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목소리, 마음이 모아지는 통로

category 名文---명작칼럼 2024. 11. 11. 17:20
반응형

목소리, 마음이 모아지는 통로

 

아트앤스터디

인문학 교육 포털. 진중권, 이정우, 강신주, 장의준. 대표 인문학자들의 인문학 특강!

www.artnstudy.com

김찬호 (사회학자, 성공회대 교양학부 초빙교수)


이미지보다 강력한 음성의 힘

군부독재 시절에 대중 매체에서는 거물급 야당 정치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목소리가 처음 방송을 탄 것은 80년대 중후반 민주화의 물결이 사회를 급격하게 바꿔갈 무렵이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음성이 그 전까지 얼굴 이미지로 상상했던 것에 비해 너무 가늘어서 놀랐던 기억이 선연하다. 그런데 지금도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인물들이 있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의 육성은 여전히 방송에서 금지된다. 그리고 일본의 대중문화가 거의 다 개방되었는데, 일본어 가사가 담긴 노래는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정적(政敵)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동영상은 공개하면서 왜 목소리는 철저히 차단할까? 일본인이 작곡하고 연주한 음악은 얼마든지 허락되지만 일본어로 부르는 곡은 금지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청각 신호가 시각 이미지에 비해 훨씬 강렬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쉽게 사로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권력자나 기득권 세력은 두려워한다) 히틀러가 독일 국민을 집단 광기로 몰아넣을 수 있었던 것도 당시 널리 보급되었던 라디오 덕분이었다. 게르만족의 우월성과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을 선동하는 그의 연설이 군중을 파고드는 데는 그 ‘올드 미디어’로 충분했다.

제레미 리프킨은 『공감의 시대』라는 책에서 청각을 다른 감각과 비교하면서 그 특징을 다음과 같이 짚어내고 있다. ‘청각은 가장 내면화된 감각이다. 촉각, 후각, 미각도 존재의 내면을 침투하지만 청각만큼 강력한 경험은 못 된다. 음악에 심취한 경험을 떠올려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 청각은 참여적 경험이다. 우리는 소리에 빠진다. 그에 비해 시각은 친밀감이 가장 떨어지는 가장 추상적인 감각이다. 시각은 고립시키고 분할한다. 예수회 신부이자 영문학자인 월터 옹(Walter J. Ong, 1912~2003)에 따르면 “전형적인 시각 관념은 판명과 분석이다. 반대로 청각적 관념은 조화와 종합이다

이러한 통찰은 일상 경험에 두루 적용된다. 우리의 감정은 시각보다 청각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 연인의 속삭임이 가슴을 설레게 하고, 고통당하는 자의 절규가 심금을 울린다. 부모나 배우자의 잔소리가 짜증을 일으키고, 직장 상사의 고함이 두려움을 유발한다. 스포츠 경기에서 응원의 함성이나 야유를 내지르지 않고 관람하는 것은 아무 재미가 없다. 목소리를 빼고 몸짓만으로는 사람의 가슴을 움직이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무성 영화로 공포물을 만드는 것은 쉽지 않지만 라디오 드라마로는 비교적 간단하다.

목소리, 영혼을 담아내는 그릇

우리는 상대방의 목소리만 듣고도 그의 신체적 건강과 감정의 상태, 그리고 나에 대한 태도를 정확하게 가늠할 수 있다. 소리는 단순한 물리적 신호가 아니라 마음을 울리는 파동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혼을 담아내는 그릇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온전한 삶을 영위하려면 음성이 자유롭게 표출되고, 그것이 진지하게 경청될 수 있어야 한다. 그를 통해 자아의 정체성이 확인되고 타인과의 관계가 형성된다. 고백과 공감, 유머와 위트, 맞장구와 추임새, 질문과 이견 등을 눈치 보지 않고 주고받을 수 있을 때, 나를 세우면서 남을 받아들이는 공동체가 가능해진다.

스마트폰과 SNS가 소통의 주된 통로가 되면서 청각 문화는 급격히 축소되고 퇴화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시각 이미지의 과잉 속에 각자 말없이 화면에 수동적으로 몰입하고 있고, 대인 간 소통도 모바일 메신저가 대세를 이룬다. 그런 가운데 우리의 마음은 점점 얄팍해지고 취약해지는 것은 아닐까. 그러한 상호작용에는 몸이 배제되어 있고, 인간의 존재감은 몸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발현되고 자각되기 때문이다. 지성과 감성 그리고 영성은 목소리의 회복을 통해 활성화된다

비루한 세계에 휘말리지 않고 삶을 고양시킬 수 있는 터전이 절실하다. 그것은 개인적인 수련과 연마를 요구한다. 동시에 그런 지향과 열망을 모아내고 더 놓은 차원으로 나아가는 관계망이 있어야 한다. 그것을 매개하는 통로 가운데 하나가 목소리다. 전통 교육에서 낭독이 강조된 까닭도 그런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우리의 일상에 다양한 음성이 되살아나야 한다. 이것저것 구경하느라, 디지털 자판을 두드리느라 닫혀 있던 입을 열어 생각과 감정을 드러내야 한다. 이어폰을 빼고 타인들의 생생한 목소리에 귀를 열어야 한다. 함께 시를 읽으면서 또는 합창을 하면서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살아 있음을 실감한다.


필자 소개김찬호 (사회학자, 성공회대 교양학부 초빙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동대학원에서 일본의 마을 만들기를 현장 연구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에서 문화인류학과 교육학을 강의하고 있으며 서울시대안교육센터 부센터장을 지낸 바 있고, 현재 교육센터 마음의 씨앗 부센터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
『돈의 인문학』(문학과지성사, 2011) 『생애의 발견 』(인물과사상사, 2009) 『문화의 발견』(문학과지성사, 2007) 『도시는 미디어다』(책세상, 2002) 『사회를 보는 논리』(문학과지성사, 2001)

목소리, 마음이 모아지는 통로

 

아트앤스터디

인문학 교육 포털. 진중권, 이정우, 강신주, 장의준. 대표 인문학자들의 인문학 특강!

www.artnstudy.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