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
김욱동 (문학평론가·서강대 명예교수)
영상의 제국에서 독서하기
이미지가 활자 매체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영상의 제국’을 세운 이 시대에 책을 읽는 것은 단순히 시간 낭비일까? 좀더 유용한 일에 시간을 사용하는 것이 더 현명하지 않을까? 놀랍게도 몇몇 학자들은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한다.
가령 미국 뉴욕 대학교의 디지털 미디어학과 교수인 클레이 셔키(Clay Shirky)는 그렇게 주장하는 대표적인 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흔히 ‘19세기 러시아의 양심’으로 일컫는 레프 톨스토이(Leo Tolstoy)의 대표작과 관련하여 셔키는 “이제 어느 누구도 『전쟁과 평화』를 읽지 않는다. 너무 긴 데다 그다지 재미도 없다”고 못 박아 말한다.
영국 노팅엄 대학교 철학 교수인 그레고리 커리(Gregory Currie)도 문학작품을 읽는 것이 우리에게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밝힌다. 그러면서 그는 “톨스토이 작품을 읽는다고 도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더 나은 인간이 된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셔키의 주장이나 커리의 주장은 그다지 설득력 있어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문학작품을 비롯한 책을 읽으면 동료 인간을 좀더 잘 이해하고 배려하는 ‘착한’ 사람이 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적지 않다. 가령 캐나다 요크대학교의 심리학 교수인 레이먼드 마(Raymond A. Mar)와 토론토 대학교의 인지심리학 교수인 키스 오틀리(Keith Otley)가 바로 그러하다. 2006년과 2009년 두 차례에 공동으로 발표한 연구 논문에서 그들은 소설을 자주 읽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다른 사람들을 훨씬 더 잘 이해할 뿐만 아니라 그들과 좀더 효율적으로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책을 읽는 이점이 어찌 이뿐이랴. 책을 읽게 되면 시간과 돈을 절약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경제적이다. 문학작품을 비롯한 책은 독자들을 좀처럼 갈 수 없는 저 먼 과거로, 그리고 저 머나먼 낯선 지역으로 안내한다. 서재나 거실에 앉아 가만히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돈 한 푼 들이지 않고서도 뭇사람이 한 경험을 맛볼 수 있다. 또한 독서는 우리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다.
피상적 독서 VS 심오한 독서
소설을 읽다 보면 흥미로운 사람들도 만나지만 참으로 이상한 사람들도 만나게 된다. 우리도 결국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적잖이 위안을 받는다. 그런가 하면 작중인물들이 겪는 파란만장한 삶을 보며 결국 실패란 삶의 소중한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런데 반짝인다고 모두 황금이 아니듯이 독서라고 모두 똑같지는 않다.
디지털 시대 인터넷의 웹사이트에서 하는 ‘피상적 독서’는 그렇게 효과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서핑(surfing)’이나 ‘브라우징(browsing)’이라는 표현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디지털 기기를 통한 독서는 어쩔 수 없이 피상적일 수밖에 없다. 서핑보드를 타고 바다 위를 휙휙 달리거나 가축이 목장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어먹는 것처럼 건성건성 책을 읽기 때문이다. 하이퍼링크를 따라 바쁘게 옮겨 다니다 보면 도저히 집중을 할 수 없다.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 아니 잔가지 몇 개만 겨우 볼 수 있을 뿐이다. 디지털 기기를 덮고 나면 지금까지 읽은 내용은 온데간데없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다.
물론 디지털 기기를 통한 독서를 ‘피상적’이라고 몰아가는 것은 옳지 않을지도 모른다. 간편하고 쉽게 정보를 검색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디지털 기기를 따라갈 만한 것이 없다. 다만 디지털 기기를 통한 독서는 지나치게 실용적이고 도구적으로 흐르기 쉽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을 따름이다. 책을 읽는 것은 단순히 정보를 얻기 위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 활자 매체를 통한 ‘심오한 독서’야 말로 우리의 정신을 살찌우는 가장 좋은 독서 방법이다.
창의적 사고를 기르고 비판적 사고를 함양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활자 매체로 된 책을 깊이 있게 읽을 필요가 있다. 오래 달군 쇠가 오래 뜨겁듯이 천천히 생각하면서 집중해서 읽은 책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피상적 독서가 햄버거나 피자 같은 인스턴트 식사라면 심오한 독서는 식탁에 앉아 제대로 먹는 본격적인 식사라고 할 수 있다. 인스턴트 식사가 육체 건강에 해롭듯이 피상적 독서도 정신 건강에 해롭다. 영국의 문학 비평가 프랭크 커모드(Frank Kermode)는 독서를 크게 ‘육체적 독서’와 ‘정신적 독서’의 두 가지로 나눈 적이 있다. 두말할 나위 없이 전자는 디지털 기기를 통해 정보를 습득하는 피상적 독서를 말하고, 후자는 삶에 대한 지식과 지혜를 터득하는 심오한 독서를 가리킨다.
행간으로 나누는 저자와의 대화
아침에 눈 뜨자마자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에 손이 가는 오늘날, ‘심오한 독서’는 그야말로 ‘멸종 위기’에 놓여 있다시피 하다. 희귀 동식물이나 고대 역사 유적처럼 훼손하지 않고 보존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지하철을 한 번 타 보라. 앞 좌석에 앉아 있는 일곱 사람 중 여섯 사람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고, 한 사람이 꾸벅꾸벅 졸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면 자칫 우리의 지식 기반 자체가 붕괴될지도 모른다. 한국전쟁의 폐허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낸 것은 다름 아닌 활자 매체에 기반을 둔 지식이 한몫을 톡톡히 했던 것이다.
활자 매체로 된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흰 종이 위에 찍힌 검은 글자를 읽는다는 것 이상의 깊은 의미가 있다. 책을 읽으며 우리는 그동안 잊어 온 나 자신을 돌아보고, 저자와 대화를 나누거나 논쟁을 벌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책을 읽으며 꿈을 꾼다.
필자 소개김욱동 (문학평론가·서강대 명예교수)
한국외대 영문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뒤 미국 미시시피 대학교에서 문학석사, 뉴욕주립 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디지털 시대의 인문학』, 『번역과 한국의 근대』, 『은유와 환유』 등 50여 권의 저서, 『앵무새 죽이기』, 『위대한 개츠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등 30여 권을 번역서를 출간했다. 현재 서강대 명예교수이며 울산과학기술원(UNIST) 특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우리는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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