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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철의 <해란강아, 말하라!>(1954)

 

[5] 김학철의 <해란강아, 말하라!>(1954)

[BY 노마만리] 1. 연변의 소설가 김학철 1986년 역사학자 이정식과 한홍구가 김학철의 전기소설 <항전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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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변의 소설가 김학철

1986년 역사학자 이정식과 한홍구가 김학철의 전기소설 <항전별곡>을 조선독립동맹 자료의 하나로 국내에 소개했다. 이를 통해 소설가 김학철의 이름이 우리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본명이 홍성걸인 김학철은 한국전쟁 이후 주로 연변에서 활약한 작가였다. 그는 거름출판사에서 간행한 <항전별곡>이 소개되기 전까지 분단과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인해 남한의 독자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조선독립동맹 산하 조선의용군의 활동을 그린 <항전별곡>을 시작으로 1988년 <격정시대>와 <해란강아 말하라>가 연거푸 발간되면서 그 이름이 국내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김학철(1916~2001)

해방전후사에 대한 관심이 높던 시기 국내에 소개된 그의 소설에는 그 동안 베일에 감춰져 있었던 조선의용군의 활약상이 생생히 묘사되어 있었으며 신중국 성립 전후 연변 조선인들의 모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그려져 있었다. 이는 우리가 모르고 있던 사실의 발견이자 새로운 작가의 발견을 의미했다.

 

고향이 원산인 김학철은 10대의 대부분을 서울 외가에서 보낸 실질적인 서울내기였다. 그는 보성고보를 다니던 중 독립운동에 헌신하기 위해 상해로 가서 김원봉이 이끌던 의열단에 가입하게 된다. 이어 조선민족혁명당에 입당 후 1938년 창립된 조선의용대에 참여하며 독립군이 되었다.

 

조선의용대원으로 중국공산당과 함께 항일투쟁에 투신했던 김학철은 1941년 호가장전투에서 일본군의 총탄에 맞고 포로가 된다. 그는 해방이 될 때까지 일본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왼쪽 다리는 잘라내야 했다.

 

일본이 패망하여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된 그는 출옥 후 잠시 서울에서 머물다가 1946년 월북하여 로동신문사에서 일했다. 하지만 김일성 우상화에 반대하다가 비판당한 후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중국에 정착 후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항전별곡(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1983)

김학철의 <항전별곡>이 소개된 1980년대 남한에서 그를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보성고보 동창 혹은 해방공간 잠시 서울의 조선독립동맹에서 일할 때 사귀었던 사람들 그리고 일본에서 함께 수감생활을 했던 언론인 송지영 정도가 있을 뿐이었다. 훗날 남한에서 문예진흥원장, 한국방송공사이사장 등을 역임한 송지영은 나가사키의 감방에서 총상으로 고생하던 김학철이 다리를 자르게 되자 그를 붙잡고 통곡을 해 도리어 다리를 자른 김학철이 “나는 이제 우산귀신이 되었으니 송형은 이제 비가와도 걱정하지 말라”는 농담으로 위로했을 정도로 막역했다.

 

김학철의 소설이 남한의 독자들에게 관심을 끌게 되자 남한에서는 그를 서울로 초대하여 국내 독자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김학철은 남한측 출판사의 초청에 선뜻 응했다. 그러나 연락을 주고받으며 서로 만날 날을 손꼽던 송지영이 김학철이 서울에 도착하기 얼마 전 급서했다. 감방동기인 송지영을 볼 기회는 사라졌지만 이왕 서울을 방문하기로 했으니 물릴 수는 없었다. 생각해보면 방문할 이유는 많았다. 서울은 김학철이 유년기를 보낸 장소였기에 곳곳에 어린 시절 추억이 서려 있었다.

 

김학철이 머물던 서울 외갓집은 관훈동 69번지로 인사동 길을 따라 안국동 방향으로 한참을 가다보면 오른편 어느 작은 골목에 있었다. 그 집에는 김학철 외에도 원산루씨여고 출신인 작은이모의 단짝 친구, 이선희도 함께 머물렀다.

 

소설가 이선희는 김학철이 소설가가 되도록 자극을 준 인물이었다. 그녀는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개벽사의 기자가 되면서 김학철의 외가를 떠났다. 이후 파고다공원 옆 어느 캬바레의 여급이 되어 김학철을 놀래키기도 했다.

 

왼쪽 두번째가 이선희(1911~1946?)

김학철이 이선희를 마지막으로 본 곳이 운현궁 앞이었다. 길에서 우연히 만난 이선희에게 김학철은 독립운동을 위해 상해로 간다고 말했다. 걱정스런 표정의 이선희는 핸드백에서 거금 10원을 꺼내 주었다. 김학철이 상해로 떠나고 이선희는 원산출신 극작가 박영호와 결혼했다. 해방 후 김학철은 이선희를 만나지 못했다. 그녀는 월북하여 원산으로 갔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인사동 일대는 학창시절의 추억이 녹아 있는 곳이었다. 그곳을 죽기 전에 다시 가보고 싶었다.

 

서울에 도착한 김학철은 어린 시절 서울서 먹었던 대구탕이 생각났다. 김학철을 수행하던 40대 남자는 서울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대구탕 집으로 그를 데리고 갔다. 김학철은 드디어 대구탕을 먹을 수 있게 되었구나 하며 큰 기대를 갖고 식당으로 갔다. 동행한 부인과 함께 입맛을 다시며 대구탕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막상 대구탕이라는게 나왔을 때는 큰 실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생각한 대구탕과 서울서 가장 유명한 대구탕집에서 나온 대구탕이 전혀 다른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김학철이 기억하던 대구탕은 소의 내장을 넣어 얼큰하게 끓인 지금으로 치면 내장탕이었다. 소를 많이 키우던 대구지방에서 먹는 음식이라고 대구탕이라 불렀다. 하지만 그가 대접받은 것은 말 그대로 생선인 대구를 끓인 대구탕이었던 것이다. 어느 틈엔가 서울에서는 대구지역에서 왔다는 의미의 대구탕이 생선 대구에게 이름을 빼앗기게 된 것이었다. 다행이도 대구탕에 실망한 김학철은 파고다공원에서 먹은 컵라면에 입맛이 살아났고 그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내가 김학철을 기억해 낸 것도 대구탕 때문이었다. 지난 토요일(23일) 삼각지 대구탕골목에서 지인들과 대구탕을 먹으며 김학철의 서울방문기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며 함께 웃었다. 대구탕 거리의 초입에는 평양집이라는 김학철이 먹고 싶어했던 내장탕류의 음식을 파는, 소위 유명한 맛집도 있었지만 어쩌겠는가. 김학철 선생에게 내장탕으로 이름이 바뀐 대구탕을 꼭 대접해드리고 싶은 마음이지만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이지 않는가.

 

2. 해란강아 말하라!

내가 가지고 있는 책 중에는 김학철의 책이 몇권있다. 이중 중국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해란강아, 말하라!>도 가지고 있다. 이 책은 1954년에 총3부로 발간된 김학철의 최초 장편소설로 1930년대부터 신중국 성립 이후까지 연변지역 조선인 농민들의 투쟁을 그렸다.

 

<해란강아, 말하라!>(1954)

김학철은 이 소설을 쓰기 위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이야기를 소설 속에 녹여냈다. 특히 머리말에는 이 책의 초고가 나온 후부터 완성하기까지 수차례의 토론과 비평을 해준 조선의용군 출신의 동료 최채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있다. 김학철이 함께 논의한 최채는 북경의 중앙문학연구소에 근무하고 있던 김학철을 연변으로 데리고 온 인물이자 연변조선족 역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던 인물이었다.

 

최채에 대해 자료를 조사하던 중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최채가 상해의 조선인 영화인들과 관련을 맺고 있었다는 점이다. 영화사 연구자로서 흥분되는 순간이다.

 

EBS PD 안태근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던 중 알게 된 상해의 조선영화인들의 이야기를 접하고선 말 그대로 그들에게 꽂혔다. 늦깎이 대학원생으로 영화사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무성영화시기 영화인들의 활동을 멀고 먼 이국땅에서 확인하고는 이들을 연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후 상해의 조선 영화인들에 대한 자료를 조사하고 만날 수 있는 중국의 대부분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서는 수집한 자료들을 가지고 “일제강점기의 상해파 한국영화인 연구”라는 제목으로 2001년 석사논문을 썼다.

 

소위 상해파 영화인에 대한 그의 끊임없는 관심은 계속 이어졌다. 2013년 그가 쓴 <한국영화 100년사>에도 소위 상해파영화인들에 관한 내용을 중요하게 다루었다. 특기할만한 것은 이 책에 최채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는 것이다.

 

인터뷰는 안태근이 2000년에 연변을 방문하여 이루어졌다. 안태근은 최채를 만나 정기탁이 만든 <애국혼>(1928)에서 시나리오와 주연을 맡은 “정군”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물었다. 참고로 <애국혼>은 안중근 의사의 전기영화이며 최채는 이 영화의 조연출이었다.

 

최채는 안태근에게 정군이라는 인물은 영화의 연출을 맡은 정기탁의 다른 이름이라며 정기탁이 시나리오를 써서 여운형에게 보여주자 여운형은 안중근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드는 것이 여러모로 좋다면서 정기탁의 시나리오를 자신이 직접 들고 대중화백합영편의 사장에게 가서 영화제작을 승낙 받았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생생한 증언으로 감춰진 역사의 한 페이지가 이로써 드러나게 되었다.

 

오른쪽이 최채(1914~2006)

최채는 독립운동가인 최중호의 아들이었다.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한 아버지를 따라 상하이에 온 그는 정기탁 등 조선에서 온 영화인들과 함께 어울렸다. 최채의 유창한 상해 말은 조선에서 온 영화인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상해를 무대로 선전활동에 종사하던 최채는 상해가 일본에 점령되자 중경으로 가서 김원봉의 조선의용군에 가담했다. 이후 조선의용군이 태항산으로 들어가게 되자 최채 역시 그곳에서 중국 팔로군과 함께 일본군에 대항해 싸웠다. 이때 최채와 김학철이 함께 활동했다. 이 둘은 한 마디로 전우였다.

 

월북 후 김학철은 로동신문사에서 근무하며 시사만화잡지 <호랑이>에 글을 썼다. 장진광, 창파 등 유명한 만화가들이 그림을 그렸다. <호랑이>에 글을 쓰면서 김학철은 김일성을 노골적으로 우상화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꼈다. 모두들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하느님처럼 입에 달고 있었다. 그 모습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김일성에 대한 지나친 우상숭배에 대한 거부감은 그의 표정, 말, 행동에 드러났다. 결국 김학철은 로동신문사에서 쫓겨나게 된다.

로동신문사에서 발간하던 시사만화잡지 <호랑이>

<호랑이> 게재된 김학철의 글 "소위정판사위폐공판"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중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급격히 역전되자 김학철은 압록강을 넘어 만주에 도착했다. 그는 조선의용군시절 전우인 최채가 활동하고 있는 연변으로 가야하나 생각했다. 얼마 후 압록강을 넘어 만주로 온 서휘가 김학철에게 연변 시골로 가지 말고 연안에서 함께 생활했던 중국의 여류작가 정령(丁玲)이 북경에서 중앙문학연구소 소장으로 있으니 그 쪽으로 가보라고 권했다. 이때 김학철에게 북경행을 권했던 서휘는 8월종파사건 당시 김일성을 몰아내려다 실패한 그 사람이다.

 

김학철은 북경의 중앙문학연구소에서 근 두해를 보냈다. 문학공부를 진지하게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1952년 연변에 자치주가 성립되자 연변의 연변자치주장 주덕해와 연변조선민족자치구인민정부 부주석 최채가 김학철에게 연변에서 함께 일하자고 권했다. 주덕해 역시 조선의용군 출신으로 김학철의 동료였다. 친구들의 권유를 받은 김학철은 북경을 떠나 낯선 연변으로 향했다.

 

연변에 온 김학철은 그곳에 살고 있는 조선인들의 역사를 소설로 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연변의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김학철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겠다고 하자 연변의 사람들은 두 팔 벗고 나서주었다. 이렇게 하여 <해란강아, 말하라!>는 1953년 말에 탈고되어 연변교육출판사로 넘겨졌다. 해를 넘긴 1954년 4월 권도순의 장정으로 초판이 출판되었다. 김학철의 첫 번째 장편소설이었다.

 

3. 쓰러지지도 구부러지지도 않는

해란강은 조두남 곡 윤해영 작사로 잘 알려진 가곡 <선구자>에 등장하는, 우리의 독립운동 역사에서 유서 깊은 곳이다. 그곳 사람들의 이야기는 김학철의 이름을 알리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김학철의 책은 불티나게 팔렸다.

 

1954년 중국의 시인이자 평론가인 호풍(胡風)의 글이 말썽이 되었다. 호풍은 체포되었고 우파 문학인으로 낙인찍힌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조리돌림 당하고 있었다. 소위 “호풍반혁명사건”이었다. 김학철도 길림일보에 호풍을 비난하는 글을 발표해 그 대열에 섰다.

 

호풍에 대한 비판이 잠잠해 질 무렵 소위 “반우파투쟁”이라는 것이 일어났다. 스탈린 사후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 백화제방, 백가쟁명에서 이름을 딴 쌍백운동이라는 것이 일어났다. 스탈린주의식 폐쇄성을 걷어내려는 시도였다. 이때 많은 작가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출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모택동이 이들을 우파라 낙인찍고 소위 "반우파투쟁"을 시작하자 된서리를 맞게 된다.

 

“반우파투쟁” 당시 김학철은 연변작가협회의 9명의 우파지식인의 한사람으로 지목되었다. 항일투쟁 출신의 존경받는 소설가가 한 순간에 호풍과 같은 우파지식인이자 반혁명분자로 낙인찍힌 것이다. 김학철은 자신은 호풍과 다르다고 변명을 했지만 호풍도 이런 식으로 매도당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비오듯 쏟아지는 비판이 논리나 이성과는 큰 관련이 없다는 것도 알았다. 소나기를 피하는 심정으로 반우파투쟁의 날선 비판을 버텼다.

 

<격정시대>(료녕성민족출판사, 1986)

“반우파투쟁”으로 시작한 “대약진운동”이 크게 실패하자 모택동은 2선으로 물러섰다. 반우파투쟁의 비판도 사그라져 갔다. 다시 글을 쓸 수 있는 분위기가 되었다. 김학철은 모택동의 개인숭배를 비판하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제목은 <20세기의 신화>였다. 원고는 1965년 완성되었다. 하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2선으로 물러났던 모택동이 움직이고 있었다.

 

1965년 모택동의 부인인 강청과 상해신문 편집장인 요문원(姚文元)이 희곡 <해서파관>에 대한 비판을 시작했다.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시작된 것이다. 한때 우파지식으로 낙인찍혔던 김학철도 홍위병의 습격을 받았다. 집으로 들이닥친 홍위병은 김학철의 원고 <20세기의 신화>를 발견하고 이를 검토한 끝에 김학철을 반혁명분자라고 규정하고 현행범으로 체포했다.

 

홍위병들에 의해 끌려간 김학철은 7년 4개월 동안 미결수로 보냈다. 문화혁명이 한창인지라 재판도 열리지 않았다. 1975년 5월 드디어 재판이 시작되었다. 여러사람들이 구경할 수 있게 문화궁전 안에 재판소가 설치되었다. 무대로 끌려나온 김학철은 “반혁명분자를 타도하라”는 구호가 쏟아지는 가운데 10년형을 언도받았다. 10년이라는 세월은 이미 미결수로 거의 채운 상태였다. 1976년 주은래가 죽고 곧이어 모택동이 죽었다. 다음해 김학철은 만기 출소했다.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었다.

 

1980년 재심을 신청한 그는 무죄를 확정 받았다. 20여년에 걸친 탄압이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마흔살 무렵부터 시작된 피말리는 고통이 60대 노인이 되어서야 끝났다는 게 허탈했다. 감옥에 있으며 지나온 많은 이야기들을 되새김질 했다.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하여 다시 글을 썻다. <항전별곡>을 쓰고 여러 편의 단편소설들도 발표했다. 그리고 두툼한 <격정시대>를 썼다. 그의 이름은 연변을 넘어 일본과 한국에까지 알려졌다.

<나의 길>(민족출판사, 1994)

1980년대 후반 김학철이 남한의 독자들에게 크게 주목받은 이유는 그가 실제 항일전쟁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라는 사실이었다. 우리에게 <항전별곡>은 항일전쟁에 참여한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 출신이 쓴 전기소설로 소개되었다. 실제 김학철은 호가장전투에서 총상을 입고 체포 된 후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다리를 절단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그의 작품이 지닌 진실성을 상징하는 징표였다.

 

전두환, 노태우정부 기간에 한국사회에 김학철이 적극적으로 소개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항일투쟁으로 고통을 받았고 김일성과 모택동을 비판하다가 숙청되었을 뿐만 아니라 문화혁명기간동안에는 감옥에서 10년의 시간을 보냈다는 점 때문이었다. 김학철의 고된 역정은 가장 인간적인 제도라는 공산주의의 비인간성을 폭로하는 것이기 했다. 이는 평생 공산주의자로 살았던 김학철 스스로도 기대하지 않았던 것일 테다.

 

또한 당시 노태우 정부가 추진했던 북방정책으로 중국과 수교를 하고 교류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두 나라 사이의 접점을 찾아야 했다. 김학철은 한국과 중국을 이을 수 있는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를 한국으로 초대하고 방송에 나와 인터뷰도 하게 만들고 그에 관한 다큐멘터리도 만들었던 것이다. 김학철은 한국과 중국사이의 거리를 좁히는데 일조한 것이다.

 

김학철은 2001년 6월 조선의용군의 지도자였던 윤세주 열사 탄생 100주년 기념식 참석차 밀양에 왔다. 연변으로 돌아간 그는 고단한 삶이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직감했다. 18일간의 단식 후 김학철은 사망했다. 2001년 9월, 향년 85세였다.

 

대구탕에서 착안하여 시작된 이 글을 여기에서 마무리 짓는다. 끝으로 김학철에 관한 다양한 에피소드들은 1996년 중국의 민족출판사에서 간행한 그의 수필집 <나의 길>에서 대부분 참조했음을 밝힌다.

김학철의 <해란강아, 말하라!>(1954)

 

[5] 김학철의 <해란강아, 말하라!>(1954)

[BY 노마만리] 1. 연변의 소설가 김학철 1986년 역사학자 이정식과 한홍구가 김학철의 전기소설 <항전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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