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전(銅錢)과 활자(活字)는 형제(兄弟) 사이
호조 판서(戶曹判書) 박종경(朴宗慶)이 아뢰기를; “병자년(1816)에 새로 주조하기로 한 동전 30만 냥은 은화 대신 받기로 한 구리가 제 시기에 올라오지 않는 바람에 정한 수량만큼 주조하지 못하고 잠시 중단해야 할 형편입니다. 앞서 주조한 20만 냥은 호조에 이송하고 남은 10만 냥은 구리가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다시 주조하도록 하겠습니다. 구리를 운반하는 일은 수로와 육로를 막론하고 뜻대로 하기 어려운 점이 있기는 하겠지만, 해당 관원이 각별히 유념하여 조치하였다면 어떻게 용광로가 멈추는 사태가 발생했겠습니까. 곤장을 무겁게 쳐서 징계해야 마땅하겠으나 먼 지방의 사정도 잘 따져보아야 할 듯하니, 동래부(東萊府)에서 먼저 진상을 조사하여 보고하게 하고 아울러 은화 대신 받기로 한 구리와 일본에서 수입한 구리를 조속히 올려보내도록 동래부에 함께 지시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戶曹判書朴宗慶曰, “丙子所鑄新錢三十萬兩, 以銀代銅未及上來, 不得準數鑄出, 勢將姑爲權撤, 而先鑄二十萬兩, 移送戶曹, 至於餘數十萬兩, 待銅鐵上來, 更爲繼鑄矣. 銅鐵運致, 無論水陸, 果難如意, 而該句管, 若能惕念擧行, 則豈至絶火權撤之境乎? 所當嚴棍懲治, 而遠外事勢, 恐合商量, 令該府爲先査問報來, 而銀代銅及貿銅, 一竝督令上送之意, 一體申飭該府” 從之.
《일성록 순조 17년 3월 4일》
조선시대 금속활자는 태종 3년(1403)에 만든 계미자(癸未字)를 시작으로 세종의 갑인자(甲寅字)에서 본궤도에 올랐고 정조에 의해 임진자(壬辰字), 정유자(丁酉字), 정리자(整理字) 등 기술적으로 한층 뛰어난 활자가 주조되었다. 이러한 금속활자는 대부분 국왕의 지시에 의해 주자소, 교서관, 규장각과 같은 전담 기관에서 제작, 관리되었다.
예외적으로 대동법을 실시한 김육(金堉)의 아들 김좌명(金佐明)과 손자 김석주(金錫冑)가 무신자(戊申字)와 한구자(韓構字)를 주조하기는 하였으나 자신의 관할 하에 있는 병영의 인력과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아 추진한 것이며, 잠시 사적으로 보유하다가 결국 국가에 환수되었다. 그들이 활자를 주조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국왕과 가장 가까운 외척이란 신분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순조대에 또 한 차례 외척에 의해 활자가 만들어지게 되는데, 바로 1816년에 주조한 전사자(全史字)이다. 그 주인공은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綏嬪朴氏)의 친정 오빠인 박종경(朴宗慶, 1765~1817)이다. 그는 도승지, 공조 판서, 호조 판서, 이조 판서 등의 정부 요직을 역임하고 훈련대장과 어영대장을 맡아 병권까지 장악한 당시 정계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는 조선 후기에 대성(大姓)으로 성장한 반남 박씨(潘南朴氏)의 일족으로 박세당(朴世堂), 박세채(朴世采), 박지원(朴趾源)과 한 집안이다. 젊을 때 백부인 박윤원(朴胤源, 1734-1799)에게서 학문을 배웠는데, 박윤원은 김창협(金昌協), 이재(李縡), 김원행(金元行)의 학통을 계승하여 홍직필에게 전수한 당시 성리학계의 대학자였다.
1807년에 부친 박준원(朴準源)이 세상을 떠나자 백부와 부친의 문집을 간행해야 하는 책무를 가지게 된 박종경은 그들의 문집을 정리하고 이를 찍을 활자를 주조할 준비를 하게 된다. 박종경은 1814년에 정조의 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를 정리자로 간행할 때 전임 규장각 제학의 자격으로 교정(校正)과 감인(監印)을 담당하게 되는데 이 경험이 또 하나의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마침 활자를 주조하던 해에 박종경은 재정을 담당한 호조 판서로 재직하고 있으면서 국가의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대대적인 화폐 발행을 주도하고 있었다. 요즘 말로 양적완화 정책을 편 것이다. 이 일은 박종경이 활자를 주조하는 데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 동전 주조를 추진하는 단계에서 주물 기술을 가진 장인들과 용광로를 갖추어 놓은 채 동전의 주재료인 구리가 공급되지 않는 예기치 못한 사태가 발생한 탓에 도리어 활자를 주조할 기술력과 장비를 제공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동전의 주조에는 일본산 왜동(倭銅)과 중국산 주석이 사용되었다. 당시 왜동은 일본에서 직접 수입하는 방법과 동래부를 오가는 왜인들로부터 국제 통화인 은화를 대신하여 받은 구리를 모으는 방법으로 필요한 물량을 서울로 올려보내게 하였다. 이 왜동의 공급이 담당 관리의 소홀로 지연되자 박종경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동안 자신이 모아놓은 구리를 가지고 사적으로 활자를 주조한 것이다.
구리합금은 1200도 내외에서 용해되기 때문에 동전을 주조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용광로와 고도의 기술력이 요구된다. 당시 동전을 주조하는 주전(鑄錢)은 활자를 주조하는 주자(鑄字)와 동일한 공법으로 언제든 전환 가능한 기술이었다. 즉 1816년에 박종경의 주도로 제작된 동전과 활자는 동일한 용광로에서 태어난 형제와 같은 사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전사자가 주조되자 곧바로 인쇄에 들어가 그 해에 부친인 박준원의 《금석집(錦石集)》(12권 5책)과 6대조부터 조부까지 문집을 합집한 《오세유고(五世遺稿)》(6권 3책)를 인쇄하고 그 이듬해에는 박윤원의 《근재집(近齋集)》(32권 16책)과 《근재예설(近齋禮說)》을 인쇄하였다.
이 활자를 전사자(全史字)라고 부른 것은 활자의 글꼴이 청나라 건륭 연간에 《사기(史記)》에서 《원사(元史)》에 이르기까지 21종의 정사(正史)를 모아 간행한 《이십일사(二十一史)》, 즉 전사(全史)이기 때문이다. 글씨 모양은 매우 정교한 인서체로 되어 있으며 활자수는 20만자이다.
이 활자는 본래의 목적이 집안 조상의 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주조되었고 1817년에 박종경이 세상을 떠남에 따라 한동안 사용되지 않다가 1822년 남공철의 문집인 《영옹속고(潁翁續藁)》를 시작으로 구한말까지 많은 문인 학자들의 문집과 저술들을 인쇄하였다. 박지원의 《연암집(燕巖集)》도 이 전사자로 인쇄된 바 있다.
글쓴이 최채기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