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너 메이크스 젠틀맨
오전 열한 시. 새벽에 일어나 몇 시간 글 하나 쓰다가 굳은 근육을 아파트 운동실 가서 풀어주려다가 관뒀습니다. 꼴 보기 싫은 사람이 거기 있을 시간이었거든요. 그래서 이 글이나 쓰기로 했습니다. 이 글 제목-Manner Maketh Gentleman-은 꽤 인기였던 할리우드 영화 ‘킹스맨’에 나온 대사인 거 아시죠? 하지만 여러 꼴을 보면 매너가 사람 만드는 건 남자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더군요.
나보다 서너 살 어려 보이는 그자는 열한 시 좀 넘어 가면 언제나 나보다 일찍 와 있습니다. 그런데 한 번도 나보다 먼저 인사를 한 적 없어요. 눈이 마주쳐 목례를 하면 받기만 할 뿐, 운동 끝내고 먼저 나서면서도 “천천히 오세요. 많이 하세요. 건강하세요” 같은 덕담을 할 줄 몰라요. 오늘 가도 또 ‘그짝’ 날 겁니다. 그 사람, 내가 자기 존경하는 줄 알까 봐 가기가 좀 그렇습니다. 인사할 줄 모르는, 예의 없는, 매너를 ‘개무시’하는 이런 사람들한테 자꾸 먼저 인사하면, 인사하는 사람만 싱겁고 우스운 사람될 것 같기도 해요.
아파트 같은 라인에 사는 한 영감님은 현관이나 엘리베이터, 서로 손자 손녀 데리고 놀이터에서 만날 때마다 인사를 해줬더니 이제는 자기가 먼저 인사를 하는 버릇이 들었습디다. 이자에게도 철들 때까지 체육실에서 만날 때마다 내가 먼저 인사를 계속해 봐? 좋은 맘 먹고? 이런 생각도, 해보는데 모르겠습니다. 실천에 옮길지 말지는.
거꾸리
저녁 먹기 전 여섯 시쯤에 가도 미운 자가 하나 있습니다. 이자는 체육실 들어오자마자 준비 운동도 안 하고 혈액 순환시키는 데 최고라는 ‘거꾸리’에 매달리는데, 45도 정도로 거꾸로 매달려 전화기 쳐다보며 20분쯤 있다가 내려옵니다. 내가 매달리려 했더니 비닐 씌운 거꾸리 ‘등판’이 그 사람 체온 때문에 뜨끈뜨끈! 식은 다음에 매달릴 생각하며 벨트머신에 올라 허리에 벨트를 거는데, 어럽쇼, 그새 거기 냉큼 또 매달립니다. 언제 내려오나 봤더니 또 20분. “이런 싸가지!!”
문제는 둘 다 나보다 어리고, 덩치는 더 크고, 쇳덩어리도 나보다 훨씬 무거운 걸 들었다 놨다 한다는 거지요. 시비는 함부로 해서는 안 되지요. 킹스맨의 주인공은 총도 되고 칼도 되고 총알도 막아주는 초고성능 무기-영국 신사 우산 모양-가 있어 매너 없는 '모지리'들 모두 혼쭐을 냅니다. .
벤치프레스
마음에 드는 ‘예쁜 사람’도 있긴 합니다. 준비 운동 다 하고 내 루틴대로 벤치프레스-누워서 역기를 밀어 올리는 운동이지요-를 하려는데 어떤 젊은 친구-진짜 젊었음. 30대 후반 아니면 40대 초반-가 먼저 거기 다가섭니다. 철커덕 철커덕 무게를 조정하고, 손잡이 높이도 조정하더니 씩씩 열댓 번 들어 올리고 내려옵니다. 내가 보통 한 번에 열다섯 번씩 세 번 반복하는 벤치프레스를 열 번가량 반복하더라고요. 내가 드는 것보다 훨씬 무겁게 해놓고 말입니다. 힘이 넘치는 ‘청년’이지요. 근데 내가 주변에서 얼쩡대니까 “하시겠어요?”라면서 비켜줍니다.
“아, 고마워요. 난 열다섯 번씩 세 번 반복하니까 우리 교대로 합시다”라고 대답하고, 무게를 나 하던 대로 맞춘 후 손잡이 높이를 조정했지요. 손잡이 높이는 3단인데, 아이 손가락만 한 핀을 빼서 다른 구멍으로 옮겨 꽂으면 조정이 됩니다. 아래로 내릴수록 밀어 올리기가 더 힘듭니다. 운동 효과는 더 높을 테고. 어떻든, 이 청년이 제일 아래 칸에 맞춰 놓은 걸 내 하던 대로 둘째 칸으로 옮기는데 핀 구멍 맞추기가 쉽지 않더군요. 우물쭈물 덜거덕덜거덕 몇 번을 해도 핀을 못 끼우니까 “제가 해드릴까요” 하면서 쉭 맞춰줍니다.
이것 말고도 기특한 게 또 있어요. 나는 내 무게로 열다섯 번 운동하고 그냥 내려왔는데 이 청년은 벤치를 비워주면서 내가 들었던 무게로 중량(쇳덩어리 숫자)을 맞춰 놓는 겁니다. 무게도 핀을 옮겨 꽂아서 올리거나 낮추는데, 손잡이 핀 옮기는 것보다는 쉽지만 기본적으로는 배려심이 있어야 하지요. 물론 그 후부터는 나도 내려오면서 핀을 이 젊은 친구가 들던 중량에 꽂았지요. 젊은이에게서 그동안 몰랐던 체육관 매너를 배운 겁니다.
벨트머신
늙은 남자만 미운 짓 하는 게 아닌 거 알려드릴게요. 체육실에는 벨트머신이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 낡아서 소음이 심하고 하나는 새것이라 조용한데, 여기 올라가서 한 시간을 보내는 ‘할매’가 있어요. 이 할매도 오후 여섯 시쯤 가면 먼저 와 있는데, 벨트를 허리에 걸었다가 어깨에 걸었다가 또 뒤돌아서 배에 걸기도 하고, 의자를 끌어와서는 거기 앉아 종아리 넓적다리까지에 벨트를 돌립니다.
이 할매는 벨트가 온몸을 흔들어대는데도 눈 나빠지는 건 모르는지 한 시간 동안 휴대폰만 보고 있습니다. 기다리던 나는 낡은 기계로 올라가 허리에 밸트를 감지요. 모터 소리가 요란한데도 이 할매, 전화기에서 눈을 떼지 않아요.
나에게서도 나쁜 매너 찾아낼 사람 없지 않겠지만 적어도 우리 동네 체육실에는 나보다 매너 나쁜 사람이 더 많은 건 확실합니다. 신사도 드물고 숙녀도 드문 한국이라고 세상에 외치고 싶어졌습니다.
매너 메이크스 젠틀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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