10년. 당신은?>>

 

<<난 7년... 녀자문제루... 인제 2년이 좀더 남았소.>>

 

<<그래 어떻소 여기 형편이?...>>

 

<<애먹소 이놈의 중대! 맨 병다리, 병신들뿐이니... 한번 지내보우. 머리가 세잖나!>>

 

<<여기... 정치범은 없소?>>

 

<<왜 없어. 정치범 30명, 형사범 90명... 3대1인데.>>

 

<<청진기는?>>

 

<<청진기는 내 이걸 물려줘두 좋겠지만 손때가 묻은거니... 내 위생소에 가서 다른걸 하나 타주리다.>>

 

현덕순이 뒤에 떨어져서 천천히 중대안을 한번 돌아보니 아름이 찼다. 한다리를 관속에 들이민 80살 이상의 늙다리가 넷이나 있고 그리고 팔병신, 다리병신이 열이 넘었다.

 

(이런데서... 한해두 아니구... 사람이 어떻게 산담!)

 

현덕순은 자기의 고된 운명이 새삼스레 저주스러웠다.

 

2

원망스러우리만큼 작은 강낭떡 한개와 안타까우리만큼 적은 배추국 한그릇을 게 눈 감추듯 재껴치우기가 바쁘게 벌써 밖에서는

 

<<정렬!>>

 

조장녀석의 웨치는 소리가 났다. 이날의 오전작업이 시작되는것이다. 낡은 재빛의 죄수복을 걸친 늙다리, 병신들이 간수를 향하고 석줄로 정렬을 하는데 현덕순도 구급가방을 걸메고 대렬꽁무니에 가 섰다. 거기가 중대의사의 서는 자리였다. 간수가

 

<<번호!>>

 

구령을 내려서

 

<<하나!>>, <<둘!>>, <<셋!>>, <<넷!>>...

 

불러내려가는중에 별안간 뒤줄에서

 

<<이놈아, 어딜 또 끼여들어!>>

 

<<썩 물러나지 못해?>>

 

<<왜들 이러우? 나두 일을 나가겠다는데!>>

 

<<같잖게 일은 다 뭐냐!>>

 

<<다리갱일 분질러놓기전에... 냉큼 물러나라!>>

 

<<왜들 헤살이야! 개코같이! 한번 나간다면 나가는줄 알아!>>

 

<<간수님, 이 자식이 또 끼여들었습니다! 괴물이 또 끼여들었습니다! 조춘생이가 또 끼여들었습니다!>>

 

<<그따위 교란분자는 당장... 삽가래루 쳐내라!>>

 

<<괴물!>>

 

<<키킥!... 킥킥...>>

 

간수가 곧 률기를 하고

 

<<조춘생!>>

 

큰소리를 부르니 대렬속에서 젊은 목소리가 선뜻

 

<<녜!>>

 

대답을 하였다.

 

<<넌 물러가라. 너 할 일은 없다.>>

 

<<아닙니다 간수님, 전 얼마든지 일을 할수 있습니다. 저런 늙다리들보다 몇곱절 더 잘할수 있습니다. 전 꼭 따라갈겁니다.>>

 

현덕순은 속으로 괴이쩍게 여겼다. 아득바득하는 놈을 못하게 밀막다니!

 

<<간수님, 제발 저를 좀 데리구 가주십시오. 부탁입니다, 녜 간수님!>>

 

간수가 못마땅스레 미간을 찡그리고 혀를 한번 쯧 차더니 뱉듯이 분부하였다.

 

<<조장, 할수 없다. 그대루 데리구 가자.>>

 

<<녜!>>

 

<<봐라, 간수님이 허락하잖나! 괜히들 중뿔나게 나서서!>>

 

<<이놈아, 아가리 닥치구 줄이나 바로 서!>>

 

<<녜녜.>>

 

현덕순은 그 조춘생이라는 죄수에게 흥미를 가지고 작업을 하는 동안 유심히 살펴보았다. 작업은 겨울나이남새를 저장할 움을 파는것이였다. 조장이

 

<<야 괴물, 넌 저쪽을 파라!>>

 

하고 지휘하면

 

<<어디? 여기? 아, 좋소 좋소.>>

 

조춘생이는 군말없이 시키는대로 수굿수굿 일을 잘하였다. 누구나 그를 부를 때는 다들 <<괴물>>이라고 부르는것을 보니 괴물이 그의 별명인 모양이다. 나이는 스물네댓살 가량, 1.6메터 가량, 팔다리가 다 실하기는 하나 기형적으로 몽탁한데 얼굴에는 리성적인 슬기라는것이 전연 보이지를 않았다. 쉴참에 현덕순이 손짓하여 부르니 괴물 조춘생이는

 

<<나?>>

 

하고 손가락으로 제 코끝을 한번 가리켜보인 뒤 곧 쭈르르 달려왔다.

 

<<당신 새루 온 의사가 아니요?>>

 

싱글싱글 웃으며 조춘생이가 물었다.

 

<<그렇다.>>

 

<<그럼 나 약 좀 줄라우?>>

 

<<약? 무슨 약?>>

 

<<먹은게 삭지 않는 약.>>

 

<<그런 약이 어디 있어?>>

 

<<없소 그런 약이? 젠장할!>>

 

<<왜?>>

 

<<왜는 무슨 왜야! 먹은게 자꾸 꺼지니까 그러는게지!>>

 

<<배가 고프단 말이지?>>

 

<<그럼 당신은 안 고프우?>>

 

앞에서 누가

 

<<야 괴물, 저리 비켜라, 냄새난다!>>

 

하고 타박주어 쫓으니 괴물도 지지 않고 그 사람에게 눈을 흘기며

 

<<우쭐해서.>>

 

한마디를 뇌까리고 천천히 저쪽으로 가버렸다. 현덕순이 그 괴물을 쫓아버리던 죄숙에게

 

<<쟤 무얼루 들어왔소?>>

 

하고 물어보니 그 사람은

 

<<저 자식? 괴상망측한걸루 들어왔소. 차차 알게 될게요.>>

 

하고 빙글빙글 웃었다. 그리고 벌렁 나가누우며 혼자말을 지껄였다.

 

<<이런 제기, 담배구경을 못하구 살다니!>>

 

이때 저쪽에서 무슨 우습강스러운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하고 현덕순이 그쪽을 바라보니 고대 자기한테 왔다가 쫓겨난 괴물 조춘생이가 그 기형적으로 몽탁한 팔다리를 쳐들었다 놓았다하며 제 노래가락에 맞추어 춤을 추고있었다. 그 모양이 우스워서 죄수들이 모두 키들키들 웃으니 작업장에서는 십장노릇을 하는 조장이 쫓아와서 괴물의 깃고대를 낚아채였다.

 

<<조신하게 앉았어! 간수님 사설하신다!>>

 

점심시간이 다되여 오전작업이 끝날 때까지 조춘생이는 혼자 빈들거리기만 하고 종내 일손을 다시 잡지 아니하였다. 다른 죄수가 그따위짓을 하였으면 주리대경을 쳐도 단단히 쳤을것인데 조춘생이만은 호외로 치는지 간수도 가랠 생각을 않고 가만 내버려두었다. 점심시간에 강낭떡들을 노나주는데 조춘생이가 허둥허둥 앞으로 대들며

 

<<내 두냥, 내 두냥! 나두 일했어! 내 두냥!>>

 

하고 소리치니 조장이 깔보는투로

 

<<옜다 이놈아, 어서 받아 처먹어라.>>

 

뇌까리고 두냥짜리 강낭떡 한개를 훌쩍 던져주었다.

 

감옥에서는 로동의 경중에 따라 식량의 공급량도 층하가 많았다. 일을 안하는자에게는 일률적으로 아침-2냥, 낮-3냥, 저녁-4냥이였다. 조춘생이같이 젊고 튼튼한 놈이 작은 크림통만한 2냥짜리 강낭떡 한개를 겨우 얻어먹고 점심때까지 기다리자면 허기증이 나서 하늘이 노래보인다. 그런데다가 또 점심에 3냥짜리 한개를 두꺼비 파리 잡아먹듯, 범 나비 잡아먹듯하고나면 간에 기별도 채 아니 가서 저녁때가지 기다리기가 참으로 난감하였다. 그런데 감옥의 규칙이 무릇 아무 일이나 일을 한자에게는 점심에 <<가량(加量)>>이라고 하여 2냥짜리 강낭떡 한개씩을 더 주게 되여있었다. 조춘생이가 일을 나가겠다고 머리악을 쓰는것은 바로 그때문이라는것이였다. 그리고 다른 사라들이 그를 작업에 참가하지 못하게 밀막는것은 그가 처음 얼마동안만 일을 하고 그 나머지는 다 춤추고 노래부르고 빈들거려서 일에 방해만 되기때문이라는것이였다. 현덕순이 납득이 잘 안 가서

 

<<그렇다면 어째서 엄하게 단속을 안하우 감옥당국에서?>>

 

하고 조장에게 물어보니 조장은 말 같지 않게 여기는 모양으로

 

<<단속? 미치놈인데... 단속을 어떻게 하우?>>

 

하고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외쳤다.

 

<<걔가 미친놈이요?>>

 

<<그럼 당신 보기엔 성한 놈 같소?>>

 

위생소에 일을 보러 올라갔다가 전임의사를 만나서 현덕순은 다시한번 물어보았다.

 

<<여보, 우리 중대의 조춘생이가 그게 정신병자요?>>

 

<<괴물 말이지? 응.>>

 

<<전신병자라구? 아니 그럼 정신병자를 어떻게 감옥에 가두우?>>

 

<<그래두 정식으루 버젓이 10년판결을 받구 왔으니 어떡하우?>>

 

<<10년? 한두해두 아니구 10년씩이나!>>

 

<<어째, 당신이 개 대신 불평을 하는거요?>>

 

<<우리는 의사가 아니요? 직업적량심이...>>

 

<<<직업적량심이> 이보, 우리는 죄수요 죄수! 알았소? 프로레타리아독재의 대상이란 말이요 알겠소? 괜히 말 한마디 뻥긋 잘못했다간 가형(加刑)이 가려(可虑)요 가형이 가려야! 하물며 당신은 반혁명인데... 더더군다나. 그저 눈 지그시 감구 어물어물 무사주의루 살아나가는게... 이 감옥에서의 처세술이란 말이요. 그래 요만것두 당신 아직 모르구있소?>>

 

<<그렇지만...>>

 

<<그렇지만은 무슨 그렇지만이야! -거기... 당신네 중대에... 렌트겐투시를 할치가 있다지? 이따 오후에 데리구 오우.>>

 

로약대에서는 다른 중대에서처럼 그렇게 로동을 세우지 않았다. 환자나 고령자들은 하면 하고 말면 마는 정도였다. 그래서 자연 죄수들끼리 한담할 기회도 다른 중대보다는 많았다. 여러 입을 통하여-본인의 종작없는 말꼬투리를 통하여-조춘생이의 범죄적사실을 알고 현덕순은 너무도 기가 막혀서 한동안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조춘생이는 한족으로서 교하현 농촌사람인데 일을 저지른것은 1971년 그가 21살 때의 일이였다. 일찌기 부모를 여의고 숙부집에 얹혀사는데 소학교를 한 4년 다녀보아서 그는 쉬운 글자도 좀 알고있었다. 의지가지없는 신세에 인물마저 보잘것이 없다느니보다는 아주 기형적으로 생긴데다가 그는 항심까지 없었다. 들일을 계속 반나절도 채 못하고 진력이 나서 혼자 씨벌씨벌 지껄이며 온데로 돌아다니니가 일쑤였다. 그러한 그에게 딸을 줄 사람은 물론 이 세상에 하나도 있지 않았다. 하건만 그의 이성에 대한 욕구는 병적으로 왕성하여 도저히 억제하기가 어려울 지경이였다. 마침 이웃에 십팔구세 난 처녀 하나가 살고있어서 그는 속으로 은근히 그 처녀를 사모하였다. 하지만 처녀는 그의 그러한 속내를 알리도 없거니와 애당초부터 업신여겨서 그를 한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한데 불행하게도 그 처녀가 무슨 병으로 이팔청춘 젊은 나이에 툭 죽어버렸다. 부모는 그 딸을 울며불며 뒤산에 갖다 묻었다. 이것을 눈여거둔 조춘생이가 혼자 속으로 궁리하였다.

 

(그 아까운 계집애를 땅속에 묻어두다니?)

 

(그럴것없이 내가 업어다 데리구 살자... 임자두 없는데.)

 

밤이 되기를 기다려서 조춘생이는 혼자 몰래 괭이 하나를 들고 뒤산으로 올라갔다. 무덤을 파헤치고 관을 빼개고 죽은 처녀를 들어내였다. 새신랑이 된 기분으로 시체를 업고 산을 내려와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대로 업고 집안에 들어갔다가는 성미 괴까다로운 작은아버지에게 야단을 맞을것 같았다. 그래서 업고 온 색시를 당분간 어디다 좀 감추어두기로 하였다. 성한 사람의짓이 아니다. 마땅한 자리가 얼른 떠오르지 않아서 림시 풋나무낟가리밑에다 뉘여두고 일단 집안에 들어와 고단한김에 네활개를 벌리고 한잠을 옳게 잤다. 아침 일찌기 작은어머니가 일어나 밥을 지으려고 마당에 나가서 풋나무단을 끌어들이려니까 그밑에-분명히 죽은걸로 아는-이웃집 처녀아이가 누워있다. 기절초풍한 작은어머니는 뒤로 벌렁 나자빠져서 다시는 깨여나지를 못하였다. 지병으로 심장병이 있었던 까닭에 너무 놀라는통에 그 충격으로 심장마비를 일으켰던것이였다. 령감이 아무리 기다려도 마누라가 아침밥을 짓는 동정이 없어서 끙끙거리며 밖에를 나가보니

 

(엉, 이게 웬 일이냐?)

 

마당에 송장 둘이 가로세로 누워있지 않는가!

 

<<그래서 저 자식은 지금두 자꾸 시부렁시부렁 저의 작은아버지를 원망하지요.>>

 

<<그럼 어떡허우 마누라가 갑작죽음을 했는데? 모르긴 해두 그령감 아마 대들보가 휘는것 같았을게요.>>

 

<<난 정말이지 이런 이야긴 난생처음 들어보우.>>

 

<<희한한 이야기지요.>>

 

<<분명히 미친놈의짓인데...>>

 

<<누가 아니라우.>>

 

(그렇다면?...)

 

현덕순은 자기가 난문제에 부딪쳤다는것을 더욱더 강렬히 느꼈다. 그의 마음눈앞에서는 벌써 의사의 직업적량심과 반혁명인지 개나발인지 하는 어마한 마귀가 서로 노리며 맞겨룰 차비를 하고있었다.

 

3

현덕순은 로약대 150명 사람의 건강을 책임진 자기가 맡겨진 직무에 태만하다는것은 용서할수 없는 죄행이라고 생각하였다. 정신병자를 징역을 살리는것은 국가의 수치라고 생각하였다. 의사가 그것을 알면서도 자기 일신의 안위를 고려하여 모르는체하는것은 범죄나 다를것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제길할, 이런 말썽거리가... 하필이면... 내게 차례질건 뭐람!)

 

조춘생이가 정신병자라는것이 더는 의심할나위가 없게 되였을 때 현덕순은 위생소로 행정의사를 찾아갔다. 행정의사는 물론 국가의 간부다.

 

<<저의 중대... 3중대의 조춘생이를... 아무래두 한번 정신검사를 해봐야겠습니다.>>

 

<<누구를 정신검사를 해봐?>>

 

<<저 3중대... 로약대의... 조춘생이 말입니다. 괴물...>>

 

<<어, 그 녀석이 징역을 사는지가 벌써 몇해째인가? 한 네댓해 잘되잖았나! 그런데 이제 와서 새삼스레 무슨?...>>

 

<<아직 확진만 못 내렸지... 정신병이 대개 틀림없습니다.>>

 

행정의사가 근시안경너머로 주제넘은 죄수의사를 한번 훑어보았다. 그리고 현연하게 불만이 어린 얼굴로 게먹었다.

 

<<다른 의사들은 다 눈이 멀었단 말인가?>>

 

<<아니올시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니면 무슨 뜻인가?>>

 

<<저 단지...>>

 

<<저 단지 뭐?...>>

 

<<정신병자를 복역을 시킨다면 법적으루 봐서... 어떤가 해서 그러는겁니다. 의사의 립장으루... 몰랐으면 모르되... 일단 안 이상은...>>

 

<<시비거리를 장만하려는건가 앙?>>

 

<<천만의 말씀입니다. 제가 언감생심...>>

 

<<돌아가서 다시한번 잘 생각해봐.>>

 

<<녜.>>

 

<<신분을 잊지 말두룩.>>

 

<<녜.>>

 

<<인민앞에 지은 죄를 철저히 한번 뉘우쳐보두룩.>>

 

<<녜.>>

 

현덕순은 코 떼서 주머니에 넣고 물러났다. 죄수의 신분이라는것을 뼈골에 사무치게 느꼈다.

 

<<직업적량심? 여보, 우리는 죄수요 죄수! 프로레타리아독재의 대상이란 말이요! 알았소?>> 하던 전임의사가

 

(과시 물계가 환한 대선배였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의기저상한 현덕순의 파김치적상태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그는 본시 칠전팔기하는 만만찮은 의지의 소유자였었다.

 

(어떡하면 정신검사를 시켜볼수 있을가? 전문의사에게 한번 보이기만 하면 락자 없을텐데...)

 

(내가 이거 부질없는짓을 하는건 아닌가? 공연히 뾰족하게 굴다가... 모난 돌이 정 맞는다지?)

 

(아니아니 그럴수없어. 끝까지 해봐야 해! 진리는 견지를 하는게 원칙이야!)

 

현덕순이 이와 같이 내심투쟁을 하고있을즈음 아무것도 모르고 그날그날 배고픈 세월을 보내는 조춘생이가 또 상식에 어그러진짓을 하여 다른 죄수들의 반축을 샀다.

 

감옥은 불야성이다. 죄수들의 탈옥을 경계하여 밤만 되면 어두운 구석이 없도록 사면팔방에 온통 전등불을 밝히기때문이다. 밤사이 그 전등불에 부나비들이 날아들었다가 떨어져죽은것이 아침에 일어나보니 땅바닥에 늘비하였다. 그 숱한 부나비를 조춘생이가 뽕나무밭에서 오디를 주어먹듯 허겁스레 싹 다 주어먹은것이다.

 

<<야 괴물아, 맛있디?>>

 

<<맛이 아마 육포 같았을테지!>>

 

<<파리두 좀 잡아먹어보지?>>

 

<<영양보충이 과도해서 벌써 군턱이 졌구나. 어디 좀 만져보자, 이리 나서라.>>

 

<<왜들 이러우? 같잖게! 저리 좀 비켜서우!>>

 

<<괴물님 나오신다. 어서 길을 틔워드려라!>>

 

<<와하하!>>

 

<<킬킬!... 킬킬...>>

 

메마른 감옥살이에 진이 난 죄수들에게는 한바탕 심심풀이가 잘되였다.

 

이 사건이 현덕순의 결심을 더욱 굳혀주었다.

 

(어떻게 해서라두 해방을 시켜줘야지!)

 

중대는 중대장과 지도원 그리고 공안계통을 대표하는 간사 하나-이렇게 셋이서 맡고있었다. 그래 우선 중대장에게 반영을 해보기로 하였다.

 

<<뭐라구? 정신검사를 시키자구? 어째 행정의사한테 제의하잖고?>>

 

<<거기선 퇴짜를 맞았습니다.>>

 

<<그런걸 나한테 또 제의하는건 무슨 뜻이야?>>

 

<<무슨 별뜻이야 있겠습니까. 그저...>>

 

<<조심하라두. 정치범을 죄수의사를 시킨것 특전이란걸 잊지말라구. 공연히...>>

 

담벼락하고 말하는 셈이였다. 현덕순은 또 한번 뒤통수를 긁고 돌아서야 하였다.

 

(이런 제기!)

 

4

현덕순이 거듭되는 좌절에 고민을 하고있을즈음 아무것도 모르는 조춘생이는 상식에서 벗어난 우습강스러운짓으로 부단히 사람들을 웃기였다. 오락에 주린 죄수들은 그를 보기만 하면

 

<<야 괴물, 노래 한마디 불러라.>>

 

<<여 괴물, 춤 한번 더 춰라.>>

 

<<인석아, 네 그 업어온 색시가 널 보구 좋다던?>>

 

<<인물이 어떻나... 곱니?>>

 

이와 같이 부추기고 놀려먹는것으로 락을 삼았다. 전 감옥 일곱개 중대 천여명 죄수에 <<괴물>>을 모르는자는 하나도 없으리만큼 조춘생은 인기가 있었다. 감옥안에 없지 못할 명물로, 웃음가마리로 되였었다.

 

바깥사회에 있을 때 같으면 글 몇줄 끄적거리면 환자를 정신검사 한번 시키는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그런데 이 감옥에서는 그것이 하늘의 별따기였다. 안과 밖이 이 정도로 판이할줄은 그는 일찌기 몰랐다.

 

두고두고 궁리한 끝에 현덕순은 지도원을 찾아서 한번 최후의 호소를 해보기로 하였다.

 

<<무어야? 사회주의적인도주의에 대한 배려라구? 주제넘은 수작! 그래 이렇게 계속 반혁명독기를 뿜을 작정인가? 좋아 그럼... 돌아가 기다려!>>

 

제 입으로 빌어서 현덕순은 마침내 <<반성>>을 하게 되였다. 감옥안에서 반성이란 며칠이고 몇주일이고 꼼짝달싹 못하고 정좌를 하고 앉아서 자기의 저지른 죄를 반성하는것인데 주야로 옆에 감시인이 딱 붙어있는 까닭에 변소를 가는데도 그놈의 딴군녀석을 떼치지 못하고 그대로 달고 다녀야만 하였다. 반성을 하는 놈은 죄수중의 또 쥐수이므로 의례 보통죄수들의 하대와 업신여김을 받기 마련이였다. 언젠가 꾀병하는 놈에게 달라는 약을 주지 않은적이 있었는데 그놈이 잊지 않고 와서 현덕순을 씨까슬렀다.

 

<<의사랍시구 우쭐렁대더니만... 잘코사니구먼. 맛이 어때?>>

 

반성하는 놈은 주먹을 못 놀리는것은 더 말할것도 없거니와 말대꾸 한마디도 못하게 되여있었으므로 절대로 안전하였다. 우리에 갇힌 호랑이를 밖에 서서 막대기로 쑤시는거나 마찬가지였다.

 

현덕순이 어째서 반성을 하게 되였는지 알턱이 없는 조춘생이도 덩달아 구경을 와가지고

 

<<여보 의사, 당신두 도적질을 하우? 손버릇이 사납군그래.>>

 

<<이번에 아주 녹장이 나는구먼. 겉보기엔 멀쩡한게... 거참 모를 일이야.>>

 

이따위 소리를 지껄이며 헤식게 히죽히죽 웃는것이였다. 저능인 조춘생이는 감옥안에서 흔히 있듯이 현덕순도 도적질을 한것이 들통이 나서 반성을 하는줄로 지레짐작을 하고있었던것이다. 감시하는 딴군녀석(<<만주국>> 경찰출신)이

 

<<야 괴물 이놈아, 인제 고만 씨벌거리구 썩 물러가라, 또 이 옮길가봐 무섭다.>>

 

하고 타박을 주니 조춘생이는 입술을 비쭉 내밀며

 

<<내 이는 복이야. 달래두 안 주겠다. 체!>>

 

하고 어슬렁어슬렁 저쪽으로 가버렸다.

 

반성을 하고있는 현덕순은 그 꼴을 보고 한편 우습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 슬그머니 화도 좀 났다.

 

(저런걸 위해서 내가 이 단련을 받다니)

 

2주일의 반성이 끝나기도전에 새 죄수의사가 중대의사로 배치되여와서 현덕순은 원래 자리에서 밀려나서 일반죄수로 격하되였다. 그 지긋지긋한 반성이 풀린 뒤에 새로 온 의사와 인사수작을 나누었다.(반성중에는 서로 보고도 말을 못하였다) 새 의사는 대학시절의 후배로서 녀자문제로 징역 5년의 언도를 받았었다.

 

<<도대체 반성은... 무슨 일루 했습니까?>>

 

<<미친놈 정신검사 좀 시키자다가.>>

 

<<이 중대에... 그런게?>>

 

<<응.>>

 

<<답답하구먼요.>>

 

<<누가 아니래여.>>

 

그러나 하늘이 아주 무심하지는 않은 모양이였다. 강청이 일파가 권좌에서 나떨어졌다는 소식이 봄철의 우뢰비처럼 감옥의 지붕을 두드리고 높은 담을 두드리고 마당을 두드리고 그리고 사람들의 굳게 닫혀 녹이 쓸어버린 마음의 쇠문을 두드렸다. 현덕순은 미결수로 4년, 기결수로 3년-모두 7년의 령어생활을 치른 뒤에 무죄석방으로 명예를 회복하게 되였다. 무참하게 유린당하였던 인간의 존엄을 되찾았다.

 

현덕순은 마중온 안해와 아들을 대합실에 앉혀놓고(안해는 남편 없는 7년 동안의 고생살이에 주름살과 흰 머리카락이 부쩍 늘었고 그리고 아들은 몰라보리만큼 크고 또 로성해졌었다) 행정의사를 찾아보았다.

 

<<아 이거 현선생, 반갑습니다. 축하합니다.>>

 

손바닥을 뒤집은것 같은 행정의사의 태도에 현덕순은 속으로 쓴웃음을 웃었다. 그러나 곧

 

(세상이란 이런거라니.) 하고 석연히 초탈하였다.

 

<<저 다른게 아니구... 3중대 그 정신병자... 조춘생이 문제를 좀 어떻게...>>

 

현덕순이 말을 채 마치기도전에 행정의사는

 

<<아 념려 마십시오, 념려 마십시오. 그건 내가 책임지구 처리 할테니까... 현선생은 그런 일에 더 머리를 안 쓰셔두 됩니다. 가급적 속히 처리해서... 그 결과를 내 알려드리오리다. 워낙 법원에두 문제가 있습지요. 그런걸 글쎄 어떻게... 나 참! 현선생두 짐작하시다싶이... 여기 이렇게 말단단위에서 일을 하자면... 남모르는 고충이 정말이지 적잖습니다. 답답할 때가 많습지요.>>

 

하고 수다스레 발뺌수작을 늘어놓았다.

 

<<그럼 부탁합니다. 고맙습니다.>>

 

<<천만에 천만에, 그럼 우리 다시 만나십시다. 안녕히!>>

 

달포가량 지나서 현덕순은 병원에서 전화를 받았다.

 

<<아 녜 그렇습니다. 누구시라구요? 아 오래간만입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예예... 아 그래서요. 출옥은 했는데... 돌아갈 집이 없다구요? 그래서...>>

 

전화는 감옥의 행정의사가 걸어온것이데 조춘생이가 출옥은 하였으나 받아주겠다는 사람이 없어서 할수없이 <<취업대>>에 취업을 시키기로 결정하였다는것이였다. 취업대란 만기출옥을 한 사람으로 교양개조가 잘되지 못하였거나 또는 갈데가 없는 사람들을 수용하여 일자리를 마련해주는 시설이였다.

 

<<그렇지만 정신병자를 그대루 둔다는 법은 없다니까... 우선 병부터 고쳐주려구... 정신병원에 입원을 시켰습니다.>>

 

<<천만에 천만에...>>

 

일요일날 현덕순이 과자 한봉지와 사탕 한봉지를 사가지고 정신병원으로 그 말썽 많던 감옥친구-조춘생이를 보러 왔다.

 

<<조춘생 면회!>>

 

간호원의 웨침소리와 함께 면회실에 들어서는 조춘생이를 보니 되는대로 걸친 환자옷에는 벌써 만국지도 쇰직하게 얼룩이 가 있었다. 혈색은 검붉은데 갓 깎은 상고머리가 눈을 끌었다.

 

<<조춘생, 너 날 알아보겠니?>>

 

<<그럼 몰라봐? 당신 의사가 아니요. 도적질하구 반성하던...>>

 

문어구에 섰던 간호원이 놀라서 현덕순을 새삼스레 훑어보았다. 그 눈에는 력연히 씌여있었다-

 

(알구보니 멀쩡한 도적놈이였구만!)

 

<<옳다 옳아!>>

 

하고 현덕순이 하하 웃으니 조춘생이는 좀 미심쩍은 얼굴로

 

<<그래 당신 여긴 왜 왔소?>>

 

하고 물었다.

 

<<너 보러 왔지 왜 왔겠니?>>

 

<<나를 보러 와? 무슨 일루?>>

 

<<이걸 갖다주려구.>>

 

<<그게 뭔데?>>

 

<<과자, 사탕.>>

 

조춘생의 두눈에 불이 반짝 켜졌다.

 

<<어서 이리 내우.>>

 

<<옜다.>>

 

<<히히!... 우리 의사가 제일이야.>>

 

조춘생이는 눅진눅진한 진과자를 게걸스레 입안에 쓸어넣고 한동안 꺼귀꺼귀 씹다가 문득 생각는듯이 두눈을 찌긋찌긋해가며

 

<<여보 의사, 다음번에 올 때두 좀 훔쳐다주우.>>

 

하고 아주 능갈치게 말하는것이였다.

 

현덕순은 거뜬한 기분으로 병원문을 나섰다.

김학철전집4-태항산록-균렬(龟裂) -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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