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우울과 피곤, 선잠의 세계
당신은 나의 염세가 궁금하다 했던가
나는 피곤과 우울을 구별하지 못한다. 나는 지금 피곤하다. 눈이 감긴다. 다시 말해 우울하다. 커피와 운동이 주는 각성을 빌려 몸은 자는데 정신만 붕 떠있다. 아니 반대인가. 정신은 이미 쇠락하여 언덕 너머 뒤안길에 남겨진 채 삶은 흐르는데 젊은 몸은 방황하며 헤메인다. 몸과 정신의 흐릿해진 경계. 흩뿌려진 안개만큼이나 모호하다. 피곤이 먼저인가 우울이 먼저인가.
가능성의 꽃봉오리가 피어나기도 전에 저물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눈을 떠야 할텐데, 꽃은 피어나야 할텐데. 나는 해를 향해 기지개 피우기보다는 어둠에 가려져 고개를 떨군다. 행위가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가, 나의 존재가 일생에 걸쳐 행위하도록 이끄는가. 나는 결정되고 매듭지어진 존재인가, 끊임없고 지난한 삶의 과정을 통해 증명해야하는 존재인가. 나는 무엇이고 지나온 삶의 고통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별 볼일 없는 삶을 뒹구는 소리가 들린다. 치덕치덕 으깨지고 뭉개지는 삶.
그곳에서 나는 개별된 존재로 구분되지 않고 타인의 취향과 사상과 소음에 길들여져 목에 밧줄이 메인 짐승처럼 그렁한 눈망울을 하고 선다. 그마저도 감기고야 말 커다란 눈이 총기를 잃고 흐릿해져간다. 희뿌연 검은자와 탁한 흰자가 경계를 잃고 뒤엉킨다. 나는 피곤하다. 나는 쉬고싶다. 반복되는 아침의 피로를 박차고 일어날 다리가 없다. 울어대는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버리고싶지만 손이 없다. 사지가 절단된 몸뚱아리는 귀를 막을수조차 없다. 쉬이 잠들지도 못하고, 일어나 살지도 못하고 방 한구석에 허물처럼 벗어놓은 구겨진 바지처럼 누워있다. 무방비로 방치된 나의 삶.
나는 몸에 갇혀 도처에서 쿵쿵거리는 진동과 웅성거리는 소음에 둘러쌓여 삶이 그저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나는 팔다리가 잘린 채로 덜컹이는 교통수단에 실려 움직인다. 흔들리고 깨어지고 부딪히는 삶.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감수할 수밖에 없는 덜컹거림이 있다. 그러나 그 끝에 나는 그것을 손에 쥐고 돌아왔는가. 고작 지갑과 핸드폰만을 잊을새라 움켜쥐고 넘치는 졸음의 범람에 기댄다. 그러나 한가로운 벤치에 앉아 모든 것을 손에 쥔 인간이 있지. 나는 오늘 그것을 바라보다 오는 길이다. 내가 평생에 걸쳐 원했던 것을 자연스럽게 얻어버린 인간을.
인생이 나에게 거칠고 흙먼지로 뒤덮힌 산길이었다면 그에게는 미끄럼틀이었겠지. 겨울철 포대자루를 끌고 눈길 위를 미끄러져 내려오듯 시원하고 매끈하게 내리지르는 감각, 그 나름의 힘든 일도 있었을 것이나 그저 주어진대로 미끄러져오면 되는 인생 말이다. 그에 반해 타고나면 피투성이가 되어버리는 가파르고 울퉁불퉁한 절벽, 벌레 가득한 진흙더미, 나의 미끄럼틀. 피부 밖으로 날카롭게 튀어나온 골절된 뼈가 흔드는 손을 대신한다. 당신이 해맑은 얼굴로 손을 흔들며 건네는 인사에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나 역시 안녕이라고, 그러나 잔뜩 낀 축축한 이끼와 조화로 장식된 뼛조각을 당신 얼굴 앞에 들이밀면서, 귓가를 웅웅대는 날벌레 몇마리가 대신 말할 것이다.
이것은 나의 실존이다. 떼놓을 수 없고 분리할 수 없이 내 존재에 따라붙는 나만의 것이다. 내가 세상을 감각하는 방식, 나의 삶. 그간 세상이 나에게 주었던 것들. 그로부터 좋은 것을 피워내기 이전의 축축한 거름 덩어리. 당신에게는 포장하거나 가공하지 않아도 좋을 무해함이 있지, 애써 피워올리지 않아도 자연스레 배어나오는 사랑스러움이 있지. 나에게는 사고를 섞어 반죽하지 않으면 형태가 잡히지 않는 혼란스러움이 있다. 나에게는 오랜 인내로 구워내지 않으면 남들에게 들이밀 수 없는 축축한 반죽 덩어리가 있다.
당신들은 나의 염세를 궁금하다 했던가. 이것은 솔직한 방식으로 포장된 나의 무엇이다. 나의 경멸, 나의 우울, 나의 자기혐오, 그리고 나의 그리움의 실체. 이제 나는 낱낱이 뜯어놓아 해부하며 전시한다. 이것은 나의 허파, 이것은 나의 간장, 이것은 나의 썩어빠진 간과 더이상 피를 돌리지 못하는 차가운 심장이라고. 잔인한가? 아니, 진정 잔인한 것은 나의 팔다리를 떼놓은 삶이었겠지. 당신은 나의 삶을 결단코 이해할 수 없다. 자신의 잣대로 납작하게 찍어내어 나를 이해하고자 노력하지도 마라. 우리는 닿을 수 없는 평행선일 뿐이다. 나 역시 당신을 이해할 수 없다. 이 전제는 내가 맥락없이 눈물을 삼키는 바로 그 이유이며, 당신 앞에서 입을 다물고 침묵하기를 선택하는 까닭이고, 끝없이 고뇌하고 우울에 빠져드는 나의 심연이다.
분화되어버린 삶. 오해로 미끄러져내리는 이해라는 착각과 피상적인 위로와 하나마나한 말들이 공기를 떠돈다. 악취가 난다. 그러니 당신이 그냥 입을 다물어주었으면. 당신의 모든 소리와 멀어질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을 나는 갈구한다. 아주 좁은 방에 갇혀 손톱이 빠져라 긁어대는 짐승처럼, 나는 내면의 작은 방에서 피흘리는 인간이다. 바람빠진 풍선처럼 푸쉬시- 구멍이 난 페르소나를 가진 인간이다. 나의 풍선이 기괴한 얼굴로 찌그러지며 당신 앞에 내려앉을 때 스쳐간 표정들을 나는 잊지 않는다.
어느 글에서 그리워하는 순간을 떠올리며, 우리가 이미 멀어지고 서로 다른 삶을 살지라도 사랑의 순간에 서로에게 건넸던 진심만큼은 진짜라고 적었다. 마찬가지로 내가 겪은 나의 삶의 진실 역시 부정될 수 없는 것이다. 눈을 가린다 한들 존재가 사라지지 않듯이. 당신이 남몰래 나를 찢어죽여도 흩뿌려진 핏방울을 쉽게 지워낼 수 없듯이. 대상없는 분노와 그리움, 억지로 피워올린 희망, 그로인해 비롯되는 역겨움과 자기혐오. 동경해 마지않는 당신이 될 수 없는 설움. 불만족과 피로와 피곤. 나는 자꾸만 집에 가고싶다. 거실에 누워 집을 찾으며 되뇌이는 혼잣말을 들은 이들은 묻는다. 네 집이 어디냐고. 대답한다. 나도 모른다고.
내가 가고싶은 곳은 어디인지, 가야하는 곳은 어디인지, 내가 있어도 되는 곳은 어디인지 나는 가리워진 눈으로 헤메인다. 무의미의 지옥이 나를 가르킨다. 시지프스의 손가락이 나를 일컫는다. 끝없는 반복과 돌아오지 않는 것에 대한 그리움과 다가오지 않을 일상들이 저 멀리서 비웃듯이 나를 지목한다. 나를 변호하는 것은 모호하게 미끄러지는 선잠뿐이다. 말끔해진 정신과 충분한 휴식을 취한 몸뚱이가 아니라 휴식을 감각하는 얕은 자각몽의 세상만이 나를 위로한다. 나는 끊임없이 굴러떨어지는 바위인가, 바위를 밀어올리는 시지프스가 나인가. 꿈꾸는 나비가 먼저인가, 나비의 꿈이 먼저인가. 나의 존재는 흩어지는 틈바구니 속 뭉쳐진 작은 먼지인가.
피곤이 먼저인가 우울이 먼저인가. 둘 다인가. 피곤은 해소될 수 없는데 어떡하지. 우울은 해결될 수 없는데 어떡하지. 꿀꺽, 나는 알약을 삼킨다. 파란색이었는지 빨간색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어린시절 뒷간에서 얼굴없는 긴 머리가 기괴한 신음을 흘리며 흔들었던 것이 무슨 색인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어디까지가 삶이고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까지가 몽상이지. 기억은 어디선가 읽은 것처럼 모호하다. 그리하여 기억의 연속성으로 존재를 규정하는 인간은 경계 밖으로 풀려난다. 선잠 속을 떠돌며 현실과 그 이외 세계에 팔다리를 걸쳐놓는다. 사분면에 걸쳐진 팔다리를 누군가 잡아당긴다. 자신의 세계의 일부가 될 것을 재촉한다. 어느것도 선택하지 못하고 팔다리가 모조리 뜯겨 낡아빠진 몸뚱아리만 남아버린 삶. 자신의 일부가 떨어져나가며 추락한 신체는 이제 어느쪽에 더 가까워져있나, 경계없는 선의 경계를 빤히 바라본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다.
최근에는 원형적 순간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나의 무력감과 나의 슬픔 나의 분노, 나의 사랑과 그리움과 그 모든것을 담은 최초의 순간. 재생 반복되며 일련의 사건들에서 내가 재확인하고 있는 내면 깊은 곳의 기억과 감각. 또렷이 기억하고있고, 완전히 지워버린 몇개의 장면들. 환상인지 꿈인지 내가 겪은것인지 읽은것인지 구분되지 않는 원형들. 차마 여기 적지는 못하겠다. 어쩌면 나도 무엇인지 모르기에 말해질 수 없는 진실들. 존재는 현상의 틈바구니에서 부유한다.
나는 뜯다말고 대충 욱여넣어 다시 포장해버린 택배 선물상자와 같다. 이제는 누구도 파악할 수 없다. 뒤틀린 배치와 찌그러진 형체와 뒤섞인 불순물들이 곱게 닫힌 문 틈 사이로 엿보인다. 바퀴와 쥐가 갉아먹고 번식한 새끼들이 튀어나오고 배설물이 배어나온다. 역겨운 것들의 틈새에서 선물일 수 있었던 원형들을 골라모은다. 이름 붙인다. 나는 쓴다. 수신 불명. 반송되어 돌아오는 우편도 있고 과거로부터 미래에게 전해지는 편지가 있다. 강남 한복판의 전단지처럼, 무차별하게 살포되는 삐라처럼 천지를 팔락거리며 휘젓다 누구의 눈길이 닿기도 한다.
쓴다는 건 이토록 처절한 것. 최근 어느 밤, 하루를 꼬박 넘긴 어느 대화에서 나는 살기 위해 쓴다고 말했다. 쓰지않고 삶을 견디는 법을 나는 모른다고. 내가 쓰는 글은 화분속에 담긴 일종의 조화(플라스틱 꽃)같다. 화분 속 지렁이처럼 살아 꿈틀대는 몸뚱아리와 미생물처럼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나의 거시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미시세계의 사건들. 분자 단위의 장면들. 발아하지 못한 아름다운 꽃송이들은 씨앗의 형태로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 틀어박혀 숨죽이고 있다. 빠르고 쉬운 방식으로, 아니 어쩌면 나에게는 유일한 방식으로 그저 쌓아 올리는 것은 내가 피워내고 싶었던 모습의, 그 언젠가 당신이 나에게 주었다 뺏어간, 내가 결국에 스스로에게 쥐어주고야 말 아주 아름다운 꽃 한 송이의 모습을 닮은 플라스틱 조화. 그럴듯한 향기를 풍기며 흩날리는 비누향 장미꽃잎 몇 장으로 화분을 장식한다.
그렇다면 내가 피워낸 조화는 가짜인가? 아니, 그것도 나의 일부다. 내가 박아넣어 나로 편입시킨 나의 세계이다. 나라는 존재의 경계는 어디인가. 어디까지 나를 구획해야 할까. 내가 꾸며낸 나의 정원을 구성하는 건 얼룩덜룩 기워붙인 천쪼가리, 잡동사니를 긁어모은 콜라주, 좋아보이는 것들만 골라모아 기괴해진 키메라. 이 모든 것은 결국 나다. 내 안에는 길들일 수 없는 생물이 있고, 여전히 누르면 피가 왈칵 배어나오는 절상이 있고, 무해한 겉껍질이 있으며, 작은 마찰에도 쉽게 쓸리고 부어오르는 진피가 있고, 부숴지지 않는 단단한 씨앗이 있고, 결석처럼 돌아다니며 고통을 주는 날카로운 결정들이 있고, 석류알처럼 알알이 피어나는 사랑이 있다. 울타리를 허물고 나라는 인간의 경계를 모호히 무한하게 확장하기.
나는 생각들이 백지 위에서 위험하게 뛰어놀고 소리지르고, 울고 웃는 것들이 잠잠해져 자리에 앉으면, 배를 열어 해부한다. 아름다운 것들은 포르말린 용액에 넣어 보관한다. 더러운 것들은 언어로 이루어진 거름망에 걸러 내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자음과 모음을 씨줄삼고 날줄삼아 그물지어 골라낸다. 내가 되고싶은 것들만 골라 편입시킨다. 나는 그렇게 내가 된다. 당신의 꽃밭에는 빛나고 향기로운 것들이 많아, 벌과 나비가 넘쳐난다. 나도 그저 한 마리 나비였나. 나는 동경한다. 물론 씨앗이 아닌 꽃으로 태어나는 것이 없음을 나도 모르지 않는다. 그러니 내가 관심 갖는 건 당신이 내민 꽃이 아니라 그 꽃이 사는 축축한 대지. 순수가 아니라 순수를 피워내는 최초의 원형. 위험한 혼잣말을 감싸안은 포장지이다.
괴롭다. 나는 내가 살수도 있었을 어느 삶의 가능성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삶이 아니다. 나는 나의 삶을 굴릴수밖에. 내 삶은 손잡이 없는 뜨거운 냄비같은 것. 손잡이를 쥔 당신들은 그저 들고 옮기면 되지 않겠냐고 말하지만 나에게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나는 익어버리고 녹아내린 손을 붙잡고 당신에게 말을 건넨다. 맞잡은 당신의 손이 시원하고 쾌적해서, 형체가 무너져내리는 손모양을 당신이 깍지끼고 꽉 붙잡아주어서 나는 자꾸만 떠올린다. 당신의 모양대로 자국이 남아버린 흐믈거리는 슬라임을 애써 주워담는다. 고양이가 헤어볼을 토하듯이 한글로 토해낸 글을 젤리같은 손으로 이리저리 굴려본다.
나는 골라모은 천쪼가리를 기워 당신과 내가 겨울을 보낼 스웨터를 지어주고야 말겠다. 당신에게 아름다운 꽃 한 송이를 주고야 말겠다. 내가 꾸며낸 아름다운 정원에 초대해 당신을 웃게 할 것이다. 그러니 그 자체로 아름다울 수 있다면, 당신이 그것을 보고 웃을 수 있다면, 내가 피워올린 것이든 어디선가 옮겨심은 것이든 단단한 조화이든 무슨 상관인가. 그것들은 여전한 삶의 고통을 적어도 조금은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어주기도 했다. ‘더 좋을거야’의 안쪽에는 죽고싶다는 혼잣말이 있었다. ‘어쨌든 사랑’의 뒤에는 슬프다는 중얼거림이 있었다. ‘사랑으로 살자’는 다짐 뒤에는 생략된 X발이라는 거센 다짐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피워낸 수많은 글에는 X같다는 현실 인식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빈번한 절망과 잔잔한 슬픔이 도사리는 세계. 그러므로 그것들은 숨기어내거나 위험해서 검열한 것이 아니라, 너무 당연한 전제라서 생략한 것들에 불과하다.
죽고싶다고 종종 혼잘말로 되뇌었다.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은 힘을 가진다는데, 진짜 죽어버릴새라 수정하는 발화. 죽고싶은게 아니라 잘 살고싶은 거겠지. 간절한 거겠지. 바라는 거겠지. 그러나 이어지는 혼잣말. 다시 수정한다. 그만 하고싶다. 그냥 가만히 내버려뒀으면 좋겠다. 내 삶으로부터의 탈출, 내 삶에서 먼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끈질기고 끈적하게 달라붙는 나에게서 끊어지고 싶었다. 나는 내 존재를 잃어버리고 싶다. 선잠의 세계. 모호한 기억의 경계와 흐려지는 존재의 구획. 흩어지는 연속성과 달콤한 휴식. 나는 회복이 아니라 휴식을 원한다. 쉬지 않고 잡을 수 있는 힘이 아니라 흩어지는 모래알 사이로 힘이 풀려버린 손아귀를 원한다. 남은 것은 고귀한 추락. 놓아버리면 남는 것은 고작 그것뿐이라는 것을 왜 모르겠는가. 잠시간의 자유. 귓가를 스치며 불어오는 바람과 넘치는 가속도에 세상이 나를 스쳐가는 감각.
그러나 끝내 꿈 속 세계는 나를 추방한다. 팔다리가 잘린 채 시체처럼 누운 내 귓가에 들려오는 꼬끼오- 울어대는 닭과 지저귀는 새들의 역겨운 노랫소리. 어느 세계에도 정착할 수 없는 존재의 부유. 존재의 필연, 존재의 심연. 망각 저 너머로 휘발되는 아득한 기억들. 건너편 세계의 그는 이제 해방되었나? 모든 숙제와 비밀들을 이쪽으로 이관한 채 평화롭게 흩어져버렸나.
나는 당신에게 아름다운 것들을 주고싶다. 그러나 동시에 그냥 잠들고 싶다. 눕고싶다. 선잠의 세계에 살고싶다. 다시 한 번 빨간 알약과 파란 알약을 들이미는 손. 아아 무슨 색이 현실이고 무슨 색이 꿈이었더라. 흐려지는 경계, 흩어지는 기억. 나도 몰라. 잠시만 기다려줘. 선택을 조금만 유보하게 해줘. 나는 깨어나고 싶지도 않고 영영 꿈속에 갇히기도 싫다. 그저 흩어지고 싶다. 꿈과 현실을 모두 감지하고 현실의 몸과 너머의 정신으로 감각하는 선잠에 세계에 흘러들고 싶다.
아아, 피곤하다. 아니 우울한 것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이만 침대에 누워야겠다. 잠에 들어야겠다. 그러나 영영 잠들지는 않을 것이다. 시간이 되면 해는 뜨고, 창문 너머로 햇살은 들어온다. 설령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고 또 몇시간이 흘러 언제일지 모를 한낮이 되더라도, 아주 늦은 늦잠이 되더라도, 나는 다시 눈을 뜰 것이다.. 아니 그저 흩어지려나.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버리고 싶은 욕망이 간절하다. 그러나 손이 없다. 제발 나를 깨우지 말아줘. 나를 잊어줘. 사라져줘. 아침이면 울던 닭이 어디 갔더라. 숨어있다가 내가 잠든 사이 내 눈을 파먹으려나. 아니 내가 닭이었나. 나는 누구였더라. 잠에 빠져든다. | [김인규 에디터]
우울하면 더 피곤해지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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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는 우울증의 흔한 증상 가운데 하나다. 우울할 때 특히 더 피곤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울하면 에너지를 많이 소진하게 된다. 이로 인해 정신적 피로는 물론 신체적 피로도 증가하게 된다.
슬픈 감정이나 외로운 감정에 빠져들수록 피로는 더 심해지고, 잠을 제대로 못 자는 것도 악화되는 원인이 된다. 불안 심리 때문에 제대로 잠들기 어렵고 자는 동안에도 숙면을 취하지 못해 피로가 회복되지 않는다.
우울증은 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 세로토닌과 같은 뇌의 신경전달물질과 연관이 있다. 이러한 신경전달물질은 에너지 수치, 수면, 식욕, 의욕, 즐거움 등을 조절하는데 중요한 기능을 하기 때문에 우울증으로 이러한 물질들이 제대로 분비되지 않으면 피곤해지게 된다.
하버드대학교 의과대학 회보에 실린 연구에 의하면 우울증은 유전적 요인, 의학적 컨디션, 스트레스를 일으키는 사건, 뇌의 화학물질 등이 다양하게 연계된 복합질환이다. 건강한 사람들이 일상에서 느끼는 피곤과 우울로 인한 피곤을 서로 구분하기 쉽지 않은 이유다. 우울증으로 찾아온 피로를 일상에서 느끼는 흔한 피로로 착각하기 쉽다는 것이다.
◆ 우울해서 피곤한 건지, 일반 피로인지 어떻게 구분할까?
우울로 인한 피로와 일반적인 피로 모두 에너지 저하, 의욕 감소, 쾌감 상실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한 가지 구분 가능한 요인이 있다면 활동에 참여하고 싶은 욕구다. 단순히 피곤한 사람들은 피로를 회복한 뒤 다시 일상 활동으로 복귀하고 싶어 하지만 우울증이 있는 사람은 이러한 활동 자체에 거의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침체된 기분 상태가 유지되는 기간도 중요하다. 잠을 잘 자고 난 뒤 혹은 충분히 휴식을 취한 뒤 에너지가 향상되고 기분이 좋아진다면 단순 피로다. 하지만 잠을 자고 일어난 뒤에도 또 다시 피로감을 느낀다면 우울감이 피로의 원인일 수 있다.
우울로 인한 피로는 모든 순간 스며들 수 있다. 신체적으로는 먹기, 샤워하기, 옷 입기 등 매일의 일상적인 일조차 하기 힘들어질 수 있다. 몸이 무겁게 느껴지고 행동이 굼뜨게 된다. 인지적인 관점에서는 집중하기, 정보 처리하기 등의 작업에 지장이 생겨 일을 원만하게 수행하는데 어려움이 생긴다. 감정적으로는 직장 동료나 친구, 심지어 가족과의 감정적 교류에 어려움이 발생해 점점 더 외로워지거나 절망감을 느낄 수 있다.
◆ 우울증이 있을 때 잘 자려면?
적정 수면 시간은 하루 7시간 정도다. 하지만 우울증이 있는 사람은 7시간의 수면이 어려운 과제다. 잠들기 어려울 뿐 아니라 깨지 않고 연속적으로 자는데도 어려움을 느낀다. 하지만 수면 시간은 피로를 회복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자야만 피로를 풀 수 있다.
밤잠의 질이 떨어지면 오후 시간 자꾸 졸음이 쏟아지고 낮잠을 자게 되는데 이는 다시 밤 시간 수면을 방해하는 원인이 된다. 우울증이 있는 사람은 가급적 활동하는 낮 시간대 잠을 자지 않고 깨어있으려는 노력을 통해 수면 패턴을 개선해나가야 한다. 잠이 안 오더라도 매일 일정 시간 눕고 동일한 시간에 일어나는 수면 스케줄을 유지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잠들기 전 술에 의존한다거나 스마트기기를 무의미하게 스크롤링하는 하는 시간도 줄이는 것이 좋다. 특히 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다른 사람들의 사진이나 일상을 보는 것은 더욱 기분을 우울하게 만들고 잠을 방해할 수 있다. 스크린의 불빛 역시 잠을 자는데 도움을 주는 멜라토닌의 생성을 방해한다.
만약 이러한 전략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수면의 양질이 향상되지 않고 우울감이 깊어진다면 수면 전문의를 찾아 상담을 받아보는 것이 좋다. 피로가 우울증과 연관된 것인지, 혹은 다른 약물 부작용 때문인지, 혹은 또 다른 원인질환이 있는 것인지 등의 여부를 체크해보아야 한다.
당신도 우울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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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깔린 많은 종이들 가운데 하나를 탁 집어 책상 위에 올려놓는 일. 흔히 언론의 역할로 불리는 어젠다 세팅(Agenda Setting·의제 설정)이 그와 같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에는 수 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진다. 그 중에 뉴스 소비자들에게 의미 있는 이야기가 뭘까. 고민과 취재를 거쳐 우리가 내놓는 기사(어젠다)는 독자에 말을 거는 일이다. 뉴스 수명이 갈수록 빨라지는 요즘, 조금이라도 더 많은 독자들과 나누고 싶은 세계일보만의 기사를 소개한다.
2030세대 우울증은 2010년 22.69%에서 2022년 35.26%로 크게 늘었다.
매사에 흥미나 즐거움이 거의 없다, 기분이 가라앉거나 우울하거나 희망이 없다고 느낀다, 잠들기 어렵거나 자주 깬다(혹은 잠을 너무 많이 잔다), 피곤하다고 느끼거나 기운이 거의 없다, 식욕이 줄었다(혹은 너무 많이 먹는다)...보건복지부가 제시한 ‘우울증 자가 체크 리스트’중 일부다. 얼핏 보기에도 심각한 질병으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평이(?)한 증상들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요즘처럼 경기가 좋지않고 싸움질이 일상인 정치권, 전직 국가대표가 연루된 희대의 사기 사건, 연예인 마약 사건 등 나쁜 뉴스들이 대세인 한국 사회에 많은 이들이 우울할 법하다.
우울증으로 병원을 찾은 이들이 지난해 처음으로 100만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입시·취업 무한경쟁...코로나 후유증...청춘은 아프다’(11월4일자·정진수 기자) 기사는 연령별로 가장 많은 우울증을 앓는 2030세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10여년전만해도 60대 이상 노년층이 우울증 환자의 36%를 차지했는데 지난해 20, 30대 환자들이 이를 앞지른 것이다. 나라의 미래를 이끌어가야할 젊은 세대가 우울과 불안, 극심한 스트레스와 싸우고 있는 셈이다.
병원 진료를 받은 우울증 환자수가 지난 2022년 100만명을 넘어선 가운데 정신건강 관련 병의원 수도 늘고 있다.
◆가파르게 늘어난 젊은 층의 우울증
금세기 최악의 전염병인 코로나 19 팬데믹은 전 세대, 전 세계에 걸쳐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악영향을 남겼다. 특히 또래 집단과 교류 폭이 클 수밖에 없는 젊은 세대들은 코로나로 인한 단절감에 취약했다. 백종우 경희대학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본지 인터뷰에서 이를 코로나의 ‘네 번째 파고’로 설명했다. 질병 자체로 인한 사망자 증가, 의료 시스템 과부하로 치료 받지 못한 이들의 사망 등을 거쳐 네 번째 파고인 정신질환의 증가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전 세계적인 추세에도 불구하고 유독 대한민국에서 젊은 층 우울증 환자가 급증한 이유는 뭘까. 청소년기 과도한 사교육 경쟁, 치열한 취업 전쟁이 주 원인으로 꼽힌다. 이는 경쟁 스트레스를 넘어 상대적 박탈감, 고립감, 패배감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단절감, 사회관계망 서비스 발달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도 영향을 미쳤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일각에서는 최근 들어 사회적 이슈가 된 젠더 갈등도 2030 여성들에 부정적으로 작용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문제는 젊은 층의 우울증이 극단적 선택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데 있다. 실제 우울증 환자의 30%가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울증을 현명하게 극복하기 위해서는 요가 등 건강한 생활 습관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술, 약 의존보다는 건강한 일상 만들기
네달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 연구팀은 우울 및 불안 장애를 앓고 있는 환자 141명을 두 그룹으로 나눴다. 한 그룹은 16주간 항우울제를 복용했고, 다른 그룹은 일주일에 2회씩 45분간 뛰게했는데 똑같은 치료 효과를 얻었다고 한다. 본지에 ‘김병수의 마음치유’ 칼럼을 게재하는 김병수 정신건강 전문의가 소개한 유명 의학 학술지에 실린 최신 연구 결과다. 김 전문의는 칼럼에서 “항우울제만큼이나 효과 좋은 치료법은 운동”이라면서 “기분이 저조해졌을 때 실천에 옮길 활동 목록을 적어 책상 앞에 붙여두고 실천해보자. 산책하기, 반려견과 함께 놀기, 음악 감상, 가족사진 보기, 시장에 가보기, 명상과 요가, 일기 쓰기, 날씨 좋은 날 뒷동산 오르기. 무엇이든 좋다”고 썼다.
음주는 금물이다. 김 전문의는 “음주 습관을 조절하는 건 정신건강을 지키는 데 매우 중요하다”면서 “음주는 자기 문제에서 도피하려는 심리적 회피다. 술로 뇌를 마취시키려고 해선 안된다”고 했다. 최준호 한양대구리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도 본지에 “음주는 우울증을 악화할 뿐 아니라 약물 치료시 효과를 떨어뜨리는 만큼 피하는 것이 좋다”면서 “약물치료도 여전히 ‘무딘 무기’인 만큼 운동과 생활습관 변화 등 무기를 병행해야 좋은 결과로 이어진다”고 했다.
우울증에 탁월한 치료약은 운동이다.
P.S. 취재한 정진수 기자에 물었습니다.
-2030세대 우울증에 주목한 계기는.
“코로나 19 기간 많은 사람들이 우울감을 호소해서 코로나 블루라는 말까지 생겼다. 관련 취재를 하는 과정에서 정신과 의사들은 포스트코로나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특히 이 피해가 젊은층에 집중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사실 파급 효과가 나타나기까지 오래 걸릴 거라고 생각하고 잊고 지냈는데, 정신건강의학과가 위치한 건물의 엘리베이터에서 젊은 사람 4명이 우르르 내리는 것을 보고 그 실태를 취재하게 됐다.”
-취재 과정에서 젊은층 우울증의 심각성에 관해 느낀 점이 있다면.
“바로 자살이다. 한국 자살률이 높다는 것은 익히 알려졌지만 실제 2030의 사망 원인 1위가 모두 자살이었다. 질병에 의한 사망자수는 적을 수 밖에 없는 연령대임을 감안하더라도 그 수치가 너무 높았다.”
-젊은층의 우울증 개선을 위해 필요한 대책은.
“우울증은 개인의 유전적 문제 외에 환경적 요인이 함께 작용한다. 개인 차원에서는 정신건강의학과를 다니며 치료하라는 것이 가장 현실적 조언이겠지만 부동산, 사교육, 무한경쟁 등 스트레스를 높이는 사회문제 개선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 후자가 없이는 사실상 재발 요인이 그대로 남기 때문이다. 다만 사회적 시스템 개선에는 시간이 걸리는 만큼 고립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안정을 찾을 수 있도록 복지제도 차원에서 사람들간 연결을 지원하는 지역 사회 네트워크 구축이 필요하다.”
<관련기사>
입시·취업 무한경쟁… 코로나 후유증… 청춘은 아프다 [S스토리-우울증 앓는 2030]
https://www.segye.com/newsView/20231103515750
우울증약 중독 된다? 정신질환 치료 잘못된 속설은 [S스토리-우울증 앓는 2030]
https://www.segye.com/newsView/20231103515910
[김병수의마음치유] 우울증약처럼 효과 좋은 활동하기
https://www.segye.com/newsView/20231019518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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