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려진 그림과 드러난 그림
이연식(미술사가)
부르주아들을 향한 조소, <세상의 기원>
홍상수 감독의 영화 <밤과 낮>(2007)에는 남자 주인공이 오르세 미술관에서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의 <세상의 기원>을 보는 장면이 나온다. 무척 신기해하면서 이 작은 그림을 요리조리 살펴보는 주인공은 화가이고 유부남인데다 여성을 좋아한다. 그림 속의 모습이 처음 보는 것이 아니다. 다른 이들의 이목도 있으니까 점잔을 뺄 법도 한데, 어린아이처럼 스스럼없이 감탄을 표현한다. 주인공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술관에, 누구나 볼 수 있는 환한 자리에 이런 그림이 걸려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신기한 것이다.
<세상의 기원>은 종종 쿠르베의 진보적인 성향과 관련지어 언급되고는 한다. 쿠르베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리지 못했던 것을, 아름답게 꾸미거나 흐릿하게 암시하지도 않고는 냉정하고 사실적으로 그렸다. 쿠르베는 이전부터 우아하고 품위 있는 그림 대신에 투박하고 직설적인 그림을 그린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런 악동 쿠르베가 또 한 차례, 위선적인 부르주아들의 면전에 화끈한 걸 던져 놓았구나. 역시 쿠르베다! 온갖 허식을 벗겨내는 전위 예술가들의 대표주자가 아닌가!
그런데 <세상의 기원>은 애초에 여러 사람이 보도록 그린 것이 아니다. 1866년 당시 파리 주재 터키 대사이자 엄청난 부호였던 칼릴 베이의 주문을 받아 그린 것이다. 어디까지나 혼자서 은밀히 감상하기 위한 그림이었다. 첫 소유주가 파산한 뒤 이 그림은 여기저기 흘러 다니다가 자크 라캉(Jaques Lacan, 1901-1981)의 소유물이 되었다. 라캉은 이 그림을 시골집에 숨겨 두고 몇몇 지인에게만 보여주었다.
뚜껑과 알맹이의 두 얼굴
라캉은 초현실주의 화가 앙드레 마송에게 이 그림을 가릴 다른 그림을 그리도록 했다. 앞서 칼릴 베이 또한 <세상의 기원>을 보관할 때 조금 더 큰 그림으로 가려두었다. ‘뚜껑 그림’으로 야릇한 그림을 가려두었던 예는 적지 않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의 <옷을 벗은 마하>는 당시 스페인의 재상 마누엘 고도이의 주문을 받아 그린 것인데, 고도이는 이 그림을 개인적인 공간에 숨겨 두고 몇몇 주변 사람에게만 보여주었다. 그걸로도 모자라 고도이 역시 ‘뚜껑 그림’을 주문했다. 고야의 또 다른 그림, <옷을 입은 마하>였다. 평소에는 <옷을 입은 마하>가 보이도록 해 놓고는 이 그림을 위로 당겨 올리면 <옷을 벗은 마하>가 드러나도록 했다.
당시 스페인에서 나체화 같은 걸 공적으로 유통시켰다가는 종교재판소에 끌려가기 십상이었다. 그런 탓에 스페인 미술이 자랑하는 나체화는 이처럼 권력자의 주문을 받아 그린 것만 남아 있고, 그런 권력자라도 나체화가 고스란히 드러나도록 걸어두는 것은 부담스러웠다. 오늘날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는 ‘뚜껑 그림’과 ‘알맹이 그림’이 나란히 걸려서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관객들에게 요염한 눈빛을 보내고 있다.
나신(裸身)을 바라보는 동·서양의 시각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은 1981년에 라캉이 사망한 뒤에야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1988년 뉴욕의 브루클린 미술관에서 열린 쿠르베의 회고전에서 처음으로 일반 관객에게 공개되었고, 그 뒤 라캉의 유족이 상속세 대신에 이 그림을 프랑스 정부에 기증하여 오르세 미술관에 걸리게 되었다. 1995년 6월 26일,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서는 이 그림, <세상의 기원>을 미술관에 공식적으로 등재하는 행사가 열렸다. 이후 이 그림은 미술관 벽에서 당당히 관객을 맞고 있다.
한국에서도 <세상의 기원>은 포털에서 연령 불문하고 얼마든지 볼 수 있다. 포털의 담당자는 아이들도 보는데 이게 뭐냐며, 당장 내리라며 항의를 하는 사람들을 상대하느라 늘 골치가 아플 것이다. 그럼에도 담당자는 물러설 수 없고, 나름대로 기댈 곳도 있다. 이 그림이 위대한 프랑스 예술의 정수를 모아놓은 오르세 미술관에, 지금도 누구나 볼 수 있는 자리에 걸려 있다는 사실이다.
일본에서는 1890년대에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화가 구로다 세이키가 그린 나체화를 둘러싸고 커다란 소동이 벌어졌다. 좀 배웠다는 이들은 갖가지 근거를 들어가며 나체화를 옹호하거나 반대했는데, 이들의 논거는 예술적 표현의 한계와 음란함의 정의에 대해 나름대로 진지한 고찰을 담고 있어 흥미롭다. 일본에서 나체화를 둘러싼 논쟁은 뜻밖의 이유로 수그러들었는데,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스스로를 서구의 열강과 같은 반열에 올랐다고 생각하면서였다. 서구에서는 나체화가 아무렇지도 않게 전시되고 다들 그걸 고상한 예술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일본에서 나체화를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건 뒤떨어져 보이지 않겠느냐, 하는 분위기가 확산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예술적 가치’라든가 ‘표현의 자유’ 같은 덕목은 상당 부분 서구에서 이식된 것이다. 이미지를 공공의 시선에서 차단해야 한다는 생각은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나 있었고, 점잖으신 우리 조상님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여드는 공간에 발가벗은 여성을 그린 그림이 걸리는 장면 같은 건 상상도 못했다. 요즘 케이블 TV에서 영화 속 등장인물이 담배를 피우는 장면마다 꼼꼼하게 블러 처리한 걸 볼 때마다, 이제 한국도 서구의 눈치를 보지 않고 문화에 대한 독자적인 기준을 내세우는구나 싶어 뿌듯하다.
필자 소개이연식 (미술사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후,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전문사 과정에서 미술이론을 공부했다. 일본의 우키요에浮世繪와 양풍화洋風畵에 대한 논문을 썼다. 학부에서는 그림을 그렸고, 현재 미술책 저술과 번역을 병행하며 미술사를 다각도에서 조명하는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미술 글쓰기를 주제로 강의도 하고 있다.
- 저서
『아트 파탈』 (휴먼아트, 2011년),『눈속임 그림』 (아트북스, 2010년),『유혹하는 그림, 우키요에』 (아트북스, 2009년),『위작과 도난의 미술사』 (한길아트, 2008년)『미술영화 거들떠 보고서』 (지안, 2006년)
가려진 그림과 드러난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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