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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 예술과 그 사람이 일치했던 추사 김정희

 

아트앤스터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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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artnstudy.com

유승민(문화재 감정위원)


추사, 글로벌 연구 체계를 만들다

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그의 조부가 영조의 사위가 되면서부터 왕실이 각별히 보살피던 가문에서 태어나, 24세가 되던 1809년에 자제군관으로 선발되어 베이징을 방문할 수 있었다. 이 여행에서 김정희는 18세기부터 중국의 학문적 트렌드로 자리매김한 고증학을 이끌던 선배 지식인들을 직접 만나게 되었고, 그 만남은 그의 학술적 잠재력을 크게 여는 계기가 되었다. 이듬해 봄에 귀국한 뒤로 김정희는 부지런히 답사하면서 조선에 남아오던 금석을 직접 확인하는 한편, 인연을 맺은 청의 학자들과 서신을 교환하며 자료를 얻고 자신이 만든 탁본을 그들에게 보내는 등, 훌륭한 글로벌 연구 체계를 만들었다.

김정희의 여러 친구 가운데 침계 윤정현(尹定鉉, 1793~1874)은 쉰이 넘어 관직에 올라 요직을 두루 맡았다. 신라 진흥왕 때 세운 황초령비가 제자리를 찾는 데 크게 기여하기도 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추사와의 인연을 잘 보여주는, 간송미술관에 있는 대폭의 글씨(사진)를 받은 이로도 매우 유명하다.

커다랗게 쓴 두 글자'溪'는 윤정현의 호다. 그리고 그 왼쪽에 잘게 쓴 글자들은 이 두 글자를 쓰게 된 경위를 김정희가 직접 밝혀 적은 발문이다. 그 내용이 이렇다.

'梣溪' 以此二字轉承疋囑, 欲以隸寫. 而漢碑無第一字. 不敢妄作, 在心不忘者, 今已三十年矣. 近頗多讀北朝金石, 皆以楷隸合體書之, 隋唐來陳思王, 孟法師諸碑, 又其尤者. 仍梣其意寫就, 今可以報命, 而快酬夙志也. 阮堂幷書.

"’梣溪', 이 두 글자를 부탁받고서 예서로 쓰고 싶었다. (남아 있는)한나라 때 비에는 첫 글자 梣이 없지만 함부로 아무렇게나 만들어 쓸 수는 없었던 터라 염두에 두고 잊지 않고 지낸 지 이미 30년이 지났다. 근래 북조시대 금석문을 제법 많이 읽었는데 모두 해서와 예서를 합쳐서 썼고, 수와 당이래로 <진사왕비(陳思王碑)>, <맹법사비(孟法師碑)> 등 비들은 또한 그 가운데 그런 경향이 강해진 것들이다. 그래서 마침내 이들 비에 쓰인 글자의 원리를 따라 쓸 수 있게 되었고, 이제야 (친구의) 부탁에 답할 수 있게 되었으며 젊은 날부터 마음 먹었던 바를 풀 수 있게 되었다. 완당이 쓰다."

梣은 본래 나무의 이름인데 오늘날 흔히 '잠자리'라는 뜻으로 쓰는 침(寢)으로 바꾸어 쓸 수도 있다. 또 음이 '침'이라서 '침(枕)'과도 통용할 수 있다. 寢은 '눕다, 자다'라는 동사의 뜻으로 흔히 쓰이므로 梣溪는 '개울가에 눕다'가 되며, 枕은 누구나 알듯이 '베개'라는 명사나 '베다'라는 동사의 뜻이기 때문에 枕溪로 읽으면 '개울을 베다'가 된다. 결국 이리 쓰든 저리 쓰든 이 두 글자의 뜻은 '개울가에서 살다, 은거하다'로 읽을 수 있다.

궁구하는 진실된 마음과 사람을 대하는 정성

시대를 풍미했던 명가 김정희의 손에서 나온 명작이 한둘이 아니어서 걸작 하나를 꼽으라면 말도 안 되는 요구라고 하겠지만, 그래도 그런 청을 받는다면 나는 이 <침계(梣溪)>를 조심스럽게 꼽을 것이다.

글씨의 완성도는 말할 필요가 없다. 획에 들어 있는 기운이든 그 획과 점이 이루고 있는 조형이든, 보는 이 누구에게나 범상치 않은 느낌과 함께 마음 속에서 감탄스러움을 끄집어 내기에 충분하기에 말을 더 해 봐야 감상을 방해할 뿐이다.

나는 이 글씨가 걸작으로 꼽힐 수 있는 근거로 추사가 쓴 저 발문을 들겠다.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궁구하는 진실된 마음과 사람을 대하는 정성'이 모두 들어 있다. 궁구(窮究)는 끝까지 파고들어 연구하는 자세다. 서예가로서 추사는 문자학을 근간으로 하여 답사와 실사를 모두 갖춘 금석학자였다. 친구의 호를 예서로 써주려 했던 마음에는 자신이 예서를 깊이 안다는 점보다 예서라는 서체가 가지고 있는 상징성을 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첫 글자 梣부터 예서로 쓴 전례를 찾을 수 없어 30년을 고심했음은 전문 영역을 연구하는 자가 쉽게 타협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을 실천한 예로 들기에 충분하다. 이 점은 학자로서 추사가 바탕이 얼마나 진실되었던가를 잘 보여준다.

또 한 가지, 이 글은 추사가 학문의 근간에 '사람'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진실된 마음으로 학문에 정진했던 만큼 '사람의 가치'에도 밝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만 8년 동안의 제주 유배, 다시 북청 유배 3년. 유배 이전, 영광의 세월과 너무 대조되었던 유배지 생활을 겪으면서 그가 새롭게 보았던 것은 사람이지 않았을까? <침계>가 그의 생애 어느 시점에 쓴 것인지 아직 정확히 알지 못하나 그가 금문을 공부하고 동한의 예서를 익힌 다음 서한의 古梣를 연구한 세월과 30년을 합치면 대개 60대에 해당하니, 두 차례 유배 생활을 겪으면서도 친구와의 약속을 실천하려는 그의 의지부터 물론 대단하며, 그 이면에 추사의 정성스러운 마음을 읽을 수도 있으니 이 작품은 참으로 뜻이 깊다.

2006년, 그의 서거 250주년을 기리며 열린 특별전의 제목에 "학예의 일치"라는 말이 들어갔었다. 참으로 적절한 제목이지 않은가? 이제 나는 그 말에 '사람'을 더하려 한다. 추사는 "학문, 예술과 그 사람이 일치"했던 이었기 때문이다.


필자 소개유승민 (문화재 감정위원)
고려대학교에서 한국미술사(18세기 노론 청류의 서화) 전공으로 박사과정 수료.
고려대, 서울시립대, 조선대 등에서 한국미술사, 동양미술사, 일본미술사 등을 강의했고, 문탁네트워크, 푸른역사아카데미, 춘천시립도서관, 서울 노원정보도서관, 광명 오리서원, 아트앤스터디에서 대중을 위한 한국미술사, 우리 그림 읽는 법 등을 강의하고 있다. 현재 문화재청 인천항 문화재감정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학문, 예술과 그 사람이 일치했던 추사 김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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