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철전집4-태항산록-(수필)주덕해의 프로필(제3권)
김학철전집4-태항산록-(수필)주덕해의 프로필
수필
주덕해의 프로필
<<주덕해는 최채, 배극 등과 더불어 연변의 뻬데피구락부-반동문인 김학철의 집-에 모여서 술잔치를 100번 이상 벌리고 반당, 반사회주의의 음모를 꾸몄다.>>
이것은 그 악몽 같던 시절에 연길시내 거리거리에 나붙었던 삐라-활자화된 비방이다. 대단히 낯이 익은 <<주덕해죄상 120조목>>중의 한조목이다.
주, 최, 배는 우리 집에 모여서 장기를 둔 일은 있어도 술잔치를 벌린 일은 없다. 더구나 100번 이상이나!
하긴 설 같은 때는 포도주 한잔씩쯤 나눈 일은 있다. 그들은 다 술에 대해여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였다. 나는 더군다나 술이라면 질색하는 사람이다. 연변의학원 로박사가 별세하였을 때 주덕해동지는 나를 보러 왔다가
<<...해부를 해보니까 글쎄 혈관이 모두 쇠줄처럼 빳빳하더라지 뭐야. 그 량반은 순전히 술에 녹았어.>>
하고 못마땅스레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었다. 이러한 주덕해더러 술잔치를 100번 이상이나 벌렸다니... 인사불성도 류만부동이지!
담배는-나만 빼놓고-세 사람은 다 몹시 피웠다. 셋이 다 골 담배군이였다.
주덕해동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나는 감옥안에서 신문을 통하여 알았을뿐이였다. 그때로부터 10년이 지난 오늘 난생처음 그에 대하여 붓을 드는데 그동안에 뻬데피구락부 성원이라던 배극동지 또한 불귀의 객이 되였다. 덧없는 인생이랄밖에 없다.
쉬는 날 우리 집에 모여서 장기를 두게 되면 언제나 장기가 1대3으로 어울리는데 1은 주덕해이고 3은 최, 배, 김이였다. <<삼국연의>>에서 류비, 관우, 장비가 3대1로 려포하고 맞붙는 형국이였다. 주덕해의 장기수가 세 사람에 비하여 월등 세기때무이였다. 최채와 나는 멱이나 겨우 알 정도이고 배극은 제법 괜찮게 두는축이였다. 하지만 수가 아무리 세다 하더라도 두눈이 여섯눈을 당해내기는 어려운 일이였다. 최채와 내가 랑옆에 붙어앉아서 배극이를 자꾸 뚱겨주면 주덕해는 다급해나서 두손을 홰홰 내흔들어 장기판을 가리며
<<말할 내기 없어, 말할 내기 없어!>>
하고 우리더러 훈수를 들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다가도 상대편의 말을 따먹을 때는 신이 나서
<<식사!>>
<<에라 또 하나 식사!>>
하고 창(唱)을 지르듯이 하였다. <<식사>>는 원래 내가 발명한 말인데 다들 감염이 되여서 장기판에만 둘러앉으면 네 사람이 그 별로 신통치도 않은 <<식사>>소리를 노상 입에 달고있었다.
주덕해동지는 제1서기에 주장까지 겸하여 때로는 번거로운 일도 적잖은 모양이였다. 그래서 직업작가인 나를 부러워하는투로
<<학철이가 제일 편해! 아무 근심걱정 없지... 투황디(土皇帝)야.>>
하고 최채를 돌아보며 웃는 일까지 있었다.
주덕해동지가 쏘련에서 신강을 거쳐 연안으로 나올 때 동행한 이들중에 간고한 항일전쟁환경에서 승리에 대한 신심을 잃고 적에게 투황한 변절자 하나가 생겼었다. 태항산에서의 일이다. 변절자들이 의례 그러하듯이 그자도 일본군의 앞잡이가 되여가지고 항일부대에다 자꾸 투항을 권유하는 편지를 특무들을 통해 들여 보냈다. 그 사연인즉 대개 아래와 같은것이였다.
<<...그 험한 산골에서 초근목피로 겨우겨우 연명하며 무엇을 더 바라느냐? 어서어서 용단을 내려서 살기 좋은데로 나오너라. 나오기만 하면 광명한 전도가 기다리고있다. 운운...>>
그런데 얄궂게도 얼마 아니하여 일본군이 무조건항복을 하는 바람에 그자는 끈 떨어진 뒤웅박꼴이 되였다. 죽지가 부러진 그자를 태항산에서 나오다가 장가구에서 만났을 때 주덕해동지는 승리의 기쁨에 도취되여
<<요놈을 붙잡기만 하면 곧 각을 뜯어 죽이겠다!>>
이렇게 이를 갈며 다진 맹세를 다 잊어버리고 그자를 그냥 용서해주었다. 후에 그자가 연변으로 찾아와서 살길을 좀 열어달라고 빌붙는 바람에 주덕해는 할수없이 그를 대학에 교원으로 배치 해주었었다.
<<그갓 녀석 죽거나 살거나 내버려두잖구!>>
하고 내가 못마땅해하였더니
<<잘못을 뉘우치구 돌아오는자에겐 살길을 열어주는게 우리 공산주의자들의 인도주의야. 당의 정책에두 부합되구. 그자가 대학에서 선생노릇할 자격은 충분하거든. 인재지. 그런 멀쩡한 녀석이 그따위짓을 했으니 더 기가 막히지. 저두 후회막급일게야.>>
이렇게 말하고난 주덕해동지는 한마디를 덧붙이는것이였다.
<<정치를 하자면 아량으로 너그럽게 받아들일줄두 알아야 해. 그저 두들겨패는것만이 장땡은 아니거든.>>
그가 이런 관후한 성품의 소유자가 아니였던들 연변인민들속에서 그와 같이 높은 신망을 이룩하지는 못하였을것이다. 타고난 천성인지 수양의 힘인지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는 장자의 풍도가 있는 정치가였다.
내가 농촌에 생활체험을 나갔을 때의 일이다. 어느 농민의 집에서 무슨 제사를 지내는데 온 마을 사람들이 다 일은 안하고 그집에 모여서 북적북적하는중에 당지부서기란 사람까지 한몫하는것을 보고 나는 속으로 대단히 못마땅하게 여겼다.
(들일이 바쁜 때 저게 뭐람!)
이튿날 나는 전위해 돌아와서 주덕해동지에게 이 사실을 반영하였다.
<<일들은 안하구... 대낮에... 그게 뭡니까? 더구나 군중의 선봉에 서야 할 당지부서기란게!>>
나의 말을 듣고난 주덕해동지는 빙그레 웃고 타이르듯 말하는것이였다.
<<지금 농민들은 다 배에 기름기가 부족하단 말이요. 무어 먹는게 있어야지! 그러니 잔치나 제사 같은 때 겸사겸사 한번 모여서들 먹는거지... 먹이진 않구 자꾸 일만 하랄수는 없거든.>>
나도 머리가 아주 깡통은 아니니까 그 말의 뜻을 근량대로 다 받아들였다. 그래 인제 잘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끄덕하였더니 그는 진일보 나를 일깨워주는것이였다.
<<지금 농촌에서 사사로이 술을 빚어먹는건 법으루 금하지만... 그것두 너무 융통성없이 금할수는 없단 말이요. 농촌 늙은이들이 막걸리동이나 담가놓구 컬컬할 때 한 복주깨 떠내다가 부저가락으루 화로불을 헤집구 데워 먹는걸 어떻게 말리우? 일반백성은... 배를 곯리면... 애국두 없거든. 그러니 그들의 어려운 형편을 잘 사펴보구나서 글을 쓰두룩.>>
당시 이렇게 나를 타일러주던 주덕해의 형상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 내 마음눈앞에서 커져만 간다. 그는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서도 좀처럼 드놀지 않는 무게있는 볼쉐비크였다.
김학철전집4-태항산록-(수필)한담설화
수필
한담설화
영국녀왕 엘리자베스2세의 단 하나밖에 없는 사위 마크 필리프스대위는 결혼한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장모인 녀왕이 령지를 골라놓고 백작으로 봉하겠다는것을 받아들이지 않고있다. 그리고 결혼 10년주년을 대대적으로 한번 경축하자는 녀왕의 어버이심정도
<<저는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한마디 말로 간단히 사절해버렸다. 뿐만아니라 그 두 아들을 귀족학교에 보내자는데도 응하지 않고 10년이 여일하게 안해 앤공주-녀왕의 외동딸과 함께 한집안 네식구 농장집에서 살고있다. 그는 하루에 10여시간씩 농업로동에 종사하고있다.
그들 내외는 처녀총각시절에 다 소문난 기마선수들이였다. 다같이 국제올림픽에 출장하는통에 서로 마음이 맞아서 결혼을 하기는 하였으나 처음부터 피차에 언약한바가 있었다. 즉
<<저는 일생을 보통평민백성으루 살 작정인데... 그래두 좋으십니까, 공주전하?>>
<<좋아요.>>
<<어디까지나 제힘으로 벌어먹구 살지... 처가 <왕실>의 신세는 질 생각이 하나두 없는데... 그래두 좋으십니까, 공주전하?>>
<<좋아요.>>
평민총각과 왕족처녀의 결합은 이렇게 이루어졌었다. 그러므로 필리프스대위는 이날 이때가지 그 안해 앤공주의 년금(年金) 22만딸라로는 자기 농장에서 부리는 뜨락또르의 다이야 하나도 사본적이 없다. 그러니가 영국의 일등부자인 처가-왕실의 신세는 피천 한잎 지지 않고 제힘으로 산다는 말이 되는것이다.
처가의 덕을 좀 보려고 또는 시가의 덕을 좀 보려고 아득바득하는 속물들이 우글우글하는 세상에 이야말로 한잔의 샴팡같이 상쾌한 이야기가 아닐수 없다. 일가문중에서 누가 좀 출세를 한다는 소리만 나면 덩달아 어깨바람이 나서-상투가 국수버섯 솟듯해서-나돌아치는 추물들과는 천양지차의 인격자라고 아니할수 없다. 그가 비록 련합왕국 녀왕의 부마로서 자산계급에 속하는 인물이기는 할망정.
올해 48살의 팽곤지는 사천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한후 20년동안을 산서대학 물리학부에서 교편을 잡아왔는데 현재는 부교수다. 그이 안해 사상덕도 역시 같은 대학 물리학부에서 강사로 사업하고있다. 그들 부부는 근자에 2년 반 동안 미국류학을 하고 돌아왔는데 미국과학잡지에 발표된 팽곤지의 론문을 읽어본 미국광학학회 회장은 그 재능을 대단히 높이 평가하여 그더러 미국광학학회에 가입하라고 권유하였다.
팽곤지의 부친은 현대 대만에 있는데 국민당의 높은 관원이다. 팽곤지가 1982년 5월에 자비(自费) 공파(公派)로 프랑스에 류학을 갔을 때의 일이다. 그의 부친과 프랑스국적을 가진 화가인 그의 아우 팽만지 그리고 일가친척들은 모두 그더러 돌아가지 말고 국외에 머물러있으라고 그를 붙들었다. 그의 아버지는 대만에다 연구사업에 가장 좋은 조건을 마련해놓았으니 자기하고 같이 가자고 아들은 끌었다. 그러나 팽곤지는 웃으면서
<<저는 그래두 조국 대륙으루 돌아가렵니다.>>
하고 사절하였다.
팽곤지부교수는 작년 6월과 10월에 또 두차례 미국에 건너가서 국제학술회의에 출석하였는데 회의석상에서 그가 발표하는 론문을 근청한 미국대학의 책임자는
<<축하합니다, 팽선생. 봉급을 후히 드릴테니 여기 남아서 같이 일해보실 의향은 없으십니까?>>
하고 그를 끌었다. 여기서 한가지 념두에 두어야 할것이 있다. 봉급을 특히 후히 주지 않고 그저 보통으로 준다 하더라도 미국대학의 봉급은 중국대학의 그것보다 10곱절이 넘는다는것이다. 그러니깐 만약 팽곤지부교수가 미국에 떨어져서 글을 가르친다면 한달봉급이 산서대학에서 그가 현재 받고있는 봉급의 1년분에 해당한다는 이야기가 되는것이다.
그렇지만 팽곤지부교수와 그의 안해 사상덕강사는 현재 여전히 산서대학에서 내외 함께 유쾌한 심정으로 사업하고있다.
<<나는 아무 부장의 아들이요.>>
<<나는 아무 주임의 처남의 조카요.>>
<<나는 아무 서기의 사돈의 팔촌이요.>>
치사스레 이런 명함 아닌 명함을 내대고 무슨 덕을 좀 보려고 급급해하는 사람기와깨미들은 골백번을 죽어도 팽곤지부교수의 이런 고매한 품성은 리해하지를 못할것이다.
(그 자식이 머리가 돌잖았나? 받은 밥상을 왜 차내던져!)쯤 생각하고 혀를 쯧쯧 차기가 고작일것이다.
부모가 잘나면 자식도 꼭 잘나란 법은 없다. 부모가 못나면 자식도 꼭 못나란 법도 없다. 순전히 부모를 존경하는 마음에서,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마음에서, 그 부모를 존경하는 마음에서,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마음에서 그 부모의 기치를 높이 추켜드는것이라면 량해할 여지도 바이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다면
<<나는 살인강도 아무개의 아들이요.>>
<<나는 사기횡령군 아무개의 딸이요.>>
이런 명함 아닌 명함을 내대고 큰길을 활보하는 용사는 어째 하나도 없는가? 더 말할것도 없이 그런 명함을 내대고는 아무 덕도 볼수가 없을것이기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주 명백한바<<순전히 부모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운운>>성립되지 않는다. 이래도 이렇게 하는데는 불순한 동기, 너절한 동기, 지저분한 동기가 없다고 딱 잡아뗄 배심이 있을것인가?
어떤 지위있는 간부가 한번은 나를 보고 자기의 아들딸들이 다 사법기관에 들어갔다고 자랑스레 말하는것을 듣고 나는
(저게 사람인가?)
생각이 들어서 그 얼굴이 빤히 쳐다보였었다. 의심할바 없이 그의 아들딸들은 저들의 실력으로 사법기관에를 들어간것은 아니였다. 그 부모의 이른바 덕택으로 들어간것이였다. 그가 만약 공금 만원을 횡령했노라고 자랑스레 말한다면 나는 차라리 그 솔직성과 용기에 감복할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여 그는 수치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철면피한이랄 밖에 더 달리는 무어라고 말할수 없다.
지난해 12월 8일 <<인민일보>> 제1면 <<금일담>>에 어느 시 재정국장의 딸 오민이 가정탁아소를 꾸렸다는 짧은 글이 실렸었다. 지식청년인 그녀의 아버지의 <<덕택>>에 의뢰하지 않고 제 갈길을 제가 개척한 독립적인격을 가진 존경할만한 처녀다. 존경을 받을것은 그녀만은 아니다. 그 아버지 재정국장도 그 딸과 마찬가지로 존경을 받아야 할것이다. 이런 존경할만한 부녀(父女)들이 살아있는 한 이 나라의 전도는 희망차고 양양하다. 직업을 선택하는데 들어서 간부의 자녀나 일반근로인민의 자녀나 다 지위가 평등하고 기회가 균등해야만 이 나라는 륭성하고 번영할것이다.
두서없는 한담설화를 마무리면서 역시 지난해 11월 27일 <<인민일보>> 제1면 <<금일담>>에 실렸던 글 한편을 우리 말로 옮겨놓는다.
심수 어느 고급료정에 북방 몸차림을 한 젊은이 몇이 들어왔는데 그중의 하나가 료정의 녀접대원과 아는 사이여서 아주 자랑스레 자기의 동행들을 가리키며
<<이분은 어느 군단장의 아드님이구 저분은 아무 국장의 따님이구...>>
이와 같이 소개를 하였다. 그런데 소개가 다 끝나기도전에 그 녀접대원은
<<어째 저분들은 다 제 이름두 없구 제 직업두 없나요? 솔직히 말해서 우리 여기선 그런 투가 통하지 않는답니다!>>
일순간, 두마디 말, 서로 완전히 다른 가치관념이 맞부딪쳐서 눈부신 불꽃을 튕겼다! 낡아빠진 봉건적문벌관념이 야유적인 미소앞에 여지없이 무너져내려앉았다.
나는 그 몇몇 젊은이들이 정말로 어느 군단장이나 국장의 자녀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설혹 정말로 그렇다 하더라고 그것은 간부자녀들중의 극소수에 지나지 않을것이다. 아직도 출신에 턱을 대고 무엇을 좀 누려보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어리석어도 이만저만이 아니랄 밖에 없다.
김학철전집4-태항산록-(수필)극단예술
수필
극단예술
지금으로부터 33년전에 연변문련(당시는 작가협회가 아직 성립되지 않았었음)에서는 내가 소설 한편을 합평할 일이 있었다. 문련이라야 호랑이 담배 먹을적이였으므로 전원 6명 밖에 안되였지만 그래도 합평은 합평대로 하였었다.
그 소설의 제목이 무엇이였던지는 강산이 서너번씩 변하는통에 까먹어서 생각이 나지 않으나 하여튼 합평의 결과는 아주 맥살이 나는것이였다. 임효원(임호), 최현숙, 김동구, 차창준 등 여러 동업자들이 일치하게 부정적반응을 보인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작자는 동떨어진 수법 즉 초특급랑만주의적수법으로 작품을 처리하였었기때문이다. 왕가물이 든 농촌을 지원하려고 시내사람들이 일떠나 각 집의 물 자아먹는 뽐프를 뽑아들고 농촌으로 달려나오는 기발한 화폭을 펼쳐놓았던것이다.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간혹 그 초특급랑만주의적수법으로 처리하였던 작품에 생각이 미치면 나는 부끄러워서 겨드랑이밑에 식은땀이 내돋군 한다.
그런데 매우 불행하게도 우리 민족에게는 <<세살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있다. 더욱 불행한것은 그 속담이 왕왕 명사수의 명중탄처럼 잘 들어맞는것이다.
유감천만한 일이기는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그 속담은 들어맞는 모양이다. 젊은 시절의 그 초특급랑만주의가 환진갑이 다 지난 지금도 가끔 들먹들먹하여서 사람을 당혹하게 만드니까 말이다.
요즘 일부 자전거방들에서 <<바람 한번 넣는데 3전>>이란 패찰을 내붙인것을 보고 나의 소설가환상은 또 훨훨 나래쳤다.
그전에는 다 자전거방에를 가면 바람은 거저 즉 무료로 넣기 마련이다. 해방후 북경에 있을 때의 일이다. 어떤 자전거방에서 밤에 빈지를 들인 뒤에는-자는데 바람 넣을 사람이 와서 문을 두드릴가봐 그런지-뽐프를 쇠사슬에 매여서 밖에 내놓고 잘 보이라고 파란색의 전구를 낀 장명등까지 켜놓는것을 나는 보았다.
그러므로 그 <<한번에 3전>>이라는 극단적돈벌이주의의 상징도 안 같은 패찰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자연 직업적본능으로 머리속에 구상이 떠오를 밖에.
어떤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뒤바퀴에 바람이 빠져서 탈수 없게 된다. 자전거방에 들려서 바람을 넣으려 하니 3전을 내라고 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사람은 잊어먹고 지갑을 집에다 두고 왔다. 사정을 말하니 자전거방주인은 들어주지 않는다. 할수없이 그 사람은 바람 빠진 자전거를 밀고 터벅터벅 걸어간다...
상상은 더 엉뚱한 비약을 한다-
엄동설한, 눈에 덮힌 무연한 벌판, 어떤 사람이 거의 얼어죽게 되여서 천신만고로 삭정이는 긁어모았으나 성냥이 없어서 불을 피울수가 없다. 이때 사람 하나가 지나간다. 얼어죽게 된 사람이 지옥에서 부처를 만난것 같이 반가와하며 성냥을 좀 빌자고 하니 그 사람은 성냥값부터 내라고 한다. 귀한 몰건은 비싼것이 상품판매시장의 법칙이므로 10원을 내라고 한다. 그러나 얼어죽게 된 사람은 10원은 고사하고 단돈 10전도 몸에 지닌것이 없다.
<<그렇다면 할수 없지.>>
성냥임자는 이렇게 한마디를 훌 뿌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 갈길을 가버린다...
춘삼월 눈이 녹을 때 사람들은 얼어죽은 시체 한구와 삭정이 한무더기를 그곳에서 발견한다.
<<세살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전통적인 원리에 따라 나의 구상은 손오공처럼 거침새없이 비약한다. 돈벌이에 눈이 어두워서 랭혈동물이 되여버린 <<돈벌이 극단예술가>>의 형상을 상상의 영사막에다 이와 같이 그려본다. 이것은 물론 작품창작령역에서의 극단예술이 낳은 산물이다.
50년전에 즉 본 세기 30년대에 상해에 있을 때, 나는 상해 명소의 하나인 대세계(상해말로는 따스까)유락장에를 몇번 드나들어보았다. 10전 내고 입장권 한장만 사면 하루종일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고 들어가 놀고 구경하고 할수 있었다. 영화건 연극이건 재담이건 가무건 마술이건 무엇이나 다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관람하게 되여있었다. 웃음거울 같은건 더 말할것도 없는 일이다. 무엇을 사먹는외에는 모든 관람료가 다 포함되여있다는 이야기가 되는것이다.
그런데 우리 이곳 공원에서는 입장료외에 웃음거울관람표라는것을 따로 받는다. 이것이 넓은 세상을 보아온 내 마음에 들리 없다. 그러니 자연히 또 직업적본능으로 구상의 날개를 펼치는데 이번에는 역시 묵은 버릇으로 극단예술적표현방법이 채용된다.
공원책임자에게 한 <<돈벌이 극단예술가>>가 헌책 즉 계책을 드린다.
<<...아니 그럴것 없이 원숭이를 보는데두 표를 사라고 합시다. 사자, 곰, 호랑이, 오소리, 여우... 그리구 독수리, 공작, 물오리, 고니, 원앙, 사슴, 노루, 락타, 미국돼지... 다 따루따루 표를 사라구 합시다. 꽃이나 금붕어를 보는것두 표를 따루 사야 하구 그리구 장의자에 앉는것두 한시간에 30전씩 세를 받기루 합시다. 이렇게 하면 불과 몇달안으로 우리는 돈더미우에 올라앉게 될겁니다. 어떻습니까? 묘안이이죠... 그래 이게 신통한 고안이 아니구 뭡니까? 히히...>>
유감스럽게도 나의 천재적구상은 때 아닌 방문객-길림신문사 기자량반의 래방으로 형체없이 깨여지고 말았다. 젠장할!
김학철전집4-태항산록-(수필)인육병풍
수필
인육병풍
사기 즉 력사적사실을 적은 책들을 읽어보면 재미나는 이야기가 많고도 많다. 어느 통치배가 인간의 호사를 다한 나머지에-그것만으로는 종시 성에 차지 않아서-마침내는 <<인육병풍>>이라는것을 고안해내가지고 사람들에게 자랑을 하였다는 대목을 읽고 나는 기가 막혀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호사로 방안에다 병풍을 둘러치는데 산수화를 그린 산수병풍 대샌에 젊고 고운 시녀들을 죽 둘러세웠다는것이다. 산 사람의 고기로 된 병풍이니까 인육병풍이라는것이다. 겨울에 찬기운을 막는데는 이보다 더 좋은 병풍은 없다고 호기를 부렸다니 사람이 하품을 아니 칠래야 아니 칠수가 없다.
이왕 병풍이야기가 난감에 희한한 병풍이야기 하나를 더해보자.
우린 작은외할아버지란이가 본 세기 20년대에 물상객주를 경영하여 천냥을 좀 모았었다. 물상객주란 장사아치들의 거간노릇을 주로 하는 객주를 말하는것이다. 그 당시 로씨야의 10월혁명으로 조선에도 적잖은 백파 즉 백계로인들이 몰려나와 갈팡질팡 하고있었다. 그자들이 당장 먹고 살기 위하여 걸머지고 나온 짜리로씨야의 쌍독수리가 찍힌 지전들을 헐값에 파는데 분홍색의 10루블짜리는 1전씩에 하늘색의 5루블짜리는 단돈 5리씩에 마구 팔았다.
볼쉐비크가 망하면 도로 제값을 받는다고 그놈들이 드립다 불어대는 바람에 행여나 해서 적잖은 사람들이 그 지전을 사들였다. 우리 그 작은외할아버지란 량반도 그 소리에 귀가 솔깃하여 볼쉐비크가 망하면 벼락부자가 되여볼 생각으로 한 반마대 착실히 사들였었다. 그런데 이제 곧 망할거라는 그놈의 볼쉐비크가 어디 생전 망해줘야 말이지! 한달을 기다리고 또 두달을 기다려도, 일년을 기다리고 또 이태를 기다려도... 망할 기미는 전연 보이지를 않으니 사람이 속이 탈노릇이 아닌가!
끈덕지게 10년을 기다린 끝에 마침내 우리 그 작은외할아버지는 아주 체념을 하고 1928년 가을-내가 소학교 5학년 때-딱지삼아 가지고 놀라고 일인당 150루블씩-10루블짜리 10장과 5루블짜리 10장씩-우리들에게 노나주었다. 종이의 질도 워낙 좋으려니와 인쇄도 아주 정교로와서 지전이자 곧 예술품인데 더구나 마음에 드는것은 그 모두가 손이 베질듯한 새 돈인것이였다. 짜리의 은행에서 무더기로 꺼내다가 한번도 써먹어보지 못한것들이였다.
나는 15루블을 주고 2전짜리 깨엿 한가락을-피동적으로-바꾸어먹었다. 늙은 엿장수가 저의 손자 갖다주겠다고 청을 들어서 아깝기는 하지만 마지못해 1루블을 선사하였더니 그 사례로 깨엿한가락을 집어주어서였다.
그후 우리 그 돈밖에 모르는 작은외할아버지는 천재적령감에서 오는 기발한 착상으로 산수병풍도 아니고 인육병풍도 아닌 <<지전병풍>> 즉 종이돈병풍을 만들기로 하였다. 표구사를 불러다가 반달 걸려 만들어낸 그 열두폭짜리 병풍은 보고 혀를 내두르지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휘황찬란한것이였다. 분홍색 10루블과 하늘색 5루블을 재치있게 배합하여 꾸며낸 걸작품이였다. 돈에 미친 인간들이 한번 해봄직한 장난이였다. 그런데 이것이 소문이 널리 나서 그후부터는 동네에서 무슨 잔치가 있을 때면 의례건으로 이 지전병풍을 빌어다가 둘러치게들 되였다. 재수사망이 대천바다에 물밀듯하라는 미신적관념이 작용을 하였음은 더 말할것도 없는 일이다.
우에서 서술한것은 지금으로부터 반세기이전에 있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근년에 와서 나는 이따금
(이거 나두 무슨 병풍 같은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군한다. 그도 그냥 무슨 보통병풍이 아니라 인육병풍따위 심상찮은 병풍이 된것 같으니 큰일이다. 젊고 예쁜 시녀들로 꾸며진 인육병풍은 보기나 아름답지. 정년퇴직을 한 로인들로 꾸며진-전 부장, 전 국장, 전 주석 따위로 꾸며진-인육병풍이야 무슨 볼품이 있을 거라구!
시내 어느 집에 무슨 잔치가 있을 때면 나도 포함된 이 로인들은 의례건으로 불리워가서 경사스럽게도 상좌에 둘러앉아 빌어온 병풍노릇을 해야 하니 이게 그래 딱한노릇이 아니고 무언가! 물론 잔치집 주인의 심정은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다. 모모한 명사들을 모셔다 앉힘으로써 경사로운 잔치가 보다 더 생광스러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일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명사로 된 덕에-우리 작은외할아버지네 그 지전병풍처럼-이리 불리워가지고 저리 불리워가지고 하는 명사량반들의 속에는 다 남모르는 고통이 있다는것도 좀 알아주어야 할것이다.
청하는데 안 가면 섭섭해할거니와 일단 청하면 죽어도 아니 응하지 못하는것이 우리 인간세상의 불문률인즉 우리 늙은 인육병풍들은 일반적으로 울며 겨자먹기를 아니할수 없는 형편이다. 잔치의 범위를 줄여서 집안끼리 하는것이 제일 리상적이고 그러지 못할 경우에는 당사자들의 소속한 부문에서 적당히 하는게 좋지 않을가? 상술한바와 같이 잔치때 이른바 명사들을 모셔가고 모셔오고 하는것도 사회적페단의 하나로 된 모양이니 역시 개혁의 손을 댈 필요가 있지 않을가?
앞으로 죽는 날까지 이런 인육병풍노릇을 얼마나 더해야 할지 알수 없으니
<<아이구, 답답한 이내 가슴이야!>>
김학철전집4-태항산록-(수필)작가수업
수필
작가수업
1
위대한 문호인 로신의 전후 20년 동안의 창작생활에서 전 10년은 비직업창작이고 후 10년은 전업창작이였다. 전 10년 동안은 대학에서 교편을 잡으며 과외시간에 창작을 하였는데 마침내 로신은 둘가운데 하나를 골라잡아야 할 갈림목에 서게 되였다. 교단에 서서 글을 가르치는데는 랭철한 리성을 필요로 하고 그리고 원고지를 앞에 놓고 창작을 하는데는 끓어번지는 격정을 필요로 한다. 한나절 싸늘해져서 글을 가르치다가 또 한나절 뜨거워져서 창작을 하려니까 자꾸 식었다더웠다하는 바람에 사람이 견뎌내기가 어려웠다. 계속 식어서 교편을 잡든가 아니면 계속 더워서 창작을 하든가 량자택일을 해야 하였다. 그리하여 로신은 결연히 교단을 떠나 직업작가의 대렬에 들어선것이였다.
여기서 알수 있는바 문학창작이란 감정이 끓어번져서 붓을 들어 그 감정을 쏟아놓지 않고는 도저히 견뎌배길수 없는 상태에서 비로소 진행되는것이다.
영국시인 바이론이 대학교 초급학년때 상급생이 하급생에게 체벌을 가하는것을 보고(당시 이런 징벌은 합법적이였다) 참다 못하여 앞으로 나서서 물었다.
<<아직 몇대나 더 때릴 작정입니까?>>
상급생이 괴이쩍게 여겨서
<<주제넘은 녀석, 그건 왜 묻니?>>
하고 게먹으니 바이론은 선뜻 대답하기를
<<나머지는 내가 대신 맞을랍니다!>>
우리가 다 알다싶이 바이론은 수많은 시작품들은 이런 동정심과 정의감과 반항정신으로 일관되였었다.
유명한 드레퓌스사건에서 프랑스작가 졸라가 논 역할을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유태인 포병대위 드레퓌스는 전국-프로시아에 군사비밀을 제공하였다는 터무니없는 죄명으로 종신형을 언도받았다. 그의 무고함을 알게 된 졸라는 즉시 일떠나 프랑스정부와 군부와 국수주의우익분자들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구원활동을 벌리여 온 나라를 뒤흔들어놓았다. 전세계를 진감한 그의 명문 <<나는 탄핵한다!>>는 그때 발표한것이다. 그 결과 졸라는 <<반역자 드레퓌스>>를 변호하였다는 죄 아닌 금고형을 받았다. 조서시인 리상화의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는 식민지백성의 창자 굽이굽이에 맺힌 망국의 한이 페부에서 터져나오는 소리다.
이상에서 보는바와 같이 작가의 창작활동이란 격정의 광풍속에서 진행되는것이다.
인민이 헐벗고 굶주리는것을 보면 피눈물을 뿌리고 인민이 행복하게 잘사는것을 보면 기뻐날뛰는것이 우리 작가들인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작가들은 인류사회의 진보에 공헌하는 고상한인물, 영웅적인물들을 열정적으로 노래하고 그리고 인류사회의 진보를 저애하는 어중이떠중이를 신랄하게 비웃고 매섭게 채찍질하는것을 그 사명으로 알고있다. 이 숭고한 사명감에 고무되여 인간정신의 기사로서의 직책을 다하려고 뼈물고있다.
작가수업이란 곧 인간수업이다. 인민의 근본적리익을 위하여 충실히 복무하는 고상한 품성-인민성-의 확립은 창작입문의 ABC이다.
2
인간세상의 모든 사건은 사람에 의하여 빚어진다. 즉 인물에 의하여 빚어진다. 인물이 없는 사건이란 유령의 잠꼬대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 글자부터 사람 즉 인물을 써야 한다. 나를 찾아오는 문학청년 및 문학장년들이 거의다 자기의 생각한 <<이야기>>를 가지고 와서
<<어떻습니까?>>
물어보는데는 속이 답답해나지 않을수 없다. 어째 좀 <<인물>>을 가지고 와서
<<어떻습니까?>>
물어보지 않는지! 자기의 <<이야기>>를 꾸미기 위하여 <<인물>>을 제멋대로 장기쪽 옮겨놓듯하는 식의 창작수법은 실패작에 직결된다.
장비는 장비고 조조는 조조다. 의관을 바꿔서 장비를 정승의 자리에 올려앉혀보라, 웃음거리밖에 더될게 있는가. 조조를 장비의 자리로 옮겨놓아도 역시 마찬가지다. 매개 사람이 다 자기의 개성, 특질, 특징을 갖고있다. 개념적인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선인형, 악인형, 당일군형, 선진분자형, 락후분자형, 인테리형, 기술자형, 로동자형... 이런 판에 박은 <<형>>으로 산 인물을 대체한다면 그것은 문학작품이 아니라 간부과, 인사과이 앙케트다. 작가협회 계통이 아니라 조직부, 인사국 계통이다.
잘난 사람은 정수리에서 발뒤꿈치까지 우점으로 차있고 못난 사람은 결점으로 묘사한다면 독자들은 하품을 하고 책장을 덮어버릴것이다.
<<이것두 소설이야? 망할 자식!>>
욕을 하고 책을 아궁이에 처넣는 신경질쟁이도 있을것이다.
나뽈레옹은 키가 작은것이 늘 마음에 걸려서 키를 잴 때 슬금슬쩍 발돋움을 하였다는것이다
쓰딸린은 17살이 된 그 딸 스웨뜨라나가 31살 먹은 멋쟁이영화감독에게 반하여 정신을 못 차릴 때 그 딸의 뺨따귀를 후려갈기면서
<<거울을 좀 들여다보고 말해! 그 잘난 상통을 해가지구... 그 녀석은 지금 여기 가두 계집, 저기 가두 계집... 계집에 걸려서 자빠질 지경이야!>>하고 야단을 쳤다는것이다.
미국 26대 대통령 데오도르 루즈벨트는 처음 련애를 할 때 너무 쑥스러워서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소리는 못하고 호주머니에서 제가 좋아하는 곤충표본-도마뱀을 꺼내들고 자꾸 그 설명만 하였다는것이다.
이상에서 볼수 있는바 산 사람은 평면도가 아니고 립체적이고 다면적이다. 심지어 대립물의 통일이기도 하다. 강청의 이른바 <<본보기극(样板戏)>>에 나오는 그런 영웅인물은 실지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날조이고 조작이다. 광녀 강청이가 만들어낸 꼭두각시다. 옳은 정신을 가진 우리의 작가들은 결코 그 길로는 갈수없다.
우리는 우점도 있고 결점도 있고 성공도 있고 실패도 있는 산 사람을 부각해야 한다. 특징지어 두드러지게 묘사해야 한다는 말이다.
조선작가들중에서 예술기량과 문장수단이 가장 뛰여난분이라면 홍명희선생을 나는 첫손가락에 꼽고싶다. 그의 <<림꺽정>>에서 꺽정이, 원씨, 동자아치, 할멈쟁이, 로밤이-이 다섯 인물이 어떻게 어울리는가 한번 보기로 하자.
꺽정이가 한나절 같이 있다가 밤에 다시 오마고 말하고 의관을 차리고 원씨의 집으로 왔다. 오래간만에 원씨가 만든 맛갈진 음식으로 점심을 먹고 원씨와 둘이 방에 앉아서 이야기를 할 때 동자아치가 열어놓은 방문앞에 와서 원씨를 들여다보며
<<아씨, 심미실이가 선다님 오신줄을 알구 보이러 왔다는데 어떡해요?>>
하고 물었다. 꺽정이는 심미실이란 사람이 누구인지 몰라서
<<누가 왔어?>>
하고 채쳐 물은즉 원씨가 웃으면서
<<담너머집 하인이 보이러 왔나봐요.>>
하고 말하였다.
<<담너머집 하인이라니?>>
<<로가 말씀이요.>>
<<그놈이 왔으면 그대루 들어올게지 무슨 연통이람.>>
<<로가가 사람이 하두 흉물스럽다기에 내가 집안에 들이지 말라구 일러두었에요.>>
꺽정이가 고개를 끄덕이고
<<그런데 심미실이란 무어야. 로밤이가 변성명을 했나?>>
<<집의 할멈이 자살궂게 그런 성명 같은 별명을 지어놨에요.>>
<<심미실이란 성명에 무슨 뜻이 있나?>>
원씨가 마루에 앉아있는 할멈쟁이를 내다보며
<<할멈, 심미실이 무슨 뜻이냐구 물으시네.>>
별명지은 사람더러 그 뜻을 말하라고 하니
<<아씨가 잘 아시면서 왜 할멈을 끌어대시여? 할멈은 정신이 사나와서 잊었습니다.>>
할멈쟁이가 딴청을 썼다.
<<무슨 말하기 어려운 뜻인가?>>
꺽정이 묻는 말에 원씨는 아니라고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그럼 왜 서루 미루구 말을 안해?>>
<<심은 심술망나니, 미는 미치광이, 실은 실본이라나요.>>
꺽정이가 심미실의 뜻을 듣고 한바탕 껄껄 웃은 뒤 동자치를 보고
<<심미실이를 들어오라고 그러게.>>
웃음의 소리로 말을 일렀다.
동자치가 밖으로 나간지 한참만에 먼지 케케 앉은 갓을 쓰고 툭툭한 무명홑두루마기를 입은 로밤이가 가장 들을 짓고 뚜벅뚜벅 걸어들어오더니 마당에 서지 않고 뜰에도 서지 않고 바로 마루우로 올라왔다.
<<어디루 올라가!>>
동자치가 뒤따라 들어오고 나무라고
<<천둥했나!>>
할멈쟁이가 한옆으로 피해 앉으며 욕하는데 로밤이는 모두 못들은체하고 안방문앞에 가까이 와서 내다보는 꺽정이에게 문안을 드렸다.
<<잘 있었느냐?>>
<<네 덕택으로 잘 지냅니다.>>
<<네 처에게 구박이나 맞지 않느냐?>>
<<제 첩년이 저라면 끔뻑 죽습니다. 구박이 다 뭡니까? 그리구 사내체것이 기집년에게 구박을 맞구야 갓철대를 이마에 붙이구 다닐수가 있습니까.>>
<<저놈이 첩이라구 하다가 기집에게 뺨을 안 맞을가.>>
<<처나 첩이나 기집은 마찬가집지요. 저두 선다님을 본받아서 적서(嫡庶)분간을 않습니다.>>
<<누굴 본받아? 이 미친놈아!>>
<<선다님께서 저를 데리구 실없이 하시느라구 미친놈 패호를 채워주셔서 치마 두른 사람들까지 저를 아주 미친놈으루 돌립니다. 창피해서 죽겠습니다. 제발 덕분에 이제부턴 실없는 말씀이라두 미친놈 성한 놈 하지 맙시오.>>
<<저놈이 아주 미치잖았나.>>
<<선다님 야속두 하십니다.>>
<<고만 가거라.>>
<<녜.>>
로밤이가 그제야 돌아서서 할멈쟁이를 보고
<<각 골 아전은 원님있는 동헌마루에 못 올라가지만 장교들은 장막의(将幕仪)를 차려서 올라가는 법이요. 나두 선다님의 막하(幕下)니까 마루에 올라와서 문안을 드린것이요. 아무리 녀편네들이라두 그런것쯤은 알아야 하우.>>
말하고 뜰우에 내려서다가 머리를 돌이켜서 원씨를 보고
<<제가 업어모실 때보다 퍽 수척하셨구먼요.>>
말하는것을
<<이놈!>>
꺽정이가 호령하니
<<아니올시다.>>
하고 목을 자라같이 움츠리고 허둥지둥 밖으로 나갔다.
성질과 생김생김이 각기 다른 산 사람. 구체적인 사람들이 말하고 행동하는것을 바로 눈앞에 보는것 같다. 얼마나 자연스럽고 또 얼마나 빈틈없이 째였는가! 글을 쓰는 작가들에게는 특히 귀감으로 될만한 대목이다.
3
작가에게는 사물이나 현상을 환히 꿰뚫어보는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 로신의 글에 나오는 나나니 즉 나나니벌에 대하여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내(필자)가 어렸을 때 우리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를 나는 지금도 분명히 기억하고있다.
<<나나니는 허리가 너무 가늘어서 새끼를 못 낳는다. 그래서 다른 벌레들을 잡아다가 제 굴속에 가두어놓고들 <나나니 날 닮아라, 나나니 날 닮아라!> 49일 동안 주문을 외우면 그 벌레들은 나나니새끼루 변한다!>>
나는 다시 그 말을-허리가 가늘어서 새끼를 못 낳는다는 황당하기짝이 없는 말까지-곧이듣고 나나니란 놈은 참으로 괴상한 놈이라고 감탄을 하였었다. 그런데 나중에 커서 알아보니 그러한 <<나나니관점>>은 우리 어머니의 독특한 견해인것이 아니라 옛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알고있는것을 되받아넘긴것에 불과하였었다.
이에 관한 로신의 글에 대의를 적어보면 아래와 같다.
곤충의 세계에서는 나나니벌처럼 악독한 흉수도 드물것이다. 나나니벌은 다른 벌레들을 잡아다가 모래땅속 제 집에 가두고는 독침으로 쏘는데 그 벌레가 아주 죽지는 않고 그저 까무러치게만 해놓는다. 그런 연후에 그 벌레의 몸에다 알을 쓸고 드나드는 굴 아구리를 봉해버린다. 그러면 굴속의 온도가 차차 높아져서 알들은 저절로 까진다. 깨여난 새끼벌들은 까무러친채 깨여나지 못하는 벌레들을 뜯어먹고 자란다. 새끼벌레들은 자유로이 날아다닐수 있으리만큼 자라면 엄지벌레가 봉해놓은 굴아구리를 뚫고 밖으로 나온다. 나나니벌이 다른 벌레를 독침으로 쏘는데 아주 죽지 않고 혼수상태에 빠져있게 하는데는 주도세밀한 타산이 있다. 아주 죽어버리면 더운 굴속에서 썩어버릴것이므로 깨여난 새기벌레들이 먹을것이 없게 된다. 그렇다고 또 맑은 정신으로 살아있게 하면 그 벌레가 도리여 제 새끼들을 잡아먹을것이다. 이 얼마나 용의주도한가!
진상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피상적관찰을 한 옛사람들은 이것을 전혀 다르게 미화하여 시까지 읊었다. 봄날 나나니란 놈이 악독한 목적으로 다른 벌레들을 잡아갈 때 그 벌레들이 안 잡혀가겠다고 필사적으로 반항하는것을
<<어서 가자. 가서 내 수양아들노릇, 수양딸노릇을 해라.>>하는데 그 벌레들이 속에는 당길 마음이 있으면서도 부끄러워서
<<아이 이러지 마세요, 이러지 마시라는데두요.>>
하고 비쌘다.
생사결판의 싸움을 수양부모와 수양아들딸 사이의 <<인정미>>가 풍기는 장면으로 묘사하였다.
이 얼마나 동떨어진 해석인가! 어찌 10만 8천리에 그치랴!
껍데기현상에 속아서 경선히 찬미의 붓을 든다면 그 작가는 지망지망한 청맹과니처럼 시궁창에 빠지는 운명을 면치 못할것이다. 본 세기 50년대, 우리 문단에서 몇몇 작가를 잡기 위해서 허무맹랑한 각본을 써서 상연함으로써 그 작가들을 패가망신의 지경에 몰아넣었던 일은 아직도 우리들의 기억에 생생한다. 이런 치욕의 력사는 영원히 다시 되풀이되지 말아야 할것이다.
로신의 글을 또 하나 살펴보기로 하자.
여기 용사 하나가 있다고 하자. 용사니까 물론 싸움을 잘할것이다. 그렇지만 용사도 사람이니까 음식도 먹고 휴식도 하고 또 성교도 할것이다. 그런데 그의 이 마지막 생활면을 돌출하게 과장하여 <<성교대사님>>이라고 받들어모신다면 어떻게 될것인가? 하긴 그렇게 하더라도 그 용사의 생활의 일부분을 반영한것만은 사실이다. 아주 근거가 없는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얼마나 억울한일인가! 그 용사의 주요한 특질은 쑥 빼버리고 전혀 지엽적인 문제-본질적이 아닌 자질구레하고 부차적인것을 정면 중앙에 내세운다면 이것을 그 용사의 형상에 대한 외곡이라고 아니할수 있겠는가!
원시공동체사회가 무너진이래 인류는 줄곧 왜 이 세상에는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의 차이가 있는지, 왜 전쟁의 류혈참극이 도처에서 련면부단하는지-그 까닭을 모르고 살아왔다. 인류사회는 어떻게 변천되는지, 사회발전의 지레대는 무엇인지-다 명확한 인식이 없이 살아왔다. 그러던것이 지난 세기-19세기 중엽에 이르러서 맑스주의학설의 출현으로 비로소 인류사상의 혼돈세계는 종말을 고하였다. 신비의 장막은 갈가리 찢어지고 사회학상의 모든 의문점은 다 과학적으로 천명되고 해명되였다.
맑스주의는 사상령역에서 가장 정예한 무기로 되였다. 이 무기를 장악한 사람만이 사회현상에 대하여 가장 예리한 판단, 가장 심각한 분석을 할수 있다는것은 의론의 여자가 없다. 무딘 끌을 가진 조각가가 어떻게 훌륭한 작품을 제작해낼수 있을것인가? 우리 어머니처럼 <<나나니 날 닮아라>>를 되받아넘기지 않으려거든, 멀쩡한 용사의 초상을 기생방, 갈보집으로 들고 가는따위의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않으려거든... 우리 무엇보다도먼저 이 무기-맑스주의리론을 장악해야 할것이다.
나는 따분한 설교는 질색하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이 한마디 권고만은 친애하는 젊은 문학도들에게 드리지 않을수 없다. 듣기 싫어도 참고 들어주기를 바란다.
4
우스개 즉 유모아가 부족하거나 아주 없는 작품은 읽기가 따분하다. 례를 들어서 <<홍루몽>>, <<유림외사>>, <<고요한 돈>>, <<림꺽정>> 및 로신의 작품들에는 다 그 갈피갈피에 우스개가 끼여있다. 영국작가 디켄즈나 미국작가 마크 트웬의 작품들은 암만 읽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사람이란 계속 엄숙하거나 계속 긴장하면 피로를 느끼고 권태감을 느끼는 법이다. 청중이 모두 듣기 싫어서 진력이 났는데도 계속 장광설을 늘어놓는 연사는 멍텅구리다.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다. 독자가 따분해하는 작품에는 아무리 심오한 철리가 담겨있더라도 그것은 실패작이랄 밖에 없다. 문학작품은 약이 아니므로 상을 찡그리고 억지로 삼킬수는 없는것이다.
파금의 소설들은 격정으로 차있다. 그러나 옥에 티라면 우스개가 부족한것이다. 똘스또이의 <<전쟁과 평화>>는 세계명작이다. 그러나 공제회(共济会)를 장황하게 설명한 대목에서는 참을성이 어지간한 나도 두손을 바짝 들었다. 빅또르 유고의 <<레 미제라블>> 즉 "아! 무정"도 역시 세계명장이다(중국에서는 "비참한 세계"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빠리의 하수도를 지루하게 늘어놓아 설명한 대목에서는 인내성 있는 독서가인 나도 장탄식이 절로 나오는것을 어쩔수가 없었다.
해학적필치는 엄숙한 주제와 상치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 엄숙성을 더 북돋아준다.
고골리는 그의 <<따라쓰 불리바>>에서 큰아들 오쓰다프가 참혹하게 처형당하는 대목을 묘사함에 있어서 녀자를 데리고 구경나온 뽈스까의 귀족 같아보이는자가 잔뜩 몸치장을 하다나니 그의 방 침대밑에는 헌신짝밖에 남은게 없을거라고 독자들을 한번 웃기여 기분을 가볍게 해주고나서 비로소 본 줄거리-엄숙한 주제로 넘어갔다. 독자로 하여금 숨을 좀 돌리고 땀을 좀 들여가지고 다시 어려운 일에 달라붙게 하였다. 일단 거뜬해졌던 기분이 다시 엄숙한 장면에 부닥칠 때 그 느껴받는 자극은 배가 된다. 의심할바 없이 고골리는 이 효과를 노린것이다.
우리도 이런 당겼다 늦추었다 늦추었다 당겼다 하는 수단을 배워야 한다.
5
숄로호브가 그의 <<고요한 돈>>에서 쓴 수법을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그리고리가 악씨니야를 기다리는 장면에서 담배를 석대씩이나 피우도록 와주지 않아서 조급증이 났다. 그리고리가 마지막 꽁초를 눈속에 처박고 기다릴것을 단념하고 막 돌아서 가는데 악씨니야가 진동한동 달려온다.
주인공이 속을 지글지글 끓이면 독자도 덩달아서 속을 끓인다는것을 잘 알고있는 수작이다. 말하자면 잔꾀다. 그렇지만 이런 <<수작>>, 이런 <<잔꾀>>가 우리에게는 절대로 필요하다. 독자의 애를 태워줄줄 모르는 작가는 맹물작가다.
하나 더 살펴보기로 하자.
<<불행은 단독으로 오지 않는다. 아침, 게찌꼬의 부주의로 미론 그리고리예위치의 씨소(种牛)가 우량한 씨말(种马)의 목을 뿔로 떠서 찢어놓았다.>>
이때문에 집안에서는 불시에 란리가 났다. 값나가는 씨말의 쭉 찢어진 상처를 약물을 달여다 씻어준다, 바느실로 찍어매준다...
이런 란리판에 엎친데 덮치기로 귀동딸 나딸리야가 시집살이를 못하고(남편이 군계집을 달고 달아나버린 까닭에) 울며불며 친정집으로 달려온다. 그러니 미론 그리고리예위치의 부아통이 어찌 아니 터질것인가!
숄로호브가 여기서 무엇을 노렸는가는 설명할 필요도 없다. 폭발력을 강하게 하느라고 씨말-황색화약-에다 나딸리야-흑색화약-을 덧섞은것이다. 등장인물들을 자꾸 시달구는것이, 탄탄대로를 버리고 험한 길로-가시밭길로-마구 끌고 다니는것이 독자로 하여금 조마조마하고 아슬아슬해서 손에 든 책을 내려놓을수 없게 만드는 효과적인 수단의 하나인것이다. 기쁜 일은 금상첨화(锦上添花)로 더 기쁘게 만들고 불행한 일은 화불단행(祸不单行)으로 불행이 두겹 세겹 겹치게 만듦으로써 자극을 강화하여 독자들을 울렸다 웃겼다 하는 수법-이것이 곧 창작의 기교인것이다.
6
항일전쟁시기, 1941년, 태항산항일근거지에서 내가 쓴 각본을 무대에 올리기로 하여 팔로군부대 어느 극단에서 녀배우 하나를 빌어온 일이 있었다[그녀의 이름이 정서보(程瑞葆)였다고 기억된다]. 한데 그녀는 무대에 올리기로 한 내 그 각본을 한번 읽어보더니 대번에 머리를 가로 흔드는것이였다.
<<왜 그러시오?>>
<<저 이 남편을 전선으로 떠나보내는 안해가...>>
<<그 안해가... 어떻게... 됐단 말이요?>>
<<작별할 때 이렇게 남편하구 서루 맞붙들고 우는건...>>
<<......?>>
<<대도시에서나 있을는지... 농촌녀자들은 이런게 없에요.>>
나는 번개같이 깨달았다. 얼굴이 빨개졌다. 외국영화에서 본 멋들어진 작별장면을 중국농촌-태항산골안에다 고스란히 옮겨 놓으려고 한 자기의 우둔한 용기에 새삼스레 놀란것이다. 그 똑똑한 녀배우-정서보의 갸름한 얼굴과 새까만 눈과 그리고 주근깨 박힌 뺨과 은밀한 미소는 아직도 내 눈앞에 선하게 살아있다.
그때로부터 40여년이 지나서 금년 년초에 나는 다시한번 자기의 청년시절의 우둔한 용기에 새삼스레 놀라야 할 일이 생겼다.
정길운선생이 와서 서울 다녀온 이야기를 하는데 자기보다 한두달 뒤늦게 서울에 도착하는 고철선생을 김포공항으로 마중나가서의 일이라는것이다. 40년 동안 딸 하나 데리고 남편을 기다려온 고철 부인과 그 딸 내외가 함께 나갔는데 40년만에 만나는 남편이 앞에 섰는데도 자꾸 울기만 하더라는것이다. 남편은 또 남편대로 몸가짐이 어줍어서 덤덤한 얼굴로 서있기만 하는것을 정선생이
<<아 무얼 하구있어? 어서 뽀뽀를 하잖구! 자, 어서 뽀뽀, 뽀뽀! ...>>
너스레를 부려서 겨우 장면을 수습하였다는것이다.
이것이 20세기 80년대에 950만 인구를 가진 대도시에서 있은 일이다. 고등교옥을 받은 인테리의 가정에서 있은 일이다. 서울은 필경 뉴욕도 런던도 다 아니였다.
작가가 상상력의 날개를 타고 현실에서 지나치게 동떨어진 비상(飞翔)을 하면 차례질것은 망신 또는 개코망신밖에 없다.
7
문학작품에서 쓰이는 언어는 <<맛>>이 있어야 한다.
<<벙어리 발등 앓는 소리>>
<<여든에 이 앓는 소리>>
<<익은 밥 먹고 선소리>>
<<장마도깨비 여울 건너가는 소리>>
<<지절대기는 똥본 오리>>
<<조잘거리기는 아침까지>>
이런 속담들은 다 말은 <<제대로>>, <<알맞춤하게>>, <<재치있게>>하지 못하는것을 비웃는것으로서 그 속담 자체는 팔진미(八珍味)의 하나인 웅장-곰의 발바닥만큼이나 맛이 난다. 문학의 기본적인 바탕은 언어이므로 이것을 소홀히 여기거나 이에 대한 수양을 쌓는것을 게을리한다면 그것은 베실로 수를 놓겠다는것나 마찬가지일것이다. 하루의 화근은 아침에 마신 해정술이요, 일년의 화근은 발에 끼이는 갖신이요, 일생의 화근은 성질이 사나운 녀편네를 얻은거라고 누가 말하는것을 어디서 들은 기억이 나는데 문학작품 창작에서의 화근은 원고지를 대하고 앉기전에 언어에 주의를 돌리지 않은거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것 같다.
<<림꺽정>>에서 한온이와 황천왕동이가 수작하는것을 한번 들어보기로 하자.
...얼마 있다가 한온이는 저의 아버지를 보러 가고 황천왕동이는 의관을 벗고 자리에 누웠다. 누운 뒤 얼마 아니 있다가 바로 잠이 들어서 자는중에
<<이 사람 일어나게.>>
한온이가 와서 깨웠다.
<<왜 일어나라나?>>
<<술 먹으러 가세.>>
<<단야에 무슨 술인가. 나는 잘라네.>>
<<오래간만에 만나서 술 한잔 같이 안 먹을수 있나. 어서 일어나게.>>
황천왕동이가 일어앉았다.
<<어디루 가잔 말인가?>>
<<우리 작은마누라가 술상을 차려놓구 기다리네.>>
<<그 술상을 갖다가 여기서 먹세.>>
<<왜, 내 첩의 집은 더러워서 못 가겠나?>>
<<쓸데없는 소리 고만두구 이리 가져오라게.>>
<<글쎄 왜 이리 가져오란 말이야?>>
<<벗어놓은 옷을 다시 주어입기 귀찮거든.>>
<<쭉 찢어질 의관 다 고만두구 그대루 가자.>>
<<어딜 상투바람으루 가잔 말이야.>>
한온이가 황전왕동이를 일으켜세우며 귀에 입을 대고
<<도적놈의 주제에 의관은 다 무어냐?>>
하고 웃으니 황천왕동이도 지지 않고
<<너는?>>
하고 마주 웃었다.
황천왕동이가 다시 의관을 차리고 한온이를 따라 그 첩의 집에 와서 안방에 들어앉았다. 한온이의 첩은 잠간 인사하고 건너방으로 건너간 뒤 다시 얼굴을 내놓지 않고 할멈 하나와 아이년 하나가 방에 드나들며 술상심부름을 하였다. 주인손 두 사람이 마주 앉아서 권커니작커니 술을 여라문잔씩 먹었을 때
<<단둘이 너무 심심하니 술칠 기집 하나 불러올가?>>
한온이가 말하는것을
<<조용히 이야기해가며 술 먹는것이 좋으니 고만두게.>>
황천왕동이가 밀막았다.
<<자네는 천생 고리삭은 샌님이여.>>
<<그저 샌님두 아니구 고리삭은 샌님이여? 자네가 사람 칭찬을 너무 과히 하네.>>
<<자네가 품안으로 기여드는 기집을 박쳤다지? 그게 고리삭은 샌님이나 할짓이 아닌가?>>
<<만일 본서방의 칼을 맞았던들 사내대장부라구 할번했네그려.>>
<<그렇지, 사내대장부면 칼을 맞을 때 맞더라두 기집을 받아주지 내박차겠나.>>
<<자네 말대루 하면 흘레개를 제일등 사내대장부루 쳐야겠네.>>
<<어른더러 이 자식이 무어냐? 욕 말구 술이나 어서 먹어라.>>
<<자네가 먹을 차례 아닌가?>>
<<벌써 옹송망송하나? 이건 내가 부어논 잔일세.>>
한온이가 술을 마시고 잔을 가득 채워서 황천왕동이를 주며
<<도적놈 도학군자, 이 술 한잔 잡으시오.>>
권주가 흉내를 내였다.
<<어른을 놀리면 종아리 맞는 법이야.>>
<<참말 자네가 그때 기집더러 종아리채를 해오랬나?>>
<<나를 정말 고리삭은 샌님으루 아네그려, 종아리채가 다 무어란 말인가.>>
<<그래두 나는 그렇게 들었어.>>
<<누가 거짓말을 한게지.>>
<<그때 이야기 한번 자세히 하게, 어디 들어보세.>>
<<그까짓 이야길 누가 한단 말인가, 술이나 가져오라게. 술이 다 없어졌네.>>
<<술은 얼마든지 있네. 우리 실컷 먹어보세.>>
<<자네 술이 늘었네그려.>>
<<전에 통히 접구두 못하던 술을 지금은 한자리에 이삼십배 례사 먹으니 굉장히 늘었지. 이게 선생님한테 배운 술일세. 꺽자정자분이 검술선생님이 아니라 검자(剑字) 떼구 술선생님이야.>>
<<우리 형님이 남의 집 자식을 버려놨군.>>
이번에는 리춘동, 김산, 로밤-이 세 인물의 수작을 한번 들어보자.
...리춘동이가 의관을 차리고 나와서 김산이와 같이 뜰아래 내려설 때 어떤 사람 하나가 허둥지둥 들어오며
<<지금이사 오신줄 알구 뵈러 오는데 어딜 가십니까? 부리나케 오길 잘했구먼요.>>
하고 떠벌거리고 리춘동의 앞에 와서 허리를 한번 굽실거렸다. 리춘동이는 그 사람이 누군인지 언뜻 생각나지 않아서 감산이를 돌아보고
<<누군가?>>
하고 묻는데
<<밤이를 몰라보십니까?>>
하고 그사람이 저의 이름을 말하였다. 다시 보니 애꾸눈이 유표한 로밤이였다.
<<오 너냐? 저승사자가 눈이 없어서 너를 아직두 잡아가지 않구 놔뒀구나!>>
<<반가와서 하시는 말씀이라두 그런 방소(方所)꺼리는 말씀은 아예 맙시오.>>
<<너 같은 놈이 급실살맞아 죽지 않는걸 보면 천도가 무심할거야.>>
<<듣기 싫어하면 더하실줄까지 번히 알며 자발없는 방소꺼린단 말씀을 했지. 지금 앞으루 한 50년 더 살아봐서 세상이 길래 신신찮으면 급살이라두 맞아죽을랍니다.>>
김산이가 나서서
<<에끼 미친놈, 저리 가거라!>>
하고 로밤이를 꾸짖고
<<미친놈 데리구 실없는 소리 그만하구 어서 가게.>>
하고 리춘동이를 재촉하였다.
<<여러 사람이 미쳤다구 놀리면 성한 놈두 미친단 말이 괴이찮은 말입니다. 여러분이 모두 나만 보면 미친놈이니 실성한 놈이니 놀리시는 까닭에 내 마음에두 내가 성하지 않지 하는 생각이 드는때가 있습니다.>>
하고 로밤이는 씨벌거리며 두 사람의 뒤를 따라오다가 고샅길 갈림에서
<<틈있는대루 또 뵈러 옵지요.>>
리춘동이가 큰소리에 놀라서 돌아보도록 소리질러 인사하고 휘적휘적 다른데로 가버렸다.
조선족작가들중에 언어를 이렇게 맛갈지게 재미나게 생동하게 구사하는분은 그리 흔치 않다. 작품속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인물들이 현실적으로 움직이는것처럼 실감있고 생동하다. 웬만한 정도로 노력해서는 좀체로 이르기 어려운 경지다. 그러나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이니까 꾸준히 노력만 하면 종당은 성취를 할것이다.
일본의 어느 작가가 19세기 말엽에 외국소설을 번역하는데
<<I Love You(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 한마디 말을 번역할 재간이 없어서 며칠동안 골머리를 않은 끝에 마침내
<<아이 콱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이렇게 번역을 하였다는것이다. 당시 그것은 명번역으로 널리 세인의 호평을 받았다. 그 까닭인즉 일본사람들은 그때까지도 남녀가 서로 사랑하는데 즉 지금 말로 련애를 하는데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할줄 몰랐었기때문이다. 이것은 조선에서도 마찬가지다. 조선조나 대한제국 시절에 련애를 하는데(하였다고 가정하고) 어떤 놈이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였다면 녀자는 듣고 놀라서 까무러쳐버렸을것이다. 어디서 오랑캐가 왔나 하고 심장마비를 일으킬 가능성도 바이없지 않다.
<<아이 콱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그 시대의 련애하는 남자의 심정을 여실히 반영한, 꼭 알맞는 말이라고 할것이다.
공자, 맹자의 입에서 컴퓨터니 텔레비죤이니 하는따위의 말이 튀여나오지 않게 하고 진시황, 칭키스칸의 입에서 원자탄이나 우주로케트니 하는따위의 말이 튀여나오지 않게 하는것은 우리 문학도들의 최저한의 의무이고 또 상식이다.
김학철전집4-태항산록-(수필)역시 아편
수필
역시 아편
우리 어머니는 스물여덟에 홀로 되여가지고 바느질품을 팔아서 우리 삼남매를 겨우겨우 키웠다. 그러자니 살림형편이 오죽하였으랴! 그때부터였다. 우리 어머니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외우기 시작한것은. 부처님을 지성껏 믿으면 살길이 열릴것으로 알았던것이다. 그러다나니 자연 또 외아들인 나의 수명장수를 빈다고 불공도 드리게 되였다. 불공을 안 드리면 아무 탈 없이 펀펀하던 내가 갑자기 요절을 하거나 비명횡사라도 할것 같아서였다. 이미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그때의 일만 생각하면 나는 슬그머니 밸이 나군 한다. 우리 집에서 10여리 떨어진 산꼭대기에 상운암이라는 암자 하나가 있었다. 글자 그대로 <<상운암>> 즉 구름우의 암자였으므로 가파른 오솔길을 돋우밟자면 중턱도 채 못 올라가서 숨이 턱에 닿았었다. 이런 상운암에다 쌀 서말, 참기름 둬되를 수명장수할 당자가 갖다바쳐야 하는데 정성이 부족하면 부정이 든다고 중도에서 짐을 벗어놓고 쉬지 말고 곧바로 가야 한다는것이였다. 그때 내 나이 벌써 열일곱살이건만 위인이 워낙 어리석었던탓으로 부처님의 버력을 입을가봐 겁이 나서 고지식하게도 쌀 서말은 질빵을 해서 어깨에 지고 참기름이 든 두되들이 큰병은 끈으로 얽어서-개피처럼-목에다 걸고 그리고 두손으로는 칡덩굴, 다래덩굴을 엇갈아 부여잡으며 땀범벅이 되여서 톺아오르고 또 기여올랐다. 엉뎅이를 땅바닥에 조금이라도 붙였다간 큰일나는줄 알았으므로 기를 쓰고 무착륙 강행군을 하였던것이다.
중놈 좋은노릇 하느라고 옥백미, 참기름을 이렇게 갖다 바치고 집에서는 네식구 조밥과 토장국으로 배들을 채워야 하였다. 불쌍한 우리 어머니가 뼈빠지게 일해서 번 돈이 그렇게 보람없이 허비된것을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우리 어머니를 속여먹은 그 중놈들이 괘씸해서 가까이 있으면 귀싸대기를 올려주고싶은 충동을 느낀다.
항일전쟁시기 태항산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다가 중상을 입고 내가 일본감옥으로 끌려갔을 때의 일이다. 감옥당국에서는 나를 대일본제국에 대항하는 적대분자-비국민이라고 수술을 해주지 않아서 곪은 상처는 날로 달로 썩어만 갔다. 이것을 알게 된 우리 어머니는 속이 달아서-외아들이 감옥속에서 사경을 헤매는데 어찌 그 어머니의 속이 달지 않으랴-나에게 편지를 써보냈는데 거기에는 적혀있기를
<<수리수리 마하수리... 옴 도로도로 지미 사바하...>>
그것은 범어(梵语)로 된 경문이였다.
<<아들아, 이 경문을 날마다 백여덟번씩만 정성들여 외우면 네 그 상처가 꼭 아물것이니 이 어미의 말을 명심하여라.>>
나는 독감방속에서 너무 기가 막혀서 한손에 그 편지를 든채 혼자 어이없이 나오는 눈물을 흘렸다. 나는 분명히 맑스주의자였다.
<<종교란 압박받는 피조물(被造物)의 탄식이며 심장 없는 세계의 령이며 생기 없는 침체의 시대의 혼이다. 그것은 인민의 아편이다.>>
종교에 대한 맑스의 이 론단을 완전히 신봉하는 젊은, 굳건한, 충성스러운 맑스주의자였다. 불교, 예수교, 천주교, 이슬람교... 무슨 교 무슨 교 할것없이... 다 나는 인민의 아편으로밖에는 보지 않는 사람이다. 나의 이러한 종교관은 그때나 지금이나 시종일관 매일반-추호의 변화도 없다.
일본이 무조건항복을 하여 다른 정치범들과 함께 감옥에서 나올 때 나는 다리 한짝을 감옥묘지에 묻고 나왔다. 그러나 다른 전우 하나는 하반신불수로 아주 걷지 못하므로 들것에 실려 나와야 하였다(몇해후에 그는 종시 자리에서 일어나보지 못하고 그대로 죽었다). 그후 둘이 같이 병원에 입원하였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내가 그의 병실에를 가보니 그는 귀속말하듯 나에게 소곤소곤 말하는것이였다.
<<글쎄 우리 어머니가 속이 달아서 요새 문복(问卜)을 한다 푸닥거리를 한다... 바삐 돌아다니시지 뭐요. 그래 어쩌겠소. 좋다구 자꾸 해보라구 부추겼지. 로인이 그렇게 해서라두 마음을 달래야지... 내 이 병이 불치의 병이란걸 우리 어머닌 아직 모르시거든. 하하, 어떻소 학철동무? <미신을 권장하는 맑스주의자>-소설재료루 훌륭하잖아?>>
이렇게 자조하듯 말하고 그는 서글픈 웃음을 웃는것이였다. 나도 할수없이 따라웃었다. 역시 서글픈 웃음이였다. -그와 나는 똑같이 철저한 무신론자였다.
종교와 미신이 사람을 어떻게 그리치는가를 나는 어려운 고비에서 여러번 뼈에 사무치게 겪어왔다. 그러므로 종교, 미신이라면 나는 치를 떠는 사람이다. 그런데 일전에 어느 신문에서 보니까 어떤 알뜰한 량반이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고만 보는것은 좀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는 론조를 들고나와 횡설수설한것을 읽어보고 나는 부아통을 터뜨리지 않을수 없었다.
(아편이 아니면 그럼 인삼록용이란 말인가? 비타민ABCDEFG란 말인가?)
나는 <<조반파(造反派)>>도 <<홍위병>>도 아니다. 교회당을 짓부시고 목사, 신부를 사방으로 끌고 다니며 회술레를 시키는따위의 야만적행동은 절대로 반대하는 사람이다. 종교신앙을 포기하도록 강박을 해서는 안된다는것을 잘 아는 사람이다. 더구나 <<세계지식화보>>에 실린 몇폭의 사진을 본 뒤부턴 종교라는것이 이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지는것은 아주 료원한 장래의 일이란것을 통감하였다.
멕카는 이슬람교의 교주 마호메트의 탄생지로서 이슬람교도들의 신성시하는 이른바 성지다. 매년 수십만의 순례자가 불원천리 찾아와서 참배를 하는 곳이다. 그런데 나는 <<세계지식화보>>의 그 사진들을 보기전에는 멕카를 이렇게 생각하였었다-
거치른 황무지에 보잘것없는 흙무덤 하나가 있다. 그 무덤우에서는 빼빼 마른 풀 몇대가 바람에 나붓기고있다. 락타를 타고 온 또는 당나귀를 타고 온 초라한 옷차림의 순례자가 땅바닥에 엎드려서 경건하게 어리석게 참배를 한다...
이것이 수십년 동안 내 마음속에 정착되였던 멕카풍경이다.
그런데 우에서 말한 그 사진들을 통하여 내 눈앞에 펼쳐진것은 아주 전연 다른 광경-딴세상이였다.
올림픽경기장을 련상케 하는 굉장한 건축물, 그 주위에는 현대식건물들이 꽉 들어찼는데 사통오달한 큰길들에는 수천대의 수를 헤아릴수없이 많은 승용차들이 서로 붐비며 강물처럼 흐르고있다. 주차장은 역시 수없이 많은, 성냥갑 같고 물매미 같은 승용차들로 가득찼다. 10만명씩 20만명씩 밀려드는 순례자들을 수용할 백색의 일매진 천막들은 교외의 들판을 메웠는데 그 수가 천인지 만인지 아무튼 끝간데 없다. 마호메트의 유골이 안치되여 있다는 석관은 네모난 층집 모양인데 그 규모가 또한 어마하다. 백차일 치듯한 사람들의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와 겨우 그 석곽의 검은 대리석벽을 어루만져보는 순례자들은 개개 다 벅찬 감격에 목이 메여 울음을 터뜨린다. 방성통곡을 아니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이러한 광신적이고 광란적인 사진을 통하여 지켜보는 나의 넋은 크게 뒤흔들렸다.
(이 지경 갚이 박힌 뿌리가 그렇게 쉽사리 빠져? 어림없는 소리!)
그러므로 우리는 무신론으로 젊은 세대를 각성시키는 사업을 쉬임없이 줄기차게 밀고나가야만 할것이다. 종교와 미신의 독기를 발산하는 흐리멍텅한 구름이 인류의 머리우에서 말끔히 걷히지 않는 한 인류의 진정한 해방, 진정한 행복은 있을수 없다.
나는 다시 한 번 웨친다-
<<누가 무어라든 종교는 역시 인민의 아편이다!>>
김학철전집4-태항산록-(수필)연극에 얽힌 사연
수필
연극에 얽힌 사연
1941년 이삼월경, 양자강남북안 각 전장에 분산되였던 조선의용대의 각 지대들이 황하를 북으로 건너서 태항산항일근거지로 들어가려고 륙속 락양에 집결하였다(당시 조선의용대 락양분대의 분대장은 27살의 문정일이였다).
한번은 오래간만에 한데 모인 각 지대가 어우러져 축구대항전을 벌렸는데 내가 자기의 소속한 제2지대팀을 응원하다가 보니 제1지대팀에 낯선 친구 하나가 끼여있었다. 안경을 쓴 말라괭이인데 뽈을 차지도 못하는 주제에 이리 뛰고 저리 닫고 갈개기는 홑으로 갈개였다. 내가 옆에 서서 구경하는 심성운에게
<<저기 저 안경쟁이... 어디서 난 뻐꾸기야?>>
하고 입을 삐쭉하였더니 심성운은
<<상해에 있는 황... 알지? 그 형이래.>>
하고 대답해주었다.
<<어느? 촬영소에 가 있다던? ...>>
<<응.>>
<<흠... 그치야?>>
나는 흥미를 갖고 새삼스레 그 안경쓴 말라괭이를 여겨보였다. 황은 내가 심성운이랑 같이 상해에서 지하활돌을 할 때 안 사람인데 그의 아버지는 독립운동에 헌신한 로혁명가였다.
<<형하구 동생이 아주 팔팔결 다르군그래.>>
<<왜... 그래두 어떻게 보면 모습이 좀 비슷한데가 있지.>>
저녁녘에 그 황의 형이라는 친구와 통성명을 하게 되였는데
<<나는 김학철이라구 하우.>>
<<나는 최채요.>>
황씨가 어느 틈에 최씨로 둔갑을 하였었다.
최채와 나는 다 자기를 대단한 예술가로-거의 천재적인, 쓰다니슬라브스끼적인 예술가로-자처하고있었다. 그러한 제멋에 사는 류사점으로 하여 그와 나는 곧 사귀여 의기상투하는 친구로 될수 있었다.
문정일이 제1전구 장관사령부에 조선의용대 대표로 주재하고 있으면서 교묘한 수단을 써서 상장(上将)참모장 곽기가(郭寄崎)를 업어넘겨준 덕에 우리는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무사히 황하를 건너서 태항산으로 향할수 있었다. 당시 황하를 항행하는 일체 선박은 다 국민당군대의 통제하에 있었다. 그러므로 맹진(孟津)나루를 건느는데도 장관사령부에서 직접 발급한 도하증이 절대로 필요하였다. 조선의용대가 팔로군에 합류하자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그 맹진나루 도하작전에서 문정일은 력사에 남을 공훈을 세웠다. 춘추시대의 탁월한 군사전략가 손무도 <<싸우지 않고 적병을 굴복시키는것이 산수중의 상수>>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 분대가 태항산록에 주류하고있을 때의 일이다. 나는 창작의욕이 불타서 상당히 어려운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희곡 즉 각본 하나를 써내였다. 제목은 <<등대>>이고 줄거리는 탈옥을 한 정치범이 등대지기하는 형을 찾아오는 이야기를 엮은것이였다. 나는 당시 그것을 탈고해놓고
(이거 내가 쉐익스피어, 입쎈을 릉가하지 않았나?)
의심을 하였다. 아무리 보아도 내 그 <<등대>>가 <<햄리트>>나 <<민중의 적>>보다 더 멋이 있어보였기때문이다. 아마도 머리가 너무 뜨거워져서 눈에 무엇이 씌웠던 모양이다. 개구리가 캉가루를 보고
<<너도 나처럼 이렇게 도랑을 뛰여넘을만하니?>>
묻는거나 무엇이 다르랴! 하루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르던 시절의 한토막 웃음거리였다.
그런데 그 유명짜한 <<등대>의 연출을 담당한것이 다름아닌 바로 최채였다(그는 영하배우출신이였다). 더구나 기이한것은 작자인 나의 연출자인 최채가 다 무대에 올라가서 주역노릇을 하는것이였다. 최채는 등대지기를 하는 형, 나는 탈옥수인 그의 동생... 아마도 챠플린의 자작자연에서 계발을 받았던 모양이다. 챠플린의 <<모던시대>>는 1936년에 나오고 우리의 <<등대>>는 1941년-5년후에 나왔으니까. 최채의 안해역 그러니까 내 형수역을 담당한것은 더더구나 조선이름은 권혁(权赫)이라고 하였는데 조선의용대의 유일한 일본녀자로서 조선말, 중국말을 다 잘하였다(그녀는 해방후 나와 이웃하여 살면서 우리 젖먹이아들 해양이를 업고 좋아라고 돌아다녔다. 그녀는 아이낳이를 못하였다).
<<등대>>의 무대장치를 담당한것은 박무이고 효과를 담당한것은 리명선이였는데 박은 그후 어느 통신사의 사장으로 되고 리는 조선전쟁때 부대를 지휘하다가 인천에서 전사하였다. 박무는 광동 중산대학에서 중앙륙군군관학교로 전학을 해왔던 사람인데 무대장치를 어찌나 잘하는지 아무데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전문가의 솜씨였다. 그러하기에 나중에 마덕산이란 친구가 나를 보고 그 메기입을 실룩거리며 비웃었지.
<<임마, 네 그것두 연극이야? 무대장치가 하두 볼만하기에 그걸 보느라구 끝까지 앉아있었지... 그러찮았더면...>>
마덕산이는 그후 일본군법회의에서 총살형을 언도받았다. 그는 12명의 총수로 편성된 행형대앞에서 눈을 싸매는것을 거절하고 오연히 버티고 서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효과를 담당한 리명선의 파도소리를 고리짝뚜껑에다 녹두를 담아가지고 이쪽저쪽으로 기울여서 내는데 아주 진짜파도소리 같아서 그윽한 항구의 정취를 자아낼 정도였다.
총탄이 우박치는 전장을 이리 닫고 저리 닫고 하던 시절에 이런 연극을 상연하였던 일을 생각하면-아득한 옛날 젖먹이시절의 엄마의 자장가와 은근히 귀전을 감도는것처럼-나는 지금도 이름 할수 없는 향수에 잠기군 한다.
해방후 최채는 연변에서 일하며 <<혈투>>라는 각본을 써서 잡지에 발표하고 또 상연도 하였다. 그것은 조선의용군(이때는 <<대>>가 아니라 군)의 유명한 전투-호가장전투의 정경을 묘사한것으로서 그 주요인물 김철(铁)은 바로 나 이 김학철이였다. 재작년인가 최채가 연변에 왔을 때 연변대학 도서관에서 빌어다주어서 나는 그 각본을 처음 읽어보았다. 그 잡지의 이름은 잊어버렸는데 거기에는 정명석, 채택룡, 홍성도 등 여러 사람의 글도 실려있었다.
최채가 성으로 올라가기전에 그와 나는 여러해 이웃하여(바로 앞뒤집) 살았는데 그때 틈만 있으면 우리는 장기를 어울렸었다. 둘의 장기재주는 연극재주만큼이나 없어서 멱이나 겨우 아는 정도였으나 둘이 다 성질이 가랑잎에 불붙기였으므로 윷진 애비 모양 한곬으로 파고들며 기들을 썼었다. 누가 찾아올가봐 문을 잠그고 또 전화가 걸려올가봐 수화기를 벗겨놓고 그리고 맞달라붙어서 결판을 내였다.
최: <<아불싸! 이제 그건 잘못 썼으니... 한번만 물리라구.>>
김: <<한번 썼으면 고만이지 물리는건 다 뭐야.>>
최: <<아차실수루 그런건데... 좀 못 물릴것 뭐 있어?>>
김:<<한번 안된다면 안되는줄 알아. 개코같이!>>
결국은 량편이 다 두볼에다 밤을 물고 시무룩해서 갈라진다. 적어도 한주일가량은 피차에 발을 끊는다. 그러나 한주일이 지나면 궁둥이에 좀이 쑤셔서 견뎌배길 재간이 없다. 결국은 최채가 어슬렁어슬렁 찾아와서
<<학철이 있나? 뭘 해?>>
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것처럼 안락의자에 엉뎅이를 내려놓는다.
<<어때... 한판 어울려보가?>>
<<좋겠지!>>
밤낮 이것을 되풀이하며 우리는 살았었다.
태항산에서 연극을 상연하는 때로부터 45년이 지난 지금도 최채와 나는 일을 하고있다. 기력이 좋아서 끄떡없이 일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김학철전집4-태항산록-(수필)전적지에 얽힌 사연
수필
전적지에 얽힌 사연
<<먼곳에서 온 편지>>
XX동지
주신 글월 반가이 받아보았습니다. 열정적인 협조에 감사를 드립니다. 동지께서 그려보내주신 귀현의 략도에서 저는 40년전 항일의 봉화가 타오르던 원씨(元氏)현의 흙냄새를 맡는것 같습니다.
항일전쟁시기 우리 조선의용군은 무한에서 건립되였습니다. 1938년 가을이였습니다. 그후 우리는 태항산항일근거지에 전입하여 산서성 동욕(桐峪)에 총지휘부를 설치하였습니다. 당시 동욕은 팔로군총사령부 소재지였습니다.
1941년 가을, 우리 분대 약 30명 대원들은 원씨현경내에 진입하여 팔로군부대와 협동작전을 벌렸습니다. 당시 남좌거리는 적군의 전초기지였습니다. 우리는 낮에는 전투를 하고 밤에는 적군을 와해시킬 목적으로 적군의 포대에 접근하여 대적군선전공작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일본말에 능통하였으므로 그것이 가능하였습니다.
1941년 12월 11일, 적군은 선옹채로 쳐들어왔습니다. 우리는 즉시 팔로군의 한개 대대와 함께 치렬한 방어전을 벌림으로써 적군을 격퇴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날 밤 우리는 호가장에 옮기여 숙영하였습니다. 이튿날 즉 12월 12일 새벽, 적군의 대병력이 우리를 포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불가피적으로 일장의 혈전이 벌어졌습니다. 그 전투에서 4명의 조선의용군 용사가 젊은 목숨을 바쳤습니다.
손일봉(孙一峰) 28세
박철동(朴哲东) 26세
한청도(韩清道) 27세
왕현순(王现淳) 24세
이밖에 중상자 둘,경상자 둘이 났는데 저도 그중의 한 사람입니다.
귀현당사판공실의 초청을 두번이나 받고서도 신체조건에 눌리고 또 나이에 눌려서 원씨땅에 묻힌 옛 전우들을 찾아보지 못하는 이 심정을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이달 12일 호가정전투 40돐입니다. 귀현의 땅속에 묻혀있는 그들은 저의 가슴속에 아직도 살아있습니다. 저는 귀현 인민들이 행복한 생활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바라는바입니다. 그래야 우리 전우들의 피가 헛되이 흐른것으로 되지 않겠기에 말입니다.
귀현의 번영과 <<백화원>>의 만발을 축원합니다. 귀현 인민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김학철
1981년 12월 3일
이상은 태항산기슭에 위치한, 하북성 원씨현에서 발간되는 간행물 <<백화원>> 1982년 제1호에 실린 나의 편지다(제목은 편집부에서 단것이다).
그때로부터 2년 반이 지난 어제 즉 1984년 6월 22일에 나는 료녕성에서 사업하고있는 옛 전우 한청한테서 한통의 편지를 받았다. 그 내용의 일부를 발취하면 아래와 같다.
...이번에 나는 혼자서 동무들의 옛 싸움터-호가장을 찾아가 보았소. 당시 동무들과 협동작전하던 팔로군의 한 중대장이 아직도 살아있어서 나를 반겨맞는데 그 첫마디가
<<어째 이렇게 혼자 오셨습니까? 40여년 동안에 여기 묻힌 전우들을 찾아보는이가 한분도 없었으니 웬 일입니까? 당시 조선의용군 동지들이 아직 그래도 더러는 살아계시겠지요?>>
나는 말문이 막혀서 선뜻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 얼버무려넘길수 밖에 없었소. 그 옛 중대장이 속으로 우리 조선동지들을 얼마나 무정하다고 생각했겠소? 나는 부끄러워서 등골에 식은땀을 흘렸소. 무슨 변명의 여지가 있어야지! 우리가 그래 의리 없고 량심 없고 도덕 없는 인간들이 아니요? 항일로간부! 생각만 해도 낯이 뜨뜻해나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만리이역에서 목숨을 바친 지하의 전우들을 대할 면목이 있소 없소? 그들은 다 총각의 몸으로 죽었소. 다들 대가 끊어졌단 말이요. 그런데 우리는?... 처자식 거느리고 손자손녀 앞에 두고... 이렇게 편안히들 잘살고있소그려! 그들의 무덤이 보잘것없는 태항산구석에 처박혀있지 않고 교통이 편리한 어느 명승고적 같은데 있었다면 이 지경이야 아니였겠지? 슬픈 일이고 가탄할 일이요. ...
▣사진 – 태항산 략도
나는 <<백화원>>편집부의 요청에 따라 그들이 그려 보내온 략도에다 다음과 같이 기입해 보내였다.
김학철전집4-태항산록-(수필)죄수복에 얽힌 사연
수필
죄수복에 얽힌 사연
이전에 일본감옥에서는 미결수에게는 하늘색의 죄수복을 그리고 기결수에게는 붉은 벽돌빛의 죄수복을 입혔다. 기결수중에도 하늘색죄수복을 입은것이 더러 있기는 하였는데 그것은 <<모범죄수>>에게 한하여 베풀어지는 특전 즉 <<영예복>>이였다, 그보다 더 높은 <<최고영예복>>은 흑, 백 두가지 실로 섞어 짠 <<시모후리(霜降)>>였다.
지난 60년대와 70년대의 그 유명짜한 무법천지통에 내가 갇혀있던 추리구(秋梨沟)감옥에서는 일률적으로 회색죄수복을 입히는데-일본감옥에서 번호표를 다는것과는 달리-거기서는 죄수라는 뜻의 <<범(犯)>>을 흰 뼁끼로 또는 붉은 뼁끼로 더덕더덕 찍은것을 입혔었다.
내복은 일년에 런닝샤쯔 하나와 빤쯔 하나밖에 내주지 않으니까 여벌은 다 집에서 갖다 입어야 하였다. 그러므로 옥바라지를 해줄 사람이 있는 놈은 별문제가 없지만 옥바라지를 해줄 사람이 없는 놈은 그 곤난이 말이 아니였다. 알몸뚱이에 헐렁헐렁한 죄수복을 그대로 걸치고 다니는 놈까지 있는 형편이였다.
감옥에서는 어쩌다가 영화를 돌려도 죄수의 탈옥하는 장면 같은것은 의례 카트를 하기 마련이였다(죄수들이 그 본을 따서 도망을 칠가봐). <<꽃파는 처녀>>라는 영화를 나는 본적이 없지만 거기에도 아마 탈옥하는 장면이 있는 모양이였다. 추리구감옥에서 돌릴 때는 그 대목을 카트하였다고 선배죄수들이 서로 지껄이며 비웃는것을, 발언권 없는 후배죄수인 나는 옆에 서서 마음을 가다듬고 삼가 들은적이 있었기에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카트를 하여도 탈옥사건은 심심찮을 정도로 늘 있었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감옥당국에서는 대책을 강구하였다(참으로 골머리 아픈노릇이였다). 죄수복과 내복들에 전부 뼁끼로<<범>>자와 입은 놈의 이름, 죄명, 형기 등을 밝혀 쓰기로 한것이다.
범-현행반혁명-10년-김학철
오스포드대학의 명예철학박사의 칭호도 이렇게 써붙이고 다니면 그리 보기 좋을것이 없겠는데 하물며 반혁명 운운을! 생각들 좀 해보시라, 이 김학철이의 몰골이 어떠만 하였겠는가!
그런데 바깥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감옥안에서도 <<극단주의>>가 판을 치는 바람에 마침내는 런닝샤쯔, 빤쯔나부랭이에다까지 <<범>>, <<아무개>>, <<현행반혁명>> 또는 <<력사반혁명>>, <<19년>> 또는 <<20년>>... 이따위로 써놓게끔 되였었다.
말을 참지 못하는 나의 <<동범(同犯)>>즉 <<감옥동창생>> 하나가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겨서
<<제기, 어느 미친놈이 맨 빤쯔 바람으루 도망질을 칠라구!>>
한마디를 뇌까렸다가 <<반개조(反改造)분자>>로 몰리여 학질을 뗀 일까지 있었다.
<<장춘문예>> 85년 3호에 실린 졸작 <<죄수의사>>의 주인공 <<장춘생>>이는 나의 <<추리구감옥 동창생>>으로서 본명은 류사곤-구태현 사람이였다. 이 류사곤이도 속옷형편이란 말이 아니여서 차마 눈뜨고 보기가 구차할 지경이였다. 딱하게 여긴 나머지에 나는 여벌의 메리야스내복 하나를 남모르게 넌지시 꺼내다주면서 신신당부를 하였다.
<<류사곤, 너 이거 속에다만 입어라. 아무한테두 보이지 말아. 알았니? 괜히 또 누구 벼락을 맞히지 말구.>>
감옥에서는 죄수끼리 무슨 물건을 서로 바꾸거나 주고받는것을 엄금하였었다. 무슨 꿍꿍이를 할가봐서였다.
하건만 워낙 정신이 부실한 류사곤이는 얼마 아니하여 나의 그 신신당부를 까맣게 잊어버리고말았다. 어느날 수십명의 죄수들이 움을 파는 작업을 하는데 개밥에 도토리로 류사곤이녀석도 끼여들었었다. 그런데 한바탕 신이 나서 삽질을 하다가 땀이 나기 시작하니까 그 녀석은 겉에 입었던 죄수복을 훌러덩 벗어버리는것이였다. 멀찌감치에서 그 자식의 하는 꼴을 바라보다가 나는 대번에 숨을 들이그었다. 왼새끼를 꼬았다. 손톱여물을 썰었다.
(아이구 하느님 맙소사! 저런 망할 자식 좀 봤나!)
그 녀석이 입은 남색메리야스내복에는 흰 뼁끼로 뚜렷하게
<<범-현행반혁명-10년-김학철>>
이렇게 씌여있지 않은가!
눈치 빠른 간수가 이것을 발견하기가 무섭게 외마디소리를 냅다 질렀다.
<<도대체 이 중대엔... 김학철이가 몇개야!>>
류사곤 이놈은 끝내 내게다 벼락을 맞혀주고야말았다.
나는 톡톡히 야단을 맞고 그리고 시말서까지 써바쳤다-<<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류사곤이는 본시 누구나 다 호의로 치는 인간이였으니까 꾸지람 한미디도 듣지 않았다. 뿐만아니라 그때부터는 도리여 드러내놓고 그 <<김학철 또 하나>>의 메리야스내복을 입을수 있게 되였다. 그것을 몰수하면 류사곤이가 알몸이 된다는것을 간수도 다 알고 있었으므로 크게 선심을 써서 그래도 눈감아주었던것이다.
이듬해 봄, 새 죄수복들을 타는데 류사곤이한테도 물론 례외없이 한벌이 차례졌다. 그 녀석은 새옷 한벌을 얻어입고 좋아서 입이 함박만큼이나 벌어졌었다. 그런데 어떡허다 호주머니에 손을 들이밀어보더니 그 녀석은
<<이?>>
하고 괴상한 얼굴을 하면서 손에 집히는 종이쪽지 하나를 꺼내드는것이였다. 네모나게 접은것을 펼쳐들고 들여다보니 무슨 글자가 적혀있기는 하나 워낙 까막눈이라 알수 있어야지!
<<여보 김학철, 이거 좀 봐주우... 뭐라구 적혀있소?>>
류사곤이는 내가 신문을 보는것을 여러번 본 까닭에 나를 소학졸업정도의 지식은 갖고있는 사람으로 짐작하였었다. 내가 그 쪽지를 받아서 들여다보니 거기에는 그리 잘 쓰지 못한 한문글자로 적혀있기를-
<<친애하는 아들아, 이 엄마가 지어보내는 이 옷을 입고 개조를 잘하여라.>>
내가 그 쪽지를 손에 든채 앙천대소를 하니 다른 죄수들이 무슨 일이 났나 하고 모여들면서
<<무슨 일이야?>>
<<뭐라구 적혔기에?>>
입입이 한마디씩 묻는것이였다. 내가 웬 영문을 몰라서 어리둥절하는 류사곤이의 밤송이 같은 머리를 한번 툭 때리고나서
<<이 자식이 엄마가 생겼어. 수양엄마 하나가 생겼단 말이야.>>
하고 떠드니
<<엄마가 생기다니?>>
<<수양엄마? 무슨 수양엄마?>>
<<어디 그 쪽지 이리 좀 내라구. 대체 뭐라구 적혀있기에?>>
하고 다들 대들어 내 손에서 그 쪽지를 채여가는것이였다. 그리고는 머리르 한데 모으고 들여다보더니 곧 걷잡을수없이 웃음보들을 터뜨렸다.
<<류사곤이 이놈아, 어서 한턱 내봐!>>
<<수양엄마가 생긴 턱을 내란 말이다... 이 녀석아!>>
<<와하하! ...>>
<<멍청이녀석 같으니라구!>>
그들은 대들어서 류사곤이를-추리구감옥의 아Q를-한바탕 시달구어주었다. 다들 동네북처럼 그 녀석의 머리를 툭툭 한대씩 갈겨준것은 더 말할것도 없는 일이다.
류사곤이는 갑자기 동네북이 되여버린 머리를 싸안고 일변 피해 달아나며 일변 두눈을 희번득거리며 투덜거리는것이였다.
<<먹은 밥알이 곤두서나? 왜들 지랄이야!>>
그 쪽지는 죄수복을 만드는 감옥공장에서 일을 하는 녀죄수들이 심심풀이장난으로 적어넣어 보낸것이였다. 새 죄수복에는 가끔 그런것들이 들어있군 하였었다.
나는 <<촉경생정(触景生情)이랄지... 불현듯 집생각이 간절해졌다. 그래서 안해에게 편지를 썼다(한달에 한통씩 집안식구에게 만은 편지를 쓸수 있었다).
혜원:
삼십년전 이달 스무나흗날 대동강변 경제리에서 맺어진 인연은 곡절 많은 삶의 흐름을 이루고 때로는 흐려졌다 때로는 맑아졌다 꾸준히 또 줄기차게 흘러내렸습니다. 은혼의 여울목은 이미 지났고 금혼의 나루터는 어직 멉니다. 애되던 당신의 얼굴에는 년룬의 거미줄이 희미하게 얽혔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눈앞에 푸르싱싱 자라나는 후대들을 봅니다. 부푼 희망속에 기대에 찬 눈으로 푸르싱싱 자라나는 후대들을 봅니다. 삶의 흐름은 앞으로도 의연히 밤에 낮을 이어 흐르고 또 흐르고 자꾸만 흐를겁니다.
이른봄 종다리의 희열을
늦가을 기러기의 적막을
아울러 이 가슴에 안겨주신이
조선의 어엿한 딸 혜원녀사께
삼가 이 몇줄 글을 바치옵니다
삼가 이 몇줄 글을 바치옵니다
학철
일구칠칠년 사월 초하루
산에 둘린 물에 둘린 추리구에서
만기출옥을 할무렵쯤 되면 죄수들은 내복에 찍힌 <<범>>자와 이름, 죄명 따위를 지워버리기에 골몰들 하였다. 그래도 입고 나가기는 난감하고 창피해서였다. 털실내복에 찍힌 글자를 지우려고 감옥공장에서 독한 약품을 훔쳐다 발랐다가 털실이 삭아서 문정문정 나가는 일까지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고스란히 그대로 다 입고, 갖고 나왔다.
(이런 훌륭한 기념품이 또 어디 있어!)
8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아직 그런 내복을 입고있다. 암만 빨아도 지워지지를 않으니까 그대로 입고있을 밖에. 시인 임효원님에게 나는 입은것을 한번 보인 일까지 있다.
감옥안에서 환갑, 진갑을 다 강낭떡과 시래기국으로 잘 쇠고나서 만기출옥으로 집이란데를 돌아와보니 나 없는 사이에 집안에 식구 둘이 늘었는데 그 하나는 며느리이고 또 하나는 낳은지 겨우 다섯달밖에 안되는 젖먹이-손자였다.
손자라는것을 난생처음 안아보는 할애비적마음은 야릇하면서도 또 흐뭇하였다.
세월이 물같이 흘러서 어느덧 그 손자가 네살이 되니까 이놈이 눈만 뜨면 아침부터 밤까지 별의별 말을 다 물어보기 시작하였다. 세상이 온통 알아보고싶은것뿐인 모양이였다. 이 세상에 나온 유일한 목적이 의문을 제기하는데 있는상싶었다.
(이놈이 나올 때 물음표를 한 억개 달고 나온 놈이 아닌가?)
이런 의심이 갈 지경이였다. 그런데 이 녀석이 하루는 느닷없이 엉뚱한 말 한마디를 물어보는것이였다.
<<할아버지 축구선숩니까?>>
<<축구선수? 아니 왜? ...>>
하고 내가 적이 괴이쩍어하니까 그 녀석은 고 조꼬만 고사리같은 손으로 내가 입고있는 메리야스내복을 가리키면서
<<그럼 어째 이런걸 입었습니까?>>
하고 납득이 잘 안 가는 모양으로 되묻는것이였다.
알고보니 어린 무식쟁이놈이 내 내복의 앞가슴과 등판에 찍혀있는 <<범(犯)>>자를 알아보지 못하는 까닭에 축구선수들이 입는 운동복의 번호와 혼동을 한것이였다.
집안은 또 한바탕 유쾌하고 번화한 웃음판으로 변하였다.
김학철전집4-태항산록-(수필)강낭떡에 얽힌 사연
수필
강낭떡에 얽힌 사연
이 근년에 와서 우리 집은 물론이려니와 이웃에서들도 가낭떡을 쪄먹는것을 보지를 못하였다. 고마운 일이라 아니할수 없다. 아무리 <<좋은 세상>>이라고 아침부터 밤까지 념불외우듯 외워도 실지로 배가 고프거나 또는 강낭덕따위에 목을 매고 살아야 한다면 그런 공념불은 아무리 외워도 다 소용이 없는 법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또 그 강낭떡을 무조건적으로 타박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 강낭떡이 생각밖에 은을 내기도 하기때문이다.
내가 강낭떡과 영광스러운 첫대면을 한것은 항일전쟁시기 태항산항일근거지에서였다. 난생처음 강낭떡이란 것을 멋도 모르고 한입 덥석 베물고 나는 곧 속으로 울부짖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구, 내 일생은 인젠 끝장이다! 이런걸 먹구 사람이 어떻게 산단 말이!)
그러나 나의 이러한 비관주의는 오래지 않아 곧 시정이 되였다. 시정이라느니보다는 극복 또는 압도가 되였다. -끼니마다 통 강냉이를 삶아먹게 되였기때문이다. 그제야 비로소 나는 전비를 톡톡히 뉘우쳤다.
(복에 겨워서 복을 몰랐었구나!)
지나간 한때 인위적인 재해로 우리들의 가정에 강낭떡이 등장을 하였을 때, 나는 가슴이 아파서 차마 보기 어려운 광경을 목도하였었다. 끼니마다 강낭떡을 들이대니까 철 없는 어린아이들이 먹기 싫다고 밥투정을 하는데 엄마가 얼림수로 강낭떡을 가장 맛나는체 떼먹어보이며
<<아이고 맛있다! 아이고 맛있다! 요렇게 맛있다는걸 안 먹어? 어서 먹어라! 자 어서!>>
이와 같이 아이들을 달래니 어린것들이
<<엄마는 제가 좋아하니까 우리한테두 밤낮 강낭떡만 쪄준단 말이야!>>
하고 그 엄마를 칭원하는것을 보았던것이다. 가엾은 엄마! 사랑하는 아들딸에게 먹이고싶은 쌀밥을 먹일수 없는 엄마의 안타까운 심정. -정직한 인간으로서는 차마 눈뜨고 보기가 어려운 광경이였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고상하고 가장 희생적정신이 강한 우리의 녀성들은 이런 시달림속에서 눈물을 속으로 흘리며 그 몇해를 살아나와야 하였었다.
내가 강낭떡을 크림빵보다도 증편보다도 카스텔라보다도 더 귀중하게 여기게 된것은 그 유명짜한 무법천지통에 추리구감옥에 갇혔을 때의 일이다. 강낭떡을 아침에는 석냥짜리 하나를 그리고 점심과 저녁에는 각각 넉냥짜리 하나씩을 먹고 살아야 하는데 부식물이라는건 멀건 남새국 한사발뿐이니까 량에 차지를 않아도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허구한 날 배가 차지 않는다는것은 일반 사람으로서는 상상하기가 어려운 경지다.
배를 한번 잔뜩 불리워보고싶은 욕망이란 강렬하기가 짝이 없는것이여서 그 무엇이라도 막아낼수는 없었다. 그리서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죄수들은 궁여지책으로 한끼씩을 엇갈아 굶는 방법을 썼다. 즉 한끼를 먼저 굶고 강낭떡을 남에게 뀌여주었다가 나중에 받아서 한꺼번에 두개를 먹거나 아니면 먼저 두개를 먹고 나중에 한끼를 굶는것이다.
미결감방에서는 먼저 먹는 놈이 다음 때식때가 되기전에 갑자기 이감(移监)이 되거나 석방이 되여서 뀌여준 놈이 크게 랑패를 보는수가 있지마는 기결수들사이에는 그런 돌발사건이 있을수 없으므로 그 점만은 모두 안심들 하였다. 그렇지만 한끼를 굶고 네시간 동안 일을 하면서 다음 끼니때를 기다린다는것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였다. 허기증이 나서 나가 너부러지는 놈까지 다 있었다. 더운물에서 건져서 찬물에 담그거나 찬물에서 건져서 더운물에 담그는 식으로 배를 불려보았다 곯려보았다 하는것이 좋을리가 없었다.
이밖에도 또 여러가지 방법을 시험들 해보았으나 그 결과는 다 신통치가 못하였다. 워낙 절대량이 부족하기때문이였다.
한번은 이른바 모범죄수들만 한 30명 골라뽑아 데리고 돈화거리로 공장견학을 갔었다. 당일치기니까 점심 한끼만 밖에서 먹으면 되였다. 겉치레 잘하는 감옥당국에서는 바깥세상사람들이 보는데서 죄수들에게 식은 강낭떡을 먹이는것은 볼품이 사납다고 떠나기전에 미리 빵을 사다가 매 사람 두개씩 노나주었다. 그리고 명백히 잘라말하였다.
<<점심시간에는 더운물만 공급할테니까 다들 그런줄 알라.>>
오전의 견학을 마치고 한낮때가 되자 간수들은 죄수견학단을 끌고 미리 교섭해놓은 국영식당에를 들어왔다. 한쪽구석에 한 30명 앉을 자리가 마련되여있었다. 다른 손님들이 구경스레 바라보는 가운데 죄수들이 자리잡아앉자 곧 접대원들이 더운물 2통과 빈 사발 서르나문개를 갖다주었다. 죄수들이 제각기 사발에다 다운물을 떠가지고 상에 죽 둘러앉아 훌훌 마시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빵을 꺼내먹는 놈은 하나도 없었다. 괴이쩍게 여긴 간수들이 구경하는 다른 손님들을 흘금흘금 곁눈질해보면서 입속말로-도적놈 개 꾸짖듯-죄수들을 독촉하였다.
<<무엇들 하구있어? 어서어서 빵을 꺼내먹지 않구!>>
그러나 죄수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맹물만 마시고있었다.
<<어떻게 된거야! 왜들 말이 없어?>>
화증난 간수가 어깨를 잡아흔드는 바람에 할수없이 한놈이 대답을 올렸다.
<<저 아침에... 다 먹어버렸습니다.>>
간수들은 어이없고 기가 막혀서 서로 돌아보고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단 한놈의 례외도 없이 아침의 강낭떡 하나와 점심의 빵 두개를 한꺼번에 다 먹어버리고 그리고 모두들 빈손 털고 떠나왔던것이다. 그러니까 속내 모르는 구경군들이야 감옥에서는 죄수들에게 점심을 먹이지 않고 맹물한 먹이는줄로 알 밖에!
(정치적영향이 얼마나 나쁜가!)
<<죽일 놈들, 얼마나 나쁜가!)
중인소시에 피대도 세울수 없는 간수들은 모주 먹은 돼지 벼르듯 죄수들을 벼르기만 하였다.
그 10년 동안의 무법천지통에 밖에 있는 사람도 갖은 곡경을 다 치렀는데 감옥안에 갇힌 사람이야 더 말할게 있을건가!
감옥에서도 한달에 두끼씩은 쌀밥을 먹이는데 나는 매번 다 먹지 않고 다른 사람의 묵은 강낭떡과 맞바꾸어먹었다. 쌀을 일지 않고 밥을 짓기때문에 돌이 너무 많아서 먹을수가 없어서였다(이발이 견뎌내지 못하였다). 밑바닥에서 푼 밥은-돌이 밑으로 가라앉기때문에-더 형편이 없었다. 혼강시에서 이감되여온 정치범 하나가 성질이 워낙 깐깐한 까닭에 한사발 밥에 돌이 대체 몇개나 들어있나 세여본즉... 무려 127개! 그는 당장 감옥당국에 이 <<놀라운>> 실정을 서면으로서 보고하였다-<<이런 밥을 우리더러 어떻게 먹으랍니까!>>
그러나 감옥당국에서는 그의 보고를 무시해버렸다. 모르기는 해도 아마 천명 사람이 먹는 밥의 쌀을 인다는 재간이 없어서였을것이다. 그 바람에 그에게는 공연히 별명만 하나 생겼다.-<<이얼치(127)>>. 그때부터 동료죄수들은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여보 이얼치, 그 삽 이리 좀 집어주우.>>
<<가루비누 남은게 좀 없소 이얼치?>>
이렇게들 부르기 시작하였던것이다.
감옥안에서도 감동적인 장면은 없지 않았다. 설 같은 때 먹을것이 푸짐하게 공급되면 그것을 먹지 않고-다른 중대에 있는 동생을 갖다주겠다고-싸들고 달려가거나 달려오는 죄수들이 있었다. 형제간에 또는 부자간에 같은 사건으로 들어오는 일이 더러 있었기때문이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감옥당국에서는 그후부터 혈족을 한감옥에는 가두지 않기로 하였다.
나는 감옥안에서 배고픈 세월을 보내면서 지나간 일들을 돌이켜보고 쓴웃음을 웃지 않을수 없었다.
30년대 중앙륙군군관학교에서의 일이다. 3개 대대 천여명 학생이 먼 행군길을 떠나게 되였다. 각 중대에서는 출발직전에 매인당 군량미 한 전대씩을 노나주었다. 총에 칼에 탄약에 수류탄에 외투에 탄자에... 짐이 이만저만 무겁지가 않은데 거기다 또 쌀전대까지 얹으라니 죽을 지경인것은 사실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 갖고 길을 떠나겠는가! 내가 전대를 배낭에 얹혀놓고 어떡허다 보니 교정끝에 있는 변소뒤로 숱한 학생들이 들락날락하고있었다.
(대체 무얼가?)
좀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슬렁슬렁 가보니 아 이런! 변소뒤에 하얀 입쌀이 피라미드형으로 쌓였는데 숱한 녀석들이 거기다 제 각기 전대의 쌀을 덜고있지 않는가! 한놈이 한두근씩만 덜어도 사람의 수효가 워낙 많으니까 피라미드가 될 밖에 없었다.
일생을 살아가자면 남아서 주체궂어하는 때도 있고 또 모자라서 허덕거리는 때도 있는것이 아마 인생인 모양이였다.
만기출옥을 한 뒤에 감옥안에서 그렇게도 먹고싶던 강낭떡을 한번 좀 실컷 먹어보려고 안해더러 강낭떡을 쪄오랬더니-하나도 맛이 없었다. 차일시피일시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인가싶었다.
강청이 일파와 더불어 강낭떡시대는 인제 영영 가버렸다. 지긋지긋한 강낭떡시대는 영원히 가버렸다.
김학철전집4-태항산록-(수필)발가락이 닮았다
수필
발가락이 닮았다.
항일의 봉화가 타오르는 태항산에서의 일이다. 우리 조선의용군의 한 부대는 팔로군과의 협동작전으로 침략군의 거점-보루 하나를 공격하여 이를 점령하였다. 교전하는 쌍방에 다 사상자가 난것은 더 말할것도 없는 일이다. 화약내와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는 보루안에 뛰여들어보니 가로세로 나가너부러진 적병들의 시체가 랑자하였다. 의전례하여 몸뚱아리가 아직 다 식지 않은 송장들의 몸뒤짐을 하다가 나는 한놈의 잡낭(즈꾸로 만든 멜가방)속에서 책 한권을 뒤져내였다. 태항산항일근거지는 책이 매우 귀한 곳이다. 그래서 나는
(이게 웬 떡이냐?)
금시계라도 하나 뒤져낸것처럼 대견해하며 그 책을 다시 본즉 손바닥만한 수진본인데 앞뒤뚜겅이 다 떨어져나가서 누가 지은 무슨 책인지를 알수가 없는것이였다. 그런데 나를 깜짝 놀라게 한것은 그 책이 일본글로 된것이 아니라 우리 한글로 된거라는것이였다.
(그렇다면...)
다음 순간 나는 속이 찡하여 어쩔할바를 몰랐다. 그러니까 분명... 내 발밑에 죽어넘어져있는것은 일본놈이 아니고 우리 조선사람이였다. 조선청년이였다. 조선에서 끌려나온 희생물-학도병이였다!
(만리이역에서-아무리 모르고 한 일이라도-동포를 죽이다니!)
나는 한동안 그 시체앞에 멍하니 서있다가
<<아 뭘 하구있어 학철이? 빨리 나오잖구!>>
하는 어느 전우의 재촉하는 소리를 듣고 비로소 제정신이 돌아서
<<아 이제 나가.>>
일변 대답하고 일변 그 학도병의 뜨고 죽은 눈을 감겨주었다.
전투가 끝난 뒤에 뒤적거려보니 그 로획품 수진본은 단편집인데 누가 쓴것인지는 몰라도 거기 수록된 10여편의 단편이 모두 시시껄렁한것들뿐이였다. 그중 한편의 제목이 눈을 끌어서 맨먼저 읽어보는데 그 제목은 기발하게도 <<발가락이 닮았다>>였다. 그 줄거리를 대강 적어보면 아래와 같다.
어느(조신인) 인테리가 오입질이 심하여 성병(림질)에 걸렸다. 후에 다행이도 완치는 되였으나 그 후유증으로 생식적기능은 영영 파괴되고말았다. 그의 친구인 한의사가 검진을 해보고 내린 진단이였다. 그는 매우 실망하였으나-누구를 탓하랴-할수 없는 일이였다. 그후 결혼은 하였으나 아이가 생기기를 바라지는 못할 형편이였다. 그러던중 뜻밖에도 그의 안해가 임신을 하였다. 물론 그 안해는 남편의 생식적기능이 아주 파괴된것을 모르고 시집을 왔었다. 남편은 가슴이 뜨끔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 녀편네가? ...)
아무리 안해의 행실을 의심하지 않을래야 않을 재간이 없었다. 남편은 이 충격적인 의문을 한시바삐 풀기 위하여 친구의사를 부랴부랴 찾아갔다.
<<여보게 대체 이게 어찌된 일인가? 자네가 분명히 말해주지 않았었나... 나는... 인제... 안된다구. 그런데 녀편네가 아이를 배였으니... 이게 그래? ...>>
<<너무 흥분하지 말게. 어디 한번 다시 진찰을 해보세.>>
그 친구의사가 다시 면밀히 검진을 해본 결과 자기가 전에 내린바 있는, 생식적기능이 완전히 파괴되였다는 진단은 틀림이 없었다. 그러니까 뒤집어서 말하면 그 친구의 안해가 행실이 부정하여 사이서방의 아이를 배였다는것을 의학적으로 증명한것이 되였다. 그러나 능란한 의사는 잔뜩 의심을 품고있는 친구를 안위하기 위하여
<<거참 기적적일세. 자네 생식적기능이 어느새 아주 제대루 회복이 됐네그려. 희한한 일일세. 반갑네 정말... 축하하네.>>
이렇게 얼렁뚱땅해 넘겼다.
그후 몇달이 지나서 안해가 아이를 낳았는데 그게 또 마침 옥동자라. 이런 경사가 또 어디 있으랴! 그런데 한달이 지나고... 돌이 지나도... 아이가 아버지를-법률상의 아버지 즉 본남편을-조금이라도 닮으데가 있어야 말이지! 저와 모습이 판판결 다른 아이를 오랜 동안-여러달을 두고-의혹에 찬 눈으로 이리 살펴보고 저리 뜯어보고 하던 본남편 아버지는 끝내 닮은데를 찾아내고야 말았다.
<<발가락이 닮았다! 발가락이 닮았다! 신통히 닮았다!>>
그는 이렇게 환성을 지르는것이였다.
일제의 철제하에 신음하는 민족의 고난에 외면을 하고 이따위 소설을 써서 민족의 반항정신을 마비시키는 그 이름도 모르는 너절한 작자에게 나는 침을 칵 뱉어주고싶었다.
몇해후, 일제가 무조건항복을 한 뒤에 나는 약 1년 동안 해방된 서울에서-독립동맹 서울시위원회에서-일하였다, 그러다보니 자연 남조선의 많은 문인들과도 접촉할 기회를 갖게 되였다. 진보적인 작가들의 조직인 문학가동맹의 기관지 <<문학>>편집부에서 한번은 무슨 좌담회를 개최하였는데 나도 초청을 받아서 참석을 하였다. 그 석상에서 나는 들떼여놓고 한번 물어보았다.
<<내가 전에 <발가락이 닮았다>라는 단편소설을 하나 읽어본적이 있는데... 그 작자가 누구인지는... 아직도 모르구있습니다. 그게 대체 누굽니까?>>
좌석은 삽시에 웃음판으로 변하였다.
<<김동인이가 쓴겁니다. 김동인이가... 지금 <문필가협회>라는 우익단체를 꾸리느라구 열을 올리구있지요.>>
(오, 그러니까 그게 김동인이의 단편집이였구나!)
나의 오랜 궁금중은 드디여 풀리였다. 어처구니없이 풀리였다. 서울서 중학교에 다닐 때 나는 신문에 련재되는 김동인의 력사소설 <운형궁의 봄>을 읽어본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한동안 허전한 느낌이 사로잡혔다. 이름 못할 비애 같은것을 느꼈다.
재능있는 한 작가의 타락상을 눈앞에 보는 슬픔이였을가?
김학철전집4-태항산록-(수필)간판왕
수필
간판왕
<<뭐라구? 미국엔 왕이 많다구? 무슨왕이?>>
<<록펠러-석유왕, 카네기-강철왕, 포오드-자동차왕, 알리-권투왕...>>
<<으응... 그런 왕... 난 또 무슨...>>
<<아주 대수로와하지 않는군그래?>>
<<그럼 내가 찔끔할줄 알았나? 그 잘난 왕!>>
<<희기는 까치 배바닥일세!>>
<<왜, 내가 흰소리하는줄 알아?>>
<<그럼 뭐야?>>
<<제게두 세상에 자랑할만한 왕이 있다는걸 왜 몰라? 이 사대주의-양국놈의 졸도야!>>
<<뭐야? 제게두 왕이 있어? 야 거 금시초문이다. 도대체 그 왕이 무슨 왕이야!>>
<<무슨 왕이냐구? -간판왕? 인제 알겠어?>>
<<간판왕?... 간판왕이란게 뭐 말라뒈진게야?>>
<<뭐 말라뒈지긴! 이 세상에서 제일 긴 간판... 몰라? 글자가 제일 많은 간판... 몰라?>>
<<헤? 그런게 어디 있어?>>
<<<길림시 광주항주련합유한책임주식회자 연길분회사>-스물두자. <연길시물자국로동복무공사제2상점>-열여섯자. <연길시부식물공사 공원식료품상점>-열다섯자...>>
<<알았다. 알았다! 이제 고만해라.>>
<<비둘기장만한 상점에다 이런 굉장한 간판을 내건건 이 지구상에서 우리 여기밖에 없어. 이래두 세계에 내놓구 자랑할만한 간판왕이 아니란 말이야?>>
이것은 어느 재담군이 지어낸 재담이 아니다. 공원 긴걸상에 걸터앉아서 한담설화하는 어느 두친구가 주고받는 말을 필자가 우연히-귀결에 얼핏-들은 말이다. 그 웃음의 소리가운데 무슨 철리가 담겨져있는것 같아서 돌아오는 길에 나는 혼자 자꾸 더듬었다.
일본에 <<오다뀨(小田急)라는 석자짜리 간판을 내건 백화점이있다(네온싸인이고 뭐고 다 석자다). 칠팔층의 큰 빌딩인데 지하층은 바로 지하철도역이고 그리고 옥상은 아동공원이다. 영화관, 연예장, 무도장, 화랑(회화전람관), 미장원, 양복점, 사진관, 식당(양식당과 일본료리점), 다방, 바... 안 갖춘것이 없는 별천지다. 하루의 매상고가 딸라로 환산하여도 6계단 수인것은 더 말할것도 없는 일이다. 그렇건만 그 간판은 단 석자-<<오다뀨>>다.
이와 비슷한, 엄청난 규모의 백화점들도 다 <<시라끼야(白木屋)>>가 아니면 <<미쯔꼬시(三越)>>... 두자가 아니면 석자다(세계에서 제일 큰 미국의 석유회사는 <<액소>>, 전날 서울에서 가장 유명하던 백화점은
<<화신>>).
얼마나 외우기 쉬운 이름들인가.
<<그거 어디서 샀소?>>
<<<오다뀨>에서.>>
<<또 있습니까?>>
<<얼마든지.>>
얼마나 간단한 시민들의 대화인가.
<<우리 <시라끼야>에 가볼가?>>
<<아니 먼저 <미쯔고시>에 들려보자구.>>
<<아무려나.>>
이렇게 말을 주고받는데 그들은 이미 습관이 되였다. 한데 만약 그들더러
<<이봐, 우리 <길림시 광주항주련합유한책임주식회사 연길분회사>에 좀 가볼가, 거기 파는게 있을는지 모르겠는데.>>
<<아니, 먼저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연변농학원공급판매공사>에 들려보자구.>>
<<그럴바엔 차라리 <연길시물자국로동복무공사제2상점>으루 가자구.>>
<<아무려나, 그것두 좋겠지.>>
이런 대화를 하라구 한다면 그들은 숨이 차서-한끈에 잇대여 쥐여치기가 너무 힘이 들어서-아주 나가 누워버릴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도 그렇거니와 초련 웬만한 총기를 갖고서는 그 긴 상호-20여자자리 상호-를 외워낸다는 재간이 없을것이다.
단지 세계기록을 수립해서 간판왕의 영예를 쟁취할 생각에서라면 그것은 또 별문제다. <<길림성>>우에다 <<중화인민공화국>> 일곱자를 더 붙여서 스물아홉자를 만들어도 좋고 또 보다 더 상세하게 <<아세아주>>, <<지구>>, <<태양계>>, <<우리 은하계>>까지 덧붙여서 아주 우주무역의 길을 튼대도 무방할것이다.
일본이나 련방독일에서 시민들에게 도난, 폭력, 화재 등의 사고로 긴급전화를 걸 때는 <<110번>>, <<09번>>에다 걸면 경찰이 곧 출동된다고 거듭거듭 선전하는것은 시민들이 외우기 쉽고 편리하라고 하는것이다.
이 바쁜 세상에 어느 미친놈이 스물몇자짜리 간판을 한자한자 내리외운다던가! <<능률>> 두 글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전연 모르는 사람들만이 그런 간판왕식판을 걸어놓고 자아도취의 선경에서 도끼자루 썩는줄을 모르고있을것이다.
소설도 마찬가지다. <<오다뀨>>, <<미쯔꼬시>>식으로 모리속에 쏙쏙 들어오게 써야지 <<길림성 광주항주련합유한책임주식회사 연길분회사>>,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연변농학원공급판매공사>>식으로 빈틈없이 자상하게 루락없이 구전하게-완전무결하게-써놓으면 실수야 없지만서도 그것을 끝가지 다 읽는 사람 또한 없을것이다. 하품이 련달아 나오고 눈까풀이 나꾸 내리덮여서.
모름지기 우리 문학도들은 쏙쏙 들어오게 하는 묘기를 배우고 익히기에 힘써야 할것이다. 간판왕식소설을 쓰지 말아야 할것이다. 소설왕이 되지 말아야 할것이다.
김학철전집4-태항산록-(수필)주덕해의 프로필(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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