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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철전집4-태항산록-문학도(제2권)

 

 

김학철전집4-태항산록-전란속의 녀인들 - 소설게시판 - 모이자 한민족 커뮤니티

소설 전란속의 녀인들 하북성 찬황(赞皇)경내의 야초만(野草湾은 태항산록에서 불과 10여리 떨어진 장거리인데 일본군은 거기다 태항산항일근거지를 겨냥하는 전초기지-거점을 구축해놓고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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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철전집4-태항산록-문학도

 

소설

문학도

 

1

홍설걸이는 림시공으로 주로 청결차가 쓰레기통을 쳐갈 때 지저분하게 흘린것들을 깨끗이 쓸어담는 일을 하고있었다. 그러니까 청결차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뒤거두매질을 한다는 말이 되는것이다. 남들은 그가 하는 일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너절하다고 깔볼수도 있지마는 그는 그나름으로 배짱이 있었다. 언젠가 <<세계지식화보>>에서 빠리의 청결공들이 파업을 하여 그 아름다운 빠리의 거리거리가 온통 쓰레기천지로 되여버린 사진을 본 뒤부터는 그 배짱이 더욱 세여졌었다. 말쑥하게 차린 자기또래의 젊은이들이 젠체하고 자기를 반원형으로 에돌아가는것을 보면 그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내가 아니면 너희들은 쓰레기에 묻혀 살아야 해. 알았니?)

 

홍성걸이가 한번은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고있는 일들을 글로 다듬어 적어서-소설의 형식으로 엮어가지고-허허실실로 어느 잡지사에 보내보았더니 뜻밖에도 그것이 게재가 되였었다(본래의 모습을 거의 알아보기가 어려울만큼 수정이 되여있기는 하였지만서도). 단 신기하게도 작자의 이름 석자만은-편집자가 아차실수를 하였는지-한자도 수정을 하지 않고 그대로 내였었다.

 

이에 고무를 받아서 그는 쓰레기통에다 쓰레기를 퍼담는 일 이상으로 원고지의 칸칸을 글자로 메워나가는 일에 열중하게 되였다. 하건만 그 한편이 첫번이자 마지막으로 다시는 더 게재가 되지 않아서 그는 감질이 나고 짜증이 났다. 나중에는 울화까지 치밀었다.

 

홍성걸이가 얼마 아니하여 같은 림시공중에서 저와 처지가 비슷한 친구 하나를 발견하게 되였다. 윤창환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친구도 첫번이자 마지막으로 글 한편을-소설이라고 일컫기는 외람스러운 글 한편을-발표해보았는데 웬 까닭인지 그후는 아주 감감무소식-함흥차사라는것이였다. 동병상련이랄지 <<다리 부러진 노루 한굴에 모인다>>랄지 아무튼 두 사람은 남달리 상종이 잦게 되였다.

 

<<우리 끝까지 견지해보자구.>>

<<다시 이를 말인가.>>

 

낚시군도 단 한마리의 새끼붕어라도 낚아본 늪에는 언제나 미련을 갖기 마련이였다.

 

<<이게 그래 조화든 일 아니야? 첫말만 명중이 되구... 그 나머지는 다 헛불이라니.>>

<<그러게 말이지.>>

<<여기 무슨 음모가 있는건 아닐가?>>

<<설마한들 그렇게까지야.>>

 

홍성걸이와 윤창한이는 서로 뜻이 맞아서 남들이 부러워할만큼 가깝게 사귀였다. 막연한 친구로 되였다.

 

<<아니 우리 이럴게 아니라... 어디 가서 지도를 좀 받아보자. 눈먼 놈 갈밭에 든것처럼... 자꾸 헤더듬지만 말구.>>

<<좋겠지. 그렇지만 지도를... 어디 가서 받는다니?>>

<<넨장할, 이왕이면 좀 큼직한데 가 달라붙어보자꾸나. 잔고기가시 세다구... 시시껄렁한것들이 더 젠척하는 법이니까.>>

<<그건 그래.>>

 

두 사람은 큰마음을 먹고 이름난 소설가 백운산을 한번 찾아보기로 하였다.

 

<<이거 망신이나 하지 않을가?>>

<<아닌게아니라 좀 켕긴다야.>>

 

그러나 벼르던것보다는 낳기는 더 쉬웠다. 백운산은 아주 소탈하게 초면의 두 문학청년을 맞아준것이다. 백운산의 거실에는 정면벽에 경고표지 하나가 눈에 띄게 붙여있었다.

 

담배를 피우지 말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No smoking, thank you

 

(오, 외국손님들이 드나드는 모양이구나.)

 

홍성걸이와 윤창환이는 대번에 짐작하였다.

 

<<내가 기관지가 좀 좋지 못해서 담배연기를 맡지 못하니까... 이 점을 향해해주기를 바라오.>>

 

백발이 성성한 백운산이 웃는 얼굴로 미안스레 량해를 구하였다.

 

<<녜녜, 저희는 애당초부터 담배라는걸 피울줄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더욱 좋구.>>

 

말하고 백운산은 웃으면서 한마디를 덧붙이는것이였다.

 

<<외국사람들은 가치담배를 <암가치>라구 하지요. 암을 유발한다구 말이요.>>

 

초면인사를 마친 뒤에 용건으로 들어가서 홍성걸이가 떠듬떠듬 사연을 이야기하고나서

 

<<...그래 결국은 둘이 다 허허벌판에서 눈보라를 만난것처럼... 향방을 모르구 헤더듬는 셈입지요.>>

 

하고 말끝을 맺으니 백운산은 유심히 듣고있다가 고개를 끄덕끄덕하였다.

 

<<발표된것들은 나두 읽어봤는데...>>

<<녜? 선생님께서... 읽어보셨다구요?>>

 

두 사람은 놀라서 눈들을 크게 떴다. 하찮은 자기들의 이른바 작품을 백운산 같은 대가가 읽어주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하였던것이다. -두 사람은 다같이 황감한 영광에 휩싸였다.

 

<<아주 진실하게 반영했더군. 거침없는... 있는 사실 그대루를...>>

<<황감합니다.>>

<<그런데 변변치 못한걸...>>

<<아니아니 정말 잘들 썼어요.>>

 

백운산은 가볍게 손을 흔들고 다시 물었다.

 

<<그래 그다음것들은 어떤 소재를 취급했던가요?...>>

<<제 그다음것 하나는... 젊은 과부에 관한겁니다. 그리구 또 하나는... 항일전쟁을 다루었구요.>>

<<저는 시어머니, 며느리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그리구 또 하나는... 항일전쟁을 다루었구요.>>

 

홍, 윤 량인의 얼굴들이 지지벌개지며 하는 말을 듣고 백운산은 허허 웃었다.

 

<<인제 알겠소. 왜 그다음것들이 중시를 받지 못했는지.>>

 

이렇게 허두를 떼여놓고 백운산은 두 사람이 다 깨달을수 있도록 알기 쉬운 말로 차근차근 일깨워주었다.

 

<<처녀작들은 다 자기가 익히 아는 사실을 진실하게 반영했으니까 독자들에게 친근감을 주었어지만... 그다음것들은 그렇지가 못하지요. 아무리 필력이 있더라 해두 익숙하지 못한것을 주관적으루 엮으면 진실감이 부족하단 말이요. 그러니까 편집부의 반응이 랭담한건... 대개 이때문일게요.>>

 

두 사람은 깨도가 되여서

 

<<참 그렇겠습니다.>>

<<그런걸 전 또... 멋을 부리느라구... 일부러 그런 소재를 골랐습지요.>>

 

한마디씩 지껄이고 뒤통수를 긇으니 백운산은 웃음면서

 

<<초학자들에겐 그것두 다 좋은 경험이지요.>>

 

말하고 잇달아서

 

<<독일의 위대한 문학가 괴테가 자기 작품의 주인공의 입을 빌어서 한 말이 있지요. <만약 그 사슬이/ 그대의 진심에서 우러나온것이 아니면 그대는/ 그것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한군데다 얽어매지는 못하리라>. -우리 문학도들이 한번 음미해볼 가치가 있는 말이지요. 안 그렇게들 생각하오?>>

 

하고 백운산은 두 젊은 초학자의 얼굴을 번갈아 보는것이였다.

 

2

<<야 우리가 오늘 결심을 내리길 잘했다.>>

<<누가 아니라니.>>

<<역시 큼직한데 가 달라붙어야 먹을 알이 있다니까.>>

<<백운산은 참말이지 선성 듣던것보다 인물이 더 낫더라.>>

<<옳은 말이야.>>

<<난 인제 정말 신심이 생긴다.>>

<<나두.>>

 

홍,윤 두 사람이 이와 같이 씩둑씩둑 지껄이며 자전거들을 타고 오는데 맞은편에서 불시에 비까번쩍하는 오토바이 한대가 달려왔다. 그 일본제 <<스즈끼>>를 모는것은 담홍색헬메트를 멋이 찔찔 흐르게 쓴 청년이다. 그 청년이 눈결에 언뜻 두 사람을 알아보자 곧 급정거를 하면서

 

<<야, 너희들 어디 가니?>>

 

큰소리로 알은체를 하였다.

 

<<아니, 너 정태진이 아니야?>>

 

<<그 자식 참... 깜짝 놀랐네. 난 또 무슨 대단한 량반이 검문을 하는줄 알았다.>>

 

두 사람이 롱지거리를 하며 각각 자전거에서 내리는데 그 정태진이라는 청년은 오토바이를 그대루 탄채 두발로 땅을 디디고

 

<<왜 무슨 뒤줄이 켕길 일이라두 했니?>>

 

하고 마주보며 웃었다.

 

정태진이도 원래는 홍,윤들과 같은 림시공이였었는데 지난해 봄에 그만두고 무역상인 저의 형을 도와 무슨 장사를 하고있었다.

 

<<너 이 자식 때벗이를 아주 단단히 했구나.>>

<<기름이 찌르르 흐르잖니?>>

<<아하하! 그러냐?>>

 

하고 정태진이는 제몸을 한번 굽어보고나서 뽐내는 기색이 아주 없지는 않은투루

 

<<너희들 별일 없거든 나하구 우리 집에나 가자, 한턱 내마.>>

<<우리 집 사림하는 꼴두 한번 좀 봐야지.>>

 

하고 두 친구를 끌었다.

 

<<아닌게아니라 한번 가볼 생각두 없지 않았다.>>

<<가자 가자. 돼지우리에 주석자물쇠를 잠가두 제멋이라는데... 어떡허구 사나 한번 가보자.>>

 

자전거 두대가 곧 뒤돌아서서 슬렁슬렁 달리는 오토바이를 따라갔다. 값진 새 오토바이와 다 낡은 두 자전거가 대조적으로 눈에 띄여서 잘 어울리지 않는 일행 세 사람이였다.

 

홍성걸이와 윤창한이는 집들이를 한지 이제 두달밖에 안되였다는, 벼락부자냄새를 강하게 풍기는 어마한 새 이층집에 눌리워 목이 움치러지는 느낌이였다.(정태진이는 나이가 근 20살이나 틀리는 형의 집에 얹혀 살았었다) 이 역시 벼락부자냄새가 진동하는듯한 정태진이의 어머니 같은 형수가 치마바람이 나게 달려나와 시동생이 끌고 온 허술한 옷차림의 두 친구를 정도 이상 반갑게 맞아들였다. 집자랑, 세간자랑을 할 대상이 더 없어서 무료해하던중인데 마침 잘 왔다는 기색이 그 얼굴에 환하였다.

 

<<어서들 올라와요! 아니 무엇들 하구있지?>>

 

두 총각은 렬등감에 지지눌리우며 주인이 끄는대로 으리으리한 집안에 들어와 권하는 쏘파에 어색스레 걸터앉았다.

 

(저 형수아주머니만 아니면 이 지경 구속스럽진 않으련만.)

 

둘이 다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였다. 그러자 슬그머니 반감마저 생겼다.

 

(같잖게 녀편네가 나서서 차치구 포치구 할건 뭐람!)

 

천연색텔레비죤, 스테레오록음기 따위의 각종 전기용품들로 무슨 전시장처럼 호기롭게 꾸며진 방안에서 떡 벌어진 대접을 받으면서 홍,윤 량인은 불현듯 대비를 해보지 않을수 없었다.

 

(2년 동안 장사를 한 정태진이 형제네 살람살이가 40년 동안 작가생활을 한 백운산을 열곱절두 더 릉가했구나. 아이구!)

 

그것은 소달구지가 <<도요다>> 5인승과 경주를 하겠다는거나 마찬가지의 웃음거리였다! 특히 윤창환이의 마음눈에는 글자 한자에 1전씩을 받으면서 돋보기를 쓰고 밤을 새워가며 원고지와 씨름을 하는 백운산의 몰골이 가련하기만 하였다.

 

<<야 그 자식 아주 팔자를 고쳤구나.>>

<<똑 뭐같이 생긴게... 복이 붙을데라군 없는지... 부모산소를 잘 썼냐?>>

<<미꾸라지가 룡된단 말 못 들어?>>

<<넨장할, 이런 세상에 굽석굽석 쓰레기를 치구있다니!>>

<<어째... 회심이 드는가?>>

<<아닌게아니라 회심두 든다야. 다같은 사람인데... 어디가 못났다구... 넨장할!>>

 

잘 먹었다는 인사하고 돌아오는 길에 홍,윤 두 친구는 이와같이 씩둑거렸다.

 

두어주일 가량 지나서의 일이다. 홍성걸이가 백운산이 일깨워 준대로 하나를 써가지고 윤창한이를 찾아 의논하였다.

 

<<넌 어떻게 됐니? 닌 그럭저럭 하나 뭉뚱그렸는데. 너두 됐거든 우리 백선생한테 한번 갖구 가서 좀 봐줍시사구 하자.>>

<<야야, 어느 하가에 그런 하늘의 별 따기를 하구있겠니! 난 기권했다. 하려거든 너 혼자나 해라.>>

<<이 자식이 오늘... 대낮에 무슨 잠꼬대야?>>

<<정말이라니가. 난 사실 말이지 지금 그럴 경향이 없다. 머리속에 다른게 꼴딱 들어차놔서.>>

<<다른게 꼴딱 들어차?>>

<<그렇다니까.>>

<<그 다른게란게... 뭐 말라뒈진게야 대관절?>>

<<뭔 뭐겠니? 돈벌이할 궁리지! 그 자식 참 깡통대가릴세!>>

<<너 그거 진담이냐?>>

<<내가 언제 너한테 허튼말 하던?>>

 

홍성걸이는 할 말이 없었다. 기가 막혔다. 입이 썼다.

 

(한 인간의 의지가 돈이 유혹앞에서 이다지두 취약하다니!)

 

그는 깊이 탄식하였다. 그러나 곧 또

 

(하긴 윤창한이의 택한 길이 옳은지두 모르지.) 하고 뒤쳐생각하기도 하였다.

 

(아니, 난 그래두 끝까지 이 길을 갈테다!)

 

그리하여 며칠후 홍성걸이는 불안한 마음을 안고 혼자서 백운산을 찾아갔다. 갖고 가는 몇십매 안되는 원고가 희망과 절망이 엇갈려들어서 자꾸 거뿐해졌다 묵직해졌다 하는것 같았다.

 

<<어째 친구 하나는 떼팽기치구?>>

 

백운산이 좀 의아스레 묻는 말을 홍성걸이는

 

<<녜, 저 다른 볼일이 좀 있어서... 같이 오지 못했습니다.>>

 

하고 얼버무렸다. 바른대로 대답을 올리기가 거북스럽기도 하였거니와 또 그럴 필요도 없을것 같아서였다.

 

<<이 원고는 내 시간을 내서 읽어볼테니까... 한주일후에 우리 다시 만나서 독후감을 나누기루 합시다.>>

 

그 한주일이 채 되기전에 홍성걸이는 친구 하나와 갈라지게 되였다. 윤창환이가 사직을 하고 어느 큰 개인상인에게 고용되여 머나먼 광주로 떠나간것이다. 일년에 한두번씩 돌아오게 된다는것이였다.

 

<<그럼 너 올 때 바나나나 좀 가져오나.>>

<<어렵잖지.>>

<<인제 뱀고기, 원숭이고기 다 먹어보게 됐구나.>>

<<그따위 징그러운걸 누가 먹는다던.>>

<<그래두 광동사람들은 네발 가진것 책상, 걸상만 빼놓구 다 먹구 날아다니는건 비행기만 빼놓구 다 먹는다더라.>>

<<허풍이다 그건, 아하하!...>>

 

독후감을 나누게 된 날 홍성걸이가 더는 기일수 없어서 백운산선생에게 이실직고를 한즉 백운산은

 

<<그래요?>>

 

하고 고개를 기울이고 한동안 생각해보다가

 

<<사회주의 36년에 이 강토에서 아직두 빈궁을 퇴치 못했으니까... 경제건설에 달라붙는거야 잘하는 일이지요.>>

 

하고 윤창환이의 행동을 긍정하였다. 그런 연후에 다시

 

<<그렇지만.>>

 

하고 <<단서(但书)>>를 붙이고나서 이렇게 말하는것이였다.

 

<<우리 문학도들은 단순하게 경제적효률만을 추구할수는 없지요. 우리의 목적은 인민대중에게 정신적재부를 공급하는데 있으니까. 배를 곯으면서두 창작에 몰두한 위대한 작가들의 선례를 우리는 허다하게 알구있거든요. 이건 작가뿐만이 아니지요. 맑스의 례를 들어두 그렇지... 맑스는 원래 철학박사였으니까 당시 그 사회에서 상류계에 속했지요. 하지만 맑스는 그 부유한 생활을 버리구 전당포의 단골손님노릇하는 빈궁한 생활을 택했단 말이요. 자기의 리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프로레타리아의 해방사업에 헌신하기 위해서. 그러게 우리 문학도들은 자기의 사업과 생활 문제가 상충할 때는 서슴없이 전자를 택하구 후자를 버려야 한단 말이요. 요만한 각오두 없이 문학도의 대렬에 끼이겠다는건 앉은뱅이가 등산대에 참가하겠다는거나 마찬가지의 웃음거리지요.>>

 

백운산의 이 몇마디 말에 홍성걸이는 크게 고무되여 자기가 걷고있는 길이 완전히 옳았다는 신심을 더욱더 굳히였다.

 

홍성걸이가 백운산의 지도를 받아가며 천신만고하여 써낸 단편소설이 어느 문학잡지 한 귀때기에 실리기까지에는 실로 예닐곱달이라는 만만찮은 시간이랄가 세월이랄가가 걸렸었다. 처녀작을 내놓던 때로부터는 무려 2년 반만이였다! 그래도 홍성걸이는 기뻤다. 마치 무슨 큰 벼슬이라도 한것 같이 사기가 올랐다. 하늘이 돈짝만하였다. 국수버섯 솟듯할 상투가 없어서 성화가 날 지경이였다.

 

<<야 임마 한턱 내라.>>

<<그저 뭉때릴 작정이냐?>>

<<내겠니 안 내겠니?>>

<<내마 내마. 이거 놔라, 이야야! 낸다는데두. 내면 되잖나?>>

<<어서 꼿꼿이 불고기집으루 모셔라.>>

<<녜녜... 쩔 맵지요.>>

 

복새판에 걸려서 한턱인지 두턱인지를 내다보니 지출이 초과되여 적자가 났다. 소같이 벌어서 쥐같이 먹으라는 속담을 깜박 잊고 그와는 정반대로 쥐같이 벌어서 소같이 먹은것이다. 그래도 홍성걸이는 후회를 하지 않았다. 그만큼 두번째 작품이 발표된것이 대견하였던것이다.

 

3

홍성걸이가 낮에는 쓰레기와 씨름하고 밤에는 원고지와 씨름하며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있는중에 어느덧 음력설이 닥쳐왔다. 객지살이하던 사람들이 설을 쇠러 돌아오느라고 주야로 붐비여서 철도국, 항운국, 자동차부들이 정신을 차리기 어려운 계절이 되였다. 어느날 느닷없이 밖에서 누군가

 

<<있니?>>

 

명토없이 소리쳐 물어서 홍성걸이가

 

<<누구야?>>

 

하고 만년필을 손에 든채 방문편으로 고개를 돌리니

 

<<누군 누구야? 방자스레... 냉큼 나와 맞아드릴게 아니라!>>

 

소리를 앞세우고 방안에 들어서는것은 얼른 알아보기가 어려울만큼 모양도 모습도 다 달라진, 신사복을 쭉 뺀 윤창한이였다.

 

<<어, 너냐?>>

<<어떠냐, 이만했으면> 영업소 부소장 한자리쯤은 문제없지?>>

 

하고 뻐기면서 윤창한이는

 

<<옜다 이거.>>

 

손에 들고 온 선물꾸러미를 앞으로 내밀었다.

 

<<신분에 알맞게 비행기를 잡숫구 오느라구... 바나나는 못 사왔다 짐이 돼서. 무게의 제한이 이만저만해야지. 하지만 이것두 괜찮은거니 그대루 받아둬라.>>

<<이 자식이 오늘 정말 희구젖히잖나.>>

<<아하하, 괜히 그저 한번 해보는 수작이다. 그렇지만 비행기는 정말 타구 왔다.>>

<<정말? 어디서 어디까지? ...>>

<<어디서 어디까진 어디서 어디까지야, 광주서 심양까지지.>>

<<그럼 심양서는?...>>

<<심양서야 물론 기차를 탔지. 그렇지만 난생처음 이번에 연석을 타봤다. 비행기구 연석이구 타는 맛이 다 그저그만이더라야.>>

<<시골뜨기가 얼떨떨했을테지. 촌닭 관청에 잡아다놓은것 같이.>>

<<앉아있는 영웅보다 떠다니는 거지가 낫다는 말 못 들었어? 너는 인제 아주 우물안의 개구리야, 우물안의 개구리.>>

<<떠다니는 거지야 어서 앉아라. 장승처럼 버티구 섰지 말구.>>

<<너 앉은 자리를 비켜다우. 내가 앉을테니.>>

<<그 자식 광주 가서 괴상한 버릇을 배워왔군. 어서 그래라, 자.>>

 

좌정하자 윤창한이가 우선 호주머니에서 권연갑부터 꺼내여 내밀어주면서

 

<<한대 피워보겠니?>>

 

하고 웃어서 홍성걸이는

 

<<너 담배 피우니?>>

 

하고 눈이 좀 둥그래질라 하였다.

 

<<대객에 초인사란 말 너 아니? 이게 없으면 손님접대를 할수 없거든. 그래서 배웠다. 술두 배우구.>>

<<술까지! 다 키운 자식 하나 아주 버렸군.>>

<<난 처음에 견습생의 입문이 무언가 했더니... 제1과가 별게 아니구... 바루 술, 담배질을 익히는거더구나.>>

<<그래 인젠 견습생을 면했니?>>

<<아직두 멀었다! 그렇게 쉽게? 아마 한 이태 근사를 잘 모아야 할것 같다.>>

<<그 일두 쉽지 않구나.>>

<<이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어.>>

<<하긴 그래.>>

<<대우는 적말없지만... 시간이 없어서 탈이다.>>

<<그렇게 바쁘냐?>>

<<글쎄 그동안 글 한줄 못 들여다봤다니까!>>

<<흥, 그렇구나.>>

 

윤창한이가 담배를 붙여물고

 

<<그래 넌 그동안 뭘 또 썼니?>>

 

하고 물어서 홍성걸이는 백운산의 지도밑에 천신만고하여 소설 한편을 발표하였다고 말하고 덧붙여서

 

<<그치들한테 끌려가 불고기집에서 턱을 내다가 5원 빚을 졌다니까.>>

 

하고 웃으니 윤창한이도

 

<<밑지는 장사 했구나. 망태기다!>>

 

하고 따라웃었다.

 

<<그래 광주에 가있으면서 녀자친구두 하나 못 사귀였니?>>

<<녀자친구가 다 뭐야!>>

<<왜?>>

<<아 우리 같은 견습생따위를 누가 거들떠보기나 한다던!>>

<<그렇게 눈들이 높으냐?>>

<<형편이 무인지경이라니까.>>

<<흠.>>

<<그 대신...>>

 

홍성걸이가 무슨 색다른 말이 나올것 같은 윤창한이의 입을 바라보았아.

 

<<우리 집에서 사진을 부쳐왔더라.>>

<<사진을? 무슨 사진을? ...>>

<<한번 보겠니? 내 색시감이란다.>>

<<어디 보자.>>

<<자, 이거다.>>

 

홍성걸이가 사진을 받아서 한눈 보자 대번에

 

<<이거 <올빼미>의 누이동생이 아니냐? 비단공장에 다니는...>>

 

하고 웨치듯이 말하니 윤창한이는

 

<<바루 봤다.>>

 

하고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말 다됐니?>>

<<웬걸. 이제 맞선을 한번 봐야지.>>

<<놓치지 말아, 색시감은 일등이다. 지금 침을 삼키는 놈이 한둘이 아니다.>>

<<나두 짐작하구있다.>>

<<그 자식, 인제 보니까 개천에 든 소루군.>>

<<아하하! ...>>

<<야 웃지 말아, 정 떨어진다.>>

<<아하하! ...>>

<<웃지 말란데두!>>

<<아하하! ...>>

 

한주일후에 윤창한이는 벼락같은 약혼식을 치르고 혼자 다시 광주로 떠났다.

 

홍성걸이는 다시 낮에는 쓰레기와 밤에는 원고지와 씨름하는것으로 그날그날을 보내게 되였다.

 

4

빠른것 같으면서도 더디고 또 더딘것 같으면서도 빠른 세월이 사정없이 흘러서 윤창한이의 첫아이-오누이쌍둥이의 첫돌이 되였다. 그러나 아이들의 아버지-윤창한이는 멀리 광주에 있었고 또 일이 바빠서 올수가 없었다. 그래 좀 싱겁기는 하였으나 결혼식때 둘러리를 섰던 관계로 홍성걸이가 그 돌잔치에 가 참석을 하였다. 석상에서 돌잡이들의 할머니인 윤창한이의 어머니가 홍성걸이를 보고

 

<<자네가 아마 우리 둘째하구 동갑이지?>>

 

하고 물어서 홍성걸이는

 

<<네 그렇습니다.>>

 

대답을 하는데 저도 모르게 얼굴이 좀 붉어졌다. 로총각들은 자격지심이 들어서 누가 나이를 물어보면 대개 이러하였다. 하지만 눈치가 좀 무딘편인 로파는 그런 사정을 헤아리지 않고 잼쳐 묻는것이였다.

 

<<생일이 어떻게 되던가 우리 둘째하구?>>

 

둘째란 윤창한이를 말하는것이다.

 

<<녜, 제가 한달 맏입니다.>>

 

홍성걸이는 참으로 난감하였다. 눈치 빠른 작은며느리-윤창한이의 안해가 시어머니에게 넌지시 눈짓을 하는데도 땅파기로 답답한 로파는 묻기만 위주하는것 같이 물어대였다.

 

<<그런데 어째 장가를 아니 가나?>>

<<녜, 차차 갑지요.>>

<<차차라니? 래년이면 서른살이 아닌가.>>

<<예, 그렇지만 지금은 다들...>>

 

홍성걸이가 쩔쩔매는것을 보다 못한 윤창한이의 안해가 얼른

 

<<어머니!>>

 

불러서 시어머니의 주의를

 

<<이것들 좀 보세요.>>

 

하고 두 돌쟁이에게 돌려놓아주었다.

 

진땀을 빼던 홍성걸이는 윤창한이의 젊은 안해에게 눈인사로 사의를 표하고 슬그머니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긴숨이 후유 나갔다.

 

(이놈의 로총각을 언제나 면한담!)

 

윤창한이가 결혼을 하고 첫아이-오누이쌍둥이를 보고 그리고 그 아이들의 첫돌이 돌아오는 동안 홍성걸이 신상에도 변화가 없지는 아니하였다. 첫째, 발표한 소설이 5편으로 늘어났고 둘째, 림시공이 고정공으로 승격을 하였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한가지 부족한것이 있었다. 부족도 이만저만한것이 아니라 아주 크게 부족한것이였다. 이때까지 장가를 못 든것이다. 들어보려고 애는 무척 썼지만 들어지지를 않은것이다.

 

홍성걸이가 한동안 혼자 서서 이생각저생각하다가 나중에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에라 속상한데 백선생한테나 한번 가보자.>>

 

백운산은 홍성걸이가 원고를 또 하나 써가지고 보아줍시사고 온줄 알고

 

<<어디?>>

 

하고 손을 내밀었다.

 

<<아닙니다.>>

 

<<그럼?>>

 

<<그저 좀 뵈러 왔습니다.>>

 

<<아 그래요.>>

 

하고 백운산은 다시 쏘파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홍성걸이가 말이 선뜻 나와주지 않아서

 

<<저...>>

 

하고 한동안 우물우물하다가 마음을 가다듬고 정식스레 입을 열었다.

 

<<선생님께 좀 여쭈어볼 말씀이 있어서 그럽니다만...>>

 

<<무슨? ...>>

 

백운산이 쏘파에 묻었던 웃음을 바로하고 홍성걸이를 바라보며 상가럽게 물었다.

 

<<말씀드리기 좀 쑥스럽습니다만...>>

 

<<어서 말해보우. 우물쭈물하지 말구, 사내대장부답게.>>

 

백운산이 웃음의 소리로 격려를 해주는데 용기를 얻어서 홍성걸이는 자기의 불우하고 가련하고 억울한 련애사(恋爱史)를 다 토설하였다.

 

<<...색시감들이야 도 좋습지요. 그리구 물론 다들 제게다 호감두 가지구요. 보다 모르겠씁니까 자기를 좋아하는걸. 한데두 결국에 가서는 다 안된단 말읿니다! 신통할 정도지요. 제가 청결차의 거두매질을 한다는 말만 하면 다들 슬그머니 떨어져나간단 말입니다. 대번에 앵돌아져 뾰로통하는게 다 있지 뭡니까. 사람이 복통이 터질노릇입지요. 일을 잘한다구 전 벌써 상장을 네번이나 탔습니다. 그런데두 다 소용이 없으니... 이를 어쩝니까? 제가 보기엔 이 세상 녀자들이란 다 편견의 노예, 허영의 노예들이예요. 눈이 다들 이마밑에 붙어있잖구 관자노리밑에 붙어있단 말이예요. 안 그렇습니까 선생님?>>

 

홍성걸이 입에서 나오는 말이 차차 부풀어가는것을 보자 백운산이

 

<<다 그러건 아니지만두... 그런 편견이나 허영심이... 일반적으루 있는것만은 사실이지요.>>

 

동정하는투로 말하고 잇달아서

 

<<그렇다면 어째서 그걸 틀어잡구... 하나의 사회적문제루 틀어잡구... 써볼 생각을 안하시우? 우리 문학도의 사명이 바루 그건데!>>

 

하고 백운산은 로인답지 않은 격정적인 어조로 말하며 손바닥으로 가볍게 앞상을 탁 쳤다.

 

<<녜.>>

 

홍성걸이는 열리지 않아 애를 먹이던 창문이 갑자기 덜컥 열린것과도 같은 일종의 령감으로 머리를 꿰뚫리였다.

 

<<쓰겠습니다!>>

 

<<세상녀자들의 심금을 울린만한 감격적인것을 하나 써보시오.>>

 

<<예 쓰겠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제목은 어떻게 다는것이 좋겠습니까?>>

 

<<문학도, 문학도.>>

 

<<녜, 문학도... 알겠습니다.>>

 

김학철전집4-태항산록-이런 녀자가 있었다

 

소설

이런 녀자가 있었다

 

1

조선의용군이 한 별동대-김영신지대가 마령관(马岭关)에서 하산하여 림성(临城), 찬황(赞皇), 고읍(高邑), 백향(柏乡) 네 고을의 중심점이 되는 압합영(鸭鸽营)부근에서 려정조(吕正操)부대의 두개 대대와 함께 적군점령하의 평한선을 넘은것은 교교한 찬 달빛이 온 누리에 가득찬 한밤중이였다. 적군이 철길 량편에 깊고 넓은 차단호를 파놓고 그리고 철길을 따라 우뚝우뚝 솟아있는 망루에서 감시를 하는 까닭에 공병역할을 하는 전사들이 재치있게 발판을 놓아주지 않으면 부대의 통과는 거의 불가능하였다. 소리소문없이 맡은 일을 충실히 해내는 그 전사들은 실로 전진하는 부대의 앞길에 가로놓인 모든 장애물을 없애주는 <<열쇠>>의 역할을 하였었다.

 

평원구의 좋은 점은 조밥, 옥수수밥을 먹지 않고 밀것을 먹는것이였다. 태항산속에서는 몹시 딸리는 소금도 거기서는 과히 귀하지 않은것이였다. 그 대신에 거의 날마다 같이 숙영지를 옮기는 것은 성가셔 죽을 지경이였다. 적군에게 꼬리를 밟히지 않기 위해서였다. 적군하고 숨박곡질을 항며 사는거나 마찬가지였다. 리가 있으면 반드시 페도 있다는 말이 과시 옳았다. 태항산에서는 간이 안 든 반찬과 험한 밥을 먹는 대신에 숙영지만은 여러달씩 한군데 붙박혀 살수 있었다.

 

려지강이와 주운룡이가 밀짚북데기우에서 잠이 깨여 누운채 소근소근 지껄였다.

 

<<밥은 여기서 먹구 잠은 태항산에서 잔다면 좀 좋아.>>

 

<<꿩 먹구 알 먹잔 수작인가.>>

 

그들은 이때 심현(深县), 무강(武强) 일대를 맴돌고있었다. 분산된 적을 보면 피하였다. 참새떼처럼 모여들었다가는 흩어졌다가는 또 모여들었다. 그것이 유격전이였다.

 

<<난 잠이 부족해서 머리가 다 띵하다니까.>>

 

<<그거야 차차 습관이 되면 일 없겠지.>>

 

<<벼룩은 태항산보다 좀 적은것 같지?>>

 

<<좀이 뭐야, 퍽 적지.>>

 

태항산에서는 세수물을 떠놓으면 대야에 금시로 새까맣게 벼룩이 뛰여들었었다.

 

<<겨울이 돼서 그런지두 모르지.>>

 

<<그것두 있겠지.>>

 

<<광동서는 겨울에도 모기장을 치구야 잔다며?>>

 

<<거기 모기장은 침대에 딸린것이지 장식품처럼.>>

 

이렇게 말하는 주운룡이는 광동 중산대학출신이였다.

 

이날 오후, 김지대장은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전체 대원들에게 비상한 소식을 알리였다.

 

<<...일본해군항공대가 지난 8일 새벽,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해서 미국함정들에 심대한 손실을 입혔답니다...>>

 

대원들은 아연 긴장해나서 모두 김지대장의 입만 바라보았다. 지대장 김영신은 호리호리한 몸매에 홀쪽한 얼굴에 눈까지 가늘었다. 그러나 강기와 활력이 언제나 온몸에서 넘쳐나는 사람이였다. 그는 중앙군교 10기 보병과 졸업생이였다.

 

 

<<...일본제국주의는 그예 남진을 단행했습니다. 사회주의쏘련에다가 아니라 제국주의 미국에다 불을 걸었습니다. 레닌의 론증은 또 한번 실증됐습니다. <자본주의국가발전의 불균형법칙>은 다시한번 그 투철함을 전세계에 과시했습니다. 제국주의강도들은 서루 물어뜯느라구 다른것을 돌볼 겨를이 없습니다. 전국은 우리에게 대단히 유리하게 전변되구있습니다...>>

 

회의가 끝난 뒤에 리지강이가 사기가 부쩍 올라서 주운룡이를 돌아보고

 

<<이러다간 나두 정말 멀잖아... 내 그 약혼녀를 만난단 소리가 나잖겠나?>> 하고 싱글벙글하였다. 주운룡이가

 

<<약혼녀? 언제 그런게 다 있었는가?>>

 

하고 의아쩍어하니 리지강이가 짐짓

 

<<그럼 없어?>>

 

하고 흰목을 썼다.

 

<<금시초문인걸.>>

 

<<금시초문? 흥, 네 그 리란영이따위는 와서 신발을 들구 따라 다닌대두 부요(不要)다... 어림없이.>>

 

리란영이와 주운룡이가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는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는터였다.

 

<<희떱기는 까치배바닥일세. 어디 사진이나 좀 보자구... 얼마나 이쁜가.>>

 

이제까지 옆에서 시물시물 웃으며 보고있던 진국환이가 갑자기 소리내여 웃으며 말참녜를 하였다.

 

<<사진 보면 꿈에 보인다... 볼 생각 말아. 수레바퀴에 치인 맹꽁이상이더라... 나 봤다.>>

 

<<참말이야?>>

 

<<내가 언제 거짓말하던가? 편지까지 다 읽어봤는데. <장연(长渊) 최참봉댁 맏손녀와 혼인을 정하였으니 그리 알아라.> 아버지가 썼더라 붓글씨루.>>

 

리지강이 황해도 해주사람인데 그 부친은 요부한부재지주(不在地主) 즉 시내에 사는 지주였다.

 

<<그게 언제야?>>

 

<<남경 있을 때지 언제야.>>

 

<<남경 있을 때? 그게 어느 옛날이야. 그럼 인젠 다 늙어 꼬부라졌겠구나.>>

 

<<저처가 전장귀신이 되면... 까막과부가 되겠지... 봉건가정이니까.>>

 

주운룡이와 진국환이가 서로 지껄이는 소리를 듣고 리지강이는

 

<<똥 본 오리처럼 잘두 지절댄다.>>

 

하고 진국환이의 어깨를 한번 탁 쳤다. 진국환이는 하하 웃고

 

<<아니다 사실은.>>

 

하고 실토를 하였다.

 

<<저처가 그때 편지를 받구 골이 나서 사진을 쪽쪽 찢어버린걸 내가 한쪼각 한쪼각 주어모아서 붙여봤다. 아주 얌전하게 생겼지 뭐야.>>

 

<<그럼 이제라두 늦지 않으니 얼른 편지를 띄워라. 기다리라구, 곧 간다구.>>

 

주운룡이가 흥감스레 말하고 깔깔 웃으니 진국환이와 리지강이도 깔깔 따라웃었다. 일본제국주의가 태평양전쟁을 발동하였다는 소식이 그들에게는 승리가 가까와온다는 랑보로 받아들여졌던것이다. 일제가 북진을 단행하면 쏘련이 복배수적으로 크게 어려움을 겪어야 할것이기때문에 그들은 은근히 근심을 하고있었다. 그래서 <<남진>> 한마디에 안도의 숨을 쉬고 기분들이 명랑해진것이였다.

 

 

2

 

나달이 지나서의 일이다. 다저녁때 한개 분대가 유림(榆林)에서 네댓마장 떨어진 자그마한 주막거리에 정찰을 나와보니 마침 한대의 승용차-검은색포드가 머리를 서쪽-석가장쪽으로 두고 멎어서있었다. 이 길은 창주-석가장을 련결하는 간선도로였다.(석가장의 지명을 이때 점령군은 석문시로 고쳤었다) 국방색국민복을 입고 고깔모양의 전투모를 쓴 운전사가 주막집에 들어가 라지에타에 채울 물 한초롱을 얻어들고 막 나오는중이였다. 운전석에는 양장을 한 젊은 녀자 하나가 앉아있었다. 그리고 뒤좌석에는 양복차림의 나이 지긋한, 코수염을 기른 뚱뚱이와 국민복차림의 서른나문 된 남자가 타고있었다.

 

(야 이게 웬 떡이냐.)

 

한개 분대 근 20명 무장대원이 불시에 달려드니 운전사는 초풍하여 물초롱을 떨어뜨리고 엉덩방아를 찧고 그리고 자동차안의 남녀 세 사람은 모두 실색하여 옴짝달싹을 못하였다. 코수염 기른 뚱뚱이의 손가락사이에 타고있는 권연이 알릴듯말듯 떨렸다. 눈 깜박할 사이에 남녀 네 사람을 차에서 끌어내고 또 땅바닥에서 잡아일으켜 앞세우고 곧 자리를 떴다. 뒤에 남은 몇 사람은 리지강이와 함께 자동차에 불을 질렀다. 말끔한 새 자동차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이는것을 보고 리지강이가

 

<<우등불모임이나 한번 했으면 좋겠다.>>

 

하고 웃으며 불 쪼이는 시늉을 하니

 

<<소불알은 안 구워먹구?>>

 

누군가가 옆에서 한마디 조롱하였다.

 

걸음을 통 못하는 남녀 네 사람을 앞에서 끌고 뒤에서 떠밀다싶이 하며 논틀밭틀로 숙영지에를 돌아오니 벌써 밤이 이윽하였다. 사내 셋은 한방에 몰아넣고 녀자 하나는 따로 가두고 그리고 보초에게 말을 이른 뒤 잘 차비들을 하였다.

 

밝는 날 아침에 먼저 사내 셋을 신문해본즉 코수염 기른 뚱뚱이는 일본의 이름난 토목건축회사 하자마구미(间组)의 석문출장소 소장이고 젊은 남자는 건축기사 그리고 나머지는 녀비서와 운전사였다.

 

<<어디를 가는 길인가? 아니면 어디에 갔다오는 길인가?>>

 

<<창주에 볼일이 있어서... 저 사람을 데리구 갔다오는 길입니다.>>

 

<<군(军)의 일루? ...>>

 

<<아닙니다 아닙니다... 군하구는 아무 상관두 없는 일입니다. 민간일입니다. 순전한 민간일입니다.>>

 

코수염 뚱뚱이는 군의 일이 아니라는 발명을 부옇게 하였다. 리지강이가 씩 웃고 지꿎이

 

<<여기 남아서 우리하구 같이 지낼 생각은 없는가? 우리 일을 맡아서 해볼 생각은 없는가?>>

 

하고 떠보니 코수염 뚱뚱이는 괴상야릇한 얼굴을 하고 대답을 못하였다. 건축기사는 식혜 먹은 고양이상을 하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운전사는 두 상전의 눈치만 보았다.

 

 

리지강이와 주운룡이는 신문을 일단 마치자 곧 녀비서를 가두어놓은 집으로 왔다, 녀자는 안날 저녁녘 경황없는중에 본 기억이 있는것 같은 두 젊은 군인(그녀의 생각대로 표현하면 두 젊은 공산비적)이 문을 열고 들어서는것을 보자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얼른 캉(炕) 한구석에 피해가 무릎을 쪼크리고 앉더니 오돌오돌 떠는데 그 덜 밉지 않은 얼굴은 백지장같이 창백하였다.

 

<<무서울것 없으니... 진정하구... 편히 앉으시오.>>

 

리지강이가 부드러운 일본말로 안심을 시키는데 녀자는 두 사람의 얼굴에 악의가 없는것을 보고 적이 마음이 가라앉는듯, 눈치는 여전히 살피면서도 앉음앉음을 편히 앉는체하고 또 떠는것도 좀 덜 떨었다. 두 사람은 캉끝에 걸터앉았다. 리지강이가 짐짓 상가럽게 말을 붙였다.

 

<<이름은요?>>

 

<<녜?..>>

 

녀자는 너무 긴장하여 묻는 말의 뜻을 못 알아들은게 분명하였다.

 

<<못 알아들으셨소? 이름이 무어냐구 물어봤는데...>>

 

<<아, 녜. 저... 야나가와 아끼꼬(柳川明子)라구 합니다.>>

 

<<야나가와 아끼꼬...>>

 

하고 되뇌고 리지강이는 주운룡이와 얼굴을 한번 마주보고나서 다시 물었다.

 

<<고향은요?>>

 

<<고향 말입니까? 녜 저 고향은... 인천입니다.>>

 

<<인천이라니... 조선 인천? ...>>

 

<<녜 그렇습니다.>>

 

<<인천이... 출생진가요?>>

 

<<녜.>>

 

리지강이와 주운룡이는 또 한번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럼 학교는 어디를? ...>>

 

<<경성녀고(京城女高)예요. 경성녀고를 나왔어요.>>

 

서울 재동(斋洞)에 있는 경성녀고는 조선녀학생들이 다니는 공립학교다. 리지강이가 놀라서 저도 모르게 조선말로

 

<<그럼... 조선분입니까?>>

 

하고 소리치듯 물으니 녀자는 잠시 얼떨떨한 눈으로 리지강이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조선분들이삽니까?>>

 

하고 곧 무릎걸음으로 다가드는것이였다. 지옥에서 부처를 만난것으로 여기는 모양이였다.

 

나중에 알고보니 류명자 23세 하자마구미에 입사한지 인제 겨우 돐이 지났었다.

 

당일로 지대본부에서는 다음과 같이 결정을 지었다.

 

일본남자 셋은 쓸데없는것이니 곧 돌려보내기로 한다. 조선녀자 하나는 포섭할 대상이 되므로 남겨두기로 한다.

 

 

3

 

다저녁때 무장대원 대여섯이 주막거리가 멀리 바라보이는데까지 일본사람들을 데려다주는데 갈라질 때 리지강이가 코수염 뚱뚱이더러

 

<<저 주막거리까지 가면 오가는 군용트럭이 있을거니까 손을 들어 세워서 타구 가시오. 다들 당신네 사람이 아니요. 어려울것 없겠지. 그리구 녀비서는 조선사람이니까 우리가 맡았다구... 당신네 령사관에 가 신고하시오.>>

 

하고 말을 이르는데 옆에 섰던 주운룡이가 삐라 한묶음을 그 호주머니에 밀어넣어주면서

 

<<야스다소장, 약소하지만 이건 전별하는 뜻으루 드리는 선물이니 그리 아시오.>>

 

하고 말하며 사람들을 웃겼다.

 

이튿날부터 류명자는 부단히 이동하는 항일부대를 따라 내키지 않는 전투행각을 부득이 하였다. 리지강이가 책임지고 교양을 하는데 녀자는 매번 다 고개를 다소곳하고 듣고있다가 리지강이의 말이 다 끝나면 의례 판에 박은것 같은 말로 비대발괄을 하는것이였다.

 

<<말씀은 잘 알았에요. 그렇지만 이번만은 그대루 돌려보내주세요. 부모님을 만나뵙구... 말씀을 여쭙구... 다시 오겠에요. 꼭 다시 온다니까요. 녜 선생님.>>

 

아무리 타일러도 막무가내였다.

 

<<말씀은 잘 알았에요. 그렇지만 이번만은 그대루 돌려보내주세요. 부모님을 만나뵙구... 말씀을 여쭙구... 다시 오겠에요. 꼭 다시 온다니까요. 녜 선생님.>>

 

소귀에 경읽기였다. 땅팔노릇이였다. 귀신은 경문에 막히고 사람은 인정에 막힌다지만 류명자씨만은 아무것에도 막히는데 없었다. 약석이 무효였다. 자갈을 솥에 넣고 삶고 또 삶고 하는거나 마찬가지였다. 절대로 익지 않았다. 그 상이 장상으로 <<말씀은 잘 알았에요. 그렇지만... 녜 선생님.>>을 되풀이하는것이였다. 똑같은 말을 끈질기게 곱씹고 하는것이였다.

 

 

성미가 느슨한편인 리지강이도 나중에는 고패를 빼였다. 할수없이 김지대장에게 사실대로 전말을 보고하였다. 김지대장은

 

<<참 별난 녀자 다 봤군.>>

 

하고 한참 생각해보다가 고개를 들고

 

<<까짓거 돌려보낼가? 공연히 끌구 다니며... 귀찮게스레.>>

 

하고 리지강이의 의향을 물었다.

 

<<아무려나 좋두룩 하시지요.>>

 

거치른 남자들의 세계에 연연한 녀자 하나가 끼이면 오죽 좋으랴. 그렇지만 당자가 굳이 싫다니... 아쉽기는 하지만 부득이한 일이였다. 리지강이가 그길로 가서 녀자에게 오늘밤 돌려보낼테니 그리 알라고 미리 일러준즉 녀자가 좋아서 어쩔줄을 모르며

 

<<선생님 고맙습니다 고마워요.>>

 

백배사례를 하는데 리지강이는 한편 밉상스럽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마음이 허전하도록 아쉽기도 하였다.

 

밤, 뭇별로 장식된 밤하늘에 심현성 성가퀴의 륜곽이 뚜렷이 드러나보이는데까지 와서 리지강이가 걸음을 멈추니 류명자도 발을 멈추고 또 호송하는 대원들도 따라서 걸음들을 멈추었다.

 

 

<<자 여기서부터는 혼자 가시오. 조기 조 성문을 향하구 꼿꼿이 걸으면 됩니다. 우린 여기서 무사히 들어갈 때까지 지켜볼테니까... 안심하구 행동하십시오. 내가 일러준대루 하십시오. 그럼 자 안녕.>>

 

마지막 작별의 인사로 굳은 악수를 나누는데 녀자의 손의 땀기가 리지강의 손바닥에 오래도록 남아서 가시지를 않았다.

 

녀자가 얼마동안 앞으로 걸어나가다가 멈칫 서서 잠시 망설이는듯... 무슨 생각을 먹었는지 홀지에 되돌아오지 않는가! 리지강이의 가슴은 높이 뛰놀았다. 걸어오던 녀자가 또 멈칫 서서 잠시 망설이더니 다시 돌아서서 성문을 향하여 조심조심 걸어갔다. 리지강이는 갑자기 다리맥이 풀리는것 같았다. 어둑컴컴한 성문의 우중충한 문루에서 날카로운 수하가 날아내려왔다.

 

<<다레까?!>>

 

그러자 류명자는 리지강이에게서 배운대로 하는 대답이 어둠속에서 또렷이 들렸다.

 

<<팔로군에 랍치당했던 하자마구미 석문 출장소의 야나가와 아끼꼬가 돌아왔습니다.>>

 

문루에서 두런두런하는 소리가 났다. 한참만에

 

<<좋다. 그럼... 두손을 들구... 그 자리에 서서 기다려라.>>

 

거친 목소리가 위협적으로 대답을 주었다. 그리고 또 한동안이 지나서 굳게 닫힌 성문틈으로 불빛이 어른거리더니 이내 삐걱하고 성문이 사람 하나 겨우 들어오리만큼 열렸다. 두손을 높이 쳐든 녀자의 그림자가 성문안으로 사라지자 성문은 다시 삐걱 쾅당 육중한 소리를 내며굳게 닫혀버렸다. 성문틈으로 어른거리던 불빛도 사라졌다. 만뢰가 구적한데 밤하늘에서 별찌 하나가 지평선을 향해 줄을 그으며 내리꼰졌다.. 리지강이의 가슴은 가을뒤의 콩밭처럼 어수선산란하였다.

 

 

4

 

하지만 끈덕진 운명의 신은 그렇게 수월히 책장을 덮어버리지는 아니하였다.

 

1942년 10월, 비록 일본군의 점령하일지라도 유서깊은 옛 도읍 북평은 짤짤 끓는 볕을 받아 가을이 한창 무르녹고있었다. 이날 오후, 북해공원문전에서 인력거를 내리는 젊은 신사 하나가 있었다. 짙은 쥐빛의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었는데 자주빛줄무늬비낀 넥타이가 그 청순한 얼굴에 멋스레 어울려서 사람들의 이목을 자연히 끌었다. 저도 모르게-거의 본능적으로-다시한변 쳐다보거나 지나쳤다가도 다시한번 뒤를 돌아보는 녀자가 한둘이 아니였다. 조직의 지령을 받고 적후의 조선청년들을 포섭할 목적으로 북평에 잠입한 리지강이의 변장한 모습이 이같이 눈에 띄는것은 그가 아직 적후공작, 지하공작에 미립이 트지 않았다는 구체적증거였다. 예로부터 <<의복이 날개>>라는 속담도있고 또 <<입은 거지는 얻어먹어도 벗은 거지는 못 얻어먹는다>>는 속담도 있기는 하지마는 그런것들은 다 일반적인 경우에 해당되는것이지 이런 특수한 경우에는 해당이 되는것이 아니다.

 

리지강이가 제멋에 겨워서 막 인력거에서 내렸을 때였다.(그는 지금 조용한 공원으로 약속한 사람을 만나러 오는 길이였다.) 자칫 뒤미처 따라온 인력거 두채가 옆에 와 멎어서면서 곧 젊은 남녀 한쌍이 각각 내리는데 남자는 일본장교복 같은것을 입었고 그리고 녀자는 수수한 양장차림을 하였었다. 리지강이는 아랑곳없이 곧 공원문을 향하여 걸음을 떼놓다가 장교복 같은것을 입은 남자와 같이 온 녀자가 자기를 보고 흠칫 놀라며 한발자국 뒤로 물러서는것을 눈결에 보았다느니보다는 차라리 륙감으로 느끼였다.

 

(무얼가 저게? ...)

 

리지강이는 감히 그 화근거리로 느껴지는 녀자를 거들떠보지 못하였다. 모르는체할 밖에는-태연한체할 밖에는-다른무슨 며리가 없었다.

 

(일본장교놈의 정부? -무어든간에 내게야 리로울것이 없지!)

 

리지강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천천히 걸어갔다. 당장에 들고 빼고싶은 마음을 억지로 누르고-천천히 걸었다. 바로 코앞에 열려있는 큰 공원문이 갑자기 까마득하게 멀어보였다. 빠져나가기 어려운 무슨 바늘구멍같이 작아보였다.

 

하이힐의 가벼운 또닥또닥 소리를 뒤꽁무니에 줄곧 딸리고 리지강이는 향방없이 닥치는대로 걸었다. 약속한 장소를 피하여 한겻진 곳 으슥진 곳만 찾아다녔다.

 

(그런데 장교놈의 발자국소리는 들리지 않는것 같으니 대체 웬 일일가? 계집만 뒤를 딸려보내고 제 놈은 청병을 하러 갔나? 그렇다면 이 계집은 보통내기는 아닐테지?...>>

 

갖은 불길한 생각이 다 머리속에 떠올랐다.

 

(이것을 어떻게 떼친다? 아마 권총을 가졌기도 쉽지.)

 

나중에 정 할수 없어서-가자니 태산이요 돌아서자니 숭산이요-결심을 채택하였다.

 

(에이 모르겠다! 어떻게 생겼나 상통이나 좀 보자!)

 

무슨 나무인지도 모르는 무슨 늙은 나무밑에서 갑자기 홱 돌아섰다. 뒤따라오던 계집이 조건반사적으로 멈칫 걸음을 멈추더니 박은듯이 서서 돌아선 남자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다음순간 리지강이의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아!>>

 

하는 소리가 새여나왔다. -눈앞에 서있는것은 분명히 열달전 캄캄한 밤중에 심현성문 바로 턱밑에서 자기가 돌려보낸 녀자포로-류명자가 아닌가!

 

<<선생님!>>

 

녀자가 반가운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내달아왔다.

 

<<제가 바루 봤에요, 바루 봤다니까요! 틀림이 없었다니까요!>>

 

일순간 리지강이는 질정을 못하고 망설였다.

 

(알은체해야 하나? 모른다고 딱 잡아떼야 하나?)

 

(반갑게 맞받아주어야 하나? 덤덤히 대해야 하나?)

 

그러나 머리가 질정을 하기전에 입에서 말이 먼저 새여나왔다.

 

<<아, 명자씨! -그런데 동행은요?>>

 

동행-일본장교-이것이 제일 문제였던것이다. 제일 걱정거리였던것이다.

 

눈을 들어 제빠르게 사위를 둘러보았으나 그 일본장교는 그림자도 보이지를 아니하였다. 녀자가 곧 눈치를 알아채고 웃는 얼굴로 안심을 시키였다.

 

<<우리 오빠예요, 사촌오빠. 헌병대의 통역으루 있에요. 그렇지만 나쁜 사람이 아니예요. 제가 담보해요. 절대루 나쁜 사람이 아니예요.>>

 

<<그런데 왜? ...>>

 

<<그런데 왜... 안 보이느냔 말씀이시죠? 차점에서 기다리라구 했에요, 선생님이 꺼리실가봐.>>

 

리지강이는 반신반의하면서 태도를 좀 누그러뜨렸다.

 

<<여기서 이렇게 만날줄은... 정말 의외로군요.>>

 

<<정말이예요. 정말 꿈만 같아요. 잘 믿어지지가 않아요.>>

 

두 사람은 잎이 누르러가는 해묵은 회화나무밑에 마주섰었다.

 

<<여기 서서 이렇게 이야기를 해두... 일 없을가.>>

 

남자가 두리번거리며 좀 미타해하니 녀자는 한번 싱긋 웃고

 

<<무슨 상관 있에요? 남들이야 련애를 하는줄 알텐데요.>>

 

하고 아주 례사롭게 받아넘기는것이였다.

 

<<왜놈들두 청춘남녀가 련애를 하는것까진 간섭을 안한다구요.>>

 

<<그럴가?>>

 

<<그러면이요. 오호호!>>

 

리지강이가 좀 마음을 놓고 궁금한것부터 물어보았다.

 

<<그런데 북평에는 어떻게?...>>

 

<<북평에는 어떻게 왔느냔 말씀이지요? 녜, 전근이 됐어요. 인제 너덧달 됐에요, 북평에를 온지가.>>

 

<<오빠를 이렇게 기다리게 해두 일 없을가?...>>

 

<<괜찮아요, 그걸랑 념려 마세요.>>

 

<<글쎄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보다두 선생님, 이번에 저를 데리구 가주세요. 꼭 데리구 가주셔야 해요. 녜 선생님?>>

 

리지강이는 얼른 갈피를 잡을수 없어서 잠시 빤히 녀비서의 덜 밉지 않은 얼굴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가벼운 가을바람에 녀자의 이마를 가린 까만 머리카락이 하늘거리다가는 흩날리고 하늘거리다가는 흩날리고 하였다.

 

<<제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할게 하번 들어보세요. 솔직히 다 말씀을 드릴테니... 괘씸하다구 꾸중을랑 마세요.>>

 

리지강이는 마음이 조마조마하기는 하였으나 들어보기로 하였다. 하긴 들어볼것 없다고 방색할 형편도 못되였다.

 

<<...제가 평원구에 있을 때 선생님께 부모님을 한번 만나뵙구나서 꼭 다시 오겠다구 말씀한건 다 거짓말이예요. 저는 애당초에 만나뵐 부모가 없었는걸요. 일찌기 량친을 다 여의구 백부님댁에서 자랐거든요. 지금 저뒤 차점에서 저를 기다리구있다는 오빠가 바루 그 백부님의 둘째아들이예요. 그리구 저는 전부터 벌써 약혼한 남자가 있었에요. 서울 식산은행 안국동지점에서 근무하고있었지요. 그러니 제가 다시 돌아올리 있에요? 얼렁뚱땅 넘기려는 수단이였지요. 알쭌한 거짓말이였지요. 저는 심현에서 놓여난 뒤 석가장총령사관을 거쳐서 어렵지 않게 곧 회사에 복직이 됐었에요. <하자마구미>에 말이예요. 그런데 이런 마른하늘에 생벼락이 또 어디 있겠에요. 종신을 언약하구 태산같이 믿어온 그이가 무슨 독서회사건인가 하는걸루 경찰에 검거됐다가 모진악형을 당하구 반주검이 돼서 나온지 불과 한주일두 채 못돼서 끝내 피여나지 못하구 스물여섯살 젊은 나이에 고만 저승길을 떠나구말았지 뭐예요.>>

 

녀자의 눈에 슬픔을 초월한 분노의 빛이 어리는것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며 리지강이는 자기의 위태로운 처지를 잠시 잊었다.

 

<<저는 제게다 이런 불행을 안겨준 원쑤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두 선생님네 그 항일부대-조선의용군에 참가를 해야겠다구 결심했에요. 그런데 알구보니 공교롭게 저의 그 오빠두 저하구 같은 생각을 갖구있지 뭐예요. 오빠두 벌써부터 항일부대를 넘어갈 마음을 먹구있었단 말이예요. 그 사정은 본인에게서 직접 들어보세요. 좋겠습니까 선생님?...>>

 

이리하여 리지강이는 마침내 류명자 종남매와 자리를 같이 하게 되였다. 셋 일행이 공원에 와서 가을의 경색을 즐기는것처럼 꾸미며 양지바른 잔디밭에 다리를 뻗고 앉아 나직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선의용군의 지하공작자와 일본헌병대의 통역관-이야말로 극적인첫 상봉이였다. 장소가 적들이 점령하고있는 북평이기에 더욱 극적이였다. 아슬아슬하면서도 랑만적이였다.

 

 

5

 

<<...저는 일본헌병대의 통역관노릇을 하면서두 아무러한 자책감을 느껴본적이 없었습니다. 그저 남들두 다 가지는 보통직업이겠거니만 여겨왔었습니다. 어느 회사의 직원이나 무슨 다를게 없는것으루 알아왔었습니다. 그러던중 지난 초여름의 일이였습니다. 그게 6월초였지요. 북평에 잠입해서 첩보활동을 하던 조선의용군의 지하공작원 하나가 체포됐었습니다. 이름은 서극강이라구 하는데 그게 본명인지 가명인지는 종내 모르구말았습니다. 나이는 스물대여섯 가량인데 훤칠한 키에 짙은 구레나룻이 아주 인상적이였습니다...>>

 

류명자의 사촌오빠 야나가와통역관 즉 류명준이가 여기까지 이야기하였을 때 리지강이는 저도 모르게 입속말로 부르짖었다.

 

<<아, 자명이!>>

 

서극강이라는 가명으로 행세하던 그 사람이 서자명이였음을 대번에 알아차린것이였다. 서자명이는 리지강이의 군관학교 동기동창이였었다.

 

<<아십니까 그분을?...>>

 

<<아니 어서 그대루 이야기하시오.>>

 

<<녜, 그런데 일본군대의 법이-간첩은 어떠한 간첩이든 다 일률적으로 총살형에 처하기루 돼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분두 총살을 당하게 됐었는데...>>

 

류명준이가 이야기를 다시 계속하는중에 저쪽에서 누군가가

 

<<오이, 야나가와! 거기서 뭘 하구있는가?>>

 

하고 소리를 쳐서 세 사람이 일시에 고개를 들고 바라보니 몸집이 똥똥한 일본헌병 하사관 한놈이 화복차림을 한 왜갈보 하나를 데리고 지나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서있었다.

 

<<아, 조장(曹长)님!>>

 

류명준이가 부지런히 뛰여일어나 몇걸음 달려가더니 장화뒤축을 기세 좋게 딱 부딪뜨리며 표준동작으로 거수경례를 붙였다.

 

<<소풍하러 오셨습니까? -저 서울서 저의 사촌형이 오래간만에 찾아와서... 지금 데리구 다니며 시내구경을 시키는중입니다.>>

 

<<응 그래. 그럼 저 녀자는?>>

 

<<녜 그건 저의 사촌누이동생... <하자마구미>에 근무하고있습니다. -얘, 아끼꼬야, 어서 와서 조장님께 인사 여쭈어라!>>

 

얼렁뚱땅하여 일본하사관놈을 배송낸 뒤에 류명준이는 중둥무이되였던 이야기를 다시 이었다.

 

<<...그분이 총살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중에 조선사람은 단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게 바루 저였습니다. 가슴팍을 겨냥한 열두개의 총구앞에서 그분은 꺼먼 천으루 눈을 싸매려는것을 거절합디다. 그리구 말뚝에 묶인채 멸시하는 웃음을 입가에 짓구 열두개의 총구를 죽 한번 둘러봅디다...>>

 

리지강이도 류명자도 다 이야기에 끌려들어 숨을 죽이고 귀들을 기울였다.

 

<<...저는 그때 처음-난생처음-가슴속에서 자책이 울컥 치밀어오르는것을 느꼈습니다-<오, 나는 사람이 아니다!>...>>

 

이야기하는 사람의 두눈이 왈칵 붉어지는것을 리지강이는 보았다.

 

(각성한 민족의 량심!)

 

<<...그래서 얘하구 둘이서 의논하구... 조선의용군으로 넘어갈 길을 은밀히 모색하던중이였습니다. 하루를 살아두 사람답게 한번 살아보자구 말입니다. -오늘 이렇게 우연히 공교롭게 선생님을 만나게 된건 아무래두 하늘의 뜻인것만 같습니다.>>

 

 

11월초, 가지마다 다닥다닥 열린 고욤들이 한창 달 때, 리지강이는 류명자 종남매와 또 다른 열혈청년 둘을 데리고-모두 다섯이서-일본군의 봉쇄선을 뚫고 태항산항일근거지로 들어오는데 성공하였다.

 

신입대원환영회에서 류명자는 얼굴이 홍당무우가 되였다. 주운룡이가 그녀의 입내를 천재적으로 잘 내여서 회장을 온통 웃음판을 만들어놓았기때문이다.

 

<<말씀은 잘 알았에요. 그렇지만 이번만은 그대루 돌려보내주세요. 부모님을 만나뵙구... 말씀을 여쭙구... 다시 오겠에요. 꼭 다시 온다니까요. 녜 선생님.>>

 

김학철전집4-태항산록-열병

 

소설

열병

 

1

황준덕이와 황준복이는 사촌간이다. 형인 준덕이는 두 딸의 아버지였다. 동생인 준복이는 한 아들의 아버지였다. 그 한 아들을 소문나게 한번 잘 키워볼 생각으로 준복이는 자진하여 산아제한수술을 받았다.

 

(돼지새끼처럼 우글우글 낳아놓기만 하면 무얼 해? 하나라두 제대루 사람을 만들어야지!)

 

그러므로 이제 세는 나이로 다섯살이 된 외아들 명수가 그들 내외에게는 금싸래기같고 은싸래기 같고 또 무슨 싸래기 같고 무슨 싸래기 같고 하였었다.

 

<<우리 가문이 통털어서 둘밖에 없으니까... 자네하구 나하구 둘밖에 없으니까... 명수 고 녀석 하나가 인제 이 가문의 종사(宗嗣)를 잇게 됐네그려. 자네두 보다싶이 나는 지금 종손구실을 제대루 할 형편이 못되거든. 하니까 명수란 놈을 키우는데 들어선 나두 반몫을 담당해야 도리가 맞잖겠나. 그러니 우선 이 돈을 받아두게. 앞으루두 고놈의 양육비는 내가 절반을 맡을테니까 그쯤 알구 우리 한번 좀 잘 키워보세.>>

 

 

<<아 형님, 갑자기 망녕이 나셨습니까? 형님은 아이가 둘이 있구 나는 하나밖에 없는데... 둘짜리가 어째서 하나짜리를 돕는단 말씀이요? 돕는다면 내가 형님을 도와야지! 제발 이런 망녕 좀 부리지 마십시오.>>

 

<<아니야, 그런게 아니야.>>

 

<<아니는 뭐가 아니란 말씀이요. 제발 좀 이러지 마십시오. 형님의 고마운 뜻은 잘 알았으니까...>>

 

<<하 참 그 사람 거...>>

 

<<글쎄 이러지 마시란데두요.>>

 

성정이 고정한 황준덕이는 종시 갖고 온 돈봉투를 사촌동생에게 떠맡기고야 마음이 놓이는듯 벗어놓았던 모자를 집어들고 일어나며 가는 인사를 하였다. 사촌형의 나이가 10여살이나 맏이인데다가 사람됨됨이가 워낙 근엄하여 황준복이는 평소 숙부 맞잡이로 그를 어려워하였었다.

 

(남들은 자비로 자식들 외국류학을 보낸다는데... 우리 명수두 그 축에 빠질수야 없지. 그러자면 우선 앞서는게 돈인데... 어떻게 해서라두 학비를 좀 든든히 마련해놔야잖겠나.)

 

예견성이 너무 좀 지나친-하긴 가물에 도랑쳐서 해로울거야 없지만서도-황준복이는 사랑하는 아들의 먼 장래문제를 골똘히 생각한 끝에 마침내 결심을 내리였다.

 

<<말 태우구 버선 깁기를 할수야 없지. 무슨 수를 써서라두 미리미리 돈부터 모아놔야지.>>

 

 

그러니 월급살이를 해서는 억년 가야 그 식이 장식으로 입에 풀칠이나 겨우 하게 된다는것을 간파한 황준복이가 장사길에 들어선것은 오히려 당연하다고 할것이다.

 

그런데 황준복이는 문학이라는것에 대하여는 애당초부터 아무 흥미도 느끼지 않는 사람이였으므로 더더구나 쉐익스피어라는게 무엇 하는것인지를 알턱이 없었다. 그러니 삼백년전에 먼 서양 어느 섬나라에 살았다는 사람-쉐익스피어인지 무슨 피어인지가 한 말을 들었을지 또한 만무하였다.

 

<<장사군은 제 애비두 속여먹는다구요.>>

 

그때 쉐익스피어는 극장 무대에서 이런 말을 시켜서 관중들을 웃겼었다. 그러니까 관중들은 그런 말을 듣고 웃음을 터뜨리려고 돈을 내고 표를 사가지고 들어왔다는것으로 되는것이였다. 쉐익스피어의 고국인 영국에서는 지금도 늘 그의 연극들이 되풀이로 상연 되는데 무대에서 배우는 역시 전이나 마찬가지로 <<장사군은 제 애배두 속여먹는다구요>>를 되풀이하여 20세기의 현대인 관중들을 웃기고있다. 정직한 장사군들이 들으면 족히 뭉둥이찜질을 안기겠다고 할만한 일이건만 아직까지-3백여년 동안에-그런 일은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다니 참 모를 일이다.

 

어느날 황준복이가 부랴부랴 사촌형 황준덕이를 찾아왔다.

 

<<자네 불시에 웬 일인가? 어서 올라오게.>>

 

<<녜 좀 의논할게 있어서... 달려왔습니다.>>

 

<<무슨 일인데? 어서 앉게.>>

 

<<예 저...>>

 

황준덕이는 무슨 말이 나오려나 하고 사촌아우의 입을 바라보았다.

 

<<저... 요새 하남성에서 온 어느 큰 양주장 외교원한테서... 술을 좀 살가 하는데... 현금이 부족하지 뭡니까. 그래 형님하구 의논을 좀 해볼가 해서 왔습니다.>>

 

황준덕이가 국가에서 지은 이 새 아빠트에 들 때 쓰고 살던 개인의 집을 판 돈이 은행에서 잠을 자고있는것을 황준복이는 잘 아는터였다.

 

<<무슨 술인데?>>

 

<<저 <두강주(杜康酒)라구-하남성에서 나는 유명한 술입니다. 한데 도매가격을 글쎄 근 3할이나 낮춰주겠다지 뭡니까. 그대신에 거래는 반드시 현금거래라는 조건부입니다. 그래서 한번 손이 좀 크게 놀아볼 생각으루 한꺼번에 뭉텅 5천병을 사기루 했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돈을 어디서 돌릴 재간이 있어야지요. 그래 생각다 못해 형님을 찾아온겁니다.>>

 

<<가만있게. 가격을 근 3할이나 낮춰주겠단다구? 그 말이 어째 너무 좀 허황하잖은가? 그 사람들두 영리가 목적일텐데... 덤핑을 하는것두 아닐게구... 그렇게 밑천두 못 건질 정도루 할인을 한다? 거참 모를 일일세.>>

 

사촌형이 믿음성이 없는듯 고개를 가로 흔드는것을 보고 황준복이는 얼른

 

<<술병에 붙인 레테르두 다 확인을 했구 그리고 그 외교원의 신분증두 다 내 눈으루 분명히 봤으니까... 무슨 다른 문제는 있을수 없습니다.>>

 

하고 설득에 힘썼다.

 

<<그렇지만 요새 신문에 가짜약, 가짜술, 가짜가루우유 따위를 단속하라는 기사가 날마다 같이 실리는데... 자네두 봤을테지?>>

 

<<글쎄 아무 념려두 없다는데두요. 내가 무슨 그런 가짜를 만들어 파는것두 아니구... 단지 제조업자에게서 받아서 소매상들에게 넘겨주는 중간상인노릇을 하는것뿐인데... 무에 겁날게 있습니까. 이 좋은 기회를 놓치잖구 5천병만 확보를 하면... 거의 독점이나 마찬가진데... 아마 한번 뜨르르할겝니다. 한병에 40전씩만 떨어진대두 얼맙니까? 눈 깜박할 사이에 2천원... 모개돈이 들어오잖습니까. 이게 형님, 그래 다 명수녀석의 장래를 위한게 아니구 뭡니까.>>

 

 

<<아이의 장래를 위한다는데는 나두 아무 의견이 없네. 하지만 그 술의 래력이 종내 수상하니 한번 더 좀 알아보구나서 거래를 하는게 좋을것 같네. 그래 자네가 간색(看色)은 했나? 술맛은 보았나?>>

 

<<녜, 술맛은... 솔직히 말해서... 좀 못한것 같습니다. 하지만 일있습니까, 우리가 제조업자두 아닌데...>>

 

할수없이 사촌아우가 실토를 하니 황준덕이의 얼굴이 대번에 엄숙하게 변하였다.

 

<<이 사람, 자네가 정신이 있나? 전정이 구만리 같은 자식의 장래를 그래 부정폭리루 뒤받침하겠단 말인가? 그런 당찮은 생각을랑 아주 깨끗이 털어버리게. 깨끗이 털어버리라구. 그리구 아이를 두구 말해두 그렇지... 이제 겨우 다섯살 먹은 아이를 놓구... 10년, 봐가며 해두 넉넉할 일을 가지구.>>

 

대꾸할 말이 얼른 떠올라주지 않아서 황준복이는 그저 입술만 달싹달싹하다가 그만두구 뿌루퉁해진 얼굴로 가는 인사를 하고 일어섰다. 사촌형수가 저녁이 다됐으니 먹고 가라고 붙드는것도 뿌리치고 급살나게 새 아빠트의 층층계를 뛰여내려왔다. 사촌형의 말이 고까와서 밸이 곤두섰던것이다.

 

(같잖게 훈계나 하구! 돈을 내놓기 아까우니까... 체, 누가 그속을 모를줄 알구! 그깟년의 세무국 부국장쯤... 하나두 부럽잖다야!)

 

황준덕이는 시의 세무국 부국장으로 제발된지가 이제 반년밖에 안되였었다.

 

황준복이는 흥정이 다된 하남산 <<두강주>>5천병을 놓치지 않으려고 오토바이를-시어미 역정에 개배때기 차듯이-냅다 몰아대였다. 소문없이 변놓이를 하는 곱사등이를 꼿꼿이 찾아갔다. 독주로라도 해갈을 해볼 작정인것이다.

 

 

2

 

<<그렇게 섭섭하게 해보내서... 어쩌지요?>>

 

안해의 미타해하는 말에 황준덕이는

 

<<섭섭해두 할수 없지. 정도(正道)를 가지 않는걸... 형된 도리에... 보구 가만있을수는 없지 않은가. 방미두점(防微杜渐)을 왜 모르우? 일이 커지기전에 미리 막아야 한단 말이요.>>

 

하고 안해의 불안감을 눅잦혀주었다.

 

<<하지만 돈을 대주기가 싫어서 그런다구... 고깝게 여기기가 쉬울걸요.>>

 

<<만일 그렇다면... 그건 제 소견이 짧은거지.>>

 

<<아이 난 몰라. 래일이라두 명수 엄마를 무슨 낯으루 본다지요.>>

 

<<그렇게 걸리는게 많거들랑 그럼 보지 말구려. 안 보면 되잖아?>>

 

<<안 보긴 어떻게 안 봐요? 이번 일요일이 바루 명수의생일인데!>>

 

황준덕이는 혀를 한번 쯧 차고-변론은 이상으로 중지-신문을 집어들었다. 그러나 황준덕이가 그토록 원치 않는 변론은 밤에 불을 끄고 자리에 누운 뒤에 또 재연하였다.

 

<<내 소견으루는... 형제간의 의가 벌어지잖게... 당신이 생각을 좀 고치시는게 좋을것 같아요.>>

 

<<쓸데없는 소리!>>

 

<<저렇게 외고집통이라니깐!>>

 

<<암탉이 울어서 잘되는 집안 봤소? 인제 좀 고만하우.>>

 

<<내 립장두 좀 생각해주셔야지요.>>

 

안해가 땅파기로 졸라대는데 화증머리가 난 황준덕이가 자리우에 벌떡 일어나앉으며 곧 손으로 담배를 붙여물고나서 쌓아온 수양의 힘으로 화증을 누르고 그리고 온언순사로 안해를 타일렀다.

 

<<장사를 시작한 뒤부터 개가 돈맛을 들여서 아주 리성을 잃었어. 환장을 했단 말이요, 환장을. 돈을 누가 벌지 말라우. 정당한 수단으로 돈을 버는건 아무도 말리지 않아요. 얼마든지 벌라구. 지금 나라에서두 장려를 하는 판인데. 그렇지만 사기, 협잡의 방법으로 부정폭리를 꾀하는건 범죄행위란 말이요, 범죄행위! 알겠소? 그런데두 당신은 나더러 그런 범죄행위를 못하게 말리지 않구 도리여 도와주구 부추겨주구 하란 말이요? 제법 똑똑한 사람이 오늘은 왜 그렇게 닭대가리요? 나 참!>>

 

황준덕이는 피우다만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눌러 끄고 너스레를 부렸다.

 

<<인제 제발 좀 자게 해주우. 사람이 고단해 죽겠소. 래일아침 또 일찌기 일어나야지. 당신은 안 고단하우? 어서 저리 좀 비키우. 우리 대단한 마누라. 세상에 둘두 없는 마누라.>>

 

자리에 드러누워서도 황준덕이는

 

<<제비 같구 비둘기 같은 마누라. 까치 같구 까마귀 같은 마누라. 위대한 마누라...>>

 

중얼중얼 지껄이다가 걷잡을수 없이 잠속에 빠져버렸다.

 

이무렵 황준복이네 집에서도 역시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워서 내외간이 늦도록 서로 지껄였다.

 

<<그런 깍쟁이 같으니라구. 그 잘난 돈 몇푼이 내놓기 아까와서... 열사흘 부스럼 앓는 소리를 온 나절이나 늘어놓구. 체, 내 더러워서!>>

 

<<설마한들 그렇기야 할라구요.>>

 

<<설마한들은 무슨 놈의 설마한들이야? 모르면 국으루 좀 가만히나 있어!>>

 

<<하지만 그 아주버니가 언제 우리한테 꼬물이라두...>>

 

<<듣기 싫어, 듣기 싫어! 새우 벼락맞던 이야기 듣기 싫어!>>

 

<<저렇다니까. 그게 당신의 흠이예요, 흠이라니까요.>>

 

<<맘씨가 부처님 죽으면 대신 들어서겠군!>>

 

<<세상사람이 다 그 아주버니를 어질다구 하는데 당신 혼자 타박을 하면 되나요.>>

 

<<쥐뿔두 모르면 입이나 좀 닥치구 가만있어. 그 어진 량반때문에 내가 얼마나 손해를 봤는지 알기나 해? 곱사등이 그 도적놈한테 가서 빚을 내왔어. 빚을 내왔단 말이야. 리자가 얼마인지 알기나 하구 그래? 물계두 모르구 그저 입만 살아서 나팔나팔!>>

 

안해가 말없이 일어나서 전등을 켰다.

 

<<불은 왜 켜?>>

 

불먹은 소리를 하며 황준복이도 덮었던 이불을 젖히고 일어나 앉았다.

 

<<어디 잠이 와요!>>

 

<<그럼 일어난김에 가서 술이나 좀 가져와.>>

 

술 몇잔을 마시고 기분이 좋아진 황준복이가 눈귀가 처져가지고

 

<<옜소, 당신두 한잔 하우.>>

 

하고 술잔을 내주니 안해는

 

<<미쳤소 갑자기?>>

 

하고 고개를 외쳤다. 황준복이가 허허 웃고 그 술잔을 제가 말린 뒤에 옆에서 자는 아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곱기두 곱지. 아주 먹구 닮았단 말이야 날.>>

 

하고 아이의 뺨을 도닥도닥 두드려주었다. 안해가

 

<<깨우겠소.>>

 

하고 가볍게 손을 내저으니 황준복이는 다시 고개를 안해쪽으로 돌리고 싱글벙글 웃으면서

 

<<여보.>>

 

하고 말을 내였다.

 

<<래일부터 난 좀 바삐 돌아쳐야겠소. 한 반달안으루 술5천병을 다 퍼먹여얄테니까. 온데 돌아다니자면 객지살이두 좀 해얄것같구. 그렇지만 다 념겨치우면 줄잡아두 스무개는 떨어질게니까...>>

 

<<스무개? 스무개가 얼마요?>>

 

<<스무개가 2천원이지 얼마여.>>

 

<<그렇게 많이?>>

 

안해의 눈이 동그래지니 황준복이는 코가 우뚝해져서

 

<<그럼 이 황준복이가 치사스레 그멍가게쟁이노릇을 할줄 알았나?>>

 

흰소리 한마디를 치고 잇달아서

 

<<그렇지만 곱사등이의 변리를 갚아줘얄테니까... 네댓개는 아무래두 허실하게 되겠지. 고런 망할 놈의 곱사등이... 콱 뒈지기나 했으면 좀 좋아.>>

 

말하고 쓴입을 다셨다.

 

<<인제 고만 차반 치웁시다.>>

 

<<가만 가만... 한잔만 더하구. 허, 그 댁네 참!>>

 

비운 술잔을 차반우에 내려놓고 황준복이는 눈이 가늘어져서 안해의 얼굴을 가까이 들여다보며

 

<<내 한달안으루 두문짜리 일본제 전기랭장고를 하나 갖다 들여놓을테니 두구보라구. 히히, 이런 남편두 아마 그리 흔친 않을걸.>>

 

하고 너덜거렸다.

 

<<돈을 그렇게 마구 쓰군 어떡허려구?>>

 

말하며 안해가 눈길을 자는 아들에게로 보내니 황준복이도 덩달아 눈길을 한번 보내고나서

 

<<또 벌면 되지. 자꾸 벌면 되잖아? 맘 턱 놓으시라니까. 념려마시라니까.>>

 

하고 호기롭게 장담하였다.

 

아닌게아니라 이튿날부터 황준복이는 오금에서 비파소리가 나게 가근방 사오십리 안팎을 쏘다녔다. 일이백병, 이삼백병 혹은 삼사백병은 눈 끔적이는 수단과 터무니없을만큼 싼값으로, 돈벌이에 눈이 어두운 소매상들에게 풍기고 퍼먹이고 떠맡겼다. 그리하여 한달도 채 안 걸리여 2년-스물넉달치 월급에 해당하는 돈을 벌었다.

 

유백색의 <<히다찌>>-두문짜리 전기랭장고를 들여놓고 황준복이는 기분이 좋아서 황홀한 눈을 하고 서있는 안해의 어깨를 툭 쳤다.

 

<<어때?>>

 

묻고

 

<<인제 바가지 다 긁었지? 아하하!>>

 

하고 너털웃음을 웃음며 연방 아래턱을 쓰다듬었다.

 

<<큰집 형님이 와보시면 어쩌지요?>>

 

<<어쩌긴 무얼 어째여. 돈을 안 대줘두 우린 이렇게 잘산다구 땅 울려놓지!>>

 

<<당신은 그저...>>

 

<<헤, 누가 더 잘사나 두고보라지.>>

 

이때 밖에 나가 놀던 어린 아들 명수가 흙손을 옷자락에 쓱쓱 문대며 들어왔다. 무슨 굉장해보이는 낯선 물건앞에 엄마, 아버지가 서있는것을 보고 아이는 무춤하니 섰다가

 

<<저게 뭐야 엄마?>>

 

물으며 와서 엄마를 직신거렸다. 황준복이가 얼른 대들어 아들을 반짝 쳐들어 올렸다.

 

<<그게 네 장가밑천이다, 장가밑천. 장가밑천이란게 뭔지 너 아니? 아하하!>>

 

 

3

 

세무국장이 퇴근시간에 동료 서넛을 자기 집으로 끌고 가는데 부국장인 황준덕이도 자연 그 축에 끼이게 되였다.

 

<<자 어서들 앉으시오. 자자...>>

 

자리를 권하여 손님들을 다 앉힌 뒤에 비로소 국장은 빙글빙글 웃으며 말하는것이였다.

 

<<기실은 우리 집 둘째란 놈이 이번에 성(省) 중학생미술전람에서 특상을 탔단 말이요. 전혀 생각밖이지요. 그래서 기쁜김에 겸사겸사 여러분을 한번 모신거니까 그줄 알구 즐거운 한때를 보내들 주시우.>>

 

<<거 정말 반가운 소식입니다.>>

 

<<그런것두 모르구 난 또...>>

 

<<잘되는 집은 가지나무에 수박이 달린다더니... 아마 그런가보군요.>>

 

<<아무튼 반갑소이다.>>

 

입입이 치하를 하는중에 단장을 한 주인마누라가 나와서 면면이 인사를 한 다음

 

<<내오리까?>>

 

하고 남편을 바라보았다.

 

<<다됐소? 그럼 내와야지. 일찍 서둘렀구먼.>>

 

떡 벌어지게 차린 주안상이 나오니 주인은 얼른 일어나서 따로 건사해두었던 고급술 두병을 꺼내오고 또 마개뽑이를 찾아내왔다. 황준덕이가 술병에 붙어있는 레테르를 보니 <<두강주>>-소문난 고급술이였다.

 

<<전설에 따르면 두강은 여름하자 하나라의 국왕으루서 인류력사상 맨처음 술을 발명한 사람이라군. 그래서 술이름을 이렇게 지었다구 하는데... 모르지.>>

 

국장의 말에

 

<<나두 그런 이야기를 어디서 들은적이 있는것 같은데요.>>

 

<<전설이니까 그저 어리숭하게 들어두면 되는게지 뭐.>>

 

<<술을 어느 한 사람이 발명했다는건... 더구나 어느 국왕이 발명했다는건... 유뮬사관하구 좀 어긋나는걸요.>>

 

<<아따 이 사람! 요만 일에 유물사관까지 거들건 뭐 있어?>>

 

<<그건 그래.>>

 

<<아하하! ...>>

 

다들 한두마디씩 지껄이는데 술잔을 잡기전에 벌써 어지간히 흥들이 났었다. 병마개를 따고 죽 돌려가며 잔마다 가득가득 따랐다.

 

<<자, 건배!>>

 

<<우리 피차의 건강을 축원해서...>>

 

<<건배!>>

 

<<건배!>>

 

유쾌한 기분으로 다들 잔을 말리였다. 그러나 곧

 

<<어?>>

 

<<이게 뭐야?>>

 

<<아니, 무슨 술맛이 이래?>>

 

<<예, 퉤!>>

 

<<두강주? 이게 두강주야?>>

 

<<가짜다!>>

 

<<어느 죽일 놈이 이런 술을? ...>>

 

무르녹던 주흥은 산산이 부서지고말았다. 주인인 국장이 아연 실색하여 얼른 술병을 다시 집어들고 그 레테르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레테르는 틀림이 없는데...>>

 

고개를 비틀며 중얼거리다가

 

<<아니, 가만들 좀 있소. 한병 마저 따보구.>>

 

하고 마개뽑이를 집어서 남은 한병을 마저 땄다. 새 병의 술맛을 본 국장의 입이 대번에 비뚤어졌다.

 

<<음, 속았군!>>

 

국장의 체증기있는 이 한마디 말이 도화선이 되여 좌중에서는 불만이 터졌다. 련쇄반응을 일으킨것이다.

 

<<그런 고얀놈!>>

 

<<중일 놈 같으니라구.>>

 

<<아니, 저런 간상배를 그대루 놔둬서 씁니까?>>

 

<<당장 무슨 조치를 취해야지요.>>

 

황준덕이는 공연히 속이 뜨끔하였다. 사촌아우 황준복이가 혹시 이 일에 무슨 관련이 있지 않나 하는 의심이 걷잡을수없이 일어났던것이다.

 

약삭바른 안주인이 얼른 술을 새판으로 받아다가 깨여진 흥을 다시 돋우며 모꼬지를 겨우 마치기는 하였으나 황준덕이는 바늘방석에 앉은것처럼 시종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때 사건의 장본인인 황준복이도 또 제나름으로 곡경을 치르고있었다. 한창 경사스러운중에 마(魔)가 든것이였다. 따로 상좌에 둘러앉아 대접을 받던 점잖은 로인들 틈에서 상서롭지 못한 말소리-언짢은 말소리가 들려올 때 뒤가 워낙 흐리터분한 황준복이는 송구스러워서 안절부절 못하였다. 입에 넣은 닭알부침이-반창고쪼각처럼-갑자기 맛이 없어져서 자기가 무엇을 씹고있는지 알수가 없었다.

 

<<여보 최유사, 이게 도대체 뭐라는 술이요?>>

 

<<보면 모으루? 두강주-이름난 고급술인데!>>

 

<<고급술? 별 기급할 놈의 고급술 다 보겠네.>>

 

<<에 퉤!>>

 

<<이거 어디서 뉘 발 씻은 물을 떠온게 아니요?>>

 

<<천만에!>>

 

<<당신두 술맛두 모르우?>>

 

<<왜 몰라?>>

 

<<알면서 우릴 이런 술을 먹인단 말이요?>>

 

<<술은 무슨 놈의 술! 말오줌이지!>>

 

<<그럴리가 없는데...>>

 

경사로운 환갑잔치가 술을 타박하는 소리로 파흥이 될 지경이였다. 처삼촌의 맏아들-처사촌이 재빨리 손을 써서 술을 갈아온 까닭에 일려던 풍파는 곧 가라앉았자만 황준복이와 그 안해의 마음은 편하지가 못하였다. 안해가 넌지시 보내는 원망의 눈길을 피하느라고 황준복이는 고개를 수그리고 저가락질을 하는체해야 하였다.

 

(공교하기는! 그놈의 두강주가 어떻게 예까지 왔누?)

 

황준복이는 입이 썼다. 그러나 더 입이 쓸 일은 뒤에 있었다.-이튿날 사촌형 황준덕이가 대단히 좋지 않은 얼굴을 하고 그를 찾아온것이다.

 

황준덕이는 그래도 기연가미연가한 마음으로 찾아왔었는데 집안에 발을 들여놓다가 버젓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서있는 신품 전기랭장고를 한눈 보자 더 의심이 붙을나위가 없게 되였다. 그러잖아도 속이 좀 떨떠름하던 판에 느닷없이 찾아온 사촌형의 기색이 전에없이 좋지 않은것을 보고 황준복이는 당황해났다.

 

<<아니, 형님 웬 일입니까. 어서 이리 앉으십시오.>>

 

제수-명수 엄마가 들어와 인사하고 나간 뒤에 황준덕이는 호주머니에서 신문 한장을 꺼내여 앞상우에 펼쳐놓았다.

 

<<자네 봤나 이 신문?>>

 

<<녜? 녜... 아직...>>

 

<<못 봤거든 한번 좀 보게.>>

 

황준복이가 얼굴을 가까이 갖다대고 들여다보았다.

 

 

모리간상배의 도량을 견결히 타격하자!

 

 

요즘 우리 주내에는 가짜약, 가짜술 따위가 대량으로 퍼져서 주민들의 건강을 해치고 생명을 위협하고있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마땅히...

 

 

황준복이는 오금이 저려나서 더 읽어내려갈수가 없었다.

 

<<뒤갈망을 해야잖겠나, 일은 이미 저질러놨으니까 말이야.>>

 

<<그렇지만 이제 와서 어떻게? 그러구 그런 일은 나 혼자만 한것두 아닌데요.>>

 

<<남의 말 할것 뭐 있나? 제앞을 닦으라는데.>>

 

<<하지만 그게 어디 될 말입니까?>>

 

<<어째서? 자네가 퍼먹인것만 도루 거두어들이면 되잖겠나?>>

 

<<아이참 형님두!>>

 

<<왜?>>

 

<<엎지른 물을 다시 주어담으란 말씀입니까?>>

 

<<그럼 사회에 해독을 끼쳐놓구두 그 책임을 지지 않겠단 말인가?>>

 

<<그렇게 엄중하게 말씀할건 뭡니까! 하찮은 일을 가지구.>>

 

<<하찮아?>>

 

<<그럼 하찮지 뭡니까. 지금 그런 일쯤은 례상사예요, 형님은 잘 모르셔서 그렇지.>>

 

궁지에 빠진 사촌아우가 아마모끼로 나오는것을 보고 성미 올 곧은 황준덕이는 곧 률기를 하였다.

 

<<이 사람, 아무리 장사를 해먹어두 인간으루서 최저한 도덕은 있어야잖겠나?>>

 

<<그런 도덕 다 찾다간 돈벌이를 못한다구요 애당초.>>

 

이때 약삭스러운 제수가 과일쟁반을 받쳐들고 부지런히 들어왔다. 문뒤에 붙어서서 방안의 쟁론을 자초지종 다 엿들었던것이다.

 

<<아주버니 과일대접이나 좀 해야지. -아니, 명수 너 뭐하니? 어서 들어와 큰아버지께 인사 여쭙잖구!>>

 

그 바람에 막 붙으려던 불이-물을 끼얹은것처럼-꺼져버렸다.

 

 

4

 

<<여보, 아주버니 말씀대루 그렇게 합시다. 사람이 노상 맘을 못 놓구 어떨게 산다지요? 발편잠 좀 자봅시다 예 여보.>>

 

황준덕이가 하고싶은 말을 다하지 못하여 매우 언짢은 기분으로 돌아간 뒤에 안해-명수 엄마가 남편을 졸라대였다.

 

<<이게 정말 미치잖았나. 익은 밥을 설리란 말이야?>>

 

<<어제 작은아버지 환갑잔치에서 로인들이 가짜술이라구 타박할 때... 난 간이 콩알만해졌었에요.>>

 

<<열두폭짜리 치마를 입잖았어? 이 세상 두강주를 내가 도맡아 판것두 아닌데... 다른 놈이 한것까지 안담할건 무어 있어. 체!>>

 

<<그래두 뒤가 자꾸 켕기는걸 어떡해요.>>

 

<<걱정두 팔자지.>>

 

<<그렇지만 아주버니가...>>

 

<<아주버니 아주버니! 인제 좀 고만 거들어 그놈의 아주버니... 귀에 못이 박히겠어!>>

 

<<저렇다니까, 그게 당신의 흠이예요, 흠이라니까요.>>

 

<<잔사설 고만하구 랭장고에서 맥주나 한병 꺼내와, 청도맥주, 그러구 명수 이 녀석두 어디 갔는지... 붙들어다가 아이스크림이나 뭘 좀 먹이라구.>>

 

황준복이가 쏘파에 편히 앉아 쨍한 맥주거품을-게거품처럼-입에 막 물었을 때였다.

 

<<황씨 있소?>>

 

밖에서 누가 주인을 찾았다.

 

<<아 누구요?>>

 

<<나.>>

 

<<어서 오우. 웬 일이요? 어서 이라 와 앉소.>>

 

찾아온것은 황준복이의 모리간상짝패-<<삽살개>>였다.

 

<<여보, 손님 오셨소. 맥주 더 가져오우.>>

 

먼저 안해에게 소리부터 치고나서 황준복이가 <<삽살개>>를 향하고 앉았다.

 

<<무슨 좋은 소식이라두 좀 있소?>>

 

<<없으면 내가 찾아올리 있는가.>>

 

<<그야 그렇지. 아하하!>>

 

<<삽살개>>가 엿듣는 사람도 없는데 목소리를 푹 낮추어가지고 가만가만 말하였다.

 

<<상해시계를... 17석 손목시계를... 반값에 넘겨받을 구멍을 하나 뚫어놨는데... 어떻소, 한 100개?>>

 

<<반값? 100개?>>

 

<<응.>>

 

<<하오(好)!>>

 

황준복이의 두꺼운 손바닥과 <<삽살개>>의 얄팍한 손바닥이 또 소리를 내며 마주쳤다. 섣달 그믐께 흰떡치는 소리만큼이나 기세가 좋았다.

 

그다음 순서는 의례건으로-

 

<<자, 건배!>>

 

<<와하하!>>

 

<<우후후...>>

 

이들의 흥정은 언제나 이렇게 전광석화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들은 맹수의 얼 같은 상혼(商魂)의 소유자들이였다.

 

저녁때 황준복이가 어린 아들을 무릎에 앉히고 연연한 귀바퀴에다 뽀뽀를 해주며 자애롭게 타일렀다.

 

<<아버지 래일 출장을 가겠는데...>>

 

<<출장? 몇밤?>>

 

<<열밤.>>

 

<<열밤? 그렇게 많이?>>

 

<<응. 그래두 곧 돌아올테니까... 그동안 장난 너무 심하게 하지말구... 엄마 말 좀 잘 듣구... 알았니? 그래야 아버지 올 때 전지루 달리는 똑딱선 사다줄테야. 알았니?>>

 

<<응. 전자풍금두.>>

 

<<그래그래... 전자풍금두.>>

 

이튿날 집을 나서면서 황준복이는 안해에게 또 당부하였다.

 

<<명수 저 녀석 좀 잘 보살피우. 어째 손이 좀 따끈따끈한것 같더라니. 병원에 한번 데려다보이든가.>>

 

<<그건 념려 마세요.>>

 

<<그럼 난 가우.>>

 

<<조심하세요.>>

 

<<아.>>

 

황준복이가 반값에 사들인 17석 상해시계-간상들이 불합격품을 주어모아다 조립한 가짜시계-를 싼값에 퍼먹이느라고 한 열흘 분주히 돌아쳤다. 호주머니가 탁탁해짐에 따라 마음도 흐뭇해졌다.

 

(돈이 없으면 적막강산이요. 돈이 있으면 금수강산이라니까. 하하!)

 

(돈이 제갈량이거든. 돈이 많으면 두억시니두 부린단 말이야. 하하!)

 

황준복이가-승리적으로-귀로에 올랐다. 그도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네편네보다 아들이 더 보고싶었다. 훨씬 더, 몇갑절 더 보고싶었다. 귀여운 아들, 사랑하는 아들이 좋아서 손벽을 치며 날뛰는것을 보려고 뻐스를 내리는 길로 우선 먼저 백화점부터 찾아들어갔다.

 

똑딱선을 샀다. 전자풍금을 샀다. 쵸콜레트도 사고 크림빵도 샀다. 한아름 안고 코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웬 일이냐. 집에 자물쇠가 잡겼으니? 집안은-나간 놈의 집 같이-괴괴하다. 영문을 몰라서 잠시 멍하니 서있다가-대답이 없을것을 짐작하면서도 불러보았다.

 

<<명수야 명수야, 나 왔다 아버지 왔다!>>

 

<<어서 나와 이거 받아라 명수야, 똑딱선.>>

 

집안에서는 아무도 대꾸를 하는 사람이 없는데 그 소리를 이웃집에서 듣고 얼굴이 해사한 오십줄의 아주머니 한분이 쫓아나왔다.

 

<<아이고, 명수 아버지 돌아왔구려... 이걸 어쩌누!>>

 

<<아주머니, 우리 집에선 다 어데를 갔습니까?>>

 

<<그동안 어째 그렇게 소식이 없었소. 어디 간데를 알아야 찾지!>>

 

<<저를 찾았습니까? 무슨 일루?>>

 

<<아직 아무것두 모르는구먼. 명수가 글쎄... 명수가 잘못됐다구요.>>

 

<<명수가 잘못돼요? 아니, 어떻게요?>>

 

<<아이고 이 량반! 그 어린것이... 저세상으루 갔다오, 아버지 얼굴도 못 보구.>>

 

황준복이가 가슴에 안고있던, 아들을 주려던 선물들이 콩크리트바닥에 와르르 쏟아졌다.

 

<<아주머니, 대관절 어떻게 됐습니까? 지금 어디들 있습니까?>>

 

오열과 신음이 뒤섞인 목소리로 황준복이가 부르짖었다.

 

<<걔 큰아버지가 알구 쏜살루 쫓아와서 구급차에다 싣구 병원에를 달려갔지요. 달려는 갔지만 아이가 워낙 무엇해놔서 고만...>>

 

<<도대체 무슨 병을 어떻게 알았기에 구급두 못했단 말입니까?>>

 

<<병은 무슨 병이라나... 대단찮은 병이였지만... 걔 엄마가 모르구 사다 먹인 약이... 가짜약이였더라구, 가짜약! 그런 몹쓸 놈들이 어디 있겠소 글쎄. 돈벌이에 눈들이 뒤집혀서... 하늘두 무섭잖은가!>>

 

황준복이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것만 같았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정신없이 병원에를 달려와보니, 아이가 숨을 거두는통에 충격을 받고 실신한 안해가 입원을 하였는데 울어서 눈이 부은 사촌형수가 그 침대옆에 지켜앉아있었다. 황준복이는 얼굴이 백지장같이 창백한 안해를 한번 들여다보고 곧 사촌형-황준덕이를 따라 태평간-시체실로 내려왔다. 떨리는 손으로 홑이불을 떠 들고 어린 천사의 생기없이 고요한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주먹쥔 손등으로 걷잡을수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닦았다.

 

밖으로 나왔다, 포르말린냄새가 자옥한 시체실에 사랑하는 아들을 남겨두고. 웅장하게 치솟은 느티나무밑에까지 와서 황준복이는 사촌형-황준덕이의 어깨를 그러안고 사나이의 울음을 터뜨렸다.

 

<<형님, 내가... 내가... 죄를 받았습니다! 죄를 받았다구요. 천벌을 받았단 말씀이예요, 형님!>>

 

그러나, 최고도로 발전한 현대의학으로도 고칠수 없는 난치의 열병-돈이라는 괴물을 보기만 하면 대번에 리성을 잃고 미쳐날뛰는 무서운 열병-은... 이 땅들에서 계속 만연중이다.

 

김학철전집4-태항산록-우정

 

소설

우정

 

갈라진지가 벌써 20년이 넘은 옛친구 황길성이한테서 편지가 왔습니다. 이달 그믐께 우리 성에 시찰을 오는 길에 우리 집에 들리겠다는 사연이였습니다. 우리는 온 식구가 다 희색이 만면해졌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그와 나는 이만저만한 사이가 아니였으니까요. 그와 나는 8년 항일전쟁의 어려운 나날에 처음부터 끝까지 생사고락을 같이한 전우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제 나이에도 어울리지 않게 흥분해가지고 마치 무슨 잔치라도 차리는것처럼 서둘러대였습니다. 집안식구들에게 총동원령을 내렸습지요. 그런데 어찌 알았겠습니까, 급기야 월말에 이르러서 글쎄 내 이 무등호의가 물거품으로 돼버릴줄을. 호사다마란 정말 헛말이 아니였습니다. 일이 그쯤 되다보니 내 속이 어째 상하지 않으며 또 서글프지 않겠습니까?

 

 

 

1937년 시월, 황길성이와 나는 함락을 목전에 둔 상해에서 절강성 가흥을 거쳐 남경까지 철퇴를 했습니다. 한데 그 남경에서도 우리는 한달남짓을 겨우 머무르고는 또다시 쫓겨서 양자강을 끼고 서쪽으로 서쪽으로 들달려야 했습니다. 우리는 무호, 안경, 구강 등지를 거쳐서 마침내 한구에까지 다닫게 됐습니다.

 

도중에 사람들로 들붐비는 무호거리에서 우리는 전화에 집을 잃은 수많은 피난민들의 비참한 정경을 목격하게 됐습니다. 로숙과 걸식, 그들은 비 그을 외지간이 없었습니다. 배 채울 밥이 없었습니다. 한데 그중에서도 특히 한집안 세식구가 우리 눈에 띄였습니다. 두눈이 먼 백발이 로파와 그의 며느리인상싶은 스물예닐곱살 가량의 시골녀자 그리고 그 녀자의 서너살짜리 아들아이-뼈와 가죽만 남은 아들아이.

 

 

우리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습니다. 황길성이의 눈에서는 금시로 눈물이 쏟아질상싶었습니다. 우리는 발이 붙어서 차마 그자리를 뜰수가 없었습니다.

 

지쳐서 눈을 감고 입을 헤벌리고 엄마의 무릎에 축 늘어진 어린아이는 창자를 줄이다 못해서 인젠 울음을 울 기맥조차도 없는 모양이였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얼굴에 애티가 있는 그 아이의 엄마는 거기 그렇게 꼼짝 않고 앉아서 굶주린 빛이 어린 눈으로-유난히도 맑은 눈으로-우리를 말끄러미 쳐다보고있는것이였습니다. 그들 한집안 세식구중에서 바깥세상과 서로 통하는것이라면 오직 그 한쌍의 눈이 있을뿐이였습니다.

 

황길성이는 부지런히 사방을 둘러보았습니다. 멀지 않은 골목어구에 내걸린 문짝만한 <<당(当)>>자가 눈에 띄였습니다. 그것은 전당포의 간판이였습니다. 황길성이는 제가 입은 연회색 스피링을 일변 벗으며 일변 그리로 달려갔습니다. 미구에 그가 다시 전당포에서 부지런히 나오는데 벗어들고 들어갔던 스피링은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급한 걸음으로 돌아온 황길성이는 조심스럽게 허리를 구푸리고 손아귀에 쥐고 온 5원짜리 지전 한장을 오래동안 씻은적이 없는 그 젊은 녀자의 손아귀에 살며시 밀어넣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간청하듯 말하는것이였습니다.

 

<<아주머니, 이걸루 애기한테 무얼 좀 사다 먹여주십시오.>>

 

젊디젊은 나이에 벌써 인생의 고초를 겪을대로 겪은 그 녀자의 얼굴에 순간 야릇한 표정이 그려졌습니다. 놀라움이랄가 아니면 감격이랄가. 그 유난히 맑은 두눈이 순식간에 흐려지는것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이번에 나를 보러 온다는 황길성이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그러니 내가 어찌 그를 가장 뜨겁게 맞아주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이듬해 봄, 우리는 호남성 상담에서 배편으로 장사까지 내려왔습니다. 우리가 탄 그 너벅선은 발동선에 끌려서 소상강을 오르내리는 련락선으로서 선객을 한 100여명씩은 태울수 있는것이였습니다. 배안에 식당까지 있어서 갑판우에다 식탁들을 벌려놓고 차도 팔고 또 음식들도 팔았습니다.

 

선객들중에 장사아치 같아보이는 나이 지긋한 뚱뚱보 하나가 있었는데 그가 거느린 마누라는 남편과는 대조적으로 어찌나도 여위였던지 보기가 애처로울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대여섯살 가량 된 아들아이만은 생김생김이 여간만 귀엽지 않았습니다. 새까만 눈에 긴 속눈섭, 앵두 같은 입술과 희다 못해서 거의 투명해보이는 살갗... 그 아이는 앞가슴에 빨간 꽃무늬가 찍힌 새공 하나를 안고있었습니다. 그들 일가가 거느린 크고작은 상자짝들이 여간만 많지를 않아서 주인인 뚱뚱보는 그 재물들을 보살피기에 분주했습니다. 처자식은 물론이고 저 자신마저 돌볼 사이가 없는상싶었습니다.

 

 

황길성이와 나는 배전란간에 비스듬히 기대서서 소상강의 수려한 강색을 바라보며 한동안 담담한 향수에 잠겼습니다. 그럴즈음에 불시로 다급한 고함소리가 들려와서 우리를 놀래웠습니다. 사람이 물에 빠졌다는것입니다. 급히 알아본즉 그 뚱뚱보장사아치의 아들아이가 가지고 놀던 공이 갑판에 떨어져서 톡톡 튀다가 때구루루 굴어 란간밑으로 빠져서 강물에 떨어졌다는것입니다. 그런걸 어린아이는 공을 잡으려는 한 생각만으로 덤비다가 희뜩하는통에 몸의 균형을 잃고 저까지 따라서 강물에 떨여졌던것입니다. 이 모든것은 다 눈 깜박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였습니다.

 

배안은 금시로 왁작해졌습니다. 배군들이 입에다 손나팔을 해대고 배를 세우라고 목청껏 고함들을 질렀습니다. 그러나 앞서서 달리는 발동선에서는 기계소리때문에 그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이렇듯 위기일발의 시각에 내옆에 섰던 황길성이가 잽싸게 웃옷을 벗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달리는 배에서 번개같이 물속으로 첨벙 뛰여들었습니다. 발동선의 추진기가 일으킨 물결이 넘실거리는 속에서 제정신없이 허우적거리는 어린 생명은 가엾게도 목숨이 경각을 달렸습니다. 황길성이는 있는 힘을 다해서 그리고 헤여갔습니다...

 

경겁한 나머지 얼빠진 사람같이 돼버린 말라꽹이엄마의 품속에서 흐주루하게 젖은 아이가

 

<<엄마!>>

 

하고 울음을 터뜨리는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둘러섰던 사람들은 후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였습니다. 어린아이를 구원하는 수선이 끝난 뒤에 황길성이가 따로 와서 젖은 옷을 갈아입고 그리고 세수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닦고있을 때 그 아이의 아버지 뚱뚱보가 쫓아왔습니다. 그는 이 은혜를 어떻게 다 갚겠느냐고 하면서 황길성이에게 여러번 허리를 굽실거렸습니다. 그런 뒤에 그는 지갑에서 10원짜리 지전 한장을 꺼내더니(당시 닭알 한알에 1전 5리 내지 2전이였음) 낯 간지러운듯이 얼굴을 붉히며 앞으로 내밀었습니다.

 

<<저, 약소하지만 이걸...>>

 

황길성이는 얼른 한손으로 그것을 밀막으며 말했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짓입니까. 이러지 말구... 어서 도루 넣어두십시오.>>

 

하지만 그 장사아치량반은 황길성이가 말하는 뜻을 제대루 리해하지 못했습니다. 제나름으로 해석을 하는 모양이였습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마음 먹고 10원짜리 한장을 더 꺼내서 덧얹으며 의논조로 묻는것이였습니다.

 

<<이러면 어떨가요?>>

 

황길성이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쓴웃음을 웃으면서 구원받은 어린아이를 한번 돌아본 뒤 타이르듯 말했습니다.

 

<<공까지 건졌더면 더욱 좋았을걸 그러지 못해서 안됐으니 내가 선사하는 셈 잡구 그 돈에서 공 하나를 사서 아들애기한테 주십시오.>>

 

 

이번에 나를 보러 온다는 황길성이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그러니 내가 어찌 그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1941년 정이월, 환남사변 즉 신사군 피습사건이 발생했을 당시, 황길성이와 나는 통칭 <<락판>>이라고 불리우는 팔로군락양판사처에 머무르고있었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다른 10여명의 사람들과 함께 황하를 건너서 태항산항일근거지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있었습니다.

 

황길성이가 <<신화일보>> 옥색신문지에 실린 주은래동지의 <<천고기원(千古奇冤), 강남일엽(江南一叶), 동실조과(同室操戈), 상전하급(相煎何急)?>>을 읽은것은 바로 거기서였습니다. 다같이 항일을 하는 마당에서 어찌 우군부대에다 그런 독수를 뻗칠수 있겠느냐고 비분강개하는 그 글을 읽고 황길성이는 격동된 나머지에 그만 어린아이같이 엉엉 소리를 내서 울었습니다. 하루밤을 꼬박 새우며 이리저리 돌아눕기만 하다가 급기야 그는 이튿날아침 일어나는 길로 꼿꼿이 판사처 책임동지를 찾아갔습니다. 그는 예정했던 계획을 변경해서 신사군으로 가겠다는 결심을 단호한 어조로 표시했습니다.

 

황길성이와 나는 죽마고우인만큼 철들며부터 피차의 성질을 손금보듯이 꿰드는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이때 나는 한걸음 더 심입해서 그의 애국충정이 백열화한것을 보게 됐습니다. 계급감정이 승화해서 <<그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사랑도 다 바치리라>>는 경지에 다달은것을 보게 됐습니다. 나는 그 같은 훌륭한 친구와 생사고락을 같이하게 된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황길성이는 마침내 <<락판>>책임동지의 간곡한 권유와 설복에 고패를 빼서 원래 작정대로 팔로군으로 가게 됐습니다.

 

 

춘분전후에 <<락판>>과 조선의용대안의 중공지하당조직 사이에 비밀히 련계가 맺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들 10여명 사람은 조선의용대 대원으로 가장하고 그들의 대오에 끼여서 북상을 하게 됐습니다. 비록 그들의 행동도 제한을 받고 또 감시를 받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들보다는 퍽 나았습니다. 어쟀든지 그들은 국제부대였으니까요.

 

5.1절 전야에 우리 10여병 동지들은 조선전우들을 따라 마침내 태항산의 땅을 밟게 됐습니다. 그 얼마나 그리던 태항산입니까. 항일의 봉화가 타오르는 태항산.

 

우리가 태항산근거지에 들어온지 두달도 채 아니돼서 맑은 하늘의 벼락 같은 놀라온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히틀러가 독쏘전쟁을 발동했다는것입니다. 황길성이는 지글지글 속을 끓이기 시작했습니다. 독쏘전쟁 제일선에 자기가 가서 참전 못하는것이 안타까와서였습니다. 쏘련인민에 대한 무한한 동정과 파시스트강도들에 대한 비길데 없는 증오가 얼굴에 현연히 나타났습니다. 그는 국내외의 정치정세와 전국에 대해서 놀랄만큼 민감해졌습니다. 마치 무슨 세계혁명과 운명을 같이하는 정치레이다이기라도 한것 같았습니다. 그 전쟁의 불길이 끊임없이 타번지는 8년항전의 나날에 그는 거의 고향이야기나 부모형제이야기를 입밖에 내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나를 보러 온다는 황길성이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그러니 내 얼굴에 어찌 웃음이 절로 떠오르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1942년 봄, 황길성이와 나는 태항산항일군정대학에서 일본침략군의 발광적인 <<토벌>>을 맞았습니다. 우리는 일제히 일떠나서 맞받아싸웠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나는 넙적다리에 관통총상을 입고 옴짝달싹을 못하게 됐습니다. 단 부저가락 같은 적의 6.8밀리 총탄이 꿰뚫고 지나간것입니다. 나는 이를 악물어 아품을 참았습니다. 적의 포위망이 자꾸만 줄어둘어서 아가리가 거의 맞달라붙게 된 위급한 시각에 황길성이가 어떡허다가 나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비발치는 총탄속을 나는듯이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얼른 나를 잡아일으켜서 둘쳐업었습니다.

 

<<난 내버려두구... 너나 어서 빠져나가!>>

 

나는 몸부림을 치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나 하나 죽는것두 원통한데... 너까지?>>

 

그러나 황길성이는 화증난 목소리로 한마디

 

<<미친 소리 말아!>>

 

꾸짖고는 그대로 나를 업은채 논틀밭틀로 마구 내닫는것이였습니다.

 

황길성이의 용감성과 완강성으로 해서 마침내 우리는 둘이 다 아짜아짜하게 위험을 모면하고 사경에서 벗어났습니다. 하지만 그통에 황길성이도 한 절반 부상병이 됐습니다. 팔목은 삐였지, 얼굴은 갉혔지... 해도 그는 겨우 이틀을 머무르고 또다시 전투부대로 돌아갔습니다. 떠나기전에 그는 싱글싱글 웃으면서 나를 보고 말하는것이였습니다.

 

<<안심하구 치료나 잘해. 내 다음번에 올 때는 적의 치중대를 쳐서... 과일통졸임을 갖구 올테니.>>

 

하지만 그후 반달이 지나서도 황길성이는 적의 과일통졸임을 손에 넣지 못했습니다. 도리여 반대로 그는 자기의 소중한것 하나를-눈알 하나를-잃었습니다. 그가 적과 맞총질을 하는중에 기관총탄에 맞아서 뛰여난 바위돌쪼각 하나가 쌩하고 날아와서 그의 왼쪽눈에 들어박힌것입니다. 의시와 간호원들의 긴장한 응급처치도 효험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 쌀알만한 돌쪼각이 뾰족한 끝이 면바로 동공에 들어박혔던것입니다.

 

나는 무어라고 안위를 했으면 좋을지 도무지 할 말이 생각나지를 않았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스물다섯이였습니다! 고향의 부모네와 동기들이 이걸 알았으면 오죽 가슴 아파하겠습니까! 그런데 지꿎은 운명은 우리를 조롱이라도 하듯이 황길성이의 처지와는 반대로 내 다리의 총상은 하루가 다르게 아물어서 거의다 나았습니다. 단지 걸음을 겉으려면 아직도 다리를 저는것이 흠일뿐입니다.

 

나는 작대기 하나를 얻어짚고 절뚝거리며 황길성이를 보러 갔습니다. 황길성이가 들어있는 병동은 마을 아래쪽 변두리에 있었습니다. 병동이라고는 해도 실상은 그저 보통농가에 불과했습니다. 나는 문을 두드리지 않고 그냥 살며시 떠밀어 열었습니다. 어둑한 방안에는 널문짝을 괴여서 만든 침대명색 셋이 나란히 놓여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에는 어지러운 이부자리만 있고 사람이 없는걸 보니 아마도 바깥출입을 할수 있는 환자인가보았습니다. 중간침대의 죽은듯이 가만히 누워있는 환자는 문을 여닫는 소리만 나고 인기척은 없으니까 베개에서 고개를 조금 들어 이쪽을 바라보았습니다. 나를 알아보자 그는 부지런히 일어나앉으며 반가운 소리를 질렀습니다.

 

<<제 발루 걸어온거야? 요!>>

 

본즉 그의 얼굴에 한 절반 붕대로 감겨있었습니다. 해도 그의 성한 한쪽 눈은 유난히 밝에 빛났습니다.

 

황길성이는 얼른 나를 끌어당겨 제앞에 앉히고 우스개소리라도 하듯이 거뜬한 어조로 말하는것이였습니다.

 

<<우린 둘이 다 영광스러운 부상을 했단 말이야, 안 그래?>>

 

나는 마음이 무거워서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어째, 기분이라두 좋잖은가?>>

 

그는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물었습니다.

 

<<아니, 아무렇지두 않아.>>

 

나는 이렇게 얼버무렸습니다.

 

황길성이는 안심하듯 내 손을 잡아당기며 경사스레 말하는것이였습니다.

 

<<하늘이 굽어살폈어. 우린 얼마든지 총을 들구 싸울수 있단 말이야. 내게다 오른쪽눈을 남겨줬으니... 이제 그래 고맙잖고 뭐야. 그러찮았다면 내 이 꼴이 뭐가 될번했어. 넨장!>>

 

나는 그저 그의 손을 꼭 쥐였을뿐 아무 말도 안했습니다. 무슨말을 한단 말입니까?

 

이번에 나를 보러 온다는 황길성이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아름다운 추억속에 잠기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손꼽아 기다리던 옛친구 황길성이가 드디여 우리 집에를 왔습니다. 그가 우리 온 집안 식구들의 극진한 대접을 받은것은 더 말할것도 없는 일입니다. 그는 전이나 마찬가지로 검은색안경을 썼는데 몸이 나서 20여년전에 비하면 몰라보리만큼 비대혀졌었습니다. 머리도 그리 세지 않았고 또 이도 두대밖에 안 빠졌다는것이였습니다. 얼굴은 보기 좋게 불카하고 허리도 꼿꼿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아주 정정했습니다.

 

그전 같으면 반갑다고 서로 얼싸안고 등을 두드리고 했겠지만 이번에는 피차간 나이를 먹어서인지 그렇게는 안했습니다. 해도 서로 만나는 분위기는 여간만 열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우리 아들에게 박래품 록음기를 선물로 가져왔습니다.

 

차를 내오고 또 담배를 권한 뒤에 안해는 아이들을 데리고 부엌으로 내려갔습니다. 그제야 황길성이는 방안을 한바퀴 휘 둘러 보고나서 묻는것이였습니다.

 

<<어째 텔레비죤두 없어?>>

 

<<여긴 아직.>>

 

하고 나는 없는 리유를 설명했습니다.

 

<<보급이 잘 안돼서... 라지오는 어느 집에나 다 있지만... 텔레비죤은 100집에 한두대가 고작이야. 형편이 이런데 하필 그런 면에서 앞장을 설거야 뭐 있어? 한 이삼년 지나서 다시 보지.>>

 

황길성이는 한동안 덤덤히 앉아있다가 말머리를 돌렸습니다.

 

<<그래 대체 아이가 모두 몇이야?>>

 

<<이제들 보잖았어? 사내녀석 하나에 계집애년 하나...두 남매.>>

 

<<그래 결혼들은 했는가?>>

 

<<아니, 아직 다 미혼이야.>>

 

<<아들아인 그래 뭘 하는가?>>

 

<<로동자야-자동차공장.>>

 

<<음. 그럼 딸아인?>>

 

<<영화관에서 표를 팔아.>>

 

<<다들 대학공부는 안하구.>>

 

<<응.>>

 

황길성이는 또다시 덤덤히 앉아있는데 보아한즉 말할 거리가 잘 생각이 나지 않아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래서 그 공백을 내가 메웠습니다.

 

<<임자네 아이들은 어떻게 지내는가? ...듣자니 손자를 봤다던데?>>

 

<<하하, 그래. 난 벌써 할애비노릇을 해. 손자놈은 돌이 갓 지났는데 발육이 여간만 좋잖아. 그리구 마누라는 지난해 정년퇴직을 해서 백분의 75를 받는데... 요즘은 손자놈하구 씨름을 하느라구 분주히 보내지.>>

 

황길성이는 기분이 좋아서 차를 한모금 마시고 또 려과연 한대를 피워문 다음 내리엮는것이였습니다.

 

<<맏이녀석은 외과의사구 자부는 소아과의사, 그리구 둘째녀석은 물리연구소 연구생인데 그 녀석의 안해감두 역시 같은 연구생이야. 막내는 계집아인데 요것이 또 똑똑하기가 웬만한 사내 볼 쥐여지를만하지. 지금 신문과에 재학중인데 장래 신문기자야 떼놓은 대상이지... 하하하!>>

 

잇달아서 그는 흥미진진하게 자기 집 박래품 천연색텔레비죤, 아들들의 경편오토바이, 전기랭장고, 세탁기 그리고 신강인가 서장인가의 특산이라는 모전방장 이야기를 늘어놓았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자기의 상이년금이 몇프로가 올랐다는것까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고개를 다수굿하고 앉아서 그저 듣기만 했습니다. 아무말도 안했습니다. 어쩐지 머리가 띵한게 기분이 좀 별났습니다.

 

<<...지난날 전생시기 임자나 내나 다 얼마나 고생들 했나. 이루 다 말할수 없는 곤난을 겪었지. 그렇다면 인제 늘그막에 좀 편안한 날을 보내는것두 의당한 일이겠지... 안 그런가? 아이들이 부모의 덕택으루 출세를 좀 한다더라두 뭐 왈가왈부할거야 없겠지... 안 그런가?>>

 

황길성이는 고개를 젖히고 천정에다 길게 연기를 뿜고나서 다시 말을 잇는것이였습니다.

 

<<인간이란 환갑이 지나서야 비로소 삶의 도리를 깨닫게 되는 모양이야. 제아무리 진리라구 해두 권력이 뒤받쳐주잖으면 그건 차표없이 차를 타겠다는거나 마찬가지야-목적지에 가닿을수 없어. 그래서 난 아직 자리를 내놓을 생각은 안해. 벼슬아치과잉이라구? 그럼 본보기루 70대 80대 로장들더러 먼저 내놓으라지. 우리 60대는 좀 천천히 나중에 내놔두 돼...>>

 

나는 어쩐지 가슴속에 야릇한 애수가 스며드는것을 느꼈습니다. 황길성이가 락양에서 <<신화일보>>를 펼쳐들고 통곡하던 정경이 불현듯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40년전 오대주 사대양의 소란하고도 보람차던 세계가 어떻게 자그마한 보금자리로, 안락한 소가정으로 줄어들었단 말인가? 그 진리를 탐구하던 용기는 어데로 사라지고 소시민의 용속한 기풍이 판을 친단 말인가? 나는 걷잡을수 없는 사색의 심연속에 빠져들어갔습니다. 황길성이의 말소리는 어느 아득히 멀고 높은데서 울려오는것만 같았습니다.

 

홀지에 딸년이

 

<<아버지!>>

 

하고 부르는 소리에 나는 소스라쳐 깨여서 현실로 돌아왔습니다. 본즉 그것들 오누이가 신바람이 나서 앞서거니뒤서거니 술에다 안주에다 제가끔 받쳐들고 들어오는중이였습니다. 뒤미처 안사람도 여러가지 별찬을 푸짐하게 날라들였습니다. 그리고는 손님더러 변변찮은거지만 어서 많이 드시라고 지성으로 권하는것이였습니다. 하지만 어쩐지 그 자그마한 환영연회가 내 머리속에서는 흡사 크리스트의 <<최후의 만찬>>만 같았습니다. 그것은 아주 열렬하면서도 또 몹시 암담한 연회였습니다.

 

밤이 이슥해서 나는 집안식구들과 함께 손님을 바래느라고 일각대문밖에 나섰습니다. 거기 멍하니 서서 멀어져가는 황길성이가 탄 승용차의 명멸하는 미등을 바라보면서 나는 여태까지 어떻게 그와 술잔을 나누고 또 어떻게 그와 담소를 했는지 잘 생각이 나지를 않았습니다. 오직 괴이쩍으면서도 고통스러운 하나의 생각만이 내 머리속을 자꾸만 자꾸만 맴돌아치는것이였습니다-벌써 오랜 옛날에, 1945년에, 나는 공산당원 황길성이를 태항산에다 묻어버렸다. 항일의 봉화 타오르는 태항산에다.

 

김학철전집4-태항산록-태항산록

 

소설

태항산록

 

1

윤지평이 령솔하는 조선의용군의 독립지대는 이때 석고산(石鼓山)일대에서 맹활약을 하고있었다. 한단성안에서 조선청년 셋을 쟁취한데 기운을 얻어 이번에는 무안(武安)에 둥지를 틀고있는 적의 헌병분견소를 료정낼 계획을 세웠다. 그 행동대의 골간으로는 로련한 테로분자들인 양대봉이와 마춘식이가 선정되였다.

 

허술한 각탁 둘레에 군복차림을 한 세 사람과 농민본색을 한, 얼굴이 해사하게 생긴 사람 하나가 둘러앉아 쑥덕공론을 하고있는데 군복을 입은 세 사람은 윤지평, 양대봉, 마춘식이고 농민복색을 차린 사람은 리명선이다.

 

<<어서 이 동무들두 다 듣게 료해한 정황을 한번 이야기해봅시다.

 

윤지평의 말에

 

<<녜.>>

 

대답하고 리명선이는 당지의 농민식으로 머리에 썼던 때묻은 수건을 벗어서 얼굴부터 한번 닦고나서 자기가 가짜량민증을 달고 성안에 들어가 여러날 걸려 수탐해온 정황을 보고하였다.

 

<<헌병분견소를 들이친다는건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바루 그 맞은편이... 길 하나 건너가... 보병중대의 병사란 말입니다. 보초가 스물네시간 줄곧 지켜서있는 코앞에서 무슨 일을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그러니 달리 료정을 내는수 밖에 없습니다. 그놈의 분견소는 헌병오장(하사)한놈, 통역 한놈, 서사 한놈... 이렇게 세놈으루 구성됐는데... 통역은 조선놈이구 서사는 중국놈입니다...>>

 

말하는 중간에 양대봉이가

 

<<뒤문두 없는가 그놈의 분견소엔?...>>

 

하고 지형지물을 물어서 리명선이는 머리를 가로 흔들고

 

<<뒤문? 없어.>>

 

대꾸하고 다시 중둥무이된 말을 잇대여 하였다.

 

<<그런데 무안성밖에 며칠거리루 장이 서는데... 그 장마당을 세놈이 가끔 나와 돌아보는 일이 있습니다. 장마다 나오는것 아니지만. 그런데 나올 때는 세놈이 다 변복을 하구 나옵니다. 그러니 해치우려면 장날 대낮에 큰길에서 해치울수 밖에 없을것 같습니다.>>

 

<<대낮두 좋지 뭐.>>

 

하고 마춘식이가 어깨를 으쓱거리니

 

<<그렇다면... 사로잡을수두 있잖겠나?>>

 

하고 양대봉이 먼저 리명선이를 바라보도 다시 윤지평을 돌아보았다.

 

<<아니 가만들 좀 있으시오. 내 이 문제를 먼저 우군부대 대대장과 한번 좀 의논해보구나서 우리 다시 토의하기루 합시다.>>

 

윤지평은 이렇게 말하고

 

<<어떻습니까?>>

 

하고 양대봉이와 마춘식이의 의행을 물었다. 두 사람은 좋다고 고개를 끄덕이는것을 보고 윤지평은 다시 리명선이를 향하여

 

<<수고했습니다. 어서 돌아가 푹 좀 쉬십시오.>>

 

하고 위로해 말하였다.

 

다음다음 장날이다. 사복차림을 한 일본헌병오장 사까이가 역시 사복차림을 한 조선인통역 류등호와 중국인서사 왕가를 데리고 장마당을 둘러보러 나왔다. 사까이와 류동호는 겉으로 보이지 않게 허리춤에 권총들을 찼었다. 사람이 워낙 잔약하게 생긴 왕가가 상전을 모시고 장마당을 한바퀴 돌아보고나서 무슨 낌새를 채였는지 공연히 불안해하며 빨리 성안으로 돌아가기를 조이는 눈치라 무사도정신으로 도약된 사까이오장과 호걸풍의 류통역은 서로 돌아보고

 

<<저 겁쟁이 좀 봐라.>>

 

<<정말 못날 녀석입니다.>>

 

비웃고 둘이 같이 껄껄 웃었다. 3등국민인 왕가는 1등국민인 오장과 2등국민인 통역이 뒤에서 자기를 비웃거나말거나 혼자 앞서서 부지런히 걷기만 하였다. 그 고집스레 서두르는 모양이 마치 무엇에 쫓기는 놈과도 같았다.

 

<<지나인(支那人)이란 할수 없군.>>

 

오장의 말에

 

<<누가 아니랍니까.>>

 

류통역은 맞장구를 쳐서 비위를 맞추며 두 사람은 례사로이 느럭느럭 걸었다. 왕가못난이에게 본을 보여주려고 일부러 더 천천히 걸었다. 대낮의 큰길이건만 장이 아직 파할 때가 멀어서인지 행인이 드물다느니보다 거의 없었다. 오장과 통역이 산책기분으로 얼마를 왔을즈음 불시에 잔등패기에 뭣인가가 딱딱하거시 쿡 와닿는것 같더니

 

<<우고꾸나(꼼작 말아)!>>

 

하고 무시무시한 경고가 귀전을 때렸다. 두 사람이 깜짝 놀라 엉겹결에 고개를 돌이켜보니 두억시니같은 허상궂게 생긴, 머리에 수건을 쓴 두놈이 등뒤에 바싹 붙어서서 목자를 부라리는데 잔등패기에 들이댄것은 권총부리가 틀림이 없었다. 무사도정신으로 도야된 사까이오장이 대번에

 

<<으악!>>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내닫는데 불 채인 중놈 달아나듯하였다. 그러자 두억시니중의 형님벌이 되여보이는 놈이 제잡담하고 권총 한방을 내갈기니 뒤통수에 명중탄을 얻어맞은 사까이오장은 두팔을 쩍 벌리며 앞으로 푹 고꾸라져서 그만 끝장이 나버렸다. 앞서가던 왕가는 이 무서운 광경을 한눈 돌아보자 곧 저 혼자 걸음아 날 살려라 뺑소니를 쳐버렸다. 류등호는 얼혼이 빠져서 동생벌이 되여보이는 두억시니가 달려들어 저의 허리춤에 지른 권총을 잡아채는데도 남의 일같이 그저 덤덤히 서있기만 하였다.

 

<<걸아라!>>

 

놀랍게도 그 두억시니가 이번에는 또렷한 조선말로 명령을 하였다. 류등호의 머리속에는 바로 며칠전에 사까이가 하던 말이 피뜩 떠올랐다.

 

<<불령선인(不逞鲜人)들이 요새 빠루(팔로)하구 부동해서 별지랄을 다하는데... 우리두 정신을 바싹 차려야겠다니.>>

 

(아불싸, 내가 그 악당놈들에게 걸렸구나! 인제 나두 볼장 다 봤다.)

 

류동호는 갑자기 다리맥이 풀려서 걸음걸이가 허청허청해졌다. 두 두억시니는 죽을상이 된 류등호를 재촉하여 앞세우고 사까이가 엎어져 뻐드러진데까지 오더니 형님벌이 되여보이는 두억시니가 송장의 허리춤에서 권총을 뒤져내고 또 잊지 않고 그 손목에서 시계까지 벗겨내였다. 익숙한 솜씨였다. 늘 해본 놈 같았다. 류등호는 사까이의 대갈통에서 흘러나와 길바닥에 고인 선지피를 보자 소름이 오싹 끼쳤다. 그러고 또 어떡허다 정신을 수습하고 다시 보니 저를 랍치해가는 두억시니가 원래의 둘에서 어느새 곱절-넷으로 늘어났다.

 

이날 밤 윤지평은 호젓한 초불밑에서 한놈을 사살하고 한놈을 생포해온 양대봉이와 마춘식이와 다른 두 대원과 리명선이의 공적을 지휘부에 보고하려고 부지런히 펜을 달리였다.

 

 

2

 

그러나 전쟁에도-세상만사가 다 그러하듯이-성공이 있으면 실패가 있고 기쁨이 있으면 또 슬픔이 있는 법이였다. 백주대낮에 무안성밖 대로상에서 사로잡은 헌병대통역 류등호를 태항산중의 지휘부로 압송하는 일행이 동욕(桐峪)에 채 와닿기도전에 비보 하나가 꼬리에 달리다싶이 하여 뒤따라왔다. 한단성안에 아지트를 건립해놓고 삐라공작을 하는 한편 조선청년들을 포섭하고있던 송은산이가 희생된것이다.

 

한단성안에 조선인개업의가 경영하는 <<평안의원>>이라는 병원이 있었다. 그 병원에 약제사로 일하는 오가성 가진 조선청년이 있었다. 그 청년에게 맡겨두었던 삐라묶음을 찾아가지고 아지트로 돌아오다가 송은산이는 그날 길거리에서 우연히 황협군 순찰대에게 검문을 당하였었다. 그는 그동안 일이 계속 순리로왔던 까닭에 저도 모르는 사이에 경각심이 풀려서 좀 느슨해졌던것이다. 몸수색을 당하게 되자 송은산이는 칼 물고 뜀뛰기를 아니할수 없게 되였다.

 

(몸을 뒤지면 삐라묶음이 나오구 또 권총이 나올것 아닌가!)

 

그는 번개같이 권총을 빼여 막 옷자락에 손을 대는 놈의 배때기를 한방 갈겼다.

 

<<악!>>

 

소리를 지르며 두손으로 배때기를 부둥키고 두무릎을 꿇으며 엎으러졌다. 송은산이는 날쌔게 몸을 빼치여 칼 박고 삼간뛰기로 도망칠을 쳤다. 등뒤에서

 

<<저놈 잡아라!>>

 

소리와 호르래기소리, 총성이 뒤섞여 일어났다. 죽어라 하고 뛰는중에 갑자기 앞길에 전투모를 쓰고 총을 든 일본병들이 나타났다. 송은산이는 그놈들을 피하여 얼른 옆골목으로 빠졌다. 그러나 얼마 아니 가서 또 골목이 메게 마주 달려들어오는 한무리의 적병과 맞닥뜨렸다. 궁지에 빠진 송은산이는 어느길가집에서 지붕을 고치느라고 벽에다 사다리를 기대여놓은것을 보고 얼른 쫓아가 그 사다리를 타고 지붕으로 바라올랐다. 지붕우에서 얼쩡거리던 기와쟁이와 그 조력군이 권총을 손에 든 놈이 지붕으로 쫓아 올라오는것을 보고 초풍하여 대번에 무릎들을 끓고 부들부들 떨었다. 송은산이는 손을 내저으며

 

<<부요파(不要怕), 부요파!>>

 

안심을 시키고 곧 지붕에서 지붕으로 뛰기 시작하였다. 한참 뛰다가 지붕이 다하여 아래를 굽어보니 거리와 골목이 일본군, 황협군, 경찰, 구경군으로 바글바글 끓고있는데 입입이 웨치는 소리가 다 자기를 잡으라는 소리였다. 옴치고 뛸데라고는 없었다. 지붕우에서 발깍 뒤집힌 한단거리를 내려다보며 송은산이는 자기의 운이 다한것을 깨달았다.

 

(에라 이럴바엔 혁명적산다운 최후를 마치자!)

 

결심을 내리자 그의 눈앞에는 고향에 계신 어머니-사랑하는 어머니의 인자한 얼굴이 크로즈업되여서 나타났다. 그는 아직 미 장가전의 로총각이였다. 그는 강원도 녕월사람으로 <<강원도메나리>>를 썩 잘 불렀었다. 그는 락천가였다. 혁명적랑만주의자였다. 단짝인 리명선이에게 수삼차나 자기의 단순한 실련담-어떤 처녀에게 말을 걸었다가 코빵 맞은 이야기를 하고는 매번 다

 

<<고년의 가시내.>>

 

하고 쓴웃음을 하였었다.

 

송은산이는 몸에 지녔던 삐라묶음을 꺼내여 잽싸게 노끈을 끌렀다. 그리고 길바닥에서 모두 고개를 뒤로 젖히고 쳐다보며 술렁 거리는 사람들을 향하여 그 삐라를 냅다 뿌렸다. 삐라가 확 퍼져서 분분히 흩날리는것을 보고 송은산이는 손에 쥔 권총을 피줄이 펄떡펄떡 뛰는 저의 관자노리에 갖다대였다. 이어 한방의 총성이 모든것을 앗아가버렸다.

 

적들은 한단거리에 <<적비(赤壁)>>라고 적은 패말을 세우고 그 밑에다 송은산의 시체를 사흘동안 전시경중(展示警众)하였다.

 

 

3

 

형대(邢台)성안 일본헌병분견소와 일본군려단사령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다까야마라는 창씨성(본 성은 고)을 가진 조선사람형제가 경영하는 아사히(朝日)라는 간판을 내건 리발소가 생겼는데 영업이 어지간히 잘되였다. 고객은 주로 조선거류민, 일본관헌, 일본거류민들인데 어느 고장의 리발소도 다 그러하듯이 이 아사히리발소도 곧 할일없이 심심한 사람들이 모여서 한담설화하는 장소로 되였다.

 

이때 형대에 사령부를 설치한 일본군려단의 려단장은 조선인 홍사익소장이였으므로 형대에 거류하는 조선사람들은 공연히 코가 우뚝하였었다. 아닌게아니라 형대의 일본관헌이나 일본거류민들도 다른데서처럼 조선사람을 반도인이라고 함부로 다루지는 못하였다. 홍사익각하의 간접적인 덕택임이 분명하였다. 아사히라는 간판이 일본인과 친일파들에게 친절한 느낌을 주어서 그런지 얼마 오래지 않아 곧 부대와 헌병대의 조선인통역들이 일본사람들과 함께 단골손님으로 려단사령부의 내막을 밥 끓고 죽 끓는것을 눈으로 보듯이 알고 지내였다. 려단사령부에 하야시라는 창씨성(본 성은 림)으로 불리는 스물네살 먹은 조선인통역 하나가 있었는데 다같은 신의주사람이라고 해서 특히 리발사형제와 가깝게 지내였다. 어느 일 없는 밤저녁에 리발소로 놀러 왔던 하야시가 마침 리발소가 조용한것을 보고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하던끝에 웃으면서

 

<<내 지난번 장군묘에 토벌을 나갔다가... 희한한걸 하나 얻어 보잖았겠소.>>

 

하고 말하며 큰다까야마가

 

<<무슨 희한한거... 어떤?>>

 

하고 흥미를 가지며 물으니 하야시는 유리창으로 내비치는 불빛에 히읍스름한 거리를 한번 내다보고나서 장화목에 손을 디밀더니 착착 접은 종이 한장을 꺼내였다.

 

<<이런거요.>>

 

<<그게 뭔데요?>>

 

불갈구리고 난로를 쑤시던 작은다까야마도 불갈구리를 손에 든채 다가와서 목을 늘이고 들여다보았다.

 

<<아니 그게 무슨... 삐라가 아닌가요?>>

 

하고 큰다까야마가 놀라니 하야시는 얼굴에 뽐내는 기색을 띠우며 주인형제를 반반씩 갈라보았다.

 

<<대체 무슨 삐란데요?>>

 

<<글쎄 태항산속에.>>

 

하고 하야시는 목소리를 푹 낮추어가지고

 

<<우리 사람들이 있다는게 정말이란 말이요.>>

 

하고 소곤소곤 말하였다.

 

<<우리 사람들이라니요? ...>>

 

<<조선사람... 조선의용군이란... 항일부대가 있단 말이요.>>

 

주인형제가 다같이 놀라며

 

<<아니 그게 웬 말이요? ...>>

 

하고 서로 돌아보기만 하고 더 말을 잇지 못하니 하야시는

 

<<쉬, 걔들이 알았다간... 내 이 모가지두 아마...>>

 

하고 삐라를 보라고 큰다가야마에게 건네주었다.

 

글머리에 서로 어기찬 태극기 한쌍이 눈에 번쩍 띄우는 그 삐라에는 또렷한 한글로 <<조선동포에게 고함>>이라고 찍혔는데 아닌게아니라 글의 끄트머리에는 조선의용군 다섯자가 분명하지 않은가! 다까야마형제가 덤덤히 서서 마주보기만 하는데 하야시는 큰 다까야마의 손에서 삐라를 잡아채듯이 하여 얼른 접은 금대로 도로 접어서 장화목에 밀어넣었다. 그리고 탄식조로

 

<<우리 민족은 죽지 않았소. 죽지 않구 아직두 살아있단 말이요. 삐라에 찍힌 태극기를 보는 순간 난 제 나라를 도루 찾은것 같아서... 속이 다 찡합디다. 그런데 제길할 난 여기서,>>

 

하고 하야시는 주먹으로 제 가슴을 한번 콱 박고

 

<<왜놈의 통역노롯을 하구있단 말이야!>>

 

하고 통탄을 하는것이였다. 사람이란 울적한 감정을 자기를 알아줄만한 사람에게 다 털어놓아야만 속이 후련한 법이였다.

 

나중에 돌아갈 때 하야시통역은

 

<<말씀 안해두 다들 아시겠지만... 이런 일은 두 형제분만 알구 계시우. 입 한번 잘못 뻥긋했다간 큰일나는 세상이니.>>

 

당부를 하고 갔다. 통역이 돌아간 뒤에 다까야마형제는 한동안 멀거니 마주 바라보고 섰다가

 

<<저거 우리 속을 떠보느라구 저러는건 아니겠지?>>

 

<<설마...>>

 

하고 서로 지껄이였다.

 

<<그럼 어떡헌다?>>

 

<<어떡허다니?>>

 

<<한번 시험적으루 포섭을 해볼가 말이야.>>

 

<<해보자구 까짓거. 사람은 미더워. 통역이라구 뼈속까지 다 민족반역자란 법이 없겠지.>>

 

<<아까 그 한탄을 하는게... 바이 거짓스럽진 않지?>>

 

<<진정이야, 내 보기엔... 진정이야. 고민속에서 방황하구있다는게 환히 알리던데 뭐.>>

 

사람들이 보는데서는 형님동생하던 두 사람의 말씨가 어느새 너나들이로 변하였다.

 

<<그럼 한번 해보자구.>>

 

<<좋겠지.>>

 

아사히리발소가 조선의용군의 아지트인것을 아는 사람은 형대성안에 몇이 없었다. 그 몇 사람도 큰다까야마의 본성명이 우자강이고 작은다까야마의 본성명이 림상수인것은 모르고들 있었다. 두 사람은 본시 리발사출신이였다. 그래서 이러한 변장이 가능하였고 또 이러한 착상을 할수 있었던것이다. 그들은 아사히리발소를 차려놓고 뒤구멍으로 애국적인 조선청년들을 포섭하고 삐라공작을 하고 그리고 정보수집을 하고있었다.

 

이때 중국의 묵은 동전을 수매해다가 일본군수산업부문에 납입하는 바람이 불어서 돈벌이에 눈이 뒤집힌 어중이떠중이들이 린근의 장거리와 마을들을 가을중 쏘대듯하였는데 그중의 한 사람이 형대성안의 아사히리발소와 서황촌부근에 주류하는 윤지평지대와의 사이를 련결하는 줄일줄을 성문을 지키는 일본병들이 어찌 알았으랴. 자전거짐받이에 동전마대를 싣고 형대성문을 무상출입하다싶이 하는 그 반도인 시라가와(본성은 백)는 우자강과 림상수가 아시히리발소를 차려놓고 포섭에 성공한 천번째 대상자였었다.

 

 

4

 

한구를 떠난 북평행 렬차가 어느 불빛 밝은 역구내에 들어서며 서서히 멎어섰다.

 

<<예가 어딘가요?>>

 

<<형대야.>>

 

<<형대... 형대에두 우리 사람이 많이 있다지요?>>

 

<<그래여.>>

 

<<이러다간 석문은... 한방중에나 지나겠네요.>>

 

<<열한시 몇분이라지 아마.>>

 

이런 말을 주고받는것은 상인풍의 중년남자와 까만색오바코트를 입은 그 안해였다.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분주살스러운 가운데 일본인 렬차장이 부랴부랴 달려오더니 출입문 바로옆의 좌석에 앉았는 승객들을 딴데로 옮기게 하여 자리를 비워놓자 군도 차고 권총 메고 누른색소가죽장화를 신은 일본헌병 셋이 저벅저벅 걸어들어오는데 수갑 채운 청년 둘을 중간에 세웠었다. 머리들이 헝클어진 두 청년을 차창밑에 하나씩 갈라앉히고 바로 그옆에 헌병 둘이 각각 붙어앉고 그리고 인솔자로 보이는 하사관은 통로 건너 넓은 좌석에 혼자 따로 편히 앉았다. 상인풍의 중년남자와 그 안해는 다른 승객들과 마찬가지로 어마한 분위기에 눌려서 숨들도 크게 쉬지 못하였다. 그들 내외의 앉았는 좌석하고는 비슥맞은쪽인데 어떡허다 압송되는 두 청년과 눈길이 마주칠 때면 그 안해-서른살안팎의 젊은 녀인은 이름 못할 동정과 숭모로 가슴이 마구 죄여드는 모양이였다.

 

(얼마나 씩씩한 모습들인가.)

 

(얼마나 철학적인 깊이를 가진 얼굴들인가.)

 

(얼마나 태연한 몸가짐들인가.)

 

<<여보, 우리 사람이 틀림없지요? 그렇지요?>>

 

안해가 남편의 귀가에 대고 속삭이니

 

<<응.>>

 

하고 남편은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스레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우리 대봉이또래들인데... 독립군인가보지요?>>

 

남편은 놀라서 다시한번 앞뒤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핀잔스레

 

<<공연한 소리 지껄이지 말어.>>

 

하고 안해의 말문을 막았다. 안해는 한동안 입을 다물고있다가 한숨을 한번 호 쉬고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개가 집을 나간지두 인젠 10년이 다돼가는데... 어디서 어떡하구 사는지... 어쩌면 편지 한장이 없담. 매정한 녀석.>>

 

 

<<양대봉한테서 무슨 소식이 있거든 즉시 주재소에 신고하라구 순사부장이 와 이러든거 잊었어? 걔 말은 아예 입밖에두 내지 말어.>>

 

남편은 도적놈 개 꾸짖듯 입속말로 웅얼거렸다.

 

렬차가 쉬지 않고 달리여 관장 못미쳐까지 왔을즈음이다. 기관차가 느닷없이 기적을 울리며 앞으로 나아가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고 그저 선자리에서 자꾸 허우적거리기만 하였다. 객차안의 사람들이 모두 영문을 몰라서 의아쩍어하는중에 별안간 객차의 출입문을 와락 밀어붙이며 총을 든 사람들이 달려들었다. 선두에 선 얼굴이 거머무트름한, 권총을 든 팔로군과 통로 건너좌석에 따로 앉았던 헌병하사관이 눈 깜박하는 일순간에 서로 대고 맞총질을 하였다. 하사관은 배를 그러안고 푹 고꾸라지고 팔로군이 왼편 팔목에서는 선지피가 주르르 흘렀다. 까만색오바코트를 입은 녀인은 그 얼굴이 거머무트름한 팔로군을 한눈 보자 소스라쳐 일어나며 소리를 지르지 않으려고 손수건 쥔 주먹으로 입을 막았다.

 

 

동전을 수매하러 다니는 시라가와가 짐받이에 마대를 실은 자전거를 타고 부랴부랴 서황촌근처의 지대본부를 찾아왔던것은 두 주일전의 일이다. 그의 가져온 소식은 온 지대를 뒤흔들어놓았다. 형대성안의 아지트-아사히리발소가 적들에게 불의의 수색을 당하는통에 다까야마형제로 가장하였던 우자강과 림상수가 꼼짝 못하고 체포되였다는것이다.

 

<<이 일을 어쩌지?>>

 

<<이걸 어떡한다?>>

 

얼굴빛들이 노래져가지고 아무리 궁리를 해보았자 헌병대에 갇힌 사람을 빼내온다는 재간은 없었다. 한개 려단이나 쏟아져들어간다면 또 모를가 그외에는 구출할 방법이 없었다. 속수무책으로 속들을 지글지글 끓이는중에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고 닷새가 지나고 또 한주일이 지났다. 두주일째 되는날 늦은 아침때 련락원 시라가와가 또 자전거를 타고 진동한동 쫓아와서 보초장을 앞세우고 지대장실에 들어서는데 숨이 턱에 닿았다.

 

<<오늘 밤차루 떠난답니다.>>

 

시라가와가 밑도 끝도 없이 웨치는 말을 미처 해득 못한 윤지대장이

 

<<밤차를 떠나? 무엇이?>>

 

하고 재쳐 물으니 시라가와는 가쁜숨을 돌린 뒤에 비로소

 

<<다까야마형제 말입니다.>>

 

하고 주사를 말하였다.

 

<<오, 어디루?>>

 

윤지대장과 보초장이 다같이 놀랐다.

 

<<석가장으로 간답니다. 석문헌병대에서 벌써 압송할 헌병들이 내려왔답니다. 하야시통역이... 하야시통역 아십지요? 하야시통역이... 새벽같이 쫓아와 일러주면서 빨리 가 알리라구 당부하잖겠습니까. 그렇지만 성문이 열려줘야 나옵지요. 그러구 또 너무 일찍 서두르면... 의심을 받기 쉽겠구... 그래서 이렇게 늦어졌습니다.>>

 

<<수고했습니다 백동무.>>

 

윤지대장은 너무 고마워서 시라가와의 손을 덥석 잡고 흔들고 또 흔들고 하였다.

 

(동전수매를 하는 애국자! 이 얼마나 대견한가!)

 

시라가와는 우러러보는 윤지대장이 자기를 너무나 뜨겁게 동지적으로 대해주는데 감격하고 또 황송하여 잠시 몸둘바를 몰라하였다.

 

윤지대장은 곧 비상소집을 해가지고 구출할 대책을 강구하는데 격앙한 동지들이

 

<<렬차를 습격합시다.>>

 

<<무조건 습격해야 합니다.>>

 

<<시각을 천추해선 안됩니다.>>

 

<<총출동합시다.>>

 

<<간나새끼들, 본때를 보여줍시다.>>

 

<<시간이 촉박한데 서둘러야 합니다.>>

 

<<현장까지 가재두 여러시간이 걸리잖겠습니까?>>

 

입입이 습격하자고 주장하여 의제는 책장 한장을 뒤지듯이 간단하게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세우는데로 넘어갔다.

 

<<렬차를 멈춰세울 방도부터 토의해봅시다.>>

 

하는 윤지대장의 말에 여러 사람이

 

<<물론 궤도를 폭파해야지요.>>

 

<<아니 레루 한개를 들어내는게 더 좋습니다. 요란스럽잖구.>>

 

<<그렇게 되면 기차가 탈선을 할텐데? ...>>

 

<<위험합니다, 그 방법은.>>

 

<<탈선은 재미 적습니다. 우리 사람까지 상할 념려가 있습니다.>>

 

중구난방으로 나서는것을 양대봉이가

 

<<내 말부터 좀 듣구나서... 내 말부터 좀 듣구나서...>>

 

하고 손을 내저어 누르고 자기의 생각한바를 이렇게 피로하였다.

 

<<렬차를 멈춰세우는데... 폭파를 한다든가 레루를 들어낸다든가 하는건 다 하지하책입니다. 우리 사람을 구해내는게 이번 행동의 목적인 이상 더더구나 쓸수 없는 방법입니다. 내가 전에 조선에서 원산총파업때 철도로동자들에게서 배운게 있습니다. 그때 외지에서 모집해오는 파업깨기군들을 저지하려구 기차를 중도에서 멈춰세우는데 원산철도로동자들은 우둔한 방법을 써서 경찰놈들에게 구실을 주지 않으려구 교묘한 방법을 썼습니다. 구배가 심한 지점을 골라서 레루에다 몇십메터 잘되게 모빌유를 잔뜩 발라놨습니다. 그랬더니 미끄러워서 그놈의 차바퀴가 자꾸 공전을 하잖겠습니까. 생전 기관차가 앞으루 나갈 재간이 있어야 말이지요. 다급해난 기관사놈이 모래통의 모래를... 언덕을 올라갈 때 쓰는 모래를... 드립다쏟습니다. 결국은 올라가긴 가까스루 올라갔지만 동안이 착실히 걸리더란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두 이번에...>>

 

양대봉이가 말을 다 마치기도전에

 

<<그거 참 된수요.>>

 

<<옳소!>>

 

<<절대 찬성!>>

 

열렬한 분위기속에 만장일치로 가결이 되였다.

 

시간이 촉박하므로 지체없이 행동으로 넘어가는데 윤지대장의 포치로 더러는 차단호를 넘을 발판을 마련하고 또 더러는 기름을 구하러 나갔다. 윤지대장은 양대봉이와 리명선을 데리고 뒤에 남아서 시라가와에게 그가 이번 행동에서 맡아할 역할을 대하여 자세히 이야기해들렸다. 시라가와를 납득시켜서 돌려보내고나니 해가 벌써 한낮때다. 또 한동안이 지나서다 장만한 발판은 그런대로 쓸만하였으나 기름은 모빌유가 없어서 대용품으로 유채기름과 돼지기름을 듬뿍 구해들였다.

 

렬차를 습격하려고 떠나 대오는 해질녘에 관장에서 오륙마장 떨어진 촌락에 들어가 저녁을 지어먹고 한동안 휴식한 뒤 야음을 타서 행동을 개시하였다. 민촌의 개짖는 소리를 들으며 유령의 행렬처럼 기척없이, 사전에 미리 정찰하여 선정한 지점에 접근하였다. 10여명 사람이 번갈아 목도질해온, 한쪽끝에 긴 삼바줄이 달린 널판대기를 도개교(跳开桥)처럼 차단호가장자리에 60도각으로 세웠다가 천천히 줄을 주어서 발판을 놓았다. 인제 렬차가 통과할 시각-9시 20분까지는 반시간이 채 못 남았다. 대원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발판을 건느며 곧 철뚝 량옆에 매복하였다. 여기는 구배선-철길이 어지간히 경사진 지점이다. 양대봉의 지휘하에 칠팔명 사람이 두패로 나뉘여 준비해온 유채기름과 돼지기름을 레루의 안쪽 절반에다만 몇십메터 잘되게 마구 발라나갔다. 두가지 성질이 다른 기름으로 레루를 아주 범벅을 만들어놓았다.

 

 

먼 형대역에서 기차 떠나는 기적소리가 들려오자 윤지대장은 허리를 구푸리고 각 분대의 분대장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다시한번 주의를 주었다.

 

<<저항만 하면 가차없이 해치우시오. 기관사두 마찬가지요. 순종하면 살려주구... 안하면 해치우시오. 일반려객을 상하지 않두룩...>>

 

이윽고 앞등으로 철길을 눈부시게 비추며 렬차가 달려왔다. 매복한 사람들은 제각기 총을 배밑에 깔고 납작납작 엎드려서 얼굴을 땅에다 파묻었다. 이런것을 모르고 기세 좋고 달려오는 기관차는 기름을 덕지덕지 발라놓은 구배선에 서슴없이 들어섰다. 그러나 얼마 못 올라가서 곧 차바퀴가 헛돌이를 시작하였다. 육중한 기관차가 선자리에서 허우적거리는양은 마치 무슨 마귀의 술법에라도 걸린것 같이 신기스러웠다. 웬 영문을 모르는 기관사와 화부가 눈들이 휘둥그래져서 얼굴을 마주보는 순간 꿈에 보일가 무섭던 팔로군들이 기관사실로 뛰여올랐다. 그리고 다짜고짜로 총부리를 들이대며

 

<<세워라!>>

 

호통을 치는것이 아닌가. 혼비백산한 화부는 손에 든 부삽을 얼른 놓고 들라고도 하지 않는 두손을-영화에서 본대로-번쩍 들었다. 기관사는 부들부들 떨면서 저를 겨눈 총구멍에다 눈을 박은채 거의 본능적인 동작으로 제동기를 더듬었다.

 

렬차가 멎어서느라고 덜거덩거릴 때 끝으로 서번째 객차의 승강구의 문이 안으로 덜컥 열렸다. 근처에서 대가하고있던. 양대봉이를 선두로 한, 손에 손에 총을 든 습격대원들이 우르르 차에 뛰여오르니 문을 열어준 사람-시라가와가 얼른 한옆으로 비켜서며 맞은편 차칸의 출입문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양대봉이가 알아차리고 서너걸음에 쫓아가 문을 와락 밀어붙이며 차칸으로 뛰여들었다. 오른편 좌석에 따로앉았던 헌병하사곤이 재빨리 권총을 빼들었다. 일순간 맞불질. 헌병하사관은 배때기를 맞고 푹 고꾸라지고 양대봉이는 왼편 팔목에 총알을 맞았다. 뒤따라들어온 리명선이와 마춘식이는 다른 대원들과 함께 와락 대들어서 깜박할 사이에 두 헌병놈의 무장을 해제시켰다. 그리고 눈들을 부라리며

 

<<열쇠!>>

 

<<냉큼 열지 못할가?>>

 

으르딱딱거리니 두놈중의 한놈이 꼼짝없이 열쇠를 꺼내여 우자강, 림상수 두 사람이 차고있는 수갑을 잘칵잘칵 열어주었다. 그러자 우자강이와 림상수는 벗겨준 수갑을 재치있게 두 헌병놈의 손목에다 되잡아 채워주었다. 그리고 한놈의 손에 쥐인 수갑열쇠를 홱 잡아채였다. 정치투쟁, 무장투쟁이란 원레 이렇게 전변이 급작스러운 법이다. 이때 양대봉이는 바로 눈앞에 까만색오바코트를 입은 젊은 녀자 하나가 서있는것을 피뜩 보았다. 그 녀자와 양대봉이의 네 눈이 마주쳤다. 번개같이 알아보았다.

 

<<누나!>>

 

소리치며 양대봉이가 한발을 앞으로 내디디는 찰나에 등뒤에서 총소리 한방이 났다. 날아온 총알은 양대봉이의 잔등어리를 뚫고 들어와 면바로 심장에 박혔다. 양대봉이는 누나의 발밑에 머리를 처박듯이 하며 고꾸라졌다. 소리 한번 지를 겨를도 없었다. 양대봉이를 쓰러뜨린 흉탄은 고대 그의 총알에 배때기를 맞고 거꾸러졌던 헌병하관이 몸을 겨우 일으키고 최후발악으로 쏜것이였다. 분이 치민 리명선이가 헌병하사관놈의 등판에다 거꾸로 잡은 총창을 콱 내리박으니 그놈은 돼지 멱따는 소리를 지르고 곧 사지를 폈다.

 

양대봉이의 누나가 무너앉으며 동생의 주검앞에 두무릎을 꿇었다. 덧없고 애달픈 10년만의 해후상봉이였다.

 

 

5

 

몇해후, 무안성밖에서 백주대낮에 양대봉들에게 생포된 헌병대통역 루등호는 화선입당을 하였다. 그의 술회를 한번 들어보기로 하자.

 

<<...저는 정말이지 일본제국주의의 압잡이노릇을 하는게 부끄러운 일이란걸 몰랐습니다. 뿐만아니라 일본헌병대의 통역노릇을 하는것을 영광으루 생각하구 자랑으루 생각했었습니다. 그러게 처음 붙들려왔을 때는 반감과 증오심으루 가슴이 막 터질것 같았습니다. 금시 죽을것만 같았습니다. 팔로군의 군복을 보나 미투리를 보나 또 무기를 보나... 깔보이기만 했습니다. 속으루 비웃었습니다. <저 꼴을 해가지구두 또 전쟁을 하겠다구?> 다 온전한 사람으루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정말 무슨 비적떼 같아만 보였습니다...>>

 

 

(이때 조선의용군의 군복과 무기도 팔로군의 그것과 똑같았었다. 그러나 기발만은 태극기를 들었었다.)

 

<<그러던 어느날이였습니다. 시사보고란걸 한다구 저더러두 같이 앉아 들으라구 해서... 머리를 수긋하구 한옆에 가 앉아 들었습니다. 무슨 개나발을 부나 어디 한번 좀 들어보자 하는 속셈이였지요. 그런데 놀랍게두 그렇게 하찮아보이던 사람이 입에서 다다넬해협이 어떻구 비씨정권이 어떻구 하는 소리가 뛰여나오는게 아니겠습니까. 분석이 명확하구두 세밀하지 뭡니까. 론리가 정연하지 뭡니까. 저는 정말이지 너무나 의외로와서... 혀를 홰홰 내둘렀습니다. <저런게 다 여기 있었는가!> 하구 말입니다.>>

 

<<저는 그때부터 고패를 빼기 시작했습니다. 차차 그들을 존경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랜 시간의 교양을 거쳐서 자기의 전비를 뉘우치게 됐습니다. 아는것이 힘이였습니다. 혁명대오는 정말루 못쓸것으루 녹여서 쓸것으루 만드는 도가니였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자기의 수치스러운 과거를 씻어버리려구 항일전쟁에 용감히 뛰여들었습니다. 물불을 헤아리지 않구 전투서렬에 섰습니다. 그리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김학철전집4-태항산록-전란속의 녀인들

 

소설

전란속의 녀인들

 

하북성 찬황(赞皇)경내의 야초만(野草湾은 태항산록에서 불과 10여리 떨어진 장거리인데 일본군은 거기다 태항산항일근거지를 겨냥하는 전초기지-거점을 구축해놓고 시시로 <<토벌대>>를 출동하여 근방의 촌락들을 교란하군 하였다. 팔로군에는 이때 항공기는 물론이요 례사 산포, 야포도 없는터이라 적의 가시철조망으로 둘린 포대를 공격하여 뿌리를 뽑아버리자면 엄청난 희생이 날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래서 조선의용군의 참모장 진일평과 새로 편성된 제1지대를 령솔하는 김영신은 태항산중의 장거리 정욕(丁峪)에서 우군부대의 지휘원들과 함께 작전회의를 가지고 구체적인 안을 짰다. 그 결과를 참모장은 제1지대 전원을 마을밖 와지에 모아놓고 둔덕우에는 보초를 세워놓고 조선말로 설명하였다. 이러한 조치를 취하는것은 작전계획이 혹시 밖으로 새여나가지나 않을가 념려해서였다. 적군의 점령구에서 가까운 장거리에 사는 주민들을 다 믿을수는 없었기때무이다. 적군과 내통하는 간세배는 백미에 섞인 뉘 같은 존재였다.

 

<<...그러니까 우리는 전원 일률적으루 일본군복, 일본무기루 몸차림을 해야겠습니다. 우군의 군수부문에서 로획품 일본장비를 우리의 요구대루 공급해주겠다는 확약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우린 잠시 일본황군이 좀 돼보잔 말이지요...>>

 

 

진참모장이 이렇게 말하자 대원들속에서는 유쾌한 웃음통이 터졌다. 둔덕우의 보초는 그 웃는 까닭을 몰라서 잠시 멍하니 와지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구 행동은 물론... 야습입니다. 야초만거점과 찬황본대 사이의 군용전화선을 절단하는것으루 작전이 시작되는데... 전화선이 끊기면 량쪽이 다... 야초만과 찬황이 다... 이변이 생긴걸 알게 될게 아닙니까. 그렇게 되면 야초만의 적들은 곧 전투태세를 갖출게구 또 찬황본대에선 즉시 증원대를 파견할게 아닙니까. 적의 증원병력은 우군의 한개 대대가 중도에서 저지하기루 이미 약정이 됐습니다. 그러니까 우린 전력을 다 야초만을 습격하는데다만 기울이면 됩니다. 말하자면 도급을 맡은 셈이지요...>>

 

대원들속에서 또 유쾌한 웃음보가 터졌다.

 

<<...그러니까 우린 찬황본대에서 달려온 증원대루 가장하구... 정정당당하게 펼쳐놓고 놈들의 포대루 들어가잔 말이지요...>>

 

이 말에 대원들은 술렁거리며 서로 돌아보며 혹 팔도 뽐내고 혹 어깨도 으쓱으쓱하였다. 구체적인 포치는 김지대장이 하는데 그도 역시 유쾌한 기분이 옮아서

 

<<증원대장 일본군중위의 역은...>>

 

하고 대원들을 둘러보다가 리지강이에게 눈을 멈추고

 

<<리지강동무가 맡두룩...>>

 

말하고 다시 례사 말소리로

 

<<장교차림을 얼없이 잘하십시오. 밤중이라구 대수 차렸다간 들통이 나기 쉽습니다. 놈들두 바지저고리가 아니니까 반드시 탐조등으루 비춰보구 확인을 하구서야 받아들일거니까.>>

 

하고 덧붙였다.

 

며칠이 지나서다. 전투모, 철갑모를 쓰고 일본군복을 입고 그리고 38식을 들고 메고 한 제1지대 대원들은 서로 마주보고 앙천대소하느라고 볼일을 못 보았다. 군조차림을 한 장난군 엽홍겅이 차렷자세를 하고 리지강이에게

 

<<나까무라(中村)쥬우이도노(중위님)!>>

 

하고 경례를 붙이니 중위로 가장한 리지강이가

 

<<아 다나까(田中)군소오까(중사냐).>>

 

하고 거만스레 고개를 한번 끄덕여서 또다시 유쾌한 웃음판이 벌어졌다.

 

<<우리 가장무도회나 한번 해볼가?>>

 

<<녀자두 없이?...>>

 

<<총각, 홀애비 무도회!>>

 

<<아니, 쪽발이무도회...>>

 

<<와하하! ...>>

 

<<자, 춰라!>>

 

<<쿵차차 쿵차차...>>

 

<<하하하하! ...>>

 

<<쿵차차 쿵차차...>>

 

다들 신명이 난것이다. 혁명적락관주의는 언제나 조선의용군과 더불어 있었기때문이다.

 

조선의용군에서는 조직부 성원이건 선전부 성원이건 할것없이 다 전투에는 일반대원들과 같이 참가하기로 되여있었다. 뿐만아니라 돌격으로 넘어갈 때는 반드시 지도원이 전투서렬앞에 나서서

 

<<공산당원은 두발자국 앞으루!>>

 

명령하여 공산당원들을 앞장세우는것이 관례로 되여있었다. 공산당원들은 그것을 단연한 일로 알고있었다. 솔선하여 적진에 뛰여들지 않는 공상당원은 두었다 무엇할것인가! 그런것은 공산당원의 자격이 없는것으로 그들은 알고있었다.

 

한개 지대의 조선의용군과 한개 대대의 팔로군의 협동작전이 시작되였다. 쪼각달이 헌 이불솜 같은 쪼각더미구름(片积云)속을 들어갔다나왔다하며 숨박곡질을 하는 초가을밤, 찌륵찌륵 풀벌레 우는 소리가 마냥 구슬펐다. 팔로군부대는 찬황에서 륙칠마장 떨어진 다리목좌우에 매복하고 어김없이 쏟아져나올 증원대를 요격하려고 만단의 준비를 갖추었다. 조선의용군은 야초만에서 네댓마장 떨어진 곳에서 전화선을 절단해놓고 한시간 가량 기다렸다가 찬황본대에서 증원을 온것처럼 속여서 포대의 문을 열게 하자는 꾀였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생겼다. 전화선을 끊어놓고 때를 기다리는중에 희미한 달빛아래 큰길을 따라 한마리의 개가 야초만쪽에서 쏜쌀로 달려오는것이 눈에 띄운것이다.

 

<<저기 군용견 아니야?>>

 

<<옳다.>>

 

<<쏴라!>>

 

칠팔명 사람이 그 군용견을 향하여 란사를 하였으나 개는 맞지 않고 납작 엎드려서 살살 기다가 별안간 다시 뛰기 시작하는데 이번에는 큰길을 벗어나서 들판으로 내달았다. 눈 깜박할 사이에 군용견은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고거 참 훈련이 제대루 됐는걸.>>

 

<<놓쳐버렸으니... 이걸 어쩌지?>>

 

<<찬황본부루 쪽지를 전하러 간거 틀림없는데.>>

 

여럿이 지껄이는중에 동쪽-찬황쪽에서 불시에 총성이 크게 일어났다. 보나마나 우군의 대대가 찬황에서 쏟아져나오는 적의 증원병을 족쳐부시는 소리일것이다. 콩볶듯하던 총성이 뜨음해지기를 기다려서 리지강이를 선두를 한 의용군의 대오는 야초만포대를 향하여 급행군하는 시늉을 하였다. 불안에 싸여서 증원대가 와주기만을 고대하던 포대의 보초장이 큰길에서 차츰 가까와오는-일부러 들으라고 내는-뭇사람의 발자국소리를 듣고 탐조등을 켜서 비추어보며

 

<<다레까(누구냐)?>>

 

하고 날카롭게 수하를 하였다. 탐조등의 광망에 눈이 부신 리지강이가 손채양으로 눈을 가리며 일본장교의 위엄스러운 목소리를 꾸며서

 

<<이상 없느냐?>>

 

하고 빈틈없는 일본말로 꾸짖듯이 되물으니 포대우의 보초장은 반가운 목소리로

 

<<녜 이상 없습니다. 상관님!>>

 

여공불급하게 대답하고 잇달아서

 

<<잠간만 좀 기다려주십시오. 곧 소대장님께 보고하겠습니다.>>

 

하고 분주히 서두르는 눈치였다. 탐조등불빛에 제 눈으로 확인한 일본군복, 일본총칼과 제 귀로 분명히 들은 장교의 거만스럽고 위엄스러운 일본말에 보초장은 이것저것 더 생각해볼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것이다. 고마운 증원대로 믿어 의심하지 않았던것이다.

 

지체없이 소대장의 지휘로 포대의 육중한 문이 안으로 열리며 곧 병사들이 나와서 가시철조망의 통로를 가로막았던 장애물을 들어옮겼다. 증원대가 들어올 길을 틔워놓는것이다.

 

<<이거 밤중에 수고가 많으십니다.>>

 

말하며 반가이 앞으로 나와서 맞아들이려는 소대장을 리지강이는 제잡담하고 권총으로 쏘아눕혔다. 그것이 돌연적습격의 신호로 되였다.

 

불의의 습격을 받고 경황망조하면서도 완강히 저항하는 적병과의 육박전은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지휘관이 선등으로 거꾸러진 까닭에 그들은 대가리 없는 룡이 되여버렸던것이다.

 

 

접선이 끝난 뒤에 보니 생포된것은 중상자 하나와 경상자 둘뿐이고 그 나머지는 다 장렬한 개죽음들을 하였었다. 주관적으로는 장렬하였지만 객관적으로는 너절하였으니까.

 

가짜일본군-의용군대원들은 얼굴에 피가 튀고 군복이 피에 젖고 또 날창에 피칠들을 하여 서로 보기에도 무시무시하였다. 리지강이는 죽어넘어진 적병들의 소지품을 뒤지다가 한놈의 잡낭속에서 수진본 책 한권을 얻어보았다. 무조건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태항산에서는 책이 여간만 귀하지가 않았기때문이다.

 

적군의 증원대를 물리쳐서 작전임무를 완수한 우군부대도 다 큰 손실 입지 않고 무사히 돌아왔다. 이렇게 깔끔한 승리는 극히 드문 일이였다. 실전에서도 주도세밀하게 짠 작전계획도 뒤죽박죽이 되는 경우가 왕왕 있었기때문이다. 두 분대가 함께 달려들어 포대를 철저히 파괴한 연후에 불까지 콱 질렀다. 주운룡이는 두어 사람을 데리고 거리안을 온데 돌아다니며 대적군삐라를 붙이느라고 분주하였다. 철퇴할 때 팔로군의 한개 소대는 포대에서 초간히 떨어진 부속건물에서 위안부 너덧을 붙들어가지고 갔다. 그것들도 침략자로 간주하는 모양이였다. 로획한 무기, 탄약 및 기타 장비가 몇무더기 잘되는것을 적아 량군의 부상병들과 함께-일본군이 발급한 이른바 량민증을 앞가슴에 단 야초만의 백성들을 운력을 시켜가지고-들것, 멜대 따위로 다 실어날랐다.

 

밝은 날 코가 비뚤어지게 실컷 자고 눈들을 떠보니 다저녁때다. 리지강이가 생각이 나서 호주머니를 뒤져보니 로획품 수진본이 나오는데 놀랍게도 표지에 찍힌것은 일본글이 아니고 한글이다. 김동인의 단편집이였다. 표지를 뒤져보니 안표지에 네모난 도장 하나가 찍혀있는데 한문자로 넉자 김전학성(金田学成). 리지강이는 기가 막혀서 머리가 떨떨해졌다.

 

(그럼 그게 조선사람이였나? -학도병이였구나!)

 

(아무리 모르구 한 일이라두... 이역만리에서... 동포를 죽이다니!)

 

리지강이는 야릇한 비애에 잠겼다.

 

이튿날 그 단편집중에서 <<발가락이 닮았다>>라는 매우 기발한 제목의 단편 하나를 우선 읽어보았다. 리지강이는 읽으면서도 또 읽고나서도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성병으로 생식능력을 상실한 한 남자가 행실이 부정한 그 안해의 낳아놓은 아들을 자기 아이로 믿으려고 애를 쓰는데 닮은데가 하나도 없어서 무진 고민을 한 끝에 마침내 아이의 발가락이 저를 닮았다고 내 아들이 틀림없다고 좋아하는 내용이였다. 리지강이는 망국의 비운을 아랑곳없이 너절한 소설을 써서 민중의 의지를 마비시키는 부르죠아문인들의 소행이 가증스러웠다.

 

리지강이가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고있을즈음 불시에 밖에서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났다. 무슨 일인가 하고 일어나 나가보니 우군부대에서 야초만습격때 붙들어온 위안부 넷을 조선의용군에 떠맡기러 왔었다. 몸에 야한 색갈의 화복-일본옷을 입고 머리는 쑥바구니가 된 녀자 넷이 어줍은 몸가짐으로 마당가에 서있었다. 일본녀자인줄 알고 붙들어갔는데 알고보니 조선녀자들이란것이다. 그러니 너희가 맡으라는것이였다. 뜻밖의 선물에 김지대장이 어이가 없어서 한동안 쓴웃음만 웃고 섰다가 할수없이 인수하는데 마지못해 인수증까지 써주었다. 대방이 그것을 요구해서였다.

 

<<싱거운 자식들, 부질없이 저런건 무엇하러 붙들어오누!>>

 

<<글쎄나 말이지. 저희가 붙들어왔으면... 구워먹든 삶아먹든... 저희가 할게지...>>

 

<<저 주체궂은것들을 데려다간 어떡하지? ...>>

 

<<낸들 아나? 대장이 어떻게 처리할테지.>>

 

<<야야야, 인물이 어쩌면... 저 지경들 못 났니?>>

 

<<메주야 호박이야... 절구통이야?>>

 

리지강이가 다시보니 아닌게아니라 개개 다 추녀였다. 추녀도 이만저만한 추녀가 아니였다. 박색중의 상박색들이였다. 옆에 섰던 주운룡이가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리지강이와 마주보고 쓴웃음을 웃었다.

 

<<적의 포대를 치러 나왔다가... 이런 덤을 받을줄을 누가 알았어?>>

 

<<세상이란 다,>>

 

하고 리지강이는 생활의 철리를 깨닫기라도 한것 같은 대꾸를 하였다.

 

<<맺구끊은듯이 가쯘하겐 되잖는 모양이지?>>

 

주체궂은 네 녀자는 곧 동욕(桐峪)지휘부로 호송되였다.

 

제1지대는 달포가량 찬황일경을 전전하다가 길가 풀덤불에 무서리가 하얗게 내려앉을무렵 일단 동욕지휘부에 귀환하였다. 동욕에 당도해보니 석고산(石鼓山)에 나가있던 독립지대도 사나흘 먼저 들어와있었다. 그동안에 네 녀자는 의용군의 녀대원들인 리란영과 김상엽이 주로 맡아 교양하였었다. 네 녀자의 이름은 무슨 옥이 무슨 옥이 ... 거의다 비슷비슷하여 까딱하면 섞갈렸다. 그 이름이 서로 비슷비슷한 녀자들에 대하여 리란영과 김상엽은-리지강이와 주운룡이에게-이렇게 이야기하였다.

 

<<아주 불쌍한 녀자들이예요. 두메산골에서 자라서 소학교두 못 다녀봤다지 뭐예요. 인물이 미우니까 후방에선 팔리지 않구... 그래 전방으루 전방으루 밀려나온거래요. 전방에선 기갈이 들어서 인물을 가리구 사리구 할 계제들이 못된다나요. 그 무지스러운 녀석들을 하루에 이삼십명씩 삼사십명씩 치르구나면 허리를 통 쓸수가 없다잖아요. 밥 먹을 틈두 없어서 누운채 주먹밥으루 끼니를 에우는 때가 종종 있다지 뭐예요. 이게 그래 인간생지옥이 아니구 뭐겠어요. 지내보니까 어찌나들 순박한지... 곧 산속에 자란 도라지 더덕이예요. 그렇게들 꾸밈없구 천연스럽단 말이예요...>>

 

리란영의 이야기에 김상엽이 말을 달았다.

 

<<그러구 일들을 어찌나 잘하는지... 산에 나무를 가면... 어느 상머슴군이 따라오겠어요. 우리따위는 애당초에 두름으루 엮어두 안된다니까요.>>

 

<<일본강도놈들에게 무참히 짓밟힌 희생물이 아니겠어요? 그런 녀자들을 인물이 좀 밉다구 해서... 천하구 배운게 없다구 해서... 우리가 없신여겨서 차별대우를 한다면... 그건 수치스러운 일이예요. 안 그렇게들 생각하세요?>>

 

<<나두 절대루 그 녀자들 편이예요. 모두들 성병이 있어서 하루 걸러루 병원에를 다녀야 하니... 얼마나 가엾어요... 정말이지.>>

 

리지강이와 주운룡이는 인간수업에서 한 과를 더 배운것 같아서 숙연들 해졌다.

김학철전집4-태항산록-문학도(제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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