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반응형

김학철전집4-태항산록-(수필)맛이 문제(제4권)

 

 

김학철전집4-태항산록-(수필)궁녀 - 소설게시판 - 모이자 한민족 커뮤니티

수필 궁녀 궁녀란 우리가 다 알다싶이 궁중에서 황제, 황후 또는 왕과 왕비의 시중을 드는 시녀 즉 하녀이다. 동시에 또 그녀들은 황제나 왕의 후보첩이기도 하다. 그러나 실지 첩으로 되는 <<영

life.moyiza.kr

 

수필

맛이 문제

 

어린아이들에게 쓴약을 먹이기가 그리 쉽지 않다는것은 우리 누구나가 다 잘 아는터이다. 그러나 단 알약이나 단 물약은 아이들이 싫다 않고 납작납작 잘 받아먹으니까 문제가 또 다르다. 쓰건달건 그 약은 아이들에게 꼭 필요하기때문에-병을 고치거나 또는 몸을 튼튼히 하기 위하여-먹이는데 아이들이 그것을 받아들일 때의 반응은 각기 다르다. 어른이 두셋씩 달려들어 싫다는 놈의 코를 쥐고 우격다짐으로 쓴 약물을 떠넣다가 사레가 들리여 란리를 겪는 광경을 우리는 대개 다 목도하였고 또 직접 겪어보기도 하였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것은-일반적으로 말하여 인지상정이니까 억지로 그러지 못하게 하기도 좀 어려운 일이다.

여기서 문제로 되는것은 <<맛>>이다. 다냐 쓰냐 하는 맛이 문제로 되는것이다. 그러니까 제일 좋은 방법은 약의 맛을 달게 하는것이다. 그렇게 하면 억지다짐할 필요도 없고 또 사레 들릴 념려도 없다. 손쉽게 치료 또는 보신강장의 목적에 달할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

 

<<저게 로망이 나잖았나? 우릴 소학교 1학년생으루 아는 모양이지... 저따위 헌 설교를 늘어놓게!>>

 

이렇게 나를 비웃을분들도 계실것이다. 그런분들은 너무 결론부터 서두르지 마시고 담배 한대 피울 동안만 참고 끝까지 내 말을 들어주시기 바란다.

한때 우리 이 고장에서는 외국에서 들어온 노래들이 판을 쳐서 본고장 노래들은 겨울을 만난 개미새끼들처럼 다 어데론가 피신을 하여 아주 종적을 감추었었다. 그러던것이 이 근래에 와서는 세상이 또 바뀌여서 그 외국의 권위들이 싹 다 어데론가 <<추방>>을 당하고말았다. 그와 갈아들어서 또 판을 치기 시작한것은 <<눈물젖은 두만강>>, <<황성옛터>>, <<나그네의 설음>>, <<목포의 눈물>>, <<방랑자의 노래>>, <<꿈꾸는 백마강>> 따위따위따위다.

이 새 권위들은 기실 뭐 별로 생소한것도 없는, 말하자면 오래간만에 다시 만난 구면이다. 40년 동안 피차격조히 지내온 옛친구들이다. 예전에는 조선팔도와 우리 이 고장을 거침새없이 넘나들던 그들이였건만 그후 모종의 인위적인 장벽으로 하여 38선이남(후에는 군사분계선이남)지역에서만 생존이 권리를 보장받아왔던것이다. 그러던것이 시대의 변천에 따라 생존공간을 좀 넓힌것이 이번의 기이한 교체현상을 뱆어낸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연발생적인 교체현상은 어찌하여 일어나는가? 한마디로 말하여 밀려나온것의 <<맛>>이 갈마드는것보다 좀 못해서라고밖에는 달리 더 어떻게 해석할 방도가 없다. 맛이 못한것을 버리고 맛이 나은것을 좇는것은 인지상정이니까 억지로 그러지 못하게 하는것은 흐르는 두만강의 물을 막아보겠다는거나 마찬가지다.

아무리 건전하고 순수하고 고상하고 혁명적이고 인민적이고 진보적이고 좌익적이고 프로레타리아적인 노래라 하더라도 <<맛>> 즉 예술성이 부족하면 얼굴이 정원의 괴석 같이 밉게 생긴 딸을 시집보내기만큼이나 애를 먹어야 할것이다. 인민대중속에 펴먹이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도태의 운명을 면치 못한다는 말이다.

지난겨울 나는 새로 나온 고서점에를 몇번 들려보았다. 의심할바 없이 이런 서점의 출현은 아주 좋은 현상이다. 그 서점에는 소규모이기는 하나 <<세놓이책>>도 마련되여있었다. 일정한 액수의 보증금을 들여놓고 책을 빌어다 보는데 하루에 2전인가 3전인가 세를 내면 되였다. 그런데 우리같이 소설쓰기를 업으로 삼는 족속들을 무색하게 만드는것은, 빌어가는 책들이 모두 <<수호전>>, <<홍루몽>> 따위 고전작품들인것이였다. 현대작품을 빌어가는것은 하나도 못 보았다. 더더구나 본지방작품들은 애당초부터 <<세놓이책>>행렬에 끼지도 못하였었다. 그러니 그렇다고 그 사람들을 붙잡고

 

<<여보 당신 왜 우리 책은 좀 빌어가지 않소? 무슨 원쑤 졌소?>>

 

시비를 붙을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이러한 입이 쓴 현상은 어떻게 해석을 해야 옳은가? 이 역시 <<맛>>, 맛이 문제다. 예술성이 문제란 말이다. 그 고전작품들에는 풍부한 예술성이 있는데 비하여 우리 작품들에는 그것이 못하거나 퍽 못하다는 말이 되는것이다.

봄날 들놀이를 가는데 일반적으로 과자, 사탕, 과일, 사이다, 술, 통졸임 따위 맛있는것들을 싸갖고 가는것은 많이 보았어도-내가 보고 들은것이 적어서 그런지-무슨 <<륙미환>>, <<십전대보환>>, <<록용토니쿰>>, <<종합비타민쩨리>> 따위를 싸갖고 가는 놈은 하나도 못 보았다. 아무리 영양가가 높아도 맛이 없으니 안된다는 또 하나의 례를-나는 이렇게 들었다(예술적으로 형상화한답시고).

 

우리의 점령당한 <<노래의 진지>>, <<소설의 진지>>에서 다른 세력을 밀어내려면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오는가!!!

 

하고 비분강개만 할것이 아니라 제가 쓰는 작품에다 <<맛>>을 가미하기에 골몰해야 할것이다. 우리 작품의 예술성이 그것들을 릉가하거나 대등한 수준에 이르기전에는 아무리 10만명의 군중대회를 열고 <물러가라!> 하고 웨치고 부르짖어도 그것들은 물러가지를 않을것이다.

소설은 치료제도, 보신강장제도 다 아니다. 소설은 사과, 귤, 카스텔라, 쵸콜레트 같은것이여야 한다. <<맛>>이 있어서 소비자의 식욕을 돋우어 군침을 꿀꺽꿀꺽 삼키게 만들어야 한다. 우격다짐을 아니하여도 그러는 동안에 일정한 영양은 저절로 보충이 되는것이다.

소설가는 당학교의 교원이 아니다. 따라서 소설책도 정치학교의 교과서는 아니다. 물론 설교로 가득찬 성경책은 더군다나 아니다.

 

김학철전집4-태항산록-(수필)나의 동범

 

수필

나의 동범

 

<<동지>>, <<동창>>, <<동향>> 따위 말을 모르는 사람은-보고 들은것이 적어서 그런지-아는 아직까지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동범>>이란 말은 아는 사람을 별로 보지 못하였다. 그도 그럴것이 우리 이 사회에 사는 사람치고 감옥살이를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것이기때문이다. <<동범(同犯)>>이란-현재 중국에서-감옥안의 죄수들이 서로 부를 때 쓰는 말이다. 같은 범죄자 즉 죄수라는 뜻이다.

 

<<여보, 김동범, 이걸 저리 좀 옮겨놓으시오.>>

<<녜, 그러리다 리동범.>>

 

이런 식으로 쓰는것이다. 하긴 저희끼리 시룽거리느라고-남들이 안 듣는데서는-이런 말을 쓰기도 한다.

 

<<요새 어떻게 지내나 열갈망나니?>>

<<아, 화룡망나닌가?... 그저 쓸쓸하게 지내네.>>

 

물론 이런 말이 공식적용어가 아니다.

 

<<문화혁명>>기간에 나는 백토광(白土矿)으로 소문이 난 추리구감옥에 갇혀 이른바 날창밑의 강제로동을 여러 해포 하였다. 그런데 그 추리구감옥에서 나는 <<총리대신>>출신의 손가성 가진 <<동범>> 하나를 사귀게 되였다. 여러 해포 같이 먹고 같이 일하고 또 같이 <<비림비공(批林批孔)>>, <<왕장강요(王张江姚)>> 따위를 학습하였다. 그런데 나이 70을 바라보는 손<<총리>>-손<<동범>>은 두주일이 걸려도 <<왕호문>>, <<장춘교>>, <<강청>>, <<요문원>> 네 인물의 성명을 바로 외우지 못하였다. 그것때문에 학습시간마다 비평을 받았으나 종시 못 외우고말았다. 그는 소학교 4학년의 문화정도밖에 갖고있지 못한데다가 나이까지 먹어서 로망이나 안 부리면 다행일 형편이였다. 그가 무엇을 좀 잘못하였다고 내가 눈방울을 굴리며 딱딱거리면 그는 위압에 눌리여 감히 대들지는 못하면서도 속은 살아서

 

<<제기, 제나 내나 다같은 징역군인데... 우쭐해서...>>

 

볼멘소리로 이렇게 투덜거리군 한다.

그도 나도 다 정치범-현행반혁명 즉 반혁명현행범이였으나 그의 형기는 나보다 5년이 더 길어서-15년이였다. 그는 길림성 휘남현사람인데 감옥에 들어오기전에는 반동적종교단체-무슨 도문(道门)의 <<총리대신>>이였다. 그의 상급인 <<황제>>는 총살을 당하였고 <<황후>>는 녀자라고 가볍게 처리되여 7년 징역형에 처리해졌다는것이였다. 나는 77년 12월 19일에 만기출옥을 하였지만 그는 나보다 반달가량 뒤늦게 78년 정월초순에 출옥을 하였을것이다(출옥한 뒤에는 서로 만나보지 못하였으므로 꼭은 모른다).

 

판결을 받고 감옥에 들어온 죄수들에게는 다 <<판결서>>라는것이 따라다닌다. 본인에게는 부본이 교부된다. 판결서에는 전부의 범죄사실이 간단명료하게 타이프라이터로 찍혀있다. 그래서 그러한 판결서를 죄수끼리 서로 돌려가며 보아서는 안된다는것이 옥칙(狱则)에는 명기되여있다. 그러나 나는 글을 좀 안다고 해서 가끔 불리워나가 등기사무를 도왔으므로 숱한 판결서들을 뒤져볼기회를 가졌었다.

 

나의 <<동범>>손가는 그 무어라나 하는 <<도문>>을 꾸려놓고 교도라는 명목의 어리석은 백성들을 숱하게 속여먹었는데 그 방법인 즉 대개 아래와 같다.

 

<<순성(顺姓)>>이라는 명칭의 종교의식을 치르고 입회를 하는데 그 회비가 일인당 3원 60전. 다시 36원을 내고 <<성미(圣米)>> 한주머니씩을 타는데 그속에는 차좁쌀 3냥6돈이 들어있다. 이 <<성미>>를 먹으면 모든 재앙을 면할수 있고 또 무병장수할수 있다는것이다. 그러니까 10전어치도 못되는 차좁쌀을 36원에 팔아먹는것으로 된다. <<황제>>는 <<황후>>외에 <<랑랑(娘娘)>>이 넷이 있는데 이것은 다 신도들의 딸중에서 골라뽑은것이다.

 

<<총리대신>>은 <<황제>>보다 급이 좀 낮으므로 그런 명목의 첩은 둘밖에 못 두었다. 그러나 수시로 젊은 녀교도들을 불러다 <<선도(善道)>>할수 있었으므로 드러나지 않은 첩은 사실상 기수부지였다.

 

그들이 선전하는것은 공산당이 꼭 망한다는것과 하늘에 계신 <<상천왕성로모(上天王圣老母)>>의 극락세계, 지상락원이 멀지 않아 이룩된다는것이였다.

 

피땀 흘려 모은 천량을 터무니없이 사취당하고 또 고이 기른 딸자식까지 제물로 내여바친 교도들(그 대부분이 농민)의 처지야 말로 가긍한 신세라 아니할수 없다,

 

그런데 더욱 엄중한것은 이 신화 같은 옛이야기 같은 일이 백년전이나 천년전에 있은것이 아니고 해방후-바로 1962년에 있었다는것이다.

 

1946년 8월 28일, 해방된 할빈에서는 한차례의 폭동이 일어났었다. 수천명의 교도들이 일으킨 그 폭동사건의 주모자는 나이 겨우 스무살 밖에 안되는 리명신(본명 리중량)이라는 <<도문>>이 우두머리였다. 그자는 교도들을 훈련시킬 때

 

<<너희들은 모두 <천병천장(天兵天将)이니까 공산당의 총알이 절대루 너희들의 살가죽을 뚫지 못한다. -자, 봐라!>>

 

하고 하나하나 실험을 해보이는데 거기에 사용된 탄알은 모두 진짜탄두를 뽑아버린 련습용탄알이였다. 그러니 암만 맞아도 죽지않을 밖에! 어리석은 교도들은-총소리는 분명히 났는데도 저는 죽지 않았으니까-정말로 자기가 땅크의 철갑판 같은 살가죽을 가진(천병천장)이 된줄만 알았다. 그래서 총알을 업신여기고 <<용감무쌍>>하게 들이덤비다가 개죽음, 무리죽음을 하였으니 이 또한 비극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 <<도문>>의 우두머리-리명신은 폭동을 일으킨지 불과 13일 후인 9월 10일에 벌써 인민법정의 판결을 받고 총살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가 죽기전에 신도들에게서 사취한 금액은 무려 50여만원에 달하였다. 그리고 또 공개적으로 얻은 두 <<랑랑>>외에 드러나지 않게 정조를 <<선도>>-유린당한 젊은 녀교도가 10여명이나 되였다.

 

력대적으로 종교는 죄악과 갈라놓을수 없는것이였다. 그것은 언제나 죄악을 가리는 면사포적역할을 놀아왔었다. 종교와 죄악을 갈라놓으려는것은 지구를 수박처럼 두쪽으로 갈라놓으려는거나 마찬가지의 헛수고일것이다.

 

보카치오(1313-1375)는 이딸리아 문예부흥기와 걸출한 작가로서 그가 쓴 <<데카메론>>은 600년이 지난 지금도 세계 각국에서 계속 번역출판되고있다. 중국에서는 <<십일담(十日谭)>>이라고 번역하였는데 그것은 그 책의 내용이 신사숙녀 열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앉아 하루에 한마디씩 돌림으로 이야기를 하여 열흘동안에 모두 백마디를 한 형식으로 되여있기때문이다. 그중의 하나를 줄거리만 추려서 소개하면 대개 아래와 같다.

 

로마 어느 귀족의 딸-순결하고 어여쁜 아가씨가 천당에 올라가는 비결을 배우려고 경건한 마음을 안고 유명한 천주당으로 덕망 높은 신부를 찾아간다. 아가씨는 천주당에 묵으면서 신부님의 가르치심을 받게 된다.

 

<<사람들이 천당에를 못 올라가는것은 다 그 배속에 악마가 들어있기때문이니라.>>

 

아가씨는 이런 가르치심을 받고 깜짝 놀라 여쭈어본다.

 

<<거룩하신 신부님, 그럼 제 배속에도 악마가 들어있습니까?>>

<<암, 들어있구말구.>>

 

아가씨는 배속이 구질구질해나는것 같아서 울상이 된다. 제 배속에 악마가 들어있는줄은 여적 모르고 살아왔던것이다.

 

<<그럼 이걸 어떡하면 좋습니까, 거룩하신 신부님?>>

<<내가 잡아줄테니... 걱정할것 없어.>>

<<아이 고마워요 신부님. 그럼 어서 좀 잡아주세요.>>

<<아 그러지. 하루밤에 하나씩 잡아줄테야.>>

<<하루밤에 하나씩이요? 그럼 며칠이나 걸리면 다 잡아낼수 있을가요, 신부님?>>

<<좀 많이 들어있으니까... 한 달포 걸리겠지.>>

<<달포도 좋아요. 그런데 신부님, 그 악마만 다 잡아버리면 저는 곧 천당에를 올라가게 됩니까?>>

<<그야 물론이지.>>

 

이리하여 신부는 밤마다 아가씨 배속에서 악마 한마리씩을 잡아내게 되였는데 그 잡아내는 방법이란 곧 아가씨와 한번씩 같이 자는것이였다. 순결한 아가씨는 기분이 곧 날것만 같았다. 정말 천당으로 올라가는 도중인것만 같았다.

 

한달후에 천당으로 올라가는 비결을 다 배운 아가씨가 경사롭게 귀가를 하니 집에서는 대대적으로 축하연을 베풀고 로마시내의 청년남녀귀족들을 다 청하였다. 그 석상에서 손님들의 간절한 요청을 받고 순결한 아가씨는 기쁘고도 경건한 마음으로 천당에 올라가는 비결을-덕망 높은 신부한테서 배운 그대로-피로하였다.

 

<<친애하는 여러분, 우리가 천당에 못 올라가는것은 다 배속에 악마가 들어있기때문입니다. 그 악마만 잡아내면 누구나 다 천당에를 올라갈수 있습니다. 녜, 이제 그 방법을 제가 배워온대루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입은 옷을 다 벗어야 합니다. 알몸이 돼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 침대에 누워서...>>

 

연회장에서는 폭소가 터졌다. 연회는 망태기판이 되였다.

600년전에 벌써 보카치오는 종교가 쓴 위선의 탈을 이렇게 벗겨놓았다.

종교를 믿으려거든 차라리 산의 바위돌이나 하늘의 별 따위를 믿어라. 그렇게 하는것이 해를 입어도 덜 입게 될것이니까.

 

김학철전집4-태항산록-(수필)나의 처녀작

 

수필

나의 처녀작

 

나는 한평생 곡절 많은 길을 걸어온 사람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의 처녀작이란것도 심상찮아서 륙상경기의 한 종목처럼-<<삼단 뛰기>>로 되여있다.

 

서울서 중학교를 다닐 때 나는 <<조선문단>>이라는 잡지사에 <<지원병>>으로 참여하여 심부름을 다닌 일이 있었다.(물론 무보수다. 차삯과 점심값만은 나온다.) 동대문밖 청량리 솔밭속에 서양 별장으로 원고를 채근하러 가서 당시 신문련재소설 <<마도의 향불>>로 유명하던 작가-방인근이 있어서 제 주제도 돌보잖고 나는 <<타락자>>라는 단편소설명색 하나를 써서 <<대담무쌍>>하게 편집부에 한번 들여놓아보았다. 그 결과 예료이상으로 아주 간단명료 한것이였다.

 

<<이봐 총각, 이두 안 나서 뼈다귀추렴부터 하겠나?>>

 

편집장 리학인선생의 이 한마디 말씀으로 나의 처녀작 <<타락자>>는 보기 좋게 쓰레기통으로 직행을 하였다. 직행을 안하면 도리여 괴변이지! 하지만 나는 지금도 그 편집장 리학인선생을 대단한 인물로 평가한다.

 

이상이 나의 <<처녀작 삼단 뛰기>>의 첫단 뛰기이다. 다음은 둘째단 뛰기다.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일대 비약을 하여 때는 1938년 가을, 곳은 일본침략군의 폭격기편대가 날마다 같이 날아들어 폭탄을 퍼붓는 항전의 도시-무한.

민중의 항전투지를 고무격려할 목적으로 각 사회단체가 한구에 있는 청년회관에 모여서 연극공연들을 하는데 우리 조선의용대에서도 단막극 하나를 올리기로 하였다. 헌데 불행하게도 그 각본을 맡아쓰게 된것이 다른 누가 아니고 바로 나였다. 당시 아마 우리 의용대에 인재가 씨가 졌던 모양이다. 그러찮고서야 지도부에서 나를 지명하였을리 만무하니까 말이다. 녀자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 순전한 <<남성극>>이였으나 그래도 <<서광>>-이름만은 그럴듯하였다. 극중에서 특무역을 담당한 사람을 물색하다가 중앙군교 광동분교출신의 진경성이라는 친구를 골라잡았는데 이치가 대번에

 

<<못해 못해! 특무역은 못해. 용사역은 해두 특무역은 못해. 죽어두 못해. 못한다면 못하는줄 알아!>>

 

하고 머리를 송충이 대가리 내두르듯하여서 그것을 설복하느라고 숱한 사람이 입을 닳리기까지 하였다.

이런 장관의 연극을 무대에 올려놓고 관객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보다가 나는 얼굴이 뜨뜻해나서 몸둘바를 몰랐다. 한마디로 말하여-형편이 없었다. 여럿가운데 제일 못하였다. 문자 그대로 따리지였다. 그렇건만 항일전쟁에 외국벗들이 참전하였다는 정치적의의를 평가해주어서 이튿날 신문에 자그마하게 한토막 좋다는 극평을 읽어보고 우리는 다들

 

<<야 그 잘난 연극을 또 괜찮다구 했다야. 희극이다!>>

 

하고 게면쩍게 앙천대소를 하였다.

마지막 단 즉 셋째단 뛰기는 또 한번 시간적 공간적으로 일대비약을 하여 때는 1945년 겨울, 곳은 해방이 된지 겨우 서너달 밖에 안되는 서울.

서술하는 순서가 좀 바뀌지만 이보다 앞서 나는 일본감옥의 독감방속에서 이궁리저궁리가 많았었다.

 

(인제 다리가 한짝 없어졌으니... 나간대두 군인은 다시 못할게구. -어떡헌다?)

(에라, 모르겠다, 문학의 길루나 한번 나가보자. -해서 안될일이 있을라구!)

 

이래서 나는-28살의 젊은 나이였으므로-서울에 있는 누이동생에게, 철창속에서 신음하는 오빠의 처참한 운명을 념려하여 비탄에 잠겨지는 누이동생에게, 호기스럽게 자신만만하게 편지를 띄웠다.

 

<<사람의 정의(定义)는 <인력거를 끄는 동물>이 아니다. 다리한짝쯤 없어도 문제없다. 걱정말아!>>

 

여기서 서술의 순서가 다시 제대로 돌아온다.

서울에서 발간되는 반월간지 <<건설>>(주필 조벽암)에 실린 나의 단편소설 <<지네>>는 난생처음으로 활자화된 나의 처녀작이였는데 그 내용인즉 군공을 많이 세운 어느 용사가 지네만 보면 무서워서 쪽을 못쓴다는 우스운 이야기였다. 그것이 발표되자 작자인 나는 자아도취되여 대단한 걸작으로 생각이 들어서 아침부터 밤까지 구름을 타고 날아다니는것 같은 기분이였으나 독자들의 반응은 그닥잖은것 같았다. 까놓고 말하면 반응이 시들푸직하였다. 그때 나는 마땅찮아서 혼자 속을 게두덜거렸다.

 

(눈은 있어두 망울이 없구나. 걸작을 몰라보고. 체, 가련한 인생들!)

 

이러나저라나 <<지네>>는 나의 40여년에 걸친, 곡절 많고 풍파 많은 문학항로의 천 출범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이상에 적은 것이 나의 심상찮은 처녀작이 삼단뛰기가 된 전말이다.

 

김학철전집4-태항산록-(수필)나의 무대생활

 

수필

나의 무대생활

 

소학교 초급학년때의 일이다. 과외활동으로 연극을 노는데 대가리 큰 아이들이 왕이니 대신이니 장군이니 전령병이니 하는따위의 좋은 역은 다 저희끼리 노나맡다나니 네게는 차례질 역이 없었다. 내가 대번에 눈방울을 굴리며

 

<<어째 나는 빼놓니?>>

 

하고 대드니까 그중 큰 녀석-우두머리격이 잠시 생각해보더니 가장 선심이라도 쓰듯이 기상천외의 엉뚱한 역 하나를 나에게 던져주는것이였다.

 

<<그럼 넌 대궐을 지키는 개역을 맡아라.>>

 

워낙 철이 없었던 까닭에 나는 그 잘난 배역을 아주 영예롭게 받아들여 지킴개노릇을 충실히 잘하였다. 책상밑에 엎드려있다가 누구나 들어오기만 하면 얼른 네발로 기여나가 <<왕왕!>> 짖었던것이다. 표준어로는 개짖는 소리가 <<멍멍>>이지만 나는 당시 표준어를 몰랐으므로 <<왕왕>> 짖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일본말로는 개짖는 소리가 <<왕왕>>이였다. 중국말로도 역시 <<왕왕>>이였다.

 

그 영예로운 지킴개역을 맡은 뒤로부터 내 별명은 <<왕왕>>으로 변하여 소문이 널리 퍼졌다. 학교밖에까지 펴져서 <<목동아이>>들까지 나를 보면 <<왕왕!>> 하고 놀려대였다. 당시 우리 고장에서는 집안형편이 구차하여 학교에 못 가는 아이들을 목동아이라고 불렀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성질이 데설궂었던 까닭에 누구나 <<왕왕!>>하고 놀리기만 하면 앞뒤를 재지 않고 불맞은 메돼지 모양 마구 덤벼들어 주먹놀음을 하였다. 하지만 그 결과는 대개-열에 아홉은-나의 패전으로 끝이 났다. 나의 그러한 감투(敢斗)정신은 전투기능으로 안받침되지를 못하였던것이다. 그러니까 울뚝밸만 쓸줄 알았지 쌈질하는 솜씨는 서툴었다는 말이 되는것이다.

 

중학교때도 학생극에 참네하여 하찮은 역을 더러 맡아보았는데 성공을 거둔적은 한번도 없었다. 한번은 철공장 로동자들이 임금인상을 요구하여 공장주와 맞서서 파업투쟁을 벌리는 내용의 연극을 무대에 올렸다가 완고파 교장선생에게 흥이 깨지도록 흑평을 들은 일이 있었다.

 

<<...학생이면 학생답게 학원내의 사건을 취급할게 아니라... 뚱딴지같은 무슨 임금인상이니... 파업투쟁이니... 이게 그래 가당한가? 본 교장은 교내에 그런 불온한 좌익적풍조를 끌어들이는것을 절대루 허용하지 않는다!...>>

 

이튿날 학생들은 교장실에 돌입하여 교장을 끌어내다 학생들이 끌거니밀거니하는 인력거에 태워가지고 서울거리를 한바퀴 회술레시킨 다음 동대문밖 쓰레기처리장에 내다버렸다.

 

<<교장을 쓰레기취급.>>

<<학원소동 확대화?>>

<<학생극이 빚어낸 일장의 소요.>>

 

이런 표제로 각 신문에 보도기사들이 실리자 쓰레기취급을 당한 교장은 사람들 대할 면목이 없어서 당일로 사표를 내고 교육계를 아주 떠나버렸다.

군관학교시절에도 학생극에 참녜하여 웃음거리가 된 일이 있었다.

극중에 두 사람이 마주앉아 술을 마시는 장면이 있는데 원래는 한잔씩만 마시고 곧 다음동작으로 넘어가게 되여있었다. 술은-물론 맹물이다.

 

<<맹물을 마시니까 기분이 나지 않아 틀려먹었어.>>

<<진짜술을 마시게 하자구, 포도주따위.>>

<<그게 어디 될 소린가!>>

<<그럼 하다못해 설탕물이라두.>>

<<그거야 될수 있겠지.>>

<<설탕물? 예싱(也行)!>>

 

무대감독과 배우들 사이에 이런 대화가 있은 뒤부터 무대에서 술이라고 마시던 맹물은 달달한 설탕물로 승격을 하였다.

탈은 여기서 났다. 한잔씩 대작을 하고는 곧 일어나서 다른 동작을 해야 할 두 배우량반이 걸상에 엉뎅이를 척 붙이고 앉아서 한잔 또 한잔... 권커니작커니... 한병 <<술>>이 다 들나도록 마셔댄것이다. 바빠난것은 다른 등장인물들이였다. 주역 둘이 눌러붙어 있으니까 다른 사람은 이럴수도 없고 저럴수도 없는 궁지에 빠졌던것이다.

나도 그 사고를 저지른 장본인이 하나였으므로 나중에 비판을 받은것은 물론이다.

 

(술이 아닌 설탕물에 빠져도 제정신을 잃은 모양이지?)

이와 같이 나의 무대생활은 소학교, 중학교, 군관학교를 통하여 다 곡절이 많았다. 실패의 련속이라고 해도 좋을만하였다. 하지만 성공한 례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항일전쟁시기 나의 무대는 전선으로 옮겨졌다. 상거나 불과 사오백메터 밖에 안되는 일본군의 전호와 중국군의 전호 사이로 옮겨진것이다. 대치한 량국군대의 진지와 진지 사이로 옮겨졌단 말이다. 전방 150메터 거리에서는 일본침략군들이 총가목을 틀어쥐고 대기하고 그리고 후방 250메터 거리에서는 중국군대가 총칼을 거머쥐고 경계하는 가운데 우리의 레파토리는 예정대로 진행이 되였다. 캄캄한 밤인데도 조명은 없었다.

 

(일본놈들이 쏘아맞추기 좋으라구!)

 

무대장치도 없었다.

 

(무대란것이 도시 포탄구뎅이천지의 공지인데 무대장치가 왜 있을가!)

 

이런 류별난 무대에서 우리는 일본침략군을 상대로 공연을 하였다. 반전(反战)사상을 고취할 목적으로 심상찮은 공연을 하였다. 일본포로들을 시켜서 일본노래도 부르게 하고 또 재미있는 재담도 피로하게 하였다. 그리고 우리가 직접 <<함화(喊话)>>도 웨쳤다. 함화란 가까이 맞선 적군을 와해하기 위하여 큰소리로 들이대는 정치선동사업을 일컫는것이다. 그들의 립장과 행동이 그릇됨을 깨우쳐주고 옳은 길로 나가도록 적극 이끌어주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개막을 알리는 징소리 대신에 수류탄을 터뜨려서 적군의 주의를 끄는것도 <<적전(敌前)무대>>가 아니고서는 볼수 없는 기관(奇观)이였다.

 

<<일본병사형제들, 안녕히 주무십시오.>>

 

하고 인사할 대신에 어두운 밤하늘에다 대고 총 몇방을 쏘는것도 랑만적이였다. 좀 무시무시하긴 하지만 그래도 전장다운 랑만이 깃든 취침인사였다.

나의 무대생활은 이같이 다양하면서도 범상찮았다. 하지만 그 에필로그 즉 종막은 더욱 극적이였다.

 

10년 대동란시기에 나는 마지막 무대를 밟았다. 우리 시내에서는 가장 큰 건물의 하나인 문화궁전에서였다. 나의 최후의 무대는 목에다 무시무시한 죄명을 밝혀적은 판대기를 걸고 그리고 아갈잡이와 뒤결박을 당하고 천여명의 관중들이 웨치는

 

<<타도하라!>> 소리속에서 재판극을 노는것이였다.

 

나의 무대생활은 대궐을 지키는 지킴개역으로 시작되여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반혁명현행범>>으로 끝이 났다.

10살에서 60살에 이르는 50년-장장 반세기에 걸친 나의 무대생활은 제대로 엮는다면 그것 자체가 곧 훌륭한 연극이 될만한것이였다.

 

김학철전집4-태항산록-(수필)나의 양력설

 

수필

나의 양력설

 

나는 11살이 되여서야 비로소 이 세상에 양력설이라는것이 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전에는 세배돈으로 딱총을 사다 터뜨리고 그리고 떡국을 먹는 설-음력설만이 유일한 설인줄 알고있었다.

 

내가 <<우편>>과 인연을 맺게 된것도 바로 그때의 일이였다. 나의 <<처녀우편>>은 심상찮게도 년하장으로 시작되였다. 당시는 엽서 한장이 1전5리-닭알 한알 값이였으므로 3전-닭알 2알 값을 주고 2장을 사다가,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르는 <<근하신년>> 넉자를 한문자로 그려서 우체통에 갖다넣었다. 단짝친구 셋이서 서로 년하장을 내자고 한 약속을 리행한것이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내가 양력설날 받은 년하장은 2장이 아니고 4장이였다. 의아쩍게 여기며 찬찬히 살펴보니 2장은 분명히 단짝들에게서 온것이였다. 그러나 나머지 2장은-하나님 맙소서-내가 <<손수>> 써서 <<친히>> 우체통에 갖다넣은것들이였다.

 

(이게 대체 어찌된 놈의 감투끈이가?)

 

정신을 수습해가지고 사고의 원인을 면밀히 분석해본즉-또 한번 하느님 맙소서-수신인과 발신인의 주소성명을 바꾸어적지 않았는가.

 

(그러니 되돌아올수 밖에!)

 

나의 첫 양력설, 첫 우편은 이렇게 유쾌하게 유명짜하게 시작이 되였다.

중학생이 된 뒤에는 해마다 양력설에 대단한 결심을 내렸다.

 

(새해부터는 꼭 일기를 써야지.)

 

그래서 <<웅변은 은이고 침묵은 금이다.>> 또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따위 격언들이 찍혀있는 그럴듯한 일기장을 사다 놓고 양력설이 와주기만을 고대하였다. 그러나 해마다 그 식이 장식으로 단 두주일도 일기를 제대로 적어본적은 없었다. 그러니까 1년 365일에서 약 350일은 언제나 공백으로 남았다는 말이다.

 

(정월 초하루날부터는 꼭 랭수마찰을 해야지.)

 

그러나 이것도 해마다 그 상이 장상으로 단 사흘도 견지해본적은 없었다. 심지어 어떤 해는 첫날 하루 하고 고만둔 일까지 있었다. 그러니까 무려 364일이-윤년이면 365일이-공백으로 된다는 말이 되는것이다.

이와 같이 나는 항심이 없는, 식은 조밥덩이 같이 푸실푸실한 소년 내지 청년이였다.

 

그러나 지금은 형편이 전연 다르다. 1년 365일을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공원막바지에 가서 체조를 하니까 말이다. 령하 30도의 추위도 나를 막지 못한다. 나의 이렇듯 강인한 의지력은 가렬한 전쟁판과 감옥살이의 간난속에서 단련이 된것이다.

나는 해마다 년말에는 이듬해의 사업계획을 세운다. 물론 그 계획이 100페센트로 다 완성이 되기는 어렵다. 왜냐면 계획과 실천 사이에는 언제나 일정한 거리가 있기때문이다.

 

희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갈보다

그녀는 누구에게나 추파를 던진다, 금시 모든것을 다 내맡길듯이

하지만 그대가 가장 귀중한것을-청춘을-다 바치고나면

그녀는 그대를 툭 차던지고 돌아보지도 않는다

 

이것이 웽그리아의 애국시인 뻬데피 싼도의 <<희망의 노래>>중의 몇구절이다. 그러나 시인은 또 잇달아 웨친다-

하지만 절망이란 허망한것, 희망처럼 허망한것

희망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절망을 하는것은 어리석다는 뜻일것이다.

매독의 특효약 살바르산을 속칭 <<606호>>라고 하는것은 그것을 실험하는 과정에서 605번 실패하고 606번만에 비로소 성공을 하였다고 해서이다. 피눈물나는 실패를 605번을 거듭해보라, 어떤가?

이 세상에 손쉽게 이루어지는 성과란, 거저먹기로 이루어지는 성과란 존재하지 않는다. 백절불굴하는 정신이야말로 성공의 어머니다.

 

어느 과학자가 실험을 해본 결과 다음과 같은 사실이 드러났다. 큰 어항에 꼬치고기를 잡아다넣고 판유리로 간살을 지른다. 그런 연후에 간살너머에다 먹이를 넣어준다. 꼬치고기는 곧 먹이를 먹으로 가다가 판유리에 코를 부딪친다. 몇번 해보았으나 매번 다 코만 부딪치고마니까 나중에는 아주 먹으러 갈것을 단념한다. 이때 간살 지른 판유리를 살그머니 들어낸다. 그래도 꼬치고기는 여러번 골탕을 먹은 까닭에 다시는 그 먹이를-거침새가 없는데도-먹으러 가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런 꼬치고기적인간이 되지 말아야 할것이다.

인생의 가치란 그가 또는 그녀가 사회에 얼마나 기여를 하였는가로 평가된다. 사회에 얼마나 이바지하였는가로 값쳐진단 말이다. 일신의 안락만을 추구하는 인간은 개짐승값에도 못 간다.

 

인류사회의 진보를 위하여 전력을 다하는 인생은 보람찬 인생이고 자랑찬 인생이다.

뻐스를 놓치지 않겠다고 줄달음질치는 사람들을 볼적마다 나는 약동하는 삶의 률동을 느낀다. 그러나 뻐스는 한번 놓쳐도 또 다음것을 바랄수가 있다. 시간은 그렇지가 못하다. 시간은 한번 놓치면 영원히 사라져버린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이 술을 마시고 트럼프놀이로 밤새움하는것을 보면 나는 조급증이 나다 못하여 장탄식이 나온다. 남송(南宋)의 철학가이며 교육가인 주희(朱熹)의 글이 생각나서이다.

 

소년이로학난성(少年易老学难成), 일촌광음불가경(一寸光阴不可轻), 미각지당춘초몽(未觉池塘春草梦), 계전오엽이추성(阶前梧叶已秋声).

 

소년이 늙기는 쉬우나 학문을 닦기는 어려우니 일분의 시간도 헛되이 하지 말라. 못가의 봄꿈을 깨기도전에 뜰앞 오동나무잎에는 벌써 가을바람이 분다는 뜻이다.

 

시대의 락오자가 되지 않으려면-아는것이 힘이니까-지식을 넓혀야 한다. 지식을 넓히려면 독서를 해야 한다.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흐리멍텅하게 일생을 보내지 않으려거든 아까운 시간을 살려야 한다. 바싹 다잡아야 한다.

 

김학철전집4-태항산록-(수필)또 뒤걸음질?

 

수필

또 뒤걸음질?

 

이 근년에 홍수같이 밀려드는 향항의 텔레비죤영화들을 옳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이 본다면 아마 한심스럽고 근심스러워서 안전부절을 못할것이다. 그 비싼 값을 주고 사들여오는 영화들에는 치고, 차고, 죽이고, 빼앗는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말이다. 지나간 그 10년동안의 저주로운 동란만으로는 부족해서 또 우리 청소년들에게 치고, 차고, 죽이고, 빼앗는것을 고취하잔 말인가?

나는 향항의 그 이른바 문화를 쓰레기문화라고밖에 더 달리는 무어라고 부를 재간이 없다. 내용이 용속하고 인물성격이 모순당착하고 그리고 사건의 전개가 황당하여 앞뒤의 조리가 맞지 않고... 어느 하나를 보아도 다 이 모양이기때문이다. 성한 사람들이 보고

 

(이건 정신분렬증환자들의 오락회가 아닌가?)

 

의심을 하는것도 바이 괴이찮은 일일것이다.

나더러 일시 숙졌던 반동적기염이 되살아나서 또 독설을 내뿜는다고 대경소괴하실분들도 계실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사실은 어디까지나 사실이니까 하는수가 없다.

쇼오 버어너어드(영국 근대의 위대한 극작가)가 쉐익스피어(300년전 영국의 세계적인 극작가)를 <<언감생심>> 비평하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못할것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또 모두들 신명같이 떠받드는 쉐익스피어의 대표작 <<햄리트(왕자복수기)>>를 그는 이렇게 비평하였다.

 

<<우리들의 작은아버지는 그렇게 쉽사리 우리들의 아버지를 암살하지 않았다. 더구나 그 형수인 우리들의 어머니와 그가 합법적으로 결혼을 한다는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햄리트의 아버지인 국왕이 화원에서 낮잠을 자고있을 때 그의 간악한 아우-햄리트의 작은아버지가 왕위를 찬탈하고 또 아음다운 황후-형수까지를 가로챌 목적으로 형의 귀속에다 독약을 부어넣는다. 그리하여 왕이 죽은 뒤에 그는 왕위와 형수를 아울러 차지한다는것이 극본 <<햄리트>>의 줄거리이기때문이다.

쉐익스피어의 또 하나의 대표작인 <<베니스 상인>>에 대해서도 쇼오는 이렇게 비평하였다.

 

<<우리는 빚을 낼 때 빚문서에다-<만일 제때에 빚을 갚지 못하는 경우에는 제 가슴에서 살 한파운드를 베여바치겠습니다.>-이렇게 적지는 않았다.>> 극본 <<베니스 상인>>에서는 간악한 유태인-고리대금업자가 정직하고 선량한 주인공을 박해할 목적에서 그와 같은 상식에서 벗어난 꿈같은 빚문서를 들여놓게 하였기때문이다.

 

이밖에도 쇼오의 쉐익스피어에 대한 비평은 많지만-여기서는 생략한다. 쇼오는 쉐익스피어의 위대한 일면을 긍정하고 숭배하는 한편 그러한 비평들을 하였던것이다. 그는 아주 명확하게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쉐익스피어의 결점은 지능상의 관련이 없고 또 앞뒤의 조리가 맞지 않는것이다. 그는 인물의 성격을 두드러지게 형상하지 못하고 또 사회를 묘사하는데도 아주 충분하지가 못하다. 단조롭고 무미건조하여 보는 사람들을 실망케 한다.>>

 

이러하건만 아직도 쇼오더러 독설을 뿜는다고 대경소괴하는 사람은 별로 있는것 같지 않다.

우리에게는 <<서비홍(徐飞鸿)>>, <<향경여(向警予)>> 같은 격조 높은 텔레비죤영화-진귀한 예술작품이 있다. 이런 자랑스러운것들을 놓아두고 그런 쓰레기문화를 기를 쓰고 좇는것은 무슨 심리일가? 우리 청소년들을 옳은 방향으로 유도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한번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전일의 그 천인공노할 어린이랍치살해사건이 있은 뒤의 일이다. 내가 우리 집 아홉살짜리 손자놈더러

 

<<집안식구나 잘 아는 사람외에는 누가 가재두 절대루 따라가서는 안된다.>>

 

하고 단단히 주의를 주니까 그놈은

 

<<외삼촌이 가자면?>>

 

하고 뚱딴지같이 말을 묻는것이였다.

 

<<외삼촌이 가자면야 물론 따라가야지.>>

<<그 나쁜 놈들이 외삼촌으로 변장을 하구 와서 가자면?>>

 

아홉살 먹은 놈의 이 물음에 나는 기가 막혀서 한동안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알고보니 소학교 1학년생인 우리 손자도 향항의 쓰레기문화-텔레비죤영화의 중독자였다! 그래서 그 조꼬만 머리속에서 황당무계한 영화의 세계와 백주대낮의 현실이 혼선을 일으켰던것이다.

우리는 또 뒤걸음질을 칠수는 없다. 우리 청소년들에게 해독을 끼치는 향항쓰레기문화에 대한 홍수방지대책도 긴급히 강구해야할 때가 되었다.

 

김학철전집4-태항산록-(수필)아름다운 우리 말

 

수필

아름다운 우리 말

 

전에 내가 김승옥, 허분숙 두분과 이웃하여 살고있었을 때의 일이다. 그 두 댁의 막내아들들인 해민이와 동찬이는 나하고 어찌나 잘 사귀였던지 노상 우리 집에 와 살다싶이 하였었다. 둘이 다 너덧살씩 먹어서 데리고 놀기 딱 좋았으므로 우리 내외에게는 아주 좋은 심심풀이로 되였었다. 내가 놀리느라고

 

<<혜민이 좋은 놈이야 나쁜 놈이야?>>

 

물어보면 해민이는 언제나 서슴없이

 

<<좋은 놈!>>

 

하고 잘라말하는것이였다.

 

<<그럼 동찬이는?... 좋은 놈? 나쁜 놈?>>

<<좋은 놈!>>

 

두놈이 다 <<좋은>>과 <<나쁜>>을 분간하는데만 정신이 팔려서 그 밑에 <<놈>>이 붙은것은 미처 생각들 못하였었다. 우리 내외가

 

<<그래그래 좋은 놈! 좋은 놈!>>

 

하고 하하 웃으면 철 없는 두놈은 무슨 영문도 모르면서 제딴엔 우습다고 손벽들을 치면서 덩달아 캐들캐들 웃는것이였다.

 

우리 말의 <<놈>>은 본시 남성을 지칭하는것이자만 귀여운 처녀 아이들에게도 겸용되여 어른들이 그 딸애기나 손녀애기를 보고

 

<<요놈.>>

 

또는

 

<<아 요런 깜찍한 놈 좀 봤나!>>

 

하는것을 우리는 듣게 된다. 이런 경우에는 <<놈>>은 애칭으로 되는것이다. 바꿔말하면 <<좋은 놈>>으로 되는것이다.

 

<<댁의 따님은 어디서 일하지요?>>

<<선생질한답니다.>>

<<그럼 저 댁 아드님은요?>>

<<의사질한답니다.>>

 

이런 대화를 들을적마다 나는 세상이 딱 귀찮은 생각까지 들군 한다.

 

(어쩌면 저다지도 말의 교양들이 없을가!)

 

도적질, 협잡질, 행악질, 화냥질 등등등... <<질>>은 부정적행위와 련결되는 수가 많은 말이다. 그런 말을 하필이면 싱싱하고 점잖은 직업 같은데 갖다붙여서 말씨에 꾀까다로운 사람들-김학철이 같은 사람들-이 듣고 세상이 다 귀찮아지게 만들어줄것은 뭇엇인가? 정 할수 없으면 <<노릇>>으로 대체라도 할것이지! <<선생노릇>>, <<의사노릇>>-이렇게.

나는 자기 남편을 <<동무>>라고 부르는 녀자를 보면 얼른 귀를 틀어막고 오금에서 비파소리가 나게 도망질을 쳐버리는 성질이 있다. 그리고 자기 안해를 <<동무>>라고 부르는 남자를 보면 대번에 손이 근질근질해나는 성질도 있다-귀싸대기를 한대 갈겨주고싶어서 말이다.

우리 안사람에 대해서도 나는 차차 불만이 커가는중이다(이 불만이 언제 일대 폭발을 일으킬는지는 물론 하느님만이 알고계신다). 시집을 갓 왔을 당시에는 고운 서울말씨로 댕갈댕갈 지껄여서 내 귀에 음악적인 희열을 갖다주던것이 이제 와선 아주 글러먹었으니까 말이다. 그전에는 내가 저녁때 늦게 들어오면 의례 고운 서울말씨로

 

<<진지는요?>>

 

물으며 부지런히 일어나 행주치마를 두르군 하였었다. 그러던것이 이 근년에 와서는 그 아름다운 말씨-<<진지>>를 도태하고 시금털털한 말투로

 

<<식사?...>>

 

하고-그 무거운 엉뎅이를 방바닥에 붙인채-물어보기가 일쑤이니... 이게 그래 현저한 퇴보가 아니고 무어란 말인가!(<<식사>>밑에 <<는요>>마저 생략된데 류의하시라.)

<<식사>>는 일본말의 <<쇼꾸지>>를 직역한것으로서 우리 민족 고유의 말인 <<진지>>에 비하면 기품이 퍽 떨어지는 말이다. 억하심정으로 이렇게 내리먹기를 좋아들 하는지. 제 좋은 비단옷을 마다하고 남의 나라에서 들여온 마대옷을 걸치기를 좋아들 하시는지. 이것도 하느님만이 알노릇이다.

홍명의선생의 <<림꺽정>>에서는 전라도기생 계향이도 서울말을 하고 평안도기생 초향이도 서울말을 하고 그리고 서울기생 소홍이도 역시 서울말을 한다(이것은 물론이다). 리기영선생이 그 작품들에서 서울말과 지방의 사투리말을 놀랄만큼 능숙하게 구분하여 구사하는데 비하면 이것은 의론의 여지가 없는 부족함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림꺽정>>의 인물들이 쓰는 말은 참으로 아름다운 우리 민족의 말-자랑스러운 말이다.

<<림꺽정>>에는 남북조선 어느 사전에서도 찾아볼수 없는 멋진 어휘들이 거의 무진장으로 들어있어서 우리 말의 <<어휘대사전>>이 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것이다.

 

지난번 내가 어느 졸작소설에서

 

<<저는 이미 마음속에 정한 사람이 있에요>>라는 말을 썼더니 편집자는 친절하게도 <<있에요>>를 <<있어요>>로 고쳐놓았었다. 물론 <<있에요>>와 <<있어요>>는 같은 말이다. 그러나 <<있에요>>에는 아름다운 녀자의 <<맛>>이 들어있다. 이것은 녀자뿐만 아니다. 남자도-젊은 남자가-<<녜 제가 그랬에요>> 하는것이 <<네 제가 그랬어요>>하는것보다 훨씬 <<감칠맛>>이 있는 법이다. 내 말이 미덥잖거든 <<림꺽정>>을 한번 뒤져보라. 맨 <<에요>>투성일테니. <<림꺽정>>에서는 황천왕동이의 안해-스물몇살 먹은 옥련이가

 

<<제가 무슨 생각이 있에요.>>

 

라는 말을 하는가 하면 옥련이의 남편-서른몇살 먹은 황천왕동이도

 

<<제가 무슨 재주루 그걸 알아내겠에요.>>

 

라는 말을 한다. 책을 뒤져보기가 귀찮거든 그럼 서울방송을 한번 귀담아 들어보라. 거기서 <<했에요>>, <<있에요>>를 쓰는가 안쓰는가.

 

아름다운 우리 말은 작자, 역자만이 배워야 할것이 아니라 편집자도 역시 배워야 할것이다. 최소한으로 남의 이미 써놓은 아름다운 말을 애써 깎거나 고쳐서 밉게 만들지는 말아야 할것이니까 말이다. 례컨대 우리 편집자가 <<아차실수>>란 우리의 말을 몰라서 <<아차, 실수>>로 고쳐놓는다면 이것도 유감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연변에서 번역제작한 일본텔레비죤영화 <<오신>>에서 며느리를 <<마님>>이라고 하고 시어머니를 <<큰마님>>이라고 하였는데 이것도 잘못이다. 이런 경우에 며느리는 <<아씨>>, 시어머니는 <<마님>>이 되여야 할것이다. 그리고 딸은-어려서는 <<애기>>라고 부르고 커서는 <<아가씨>>라고 불러야 할것이다. 이 <<오신>>에 사람을 크게 웃기는 웃음거리가 또 하나 있는바 그것은 어린 녀주인공 오신이 부자집에 가 드난살이하는것을 <<머슴살이>>를 한다고 한것이다. 머슴은 남자가 사는것이다. 녀자가 드난살이하는것은 <<안잠>>을 잔다고 해야 한다. 남자는 <<머슴군>>, 녀자는 <<안잠자기>>-이것은 우리말의 최저한의 상식이다.

 

김학철전집4-태항산록-(수필)형상성과 유모아

 

소설

형상성과 유모아

 

미국작가 마크 트웬에게 편지 한장이 왔습니다. 뜯어보니 거기에는 적혀있기를

 

<<선생님, 작가가 되려면 물고기를 많이 먹어야 한다는데 어느만큼 먹어야 되는지 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마크 트웬은 곧 회답을 썼습니다.

 

<<녜, 큰 고래 두어마리 잡수십시오.>>

 

이 경우에 트웬선생이 만약 작가가 되는데 물고기를 많이 먹어야 한다는것은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일축하는 회답을 주었다면 그것은 그 당시에 아무러한 인상도 주지 못했을뿐아니라 후세에도 아무러한 인상을 남기지 못했을것입니다.

유모아가 소설에서 발휘하는 위력도 대개 이와 같습니다.

한 가난한 선비가 겨울에 핫옷 즉 솜옷이 없어서 겹옷을 입고 덜덜 떠는것을 보고 어떤 사람이 괴이쩍게 여겨서 물었습니다.

 

<<선생님, 이 추운 때 어째 그렇게 겹것을 입구 떠십니까?>>

 

한즉 선비가 대답하기를

 

<<녜, 저 홑옷을 입으면 더 추워서요.>>

 

그 선비는 엄동설한에도 홑옷과 겹옷외에는 선택의 여지라는게 없다는것이 그 한마디의 말로 환히 드러납니다. 살림이 어떻게 곤궁하고 어떻게 쪼들리고... 길게 늘어놓아 설명하는것보다 듣는 사람의 가슴에 훨씬 더 많이 안겨오는게 있습니다.

형상화 즉 문학예술에서(우리로 말하면 소설창작에서) 예술적으로 형상한다는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프랑스작가 듀마가 독일에 관광려행을 갔을 때 유명한 버섯료리점에 들려서 명물의 버섯료리를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말이 통하지 않으니 어떡헙니가. 듀마는 독일말을 모르고 료리점 보이는 프랑스말을 모릅니다. 그래서 듀마는 머리를 썼습니다. 연필로 종이에다 버섯 하나를 그려보였습니다. 버섯료리를 가져오라는 뜻이지요. 보이는 그 그림을 들여다보더니 알았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얼른 가서 우산 하나를 갖다주는게 아니겠습니까. 버섯을 어찌나 잘 그렸던지 보이가 우산으로 잘못 본것입니다. 이 한가지 사실로 듀마의 그림그리는 솜씨가 얼마나 알뜰하다는것도 드러났거니와 그보다도 버섯료리점 보이의 아둔하기짝이 없는 맹꽁이형상에 눈에 보이는것 같이 드러났습니다.

 

홍명의선생의 <<림꺽정>>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억석이의 딸 이야기가 난 뒤로 좌중의 여러 사람이 모두 지껄여도 입 한번 뻥긋 아니하고 앉았던 곽오주가 서림이의 말을 듣고

 

<<우리가 거북할게 무어 있담. 애비는 졸개루 대접하구 딸은 제수로 대접하면 고만이지.>>

 

하고 말하였다. 오가가 웃으면서

 

<<배두령의 안해를 제수로 대접하다니. 배두령이 자네 아운가?>>

 

하고 오주의 말을 책잡으니 오주가 코방귀를 뀌며

 

<<그럼 나이 어린 기집애라두 형되는 사람이 데리구 살면 형수대접해야지.>>

<<형수로 대접하구싶거든 하시우. 누가 말리우.>>

<<자네는 제수대접하구 나는 형수대접하면 을축갑자루 셈판이 잘되겠네.>>

 

오가의 말에 다른 두령은 고사하고 돌석이까지 웃었다.

이 몇마디의 대화를 통해서 입심 좋고 흥감스러운 오가와 넉살이 좋으면서도 무뚝뚝한 곽오주의 성격이 바로 옆에 앉아서 보고 듣는것 같이 뚜렷이 드러납니다. 오가는 이러저러한 사람이고 또 곽오주는 어떠어떠한 사람이라고 길게 늘어놓아 설명을 하는것보다 훨씬 더 생동한 인상을 줍니다.

우리 집에 유치원에 다니는 여섯살 먹은 손자가 있습니다. 이놈이 몸에 열이 좀 있는것 같아서 불러다 앉히고 체온을 재여봤습니다. 36도 9분... 크게 념려할것은 없었습니다. 그래 그대로 체온계를 털었습니다. 수은주를 털었단 말입니다. 한즉 손자놈이 나를 쳐다보고

 

<<할아버지 몇돕니까?>>

 

하고 묻는게 아니겠습니까. 제따위가 몇도인지는 알아서 무어하겠습니까. 아나마나 마찬가지지요. 그래 나는 례사롭게

 

<<36도 9분이다. 일 없다.>>

 

하고 대답해주었습니다.

 

<<36도 9분? 어디 나두 좀 보겠습니다.>>

 

<<이제 할아버지 터는거 너 못 봤니? 벌써 털어버렸는데 어떻게 봐?>>

 

내 이 말을 손자놈은 곧 허리를 구푸리고 방바닥을 온데 찾아보는것이였습니다. 할아버지가 털어서 방바닥에 떨어진 36도 9분을 찾아보려는것입니다. 36도 9분을 아마 무슨 콩사탕 같은걸로 아는 모양입니다.

여섯살짜리 어린아이는 발전하는 지능이 어느 단계에 이르렀다는것을 잘 말해주는, 형상적으로 잘 말해주는 실례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전에 농촌에 생활체험을 내려갔을 때의 일입니다. 저녁에 마을에 회의가 있다고 해서 갔더니 너무 일찍 가서 그런지 모인 사람이 얼마 안됩니다. 나중에 한 아주머니가 문을 열고 들어와서 장내를 한번 둘러보더니 웃으며 하는 소리가

 

<<가물에 콩나듯했구먼.>>

 

회장에 사람이 덜 모인 형상을 이보다 어떻게 더 생동하게 묘사할수 있겠습니까.

어떤 한족사람이 헌 자전거를 보고

<<출라링뚜샹(除了铃都响)>>이라고 비웃는것을 들은적이 있습니다. 종만 빼놓고 다 소리가 난다는 뜻이겠지요. 정작 소리가 나야 할 종은 소리가 안나고 소리가 나지 않아야 할 다른데서는 다 덜커덕덜커덕 소리가 난다는 말이니 이 얼마나 형상성이 강합니까. 이 세상의 아무리 위대한 작가라도, 동서고금의 아무리 위대한 작가라도, 헌 자전거를 묘사하는데 이보다 더 형상적으로 묘사를 하지는 못할거라고 생각합니다.

 

<<림꺽정>>에서 또 하나 례를 들어봅니다.

 

꺽정이가 이야기를 하려고 돌아서니 황천왕동이는 리봉학이 뒤에 섰다고 옆으로 나서고 신불출이와 곽능통이는 황천왕동이 섰던 자리로 들어섰다.

림꺽정이는 화적패의 대장이고 리봉학이와 황천왕동이는 두령입니다. 그리고 신불출이와 곽능통이는 시위니까 신분의 차이가 모두 뚜렷합니다. 리봉학이와 황천왕동이는 같은 두령이라도 리봉학이가 퍽 더 높습니다. 그러므로 대장의 이야기를 들을 때 그들은 모두 자기의 신분에 알맞는 자리에 서는것입니다. 그래서 독자는 림꺽정이의 이야기하는 장면을 직접 눈으로 보는것 같은 립체감을 느끼게 됩니다. 작자가 만약 이 대목을 그저 <<림꺽정이가 이야기를 하려고 돌아섰다.>> 해놓고 잇달아서 <<이야기>>로 들어갔다면 독자는 직접 눈으로 보는것 같은 립체감을 느낄수는 없을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형상화하는 면에서 실패로 될것입니다. 우리는-소설을 쓰는 사람들은-언제나 이 상세하고 구체적인 동작의 묘사를 잊지 말아야 할것입니다.

어떤 남편이 밤낮 녀편네에게 눌리워 지냅니다. 다시말하면 늘 맞아대며 삽니다. 걸핏하면 녀편네에게서 비자루찜질, 부지깽이찜질을 당한다 말입니다. 하루는 무엇을 어떻게 잘못했다고 녀편네가 비자루를 거꾸로 들고 답새려 덤볐습니다. 남편은 다급해서 얼른 침대밑으로 기여들어갔습니다. 녀편네가 침대밑을 들여다보며

 

<<나와! 어서 나와! 냉큼 나오지 못할가!>>

 

호령이 추상같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점점 더 깊이 들어가서 벽에 딱 달라붙었습니다. 그리고 씩씩하게 대꾸질을 하는것이였습니다.

 

<<안 나가! 나두 사내대장부야! 한번 안 나간다면 안 나가는줄 알아!>>

 

녀편네는 무섭지, 사내대장부의 체면과 자존심은 속에 살아있지... 이 가련한 <<사내대장부>>의 모순된 심리와 행동이 얼마나 잘 나타나겠습니까! 우스운중에도 동정이 가고 동정이 가면서도 <<예끼, 이 못난 자식!>> 소리가 입에서 절로 나옵니다.

형상화하지 않은 소설은 문학의 범주에 드는것이 아니라 리론의 범주에 듭니다. 리론적으로는 얼마나 큰 가치가 있을지는 몰라도 소설로서는 실패입니다.

우리의 소설에는 일반적으로 유모아가 부족합니다. 너무 따분하단 말입니다. 영화구경을 하고 온 사람에게

 

<<그 영화 교육적의의가 있습디까?>>

 

하고 물어보는 사람을 나는 일찌기 보지 못했습니다(다른분들은 혹시 보셨는지 몰라도 나는 못 봤습니다). 내가 본 사람들은 례의없이 다 이렇게 물어봅디다.

 

<<그 영화 재미있습디까?>>

 

이와 마찬가지로 재미없는 소설은 읽지를 않습니다. 소설은 약이 아니거든요. 억지로 먹이지는 못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훌륭한 내용이 있더라도 읽어주지를 않는데야 무슨 수가 있습니까. 읽혀야 합니다, 읽도록 해야 합니다. 읽히려면 첫째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재미가 있으려면 유모아적인 필치로 쓰는것이 가장 좋습니다. 말에 맛이 있어야 합니다. 유모아는 우리 말로 익살이라는 뜻도 되고 우스개라는 뜻도 되고 또 해학이란 뜻도 됩니다. 재미있는 말을 골라서 써야 합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는 그런 재미있는 말들이 강변의 조약돌 같이 많고 하늘의 별 같이 많습니다. 웃음속에 철리가 담긴 소설은 읽지 말래도 읽습니다. 그리고 거기 담긴 철리를 깨닫지 말래도 깨닫습니다.

끝으로 위대한 로신의 작품 하나를 례로 들겠습니다. 이것은 소설이 아닙니다. 몇줄 안되는 아주 짧은 잡문입니다. 그 경개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집에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온 집안이 다 좋아서 야단입니다. 백날에 손님들을 청해다놓고 어린아이를 안아내다 보입니다. 물론 경사로운 말을 듣자는거지요. 한 손님이 말하기를

 

<<이 애기는 커서 백만장자가 될테니 두고보십시오.>>

 

주인이 좋아서 입이 벌어졌습니다. 고맙다고 치사를 한것은 더 말할것도 없는 일입니다.

 

다음 손님도 뒤지지 않고 칭잔을 했습니다.

 

<<이 애기는 커서 높은 벼슬을 할게 환히 알립니다.>>

 

이 손님도 물론 주인의 치사를 단단히 받았습니다.

 

세번째 손님은 고지식한 사람이였습니다. 어린아이가 장차 커서 무엇이 될지 미리 어떻게 압니까? 입에 발린 거짓말을 할수 없고 또 그렇다고 아무 말도 안하는것은 실례이겠고... 해서 이 손님은 고지식하게 정말을 했습니다.

 

<<이 애기가 크면... 죽을겁니다.>>

 

사람이란 세상에 났다가 한번은 꼭 죽기 마련입니다. 생로병사가 아닙니까. 그러나 고지식한 손님은 즉사하게 얻어맞았습니다. 온 집안이 달려들어서 넙치를 만들어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아무 대접도 못 받고 쫓겨났습니다. 거짓말한 사람들은 대접을 잘 받고 정말을 한 사람은 뭇매를 맞고 쫓겨났습니다. 고지식한 손님이 하도 기가 막혀서 선생님을 찾아가 여쭈어봤습니다.

 

<<선생님, 거짓말두 안하구 매도 맞지 않으려면 어떡허는게 좋겠습니까?>>

<<변통성 없는 사람!>>

 

하고 선생님은 좋은 방법을 가르쳐주시는것이였습니다.

 

<<그럴 때는 이렇게 말을 해야지. 아이구 이 애기 좀 봐! 야 이거 참 대단하구먼. 아 이런! 하하! 헤헤! 헤, 헤헤헤헤!>>

 

백날잔치에 모인 사람들의 허위성을 이 이상 어떻게 더 형상화할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더 폭로할수 있겠습니까? 우리도 이런 재치가 있으면서도 심각하기짝이 없는 필치를 따라배워야 한겠습니다. 열심히 꾸준히 익혀야 하겠습니다.

 

김학철전집4-태항산록-(수필)생각이 나는대로

 

수필

생각이 나는대로

 

없는 감격을 억지로 만들어내는것이 우리 소설의 일반적인 병통인것 같다. 나오지 않는 눈물을 억지로 짜내고 안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웃으려는데 문제가 있는상싶다. 별로 슬프지도 않은데 애를 써서 흘리는 눈물은 값싼 눈물 혹은 허위의 눈물이다. 그리고 별로 우습지도 않은데 번화스레 웃는것은 갈보식의 웃음 또는 아첨쟁이식의 웃음이다. 자연스럽지 못한 눈물이나 인위적인 웃음은 독자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독자는 바보가 아니기때문이다.

1944년 늦은봄, 일본 나가사끼감옥에서 나는 전과 6범의 절도 상습범이 만기출옥하는 장면을 목격한 일이 있다. 마흔두서넛 된 그 수인은 만성신장염으로 입원하고있다가 감옥병원에서 직접 출옥을 하는데 몸이 독같이 부어서 허리띠를 매기가 곤난했다. 복도의 벽을 짚으며 퉁퉁 부은 발을 겨우 옮겨놓는데 나이 지긋한 간수가 보따리를 들어다주며 제법 부드럽게 타이르는것이였다.

 

<<인제 제발 좀 다시 오지 말게. 이게 벌써 몇번짼가. 한편생 감옥출입만 하다말겠나.>>

 

한즉 수인은 가쁜숨을 쉬면서 대답하는것이였다.

 

<<말씀은 고맙습니다, 나리. 그렇지만 사회에서 받아주지를 않으니 어떡합니까? 여기밖에는 받아주는데가 없으니 어떡합니까? 쉬이 또 뵙지요, 나리.>>

 

나이 지긋한 간수는 더 말을 못하고 머리만 설레설레 저었다. 전과자를 사회가 용납하지 않는다는것을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었던것이다.

당시 20대의 청년이던 나는 거기서 얼마나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지 40년이 지난 지금도 그 광경이 눈앞에 선하다. 나는 언젠가 자기의 소설에다 그 장면을 되살린적이 있다.

이것도 역시 그무렵의 일이다. 나는 정치범이였으므로 엄정독거(严正独居)의 대우를 받았다. 엄정독거란 독감방에 격리시켜놓고 다른 수인들과의 접촉을 엄격히 금하는것이다. 목욕도 독탕에서 해야 하고 입원도 독병실 그리고 하루에 20분씩 허용되는 옥외활동도 간수장 하나가 딸려서 혼자 해야 하였다. 천오백명 수용자가운데 정치범은 넷밖에 없었으므로 다른 수인들처럼 영화구경도 못하였다. 정치범만 따로 하나씩 구락부에 갖다앉히고 전위해서 영화를 돌릴수는 없었기때문이다. 감옥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을 때도 간수장의 압송하에 가가지고 복도에서 혼자 벽을 향하고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 하였다. 일반 형사범들이 장의자에 늘어앉아서 나직나직이 서로 지껄이는 소리가 혼자 등을 들리고 서있는 내 귀속으로 다 흘러들어왔다.

 

<<너 얼마 먹었니?>>

<<7년.>>

<<무얼루?>>

<<강간.>>

<<멍텅구리 같으니! 도적질을 해서 그 돈으로 갈보집에를 가지, 그랬더면 재미를 실컷 보구두 이삼년밖에 안 먹었지야.>>

 

낡은 사회, 병든 사회에서 인간의 도덕적풍모가 어느 정도로 타락하였다는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화였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들나름으로의 생활규칙이 있고 또 가치법칙과 리해타산이 있는것이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수인들의 지껄이던 소리가 어제런듯 기억에 삼삼하고 귀에 쟁쟁하다.

이런것들을 꾸밈없이 그대로 되살린다면 억지울음을 아니 울고 억지 웃음을 아니 웃어도 되지 않을가.

로신의 말마따나 남이 위생을 강조하니까 엇나가느라고 일부러

 

<<좋다, 그럼 난 이제부터 전문적으로 파리만 잡아먹구 살테다.>>

 

하고 용을 쓰는것은 영웅이 아니다. 그러나 남의 의견을 좆차서-허심히 받아들인답시고-주대없이 이리 뜯어고치고 저리 뜯어고치고 해서 작자의 개성이 있고 특성이 있는 멀쩡한 작품을 괴상망측한 쪼각보를 만들어가지고 모두들 무여들어 좋다고 야단법석을 하는것도 꼴불견이다.

그리고 또 이와는 정반대로 써놓은 작품이라는게 아무리 좋게 보아주려 해도 워낙 작품이 되여먹지를 않았는데 쓴 사람의 눈에는 자꾸 불후의 명작으로 보여서

 

<<세상놈들이 다 눈깔이 멀었다!>>

 

또는

 

<<편견이다! 야심이다! 생이다! 고의적타격이다!>>

 

하고 불으락푸르락하는것도 절승경개의 하나이다.

 

모름지기 우리 문학도들은 자기의 력량을 자기가 알아야 하지 않을가? 세상에서 자격을 인정해주지 않는데 제가 부득부득 자격이 있다고 우기는것은 희비극이다. 우습강스러운 비극이란 말이다.

생각이 나는대로, 붓이 가는대로 따라다니다보니 아마 소정의 2천자가 거의 찬 모양이다. 아니, 넘은 모양이다. 이럴 때는 얼른 손을 떼고 나앉는게 아마 현명한 처사지.

 

김학철전집4-태항산록-(수필)궁녀

 

수필

궁녀

 

궁녀란 우리가 다 알다싶이 궁중에서 황제, 황후 또는 왕과 왕비의 시중을 드는 시녀 즉 하녀이다. 동시에 또 그녀들은 황제나 왕의 후보첩이기도 하다. 그러나 실지 첩으로 되는 <<영광>>을 누릴수 있는것은 백에 하나도 있으나마나하다. 백의 아흔아홉 가량은 처녀의 몸으로 평생 수절을 하다가 늙어 꼬부라져서 처녀귀신이 되기 마련이다. 궁녀는 환관 즉 내시외의 남자와는 절대로 접촉을 못하게 되여있다. 그녀들이 접촉할수 있는, 온전한 남자란 오직 황제나 왕 하나뿐인데 그 비례가 100대1, 300대1, 지어는 500-600대1이나 되다보니 사내구경을 한다는것은 하늘의 별을 따기만큼이나 어려웠다.

그래서 이런 우스운 이야기까지 있다.

궁중에 봄이 찾아드니 궁녀들이 모두 원인 모를 병에 걸려서 얼굴들이 노래가지고 시들시들 시들어갔다. 크게 념려한 황제가 시의를 불러다가 치료할것을 명한즉, 궁녀들의 병이 어찌하여 난것을 짐작하는 시의가 품하기를

 

<<신의 처방대루 약을 쓰기만 하면 병을 꼭 고칠수는 있사오나 페하께서 윤허하옵실는지?>>

 

한즉 황제의 말이

 

<<오냐 념려 말구 어서 처방이나 내라, 병을 고칠수만 있다면야 무슨 약인들 못쓰랴.>>

 

황제의 윤허가 내린 뒤에 비로소 시의가 써바치는 처방을 들여다본즉 인삼도 록용도 다 아닌 단방(单方)으로

 

<<장정(壮丁) 20명>>이다. 황제가 내심 적이 놀랍기는 하였으나 황제의 체면을 식언(食言)은 할수 없어서 처방대로 하라고 어명을 내렸다.

 

어명을 받은 도승지는 지체없이 어림군 즉 근위군에서 장정 20명을 골라뽑아서 내전으로 들여보내였다.

한달이 지났다.

황제가 하회를 보려고 내전에를 듭시니 그 노랗게 시들어가던 궁녀들의 얼굴이 모두 도화빛으로 피여나서 청춘의 아름다움이 마구 넘쳐나는듯 생기가 발랄들 해졌었다. 황제가 속으로 시의의 그 단방약처방이 효험이 대단하다고 탄복하면서 내전을 두루 살펴보는중에 괴상야릇한것이 그 눈에 띄웠다. 양지바른 담장밑에 한무리의 피골이 상접한 아편쟁이모양의 사내들이 쪼크리고 앉아서 오돌오돌 떨면서 볕들을 쪼이고있는것이다. 깜짝 놀란 황제가

 

<<아니, 저건 대체 무엇하는것들이냐?>>

 

하고 뒤에서 모시고 따라오는 상궁 즉 궁녀장을 돌아본즉 그 상궁이 상끗 웃고 아뢰는 말이

 

<<녜, 황송하오나 저것들은 상감께서 전일에 들여다보내주신 그 약을 짜고난 찌꺼기인줄로 아뢰오.>>

 

물론 이것은 누가 지어낸 우스운 이야기다. 실지 이 세상에서 그런 장정약, 날고기약을 먹어본 궁녀는 하나도 없다. 어림 반푼없지!

 

그러므로 당나라의 태종황제-리세민이 등극하자 첫 말에

 

<<3천궁녀는 두어서 무엇 한단 말이냐, 여라문만 남겨놓구 나머지는 다 내보내서 시집들을 가게 하여라.>>

 

하고 수천명의 궁녀를 일시에 해방한것은 천여년전의 제왕으로서는 영단이 아닐수 없고 또 장거가 아닐수 없다.

지금으로부터 천수백년전 백제가 망할 때, 궁녀들이 적군에게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모두가 백마강 푸른 물속에 뛰여드러 순국한 락화암(落花岩)의 비장한 이야기는 지금도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준다. 비단치마자락들을 나붓기며 바위끝에서 하나하나 뛰여내리는, 보지도 못한 그 궁녀들의 모습이 우리들의 눈앞에 생생히 떠오르군 한다.

사실상 궁녀란 화려한 옷차림을 한 녀종이였다. 그래도 사사집녀종은 비부(婢夫) 즉 종서방이나마 맞아보지! 궁녀들에게는 고만한 복을 누릴 자유도 자격도 다 없었다.

영국력사에도 궁녀에 관한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다. 어느해 궁중에서 정변이 일어났을 때 충성이 지극한 궁녀가 국왕에게 피신할 시간을 주느라고 폭도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얼른 중대문을 닫아걸었다. 그러나 내통한자가 미리 치워버린 까닭에 문빗장이 없었다. 궁녀는 서슴없이 제 팔뚝을 대신 들이밀었다. 폭도들이 사정없이 떠미는 바람에 궁녀의 팔뚝은 마침내 와지끈 부러졌다. 하지만 그동안에 국왕은 무사히 궁전을 빠져나갈수 있었다.

정변을 일으킨자나 정변을 당한자나 다 마찬가지 착취계급, 통치계급이니까 어느 편도 동정할것은 없지만서도 그 궁녀의 용기와 충성만은 가상하다고 아니할수 없다.

명나라때, 찍어서 말하면 1542년 10월 21일 밤중에 북경 황궁안에서는 가정(嘉靖)황제 주후총을 암살하려다가 미수로 끝나는 엄청난 사건이 발생하였었다. 한데 그런 엄청난 시해(弑害)를 도모하였던것은 무슨 장군도 아니고 또 무슨 대신이나 친왕도 아닌 그저 보통궁녀들이였다. 연약한 소녀들, 바깥세상을 모르고 심궁에 갇혀사는 꽃같은 처녀들-14명의 가련한 궁녀들이였다.

황제를 사자나 호랑이에 비긴다면 궁녀쯤은 토끼나 다람쥐 폭밖에 안되는 보잘것없는 존재다. 그런 티끌같은 존재인 궁녀들이 언감생심 그 무서운 황제를 잡아치우려 들다니! 도대체 무슨 일일 가?

 

그 열네 궁녀의 이름부터 차례로 적어보기로 하자.

1. 양금영, 2. 계주약, 3. 양옥향, 4. 형취련, 5. 요숙고, 6. 양취영, 7. 관매수, 8. 류묘련, 9. 진국화, 10. 왕수란, 11. 서추화, 12. 등금향, 13. 장춘경, 14. 황옥련.

이상은 다 가정황제의 총애를 받는 조비(曹妃)에게 딸린 궁녀들이다. 물론 조비궁에 매인 궁녀는 이밖에도 또 여럿이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이 사건과 특히 관련된 궁녀가 둘이 더 있었으니 그 하나는 궁녀장 진부용이고 또 하나는 장금련이라는 보통궁녀였다.

이때 황제가 또 여러 첩중의 하나인 조비한테다만 사랑을 쏟으니 정실인 방황후(方皇后)는 질투가 나서 죽을 지경이였다. 그런 판국에 이번 사건이 조비궁에서 폭발하였으니 조비가 어찌 그 열네명의 궁녀와 함께 릉지처참(목을 자르고 또 몸뚱이와 사지를 토막쳐죽이는 형벌)을 받지 않을것인가!

이날 낮, 황제가 밤에 또 조비궁으로 자러 온다는 기별을 받은 궁녀들이 머리를 한데 모으고 쑥덕공론을 하였다. 주모자는 양금영이였다.

 

<<어차피 그놈의 손에 죽을바엔 차라리 우리가 선손을 쓰자꾸나.>>

<<옳다, 네 말이 옳다.>>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니?>>

<<우리 생각두 마찬가지다.>>

<<또 무슨 다른 의견들은 없니?>>

<<없다, 없어. 그렇게 하자.>>

<<하자 하자, 해치우자.>>

 

이런 엄청난 모의를 한 궁녀들의 나이는 모두 스무살 안팎이였다. 꽃다운 나이였다. 그녀들은 잘 알고있었다-황제를 죽이는데 성공을 하더라도 릉지처참은 면치 못할것이고 또 성공을 못한다면 더구나 릉지처참은 면치 못할것이라는것을.

궁녀들은 모의가 끝나자 곧 행동으로 넘어갔다. 우선 의장개(仪仗盖)에 달린 술(명주실)을 풀어서 줄부터 꼬았다. 황제의 목을 옭아매죽일 작정인것이다.

 

밤이 들었다.

방탕한 황제가 침대우에서 방탕히 놀아먹고 기운이 빠져서 세상 모르고 잘 때 궁녀들이 행동을 개시하였다. 양금영을 위시한 열명의 궁녀가 일시에 황제를 들이덮쳤다. 서추화를 비롯한 네명의 어린 궁녀 즉 애기궁녀는 후보대원 격으로 언니궁녀들을 도와서 망을 보았다. 맨먼저 하나가 가슴을 타고 앉으면 곧 두손으로 황제의 목을 들이조르니 또 하나는 얼른 그 배를 타고 앉았다. 이와 동시에 다른 두 궁녀는 왼팔과 바른팔을 각각 맡아 눌러서 황제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그밖에도 또 둘이 왼쪽다리와 오른쪽다리를 한쪽씩 맡아 눌러서 황제가 두다리를 버둥거리지 못하게 하였다.

 

<<목을 더 바짝 졸라라, 늦추지 말아!>>

<<그 줄 이리 다우. 빨리!>>

 

이리하여 나머지 궁녀들은 재빨리 황제의 목에다 줄을 매였다. 그리고는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하지만 너무 서두르는통에 줄이 옭매듭이 져서 황제의 숨통이 아주 끊어지게까지 되지 못하였다. 이런 놀라운 변고를 눈앞에 본 장금련이라는, 우에서 말한 궁녀고자쟁이가 진동한동 달려가 방황후에게 변을 고하였다. 뜻밖의 일에 격동한 방황후는 옷도 바로 입지 못하고 현장으로 달려왔다. 방황후가 침실에 들이닥치며 대뜸

 

<<무엄한것들, 이게 웬짓이냐!>>

 

하고 매섭게 꾸짖으니 궁녀 하나가 후닥닥 마주 대들며 주먹으로 황후의 가슴패기를 한대 콱 쥐여박았다. 한낱 궁녀가 감히 황후에게 손찌검을 하다니!

심상찮은 동정에 의혹을 품고 궁녀장(관명-官名)인 총패(总牌라고 한다) 진부용이 쫓아들어오니 애기궁녀 넷이 얼른 그앞을 가로막았다.

 

사태가 위급해진것을 보자 양금영이

<<어서 불들을 꺼버려라!>>

하고 소리쳤다. 진부용은

<<끄지 말아! 끄면 안돼, 끄지 말아!>>

 

맞소리르 질렀다. 그러나 애기궁녀들은 듣지 않고 잽싸게 행동하여 침실안팎의 불이란 불은 다 불어껐다. 캄캄한 방에서 진부용이 허둥지둥 뛰쳐나갔다. 파수군을 부르러 간것이다.

급보를 받고 쫓아온 당직장교와 파수병들이 꺼진 불을 다시 켜고 그리고 눈에 사열이 오른 궁녀들을 잡아제친 뒤에 황제의 목에서 줄을 끌러놓으니 황제는 이미 기신을 잃고 다 죽은 사람이였다.

시의들이 의식 잃은 황제를 뉘여놓고 쩔쩔매는 동안에 방홍후는 재빨리 황제의 어명을 위조해가지고 사사로운 분을 풀었다. 눈에 가시 같던 조비에게 이번 시해사건의 주모자라는 억울한 죄명을 들씌워서 열네명의 궁녀과 함께 릉지처참을 해버린것이다.

 

사경을 헤매는 황제 둘레에 모여앉은 시의들은 겁이 나서 부들부들 떨기만 하였지 아무도 감히 약을 써볼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까딱 잘못하면 제 목이 달아나는 판이였기때문이였다. 나중에 할수없이 시의장 허신이 죽을 각오를 하고 독한 약을 써보았다(약을 안 쓰면 약을 안 써서 죽었다고 할것이고 또 약을 쓰더라도 효험을 못 보고 죽으면 약을 잘못 써서 죽었다고 할것인즉 이러나저라나 황제를 죽였다는 죄를 뒤집어쓰기는 매일반이였으므로).

 

시의들은 간을 졸이고 손톱여물을 썰며 지켜보는 가운데 미시(未时) 즉 약을 쓴지 칠팔시간만에 황제가 갑자기 왈칵왈칵 죽은피를 게우더니, 한 소랭이 잘되게 게우더니, 비로소 기신을 차렸다.

사후에 시의장 허신은 황제를 살린 공로로 후한 상급을 받았다. 하지만 그때 약을 써놓고 너무 마음을 졸인것이 불치의 병으로 되여서 마침내 그는 죽어버렸다. 놀라죽은것이다.

그런데 이런 전고미문의 시역(弑逆)미수사건은 어찌하여 일어났을가?

오래 살 욕심에 눈이 어두운 가정황제 주후총이 어리석게도 방사(方士) 즉 신선의 술법을 닦았다고 자칭하는 협잡배에게 속아서 장생불로단약(丹药)이란것을 고는데 소녀(숫처녀)들의 몸에서 가장 중난한 곳-유방과 음부를 도려내서 약재로 썼다. 유방과 음부를 도려내면 사람은 물론 살지 못한다. 동무궁녀들의 그런 참혹한 주검을 눈앞에 본 궁녀들은 장차 자기들에게도 들이닥칠 그런 비참한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칼 물고 뜀뀌기로 한번 반항을 해보느냐? 이런 량자택일의 어려운 갈림길에 그녀들은 서게 되였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판에 양금영 등 열네궁녀는 결연히 후자를 택하였다. 장한지고!

그러면 한번 죽을번한 가정황제 주후총은 그후 어떻게 되였는가? 자기의 잘못을 뼈 아프게 뉘우치고 개과천선 다시는 그런짓을 아니하였을가? 천만에!

 

<<가정 31년 겨울, 8살에서 14살까지의 소녀 300명을 구해들이다.>>

<<가정 34년 9월, 10살 이하의 소녀 160명을 또 구해들이다.>>

<<전부 다 장생불로단약을 고는데 약재로 쓰다.>>

 

이 몸서리 치는 사실을 기록한 문서는 지금도 북경 고궁안에 고스란히 보존되여있다.

수백명의 어린 궁녀들은 선배궁녀들처럼 반항 한번 못해보고 다 참혹한 죽음을 당하여 가정황제 주후총의 몸보신할 약재로 되였던것이다!

김학철전집4-태항산록-(수필)맛이 문제(제4권)

 

김학철전집4-태항산록-(수필)궁녀 - 소설게시판 - 모이자 한민족 커뮤니티

수필 궁녀 궁녀란 우리가 다 알다싶이 궁중에서 황제, 황후 또는 왕과 왕비의 시중을 드는 시녀 즉 하녀이다. 동시에 또 그녀들은 황제나 왕의 후보첩이기도 하다. 그러나 실지 첩으로 되는 <<영

life.moyiza.kr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