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철전집4-태항산록-(수필)세 악마의 죽음(제5권)
김학철전집4-태항산록-(부록)마지막 스무하루의 낮과 밤(끝) - 소설게시판 - 모이자 한민족 커뮤
부록 마지막 스무하루의 낮과 밤 김해양 이천일년 구월 이십칠일 밤 달도 유난히 밝았다. 달빛아래 두만강은 은빛으로 빛났다. 유유히 흐르는 두만강 물결은 지칠줄 모르는 한 령혼을 싣고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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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철전집4-태항산록-(수필)세 악마의 죽음
수필
세 악마의 죽음
히틀러, 무쏠리니, 도오죠오 히데끼(东条英机)-이 세 20세기의 살인귀들-전세계에 악명을 높이 떨친 살안귀들이 어떻게 죽었는가를 한번 살펴보는것도 흥미가 바이없지는 않을것이다.
이 세 악마는 다 천인공노할 재난의 침략전쟁을 발동한 원흉들로서 수천만의 인명을 초개와 같이 다룬 극악무도한 도살자들이다. 수백만의 륙해공군을 기세사납게 내몰아서 이웃나라들을 불바다속에 밀어넣을 때 그들의 기염은 참으로 무시무시하고 어머어마하였다. 아무도 감히 바로 볼 엄두를 내지 못할만하였다. 열광적인 환호성과 만세소리와 발구름속에 그들은 위세를 떨칠때로 떨치였다. 그들은 20세기의 항우(项羽)로, 알렉산더대왕으로, 나뽈레옹으로 자처하였다. 하건만 그들의 끝장은 개개 다 수치스러운것이였다. 참으로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수치스러운것이였다.
도오죠오 히데끼는 이른바 대화혼(大和魂)과 무사도정신의 권화(劝化)같이 행사하던자다. 그러던것이 일단 패전을 하자 전통적인 법식대로 일본도로 배를 가르고 죽기는 고사하고 권총으로 심장을 쏘아 자살을 한다는것도 제대로 못하여-자살미수-실패를 하였다. 그래서 결국은 병원에 실려가 구급치료를 받고 목숨을 일단 부지하였다가 나중에 다시 교수대에 올라가 데룽데룽 매달려 죽었다. 사전에 의사가 붓으로 심장이 있는 부위에다 동그라미를 그려주었건만 손이 떠려서 고것 하나도 바로 맞추지 못하여 탄알이 빗나갔던것이다. 사열대우에서 기고만장하여 호통을 치던 때와는 이 얼마나 딴판인가! 이 얼마나 풍자적인 대조인가!
무쏠리니란자의 끝장은 도오죠오 히데끼보다도 더 수치스러웠다. 이 소문난 비게덩이-이딸리아의 독재자는 목숨을 살리겠다고 변장을 하고 본국으로 철거하는 독일군의 트럭에 편승하였다. 그리고 적재함구석에 헌 담요를 뒤집어쓰고 누웠다가 트럭의 행렬을 멈춰세운 유격대의 검문에 걸려서 발각되였다. 유격대원이 담요를 떠들어 보다가 의외의 발견에 깜짝 놀라서
<<아니, 여보 당신 <위대한 수령>이 아니요?>>
하고 따져물으니 무쏠리니는
<<위대한 수령? 아니아니 난 아니요. 잘못 보셧소. 난 그저 보통 피난민이요.>>
하고 아닌보살하는것이였다.
<<왜 이러시오, 당신의 그 얼굴을 내가 설마 빗보았을라구? 전 이딸리아에 위대한 수령을 못 알아볼 사람이 어디 있을거라구!>>
<<천만에 천만에... 난 정말 아니요. 절대루 위대한 수령이 아니란 말이요.>>
이것이 그 호기등등하던 독재자가 체포되는 장면에서 유격대원과 주고받은 말이다.
(천하에 더러운 놈!)
그럼 그의 처단당하는 장면은 또 어떠하겠는가.
유격대대장-륙군대좌가 부하들에게 무쏠리니와 그의 요사스러운 첩-갖은 못된짓을 다한 파쑈분자를 담밑에 끌어다 세우라고 분부하니 오히려 계집은 당돌하게 나서서
<<우리 저이를 상해해서는 안돼요.>>
하고 서방을 감싸주려 하는데 무쏠리니 당자는 비굴하기짝이 없게
<<여보시오 대좌선생, 잠간만 내 말을 좀 들어주시오.>>
하고 비대발괄을 하는것이였다.
여기 어디 사나이의 기개가 꼬물만큼이라도 있는가!
사정없는 유격대원들의 총탄에 맞아서 가로세로 쓰러진 계집 사내의 시체를 원한 맺힌 인민들은 즉시 끌어다가 길가 포도넝쿨 얹는 덕대에 거꾸로 매달아놓았다. 그 추악한 몰골은 여러 나라 기자들에게 당일로 사진 찍혀 전세계에 공포되였다.(몇해전에 광서 어느 출판사에서 출판한 무슨 력사책에 그 사진이 거꾸로 실린것을 보고 나는 하도 기가 막혀서 한동안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그럼 히틀러는 또 어떻게 죽었는가. 위대한 원수(元首)답게 영웅적인 장렬한 최후를 마치셨는가? 천만에!
여태까지 전해지기는 베를린 지하 수십척의 대본영-방공구 조물속에서 쏘련군대의 포성을 들으며 첩하고 둘이서 자살을 한것으로 되여있었다. 첩은 음독자살을 하고 히들러 본인은 권총자살을 한것으로 되여있었다. 여러 나라의 영화들에서도 다 그렇게 형상되였었다. 기실 히틀러는 자살을 아니하였다. 아니한것이 아니라 못하였다. 히틀러는 권총을 손에 쥔채 쏘파에 쓰러져 이미 숨져버린 애첩의 둘레를 개미 채바퀴돌듯 자꾸 에돌고만 있었다. 나중에 복도에서 총소리나기를 기다리다 못한 부하가 문을 열고 들어와서 위대한 원수를 대신하여 자살을 시켜드렸다. 쏴죽여주었단 말이다.
수천만 사람의 목숨을 파리목숨만큼도 여기지 않던 위대한 원수에게는 제 목숨 하나 끊을 용기도 없었던것이다!
이와 같이 세 악마의 죽음은 다 비겁하고 수치스러웠다. 겉보기와는 판이하게 너절하고 더러웠다. 소위 왈 원수, 수상이란것들이 창피하기짝이 없는 죽음들을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물을 관찰할 때 버젓한 <<겉보기>>따위에 현혹이 되지 말아야 할것이다. <<겉>>과 <<속>>에다 같기표를 지르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눈이 부리부리한 장작개비 같은 리규(李逵)-<<수호전>>에 나오는 호걸-식의 영웅인물을 강청이는 그 이른바 <<본보기극(样板戏)>>의 주인공으로 내세웠는데 그것은 <<본질>>과 <<현상>> 또는 <<내용>>과 <<형식>>에다 같기표를 지른거나 마찬가지의 공식에 불과하다. 산 사람의 형상화가 아니란 말이다. 강청이의 론리대로 한다면 그럼 상술한 세 악마도 다 영웅적인 장렬한 최후를 마쳤어야 할것이 아닌가!
나는 젊은 시절에 정치적테로활동에도 종사해보고 또 여러 해포 간고한 전쟁도 치러보았다. 그런데 위급한 경우에 부닥쳐서 놀랄만한 용감성과 날파람을 보인 전우들이 왕왕 몸집이 가냘프로 또 평소에는 잔잔한 성격의 소유자들이였다는것은 우리가 한번 음미해볼만한 일이다. 눈방울을 뒤룩뒤룩 굴리는 장작개비식인물이 도리여 급한 모퉁이에서 뒤를 사리거나 꽁무니를 빼는것을 나는 적잖이 보았다. 이것은 강청이식 영웅인물이 실탄이 우박치는 전쟁판에서는 반드시 영웅인물이 아닐수도 있다는 증좌이다.
그러므로 소설을 쓰는 우리는 인물을 관찰할 때 홑껍데기로 관찰하는데 그치지 말고 웅숭깊은 속까지 꿰뚫어보려고 노력을 해야 할것이다. 인물을 립체적으로 부각하려면-죽은 인물이 아닌 산 인물을 그려내려면-이러한 고심한 노력은 불가결적인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김학철전집4-태항산록-(수필)위덕이 엄마
수필
위덕이 엄마
위덕이 엄마의 이름은 류설금이다. 강소성 무진현출생으로 해방전 상해 어느 극단에서 배우로 일하다가 항일전쟁시기 무한에서 최채동무와 결혼하였다. 해방후에 낳은 아들의 이름을 위덕이므로 위덕이 엄마가 된것인데 그 위덕이도 인젠 서른여섯살... 위덕이 엄마가 세상을 뜬지도 어느덧 3년이 지났다.
위덕이 엄마는 키가 큰만큼 발도 커서 맨발에 남자들이 신는 특대호 흰 고무신을 끌고 바로 이웃인 우리 집에를 놀러 다니군 하였다.
<<위덕이 엄만 웬 발이 그리두 크우?>>
우리 안사람이 웃으면서 이렇게 물으면 위덕이 엄마는
<<글쎄 말이야, 너무 크지?>>
하고 마주 웃는것이였다.
위덕이 엄마는 상해 프랑스조계에서 근 7년 동안 시어머니를 모시고있었던 까닭에 조선말을 아주 잘하였다. 그러나 물론 백분의 백으로 잘하지는 못하였다.
<<해양이 엄마, 나 지난밤에 이상한 꿈이 났다니까...>>
하고 위덕이 엄마가 꿈이야기를 할 때 해양이 엄마라고 불리우는 우리 안사람이 우스워서
<<꿈이 났다는게 뭐요? 꿈을 꾸었지.>>
하고 깔깔거리면 위덕이 엄마는 곧
<<오 참, 꿈을 꾸었는데...>>
하고 사근사근하게 잘못을 시정하는것이였다.
<<해양이 엄마, 이거 좀 먹어보우. 와삭와삭한게 아주 맛있소.>>
위덕이 엄마가 금시 튀긴 기름튀기를 한 남비 담아들고 쫓아와서 이렇게 말하면 해양이 엄마는 또 깔깔거리는것이였다.
<<와삭와삭이 뭐요? 파삭파삭이지!>>
<<오 그래, 파삭파삭... 맛있지?>>
위덕이 엄마는 이렇게 상냥하고 또 다정한 녀자였다.
1938년 가을, 일본침략군의 예봉을 꺾을 힘이 모자라서 항일부대는 일시 무한에서 철거하게 되였다. 그때 위덕이 엄마는 임신 4개월... 남편과 행동을 같이할수 없는 형편이였다. 그래서 남편인 최채는 갓 혼인한 안해를 인편에 딸리여 천리길 머나먼 상해로 보내였다. 상해 프랑스조계에 한번 만나본적도 없는 시어머니와 시동생이 살고있었던것이다.
이듬해봄, 딸을 낳았다는 소식이 와서 최채는 자모(慈母)를 위로하여 살라는 뜻으로 딸아이의 이름을 <<위자>>라고 지어보내였다. 그리고 최채는 중경을 떠나 락양을 거쳐서 태항산항일근거지로 들어가버렸다. 그래서 그 젊은 안해는 남편의 소식을 모르는채 항일전쟁이 끝날 때까지 상해에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7년 동안을 살아야 하였다.
한족녀자인 류설금이 조선족시어머니를 얼마나 잘 섬겼던지 90 고령으로 아직도 서울에서 작은아들하고 살고있는 시어머니한테서 편지가 왔는데 아들안부 손자손녀안부 다 제쳐놓고 며느리안부부터 물었었다. 편지에는 로인이 그 며느리를 못 잊어하는 정이 넘쳐흘렀었다. 그래서 로인이 정신적타격을 받을가봐 최채는 아직도 그 며느리가 무고히 잘 지낸다고 속이고 이미 고인이 된것을 알리지 않고있다.
류설금은 일본이 망하자 곧 시어머니를 따라 남조선으로 갔다. 그때 위자는 벌써 일곱살이 되여 학교를 갈 나이가 다되였다. 당시 남조선에서는 공산당을 위시한 각 좌익정당들이 모두 합법적으로 활동하였으므로 류설금은 곧 위자를 데리고 조선독립동맹 서울시위원회를 찾아갔다. 연안과 태항산에서 귀국한 최채의 전우들이 거기서 사업하고있었기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찾아가보니 유감천만하게도 최채만은 거기 있지 않았다. 몹시 딱하게 생각한 조직부장 심성운이 어린 위자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류설금에게 물었다.
<<최채동무가 여기는 없는데... 평양을 한번 가보시겠습니까?>>
말이 떨어진 그 즉석에서 류설금은 결심을 표시하였다.
<<녜 가겠습니다. 보내만 주십시오.>>
그리하여 류설금은 일곱살 먹은 딸아이를 데리고 독립동맹의 지하련락망을 통하여 그 무서운 38선을 몰래 넘어 북조선으로 왔다. 평양에는 중국에서 돌아온 최채의 전우들이 숱하였다. 열도 더되고 스물도 더되고 서른도 더되였다. 그러나 꼭 찾아야 할 최채만은 없었다! 이런 안타까울데가 또 어디 있으랴. 류설금은 발밑의 땅이 꺼지는것 같았다.
최채는 조직의 안배로 다른 몇몇 동지들과 함께-주덕해, 문정일 등 동지와 함께-중국에 떨어졌던것이다. 조선을 나오지 못하였던것이다. 남편을 찾아 중국에서 바다 건너 남조선으로, 그 남조선에서 또 천신만고로 38선을 넘어서 북조선으로 온 류설금은 그 북조선에서 또다시 압록강을 건너서 중국으로 남편을 찾아 가야만 하였다. 생소한 이국땅을 철부지딸아이를 데리고 남편을 찾아 헤매는 류설금...
그러나 류설금은 끝내 남편을 찾고야말았다. 8년만에 안도에서 처자의 소식도 모르고 홀아비로 지내는, 군복 입고 권총 찬 최채를 찾았다. 그리하여 1년후에 태여난 아들이 바로 우에서 말한 그 위덕이다.
해양이 엄마는 지금도 누구나 보면 위덕이 엄마를 산 춘향, 20세기의 춘향이라고 입에 침이 없이 칭찬을 한다. 나도 그렇다.
위덕이 엄마는 얼굴만 곱고 잔잔하게 생긴것이 아니라 그 마음씨 또한 착하고 부드럽고 어질었다. 이 세상에서 위덕이 엄마가 역정을 내거나 불쾌한 언동을 하는것을 본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거짓말쟁이를 가문두지 않을것이다.
위덕이 엄마는 성모 마리아 같이 안존하고 아늑한 녀자였다. 그 막내아들 위광이가 불행한 사고로 저세상으로 갔을 때 나는 마침 먼곳에 출장을 나가있어서 알지 못했었다. 내가 돌아오는 첫밗에 해양이 엄마가 위광이의 불행을 알려서 나는 현관에서 신발도 벗지 않고 그대로 돌쳐나와 위덕이네 집으로 달려갔다.
어린 위광이가 내 무릎에 앉아서 내 얼굴을 쳐다보며
<<아버지, 사탕 더 있소?>>
하고 새까만 눈을 깜박깜박하던 일이 생각나서 나는 속이 얼얼하였다(위광이와 그 누나 위영이는 나를 아버지라고 불렀었다). 위광이는 살갗이 맑다 못해 투명할 지경이였다. 그 집 아이들이 다 그 엄마를 닮아서 살갗이 유난스레 맑지만 위광이는 특히 더 맑았다. 그래서 해양이 엄마는 위광이만 보면
<<요 백인종 서양놈아.>>
하고 놀려주었었다.
나의 궂긴 인사를 받는 위덕이 엄마의 얼굴은 평소나 거의 다름없이 안존하고 담담하였다. 사랑하는 어린 자식을 불시에 잃어버린 그 어머니의 마음이 어떠하랴!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렇건만 위덕이 엄마의 얼굴은 고요한 늪 같이 잔잔만 하였다. 잔물결 하나 일지 않았다. 그것은 타고난 천성과 깊은 수양으로 이루어진 높은 경지의 교향시곡이였다.
위덕이 엄마는 우리 집 식구들의 마음속에 언제나 살아있다. 해양이 엄마 마음속에, 해양이 마음속에 그리고 해양이 아버지 마음속에 언제나 살아있다.
김학철전집4-태항산록-(수필)경사로운 날에
수필
경사로운 날에
민족색채가 강렬할수록, 지방색채가 농후할수록-세계적이라는 말을 어디서 보았는지 들었는지 한것 같다. 지당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춘향전>>에서는 리조중엽의 전라도 남원의 풀냄새와 꽃향기가 물씬 풍긴다. <<아Q정전>>에서는 청말(清末)의 강남의 운하를 오르내리는 <<항촨(航船)>>의 사공의 노질하는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고요한 늪>>에서는 질주하는 돈까자크기병대의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소리가 귀청을 때린다.
<<민족>>과 <<사회주의대가정>> 또는 <<민족>>과 <<프로레타리아국제주의>>를 대립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변증유물론의 대립물의 통일법칙에 대한 천식, 무식 또는 문맹의 표현이다.
료녕인민출판사 조선문편역실에서는 지난 10년 동안에 우리 민족문화의 간선도로에 의욕적이고 야심적인 리정표를 적잖이 세워놓았다. 그중에서도 <<김지하시선>>은 특히 이채를 띠는것으로서 영웅적 광주인민봉기에 대한 강유력한 성원으로 되였다. 그것은 <<전두환을 찢어죽여라>>를 봉기자들과 함께 웨친거나 마찬가지다.
해실(该室)이 장차 민족출판사로 발전하면 보다 더 큰일, 많은 일을 해내리라는것은 의심할바 없다. 사회주의시대의 민족문학을 가꾸기에 힘쓰는 한 문학도로서 그 무궁한 발전과 번영을 충심으로 기원하는바이다.
김학철전집4-태항산록-(수필)변천의 35년
수필
변천의 35년
<<천지>>가 걸어온 발자취를 한번 더듬어보는것도 흥미가 바이 없지는 않은 일이다. 곡절 많은 그 려정에는 특기할 일들이 적지 않기때문이다.
<<천지>>만큼 이름을 여러번 간 잡지도 이 세상에는 그리 흔치 않은것이다.
<<연변문예>>가 <<아이랑>>이 되였다가 다시 <<연변문학>>으로 변하엿다가 다시 부정의 부정의 또 부정으로 도루메기 <<연변문예>>로 되였다가-일대 용단으로 단호히 묵은 테두리를 떨쳐나서 <<천지>>로 되였으니까 말이다.
이러한 이름의 변천은 그 대부분이 정치적시후 소산으로서 극좌로선의 발톱자국이 력연히 나아있는가 하면 개방적인 락관주의의 어루만짐도-수목의 년륜마냥-뚜렷이 남아있다.
김창걸선생의 창의로 명명되였던 우리 민족의 냄새가 그윽한 <<아리랑>>은-그동안에 주인이 갈리여-현재는 총서 <<아리랑>>에서 그 향화(香火)를 받들고있다.
이러므로 <<천지>>는 "이름갈기대왕"의 칭호를 받더라도 부끄러울것은 없을것이다.
<<천지>>만큼 이사를 많이 한-사지를 여러번 옮긴-간행물도 이 세상에는 그리 흔치 않을것이다. 35년 동안에-잘 모르기는 해도-한 이삼십번 자리를 옮기지 않았을가? 컴퓨터나 사용한다면 또 모를가 그러찮고서는 아마 정확한 수자를 찾아내기는 좀 어려울것이다. 달팽이처럼 편집부를 떠메고 다니면서 편집을 했다고 형용하여도 결코 과언은 아닐것이다.
지난날 대한민국림시정부가 보따리를 꾸려가지고 자꾸 떠돌아다녔다고 하여 보따리정부란 별명으로 불리웠었는데 <<천지>>도 그만 못지 않게 부평초살이를 해왔다. 그러므로 <<천지>>는 "이사의 대왕"의 영예로운 칭호도 아울러 받아 무방할것이다.
<<천지>>가 걸어온 35년은 변천의 35년이고 전투의 35년이다. 금빛의 영광과 음산한 그림자가 엇갈린 35년이다. 고상한 민족의 얼을 구가하였는가 하면 또 민족의 유생력량에다 토벌의 도끼질을 사정없이 가히기도 하였기때문이다.
이 얼마나 풍자적인가!
당시의 작자들은 애당초에 <<반동적작품>>이라는것을 써낼만한 <<담보>>가 없었다. 사실상 다들-혹시나 잘못될가 겁이 나서-지뢰원을 골라디디듯 조심조심 발을 옮겨놓았었다. 그런데다 대고 무중생유(无中生有)로 생트집을 잡아가지고 살기어린 몽둥이를 내둘렀으니 참으로 가관이랄 밖에 없다.
이와는 반대로 예술성이 형편없는것들은 <<안전면허>>를 받고 태평성대를 누리였다. 초중학생의 작문을 치더라도 75점 이상을 더 받기 어려운 이른바 <<향화>>들이 사회주의문학이라고 행세를 하여도 이만저만하지 않았다. 곡식낟가리에 올라서서 해에다 대고 담배불을 붙인다는 식의 <<대포>>가 <<장원급제>>를 하고 그리고 적라라한 사람잡이<<평론>>(?)들이 <<당성>>이 강하다고 표창을 받았다.
문학을 정치와 갈라놓을수는 없다. 그러나 문학은 역시 문학나름으로의 특성을 갖고있다. 예술성이 없는 이른바 작품은 정치문건이지 문학작품이 아니다. 그런것은 <<천지>>에 실을게 아니라 <<붉은기>>편집부에다나 볼려보아야 할것이다.
57년 이전의 <<천지>>와 80년대에 들어서는 <<천지>>는 우리 민족문학의 <<등대>>노릇, <<봉화대>>노릇을 그럴듯하게 감당하였다. 특히 80년대에 들어서는 생기발랄한 국면을 조성하여 백화가 란만한 가운데 기꺼운 풍작을 해마다 거두었다.
새로운 력량이 자라나는데, 연한 줄기들이 힘차게 뻗어나가며 하루하루 굳건해지는데-우리의 <<천지>>는 크게 기여를 하였다.
이상은 35살 때부터 70살이 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천지>>와 더불어 파란중첩한 려정을 꾸준히 걸어온 한 문학도의 숨김없는 술회다. 백발장자의 장탄식이 아니다. 늙은 과부의 넉두리도 아니다.
김학철전집4-태항산록-(수필)불합격남편
수필
불합격남편
유감스럽게도 나는 가끔 <<불합격남편>>이라는 말을 듣는다. 매우 영예롭지 못한 일이기는 하지만 다들 그렇게 평가를 내리니 할수 없다.
김영순(주덕해 부인)이 면대애서 그렇게 평가를 하는가 하면 한정희(문정일 부인)도 그렇게 평가를 하고 또 정설송(정률성 부인)까지도 그렇게 평가를 한다. -내 이 립장이 곤난하겠는가 안하겠는가.
내가 그런 평가를 받을적마다 우리 안사람은 사기가 올라서 뭐 막 야단이다. 제 편을 들어주는 우군이 생겼다고 말이다. 하지만 나를 불합격남편이라고 평가하는것은 현상만 보고 본질을 파고들지 못한데서 오는 오해다. 우리 동양사람들은 서양사람과는 달리 사랑을 하는데도 은근한 함축성이라는것이 있어서 겉으로는 드러나게 그러안고 입맞추고 하지를 않는다.
홍명의 작 <<림꺽정>>에서 주인공 림꺽정이와 서울기생 소홍이가 주고받는 정론난을 한번 들어보기로 하자.
소홍이는 의관을 받아서 옷걸이에 갖다걸고 꺽정이앞에 와서 얌전하게 앉았다.
<<오늘 어디 놀이갔었나?>>
<<련못골 어선전댁에 사랑놀음 갔었에요.>>
<<어선전이란 자네 좋아하는 사람인가?>>
<<나는 지금 좋아하는 사람이 없에요.>>
<<정말인가?>>
<<내 속을 속임없이 말하면 지금 잊자잊자 해두 못 있는 량반이 꼭 한분 있지요.>>
<<그게 누군가?>>
<<그건 말씀 안할테요.>>
<<누군지 좀 알세그려.>>
<<알아서 무어하시게.>>
<<내가 그 사람 보구 건강짜라두 좀 해야겠네.>>
<<진강짜는 안하시구 건강짜만 하신다면 진짜 그 량반은 아직 숨겨두구 그 량반의 가짜 한분 대드리지요. 자 저기 기십니다.>>
소홍이가 뒤벽에 비친 꺽정이의 그림자를 가리키니
<<사람을 놀리지 말게.>>
꺽정이는 그림자 가리키는 소홍이의 손을 잡아서 품안으로 끌어왔다.
<<진정인가?>>
소홍이는 대답이 없었다.
<<자네 같은 일등명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하나뿐일리 있나.>>
<<그게 사내량반 말씀입니다. 사내의 정이란건 들물과 같아서 여러갈래루 흐르지만 녀편네의 정은 폭포같이 외골루 쏟칩니다.>>
<<사내두 사내나름이구 녀편네두 녀편네나름이겠지.>>
<<그야 그렇지요. 그렇지만 녀편네는 대개 정으로 살구 정으로 죽습니다.>>
<<자네가 사내가 아니라 사내의 웅숭깊은 정을 몰라서 사내 정을 타박하네.>>
<<정이 불이면 불길이 솟아야 하구 정이 물이면 물결이 일어야 하지 그저 웅숭깊어 무슨 맛입니까.>>
<<정론난 고만하구 다른 이야기 하세.>>
<<무슨 좋은 이야기가 있거든 하십시오.>>
우에서 보는바와 같이 우리 녀성들은 흔히 불같이 솟아주기를 바라고 또 물결이 일어주기를 바라는-그런 일종의 경향이랄가 편향이랄가가 있다. 그래서 무뚝뚝한 남자의 깊은 사랑을 몰라보고 언제나 좀 부족해하고 또 좀 야속스러워한다. 이만하면 내가 불합격남편 소리를 듣는 까닭을 짐작들 하실줄 믿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는 결코 자기를 <<합격남편>>이라거나 <<모범남편>>이라고 내세우려는건 아니다. 그럴 자격이 없다는것을 저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있기때문이다. 내가 24년이란 긴 세월 정치풍파를 겪는 동안 우리 안사람은 갖은 고생을 다하며 살아왔다. 공동변소를 맡아서 청소하고 한달에 10전씩 한집한집 위생비를 거두러 다니지를 않았는가, 원예농장의 림시공, 벽돌공장의 림시공으로 온갖 신산을 다 맛보지를 않았는가... 간난신고 20여년에 머리는 허옇게 세고 년륜 같은 주름살이 졌다. 그러니 내가 어찌 안해에 대하여 미안한 마음이 없겠는가. 비록 그 정치풍파는 내가 겪고싶어서 겪은것은 아니였지만서도.
50년대말에 김옥렬(서헌 부인)이 세린하로 남편의 면회를 간 일이 있었다. 당시 서현선생은 <<우파분자>>로 몰리여 그곳에서 <<개조>> 즉 강제로동을 당하고있었다. 젊은 안해가 면회를 온것을 보고 숱한 <<우파>>량반들이 다 부러워하는 마음, 공경하는 마음으로 열렬히 환영을 하는데 마치 무슨 명절이라도 맞은것 같더라는것이다. 알고보니 그들은 대개 다 정치란리로 안해에게 리혼을 당한 사람들이였다. 그래서 그들의 눈에는 면회온 젊은 안해가-비록 자기하고는 아주 상관도 없는 남의 안해였지만-가장 고상하고 가장 아름다운 천사로 보였던것이다.
하긴 리혼을 한 안해들도 그 동기가 다 동일하지는 않았다. 헌신짝 버리듯이 남편을 차버린 녀자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자식들의 장래를 고려해서-정치적인 영향이 미칠가봐-울며겨자먹기로 리혼을 하였었다. 참으로 인간비극이다. 이러한 판국에 우리 안사람은 24년 동안이라는 긴 세월을 끄덕없이 나 하나만을 믿고 살아왔으니 어찌 장하다고 하지 않으랴. 그러므로 내가 안해를 잘못 대한다는것은 아무 근거도 없는 천만의 말씀이다. 단지 표현하는 형식이 담담하거나 좀 무뚝뚝하다는것뿐이다. 나는 사내대장부라는게 녀자들앞에서 체통값을 못하고 너절하게 노는것을 아주 경멸한다. 그러기에 불합격남편 소리를 들을지언정 시시껄렁한짓은 아니한다. 진정한 남성미란 수사자 같은 기백 또는 위엄과 갈라놓을수 없는것이다.
언젠가 서울에서 발간되는 어느 잡지를 뒤져보니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렸는데 그 내용인즉 시집온지 20년이 넘도록 남편의 입에서 한번도 사랑의 속삭임을 들어본적 없는 녀인의 술회였다. 단 한번도 살틀한 마음씨를 보여주지 않던 남편이 자기가 친정나들이를 떠나는 날 아침에 비가 오니까
<<고속뻐스 타지 말구 기차 타구 가.>>
한마디를-지나가는 말처럼-던지더라는것이다. 길이 미끄러워서 고속으로 달리는 뻐스가 사고를 일으키키 쉬우니까 안전한 기차편으로 가라고 권하는 말이였다. 그 무뚝뚝한 말에서 은근한 부부의 정이 넘쳐나는것이 너무도 대견하여 그 녀인은 차창으로 밖을 내다보며 감격의 눈물, 행복의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는것이다.
평양에 란심이라는 유명한 기생이 있었다. 해방후에 그녀는 림천규라는 내 친구와 결혼을 하여 희여멀끔한 알들까지 하나 낳고 부부 아주 화목하게 살았다. 우리는 그녀를 <<강이 엄마>>라고 부렀다. 아이의 이름이 강이였기때문이다. 그들 부부가 한번은 무슨날이라고 김사량과 나를 청하여 저녁대접을 한 일이 있었다. 그때 주부의 신분으로 손님 시중을 들다가 토로한 진정은 참으로 뒤맛이 그윽한것이였다.
<<기생노릇 말입니까? 인젠 생각만 해두 신물이 난다니까요. 기생방에 눌러붙어서 죽자살자하는 오입쟁이들두 진짬 좋은건 다 본마나님을 갖다주더라구요.>>
조강지처란 무엇하고도 바꿀수 없는 귀중한 존재라는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기생의 숨김없는 고백이다.
이래도 어느분이 또 나를 불합격남편이라고 하시겠는지?
내가 소설에서 재현하는 남편들도 대개 그 불합격남편 소리를 들을지언정 시시껄렁한짓은 아니하는 사내대장부들이다. 작자가 주구하는 남성미가 바로 거기에 있기때문이다.
김학철전집4-태항산록-(수필)민족의 얼
수필
민족의 얼
항일전쟁시기 태항산에서의 일이다. 팔로군의 한 부대가 행군을 하다가 우리 조선의용군이 설영(设营)하고있는 부락에 들리여 점심참을 쉬게 되였다. 우리들이 조선말로 서로 지껄이는것을 들은, 그 부대의 한 군인이 신기로운듯이 쫓아와서 우리를 살펴보았다. 그 입은 군복에 호주머니가 달린것을 보아 전사가 아니고 간부인것을 알수 있었다. 이윽고 그는 입을 열더니
<<당신들 혹시 조선사람이 아니시우?>>
하고 묻는데 그것은 틀림없는 조선말-평안도사투리가 알리는 조선말이였다.
<<녜 그렇소이다만...>>
<<아 이거 참 반갑소이다. 나두 조선사람이외다.>>
<<그렇습니까? 그러세요. 아닌게 아니라 참 반갑습니다.>>
이리하여 우리는 1대6인가 1대7인가로 반가우 악수를 열렬히 나누었다.
알고본즉 그 사람(성이 렴씨였던것만 생각나고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다)은 그가 현재 소속되여있는 려단 수천명 인원중에 단 하나밖에 없는 조선사람이였다.
<<단 혼자 너무 고적해서 어떻게 지내시겠소. 우리하구 같이 일합시다. 우리 여긴 전부가 다 조선동무들이지요.>>
<<우리가 오늘 여기서 만나길 잘했구먼.>>
<<우리 령도에서 조직적으루 교섭하면... 넘어오는건 문제두 없지요.>>
우리가 중구난방으로 이렇게 권유한즉 뜻밖에도 그 렴씨는 대번에 왼고래를 틀며
<<아니아니, 난 민족혁명은 안해요. 싫습니다 싫습니다.>>
하고 방색(防赛)을 하는것이였다.
<<민족혁명은 안하신다구요? 그럼 댁은 무슨 혁명을 하시우?>>
<<그야 물론 국제혁명이지요.>>
우리는 어안이 벙벙하여 한동안 벌린 입을 다물지를 못하였다.
<<국제혁명전문가>> 렴씨는 우리의 권유를 뿌리치더니 총총히 일어나 저의 부대로 돌아가버렸다. 그의 서두는품이 마치 간사한 무리들의 꾀임에 하마 빠질번한 정인군자가 대로행(大路行)을 하는것 같아서 우리는 서로 돌아보고 앙천대소를 하였다.
그 렴씨가 사람만은 의심할바 없는 좋은 사람이였다. 손색이 없는 프로레타리아국제주의전사였다. 하지만 사람이 너무 좀 유치하였다. 국제혁명과 민족혁명의 관계를 전면적으로 리해하지 못하고 편면적으로 리해하기때문에 량자를 대립시키는 결과를 빚었었다.
한데 문제는 그 렴씨의 유령이 태항산에서 그대로 사라져버리지 않고 아직까지-살아남아서 우리의 머리우를 배회하고있는것이다. 누가 <<민족의 얼>>이란 말만 하면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부르죠아민족주의?>> 하고 두귀를 쫑긋 세우는 량반들이-토끼 같고 말 같고 당나귀 같고 또 무엇 같은 량반들이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계시단 말씀이다.
민족의 전통이나 민족의 력사를 연구하고 정리하고 그리고 민족의 자랑스러운 얼을 발양하고 선양하는것은 사회주의와 하등의 모순도 없는 아주 정정당당한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송정환님의 4권으로 된 <<조선사회총서>>는 좋은 본보기로 되는것이다. 그가 기울인 심혈에 대하여 우리는 높은 평가를 해야 마땅할것이다.
<<총서>>는 <<삼국사기(三国史记)>>에 기초하여 신라, 백제, 고구려의 력사를 사회의 형식으로 흥미있게 엮는데로부터 시작하여 1929년의 광주학생사건으로 일단 끝을 맺었다.
저자는 감정이 없이 사무적으로 력사적사실만을 라렬하고 기록한것이 아니라 자기의 뜨거운 애국, 애족의 정을 그속에 쏟아부었다. 그리고 민족의 력사를 얄팍하게 분석하거나 동기가 불순하게 외곡하거나 어벌쩡한 수단으로 날조하거나 하지 않았다. 미국해적선 샤만호를 불태운 사건에서 평안도관찰사 박규수, 서윤 신태정, 철산부사 백락연 등 실재한 인물만을 력사적위치에 놓아주고 그리고 얼토당토않은 인물은 주인공이라고 억지로 쑤셔놓아서 천하의 웃음거리를 만드는 식의 너절한 손재주를 피우지 않은것만 보아도 알 일이다.
조선의 첫 비행사 안창남에 대하여는 필자도 잘 알고잇다. 우리가 어렸을 때 부르던 동요가운데
<<하늘에 안창남이 땅에는 엄복동이>>라는 구절이 있었다. 엄복동은 당시 자전거경주에서 일본선수들을 누르고 우승한 조선청년이였다. 그래서 우리들의 눈에 안창남과 엄복동은 자랑스러운 민족영웅으로 비치였다.
필자는 영광스럽게도 중학교 1학년-13살-때 서울에서 전국을 휩쓴 광주학생사건에 휘말려들어 동맹휴학에 가담하였었다. 그리고 <<제국주의>>라는것이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르면서-일본경찰과 기마헌병들이 학교를 포위한 가운데서-상급생들을 따라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식민지노예교육제도를 철페하라!>>
하고 웨치였다.
그러므로 <<총서>>는 필자에게는 더욱 의의가 있으며 또 흥미도 더하다.
송정환님의 <<총서>>는 자랑스러운 우리 민족의 얼을 현재의 독자들에게 일깨워주고 또 후대의 독자들에게 남겨주었다.
김학철전집4-태항산록-(수필)한 녀류작가
수필
한 녀류작가
3월 3일 밤저녁에 느닷없는 지급전보 한통을 받고 우리 내외는 불안스러운 얼굴을 마주보았다. 밤에 들이닥치는 전보가 희소식일리 없다는 속된 철학을 우리는 믿고있었기때문이다. 뜯어보니 아니나다를가
<<정령위독진명(丁玲病危陈明)>>
이런 여섯 글자가 마치 여섯개의 송곳끝처럼 우리의 눈속으로 뛰여들었다. 정력의 남편 진명이 친 전보였다. 그리고 24시간이 채 못되여 우리는 정령이 이 세상을 떴다는것을 전파를 통하여 알게 되였다(부고는 며칠후에 받았다).
그러고보니 81년 여름 연길에서 가졌던 그녀와의 짧은 몇차례의 접촉이 결국은 영원한 결별로 되여버렸다. 그때 우리 집에서 정령부부와 우리 부자는 스물 몇해만에 마주앉아 피차의 소경력을-겪어온 고난의 력사를-이야기하였다.
80년 12월에 내가 무죄선고를 받고 명예회복을 하기전까지는-나의 의사를 존중하여-정령은 우리 아들 해양이하고만 서신왕래를 하였었다. 그러므로 우리들사이에는 하고싶은 말이 쌓이고 또 쌓였었다.
정령은 우리가 북경에서 살 때, 당시 서너살 먹었던 해양이를 안아주면서 <<쑈하이양(小海洋)>>이라고 불렀었다. 그래서 그녀는 우리 손자 시월이를 보고도 웃음의 소리로 <<쑈쑈하이양(小小海洋)>>이라고 불렀다.
내가 정령더러 그동안 줄곧 모스크바방송이 정령, 애청, 풍설봉을 성원하는것을 알고있었느냐고 물어본즉 정령은
<<알구있었지, 라지오를 갖구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방송을 들을적마다 난 가슴이 더 달랑달랑했었지 뭐야.<타먼자이빵따오망(他们在帮倒忙)> 한다구 말이야.>>하고 쓴웃음을 웃었다.
하긴 국외로부터의 성원이 그녀의 립장을 더욱더 고난하게 만들어주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우리는 피차에 다 20여년 고난속에서도 반드시 인민의 품속으로 돌아가게 될 날이 오리라는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는것을 알고-새삼스레 마주보며 장쾌한 웃음을 웃었다. 우리는 피차간 소식을 모르고 살면서도-견해만은 완전히 일치하게-당의 일시 비꾸러진 로선과 당 본래의 바탕을 혼동하지 않고 뚜렷이 갈라놓고 보았던것이다. 우리는 다같이 20여년의 긴 암흑속에서도 맑스주의자로서의 방향을 잃지 않았던것이다.
정령이 석후에 돌아갈 때 허리를 잘 구푸르지 못하므로 우리 해양이가 얼른 앞으로 나와 신발의 끈을 매여드리니 정령은
<<그전에 내가 네 신끈을 매주었는데... 인젠 그 반대로구나.>>
하고 웃었다. 그 웃음은-아무리 감추려 해도 감추어지지 않는-허구픈 웃음이였다.
이튿날 영빈관 휴계실에 다시 모였을 때 정령은 동행인 루적이(楼适夷, 인민문학출판사 고문)와 나를 번갈아 보면서<<두 사람에 여섯다리>>라고 놀려주고 깔깔 웃었다. 년로한 루적이는 개화장을 짚어서 다리가 셋이 되고 그리고 나는 외다리에 쌍지팽이를 짚어서 역시 세다리가 되였었기때문이다.
이듬해 가을, 연변자치주 성립 30돐 때, 정령은 그 딸 조혜(祖慧)가 오는 편에 상하권으로 된 <<호야빈(胡也频)선집>>과 "쑈쑈하이양"을 주라는 쵸콜레트 한상자를 보내왔었다. 호야빈은 30년대에 국민당에게 체포되여 총살당한 좌익작가로서 정령의 전남편이다. 그러니까 그 아들 조림(祖林)의 생아버지인것이다. 정령은 지난달의 동지이며 또 전우였던 전남편의 글들을 정성껏 정리, 출판하여 세상에 남긴것이다.
1952년에 옹근 한여름을 정령내외와 우리는 이웃하여 살았다. 당시 북경 이화원-서태후의 별궁-만수산기슭에 전국문련의 별장 두채가 있었는데 그 하나를 운송소(云松巢)라고 하고 또 하나를 소와전(邵窝殿)이라고 하였다(당시는 아직 작가협회가 성립되지 않았었다). 정령내외가 들어있는 운송소와 우리가 사는 소와전은 자그마한 정자 하나를 사이둔 아래웃집이였으므로 피차간 래왕이 잦았었다.
<<인물을 써야 해, 인물을. 이야기를 엮지 말구... 인물을 써야해, "홍루몽"에 나오는 그 숱한 인물들이 다 살아서 아직두 우리 눈앞에서 움직이구있잖은가. 인물의 성격을 부각하잖은 소설은... 실패작밖에 더될게 없어.>>
이와 같이 정령은 거듭거듭 나에게 강조하는것이였다.
하루는 내가 무엇을 쓰다가 무심코 눈을 들어 창밖을 바라보니 우리 집 소와전-아름드리목이 하늘을 가리는-마당에 웬 낯선 사람들이 여럿이 들어와 서성거리고있었다. 공원안에 있는 집이였으므로 유람객들이 일쑤 드나드는 까닭에 나는 례사로이 생각하고 다시 하던 일을 계속하였다. 한동안이 잘 지나서 또 어떡하다 밖을 내다보니 앞서 들어왔던 유람객들은 어느새 온데간데없이 다 사라지고 그 대신 만면에 웃음을 띤 정령부부가 우리집 마당으로 들어오고있었다. 운송소의 정문은 있어도 쓰지 않고 다들 옆문으로 드나드는 까닭에 자연 우리가 사는 소와전의 마당을 지나다니게 되였었다.
내가 심심파적으로 마주 나가며... 무슨 좋은 일이 있었느냐고... 그저 지나가는 말로 물어보았더니 정령은
<<고대 우리 집에 오셨던 손님을 바래구 들어오는 길이야.>>
하고 새삼스레 남편하고 둘이서 즐거운 웃음을 웃었다.
<<어떤 손님인데요?...>>
하고 내가 재쳐 물은즉 정령은 상글거리며 무슨 비밀이라도 가르쳐주듯이 목소리를 푹 낮추어가지고 내게다 귀띔해주는것이였다.
<<모주석, 모주석... 모주석이 오셨댔어. 지금 곤명호에 배를 타러 나가셨으니... 빨리 나가봐요. 해양이랑 해양이 엄마랑... 얼른요!>>
(그러구보니 조금전에 소와전 마당에 들어와 서성거리던 사람들은 유람객이 아니구 모주석의 경호원들이였구나!)
나는 들었다보았다하고 안해와 아들을 불러내는 즉시 세식구 함께 엎드러지며 곱드러지며 락수당(乐寿堂)앞 배닿는 곳으로 달려갔다...
56년 가을 내가 북경에 갔을 때 초대소에서 정령의 집-다복항(多福巷) 16호로 전화를 걸었더니 통신원 소하(小夏)가 대번에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김학철동지가 아닙니까? 언제 오셨습니까?>>
하고 되묻는데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정령부부는 마침 사천을 가고 부재중이여서 섭섭하지만 나는 그냥 귀로에 올라야 하였다.
달포가량 지나서 북경으로 돌아온 정령에게서 편지가 왔는데 해양이앞으로 그림책 한 소포를 부쳤다는 사연이 적혀있었다. 그리고 이듬해봄에 온 편지에는 그 늙으신 어머니가 세상 뜨신것을 슬퍼하는 절절한 사연이 적혀있었다(우리는 다들 정령의 모친을 <<퍼퍼(婆婆)>>라고 불렀었다).
그로부터 29년이 지나서 나는 그 <<퍼퍼>>의 딸-정령 본인의 슬픈 소식을 그 남편-진명에게서 받았다.
정령은 더운 사람이였다. 강인한 의지의 소유자였다. 중국인민의 충직한 딸이였다.
김학철전집4-태항산록-(부록)마지막 스무하루의 낮과 밤(끝)
부록
마지막 스무하루의 낮과 밤
김해양
이천일년 구월 이십칠일 밤
달도 유난히 밝았다. 달빛아래 두만강은 은빛으로 빛났다. 유유히 흐르는 두만강 물결은 지칠줄 모르는 한 령혼을 싣고 저 멀리 동해바다로 떠나간다. 말없이, 끊임없이.
두만강에서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을 보내면서 눈물 섞인 소리로 조용히 말하였다.
아버지,
지금 이렇게 두만강까지 왔습니다,
아버지가 바라시던대로 이제 곧 두만강 강물에 실려 저 멀리 넒은 바다-아버지의 고향인 원산 앞바다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으로서 오늘 이 길을 떠나가십니다.
아버지가 여기 오시기까지는 너무나 긴 파란만장하고 격정적인 세월이 흘렀습니다.
상해와 남경 반일테로활동을 하실 때엔 류자명선생의 부하로서, 무한조선의용대시기엔 김봉원선생의 부하로서, 태항산조선의용군에서는 김두봉선생의 부하로서 총을 들고 싸우셨습니다.
그후 일본군에 의해 한다리를 잃으시고 부득이 총을 붓으로 바꾸시였습니다. 그리고는 줄곧 오늘까지 그 붓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그 붓을 함께 보내드립니다.
떠나실 때 아버지는 정말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일생을 맑스와 엥겔스 사상의 그늘밑에서, 로신의 불굴의 의지로 살아왔습니다.
전우들을 전쟁터에서 잃으시고 또 먼저 보내시고 붓으로 그들을 이 세상 사람들께 알려주셨습니다. 그로써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성실하고 용감한 우리 조선민족의 문인들과 함께 일하셨습니다. 그분들을 대표하여 오늘 이 자리에 십여명 문단의 전우들이 모였습니다. 그로써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들과 손자가 성실하게 자라서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이 자리엔 어머니와 손자와 손녀가 오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이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떠나서는 모습을 끝까지 끝까지 지켜볼것입니다.
일생을 고생하신 어머니가 아버지를 향해 손을 흔들고계십니다.
손자 시월이 그놈이 아버지를 향해 손을 흔들고있습니다.
아버지, 이젠 그 고독한 고달픈 인생을 잊으시고 편히 다녀가십시오.
저 멀리 할머니가 계시는 고향으로 가십시오.
아들 해양
이천일년 구월 이십칠일
마지막 스무하루의 낮과 밤
9월 5일 수요일
미음조차 속에서 받지 않는다. 석달 동안 지속된 주사도 지긋지긋하시단다. 서울적십자병원에서 보내주기로 약속된 병지(病志)도 종시 오지 않는다. 입원치료의 기회를 놓치신듯하다.
하루도 한시도 일을 못하시면 안달아하시는 성격에 석달이란 참으로 지옥 같은 참지 못할 생활이라고 하셨다.
친필로 유서를 작성하셨다.
남기는 말
사회의 부담을 덜기 위해
가족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더는 련련하지 않고
깨끗이 떠나간다.
김학철
병원 * 주사 절대 거부
조용히 떠나게 해달(라)
9월 6일 목요일
하필이면 고통스럽게 물까지 마시지 않으시렵니까?
애타는 권유에 보리차를 드시고 기분이 무척 좋으셨다.
서울에서 이번에 출판한 산문집 <<우렁이속 같은 세상>> 십여권에 싸인을 하셨다. 증정하실 책들이다. 받으실분들로는 <<은하수>> 金声宇선생/ 연변대학 연구소 金东勋선생/ 연변대학 조문계 金虎雄선생/ 작가협회 金学泉선생/ 연변일보 문화부 李任远선생/ 연변인민출판사 李成权선생/ <<연변문학>> 张志敏선생/ 사회과학원 金宗国선생/ <<장백산>> 南永前선생/ <<도라지>> 高信一선생/ 료녕민족출판사 郑俊基선생이시다.
9월 7일 금요일
작가협회 김학천선생, 손문혁선생 두분을 집으로 부르시였다. 조직과의 마지막 담화이시다.
이십여분 동안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시였다.
김학천선생의 인격과 조직능력, 작가협회 여러분들의 몇해 동안 꾸준히 추진해온 사업들을 충심으로 평가하시였다.
우리 민족 문단의 새 세대에 희망과 신심을 갖고계신다. 문학의 불씨를, 굳센 붓을 넘겨주고싶으셨다.
<<연변문학>>을 언급하시면서는 작가협회 기관지로서 없어서는 안될 <<연변문학>>은 장지민선생의 정력적인 활동으로써 유지될수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잡지사 조성희선생은 아버지 조득현선생과 친분이 깊으실뿐만아니라 어릴 때부터 성장을 지켜보셨고 사랑해주셨다.
<<연변문학>>(천지)과는 참으로 오랜 세월 생사고락을 함께 하시였다.
9월 8일 토요일
하루종일 물도 못 드시였다. 물을 마시면 한참이나 호흡하기 힘드시다. 고통스러웠다. 식사를 전혀 못하신지도 나흘째.
오늘 많은 이야기를 나누시였다.
나는 일생을 허위와 신격하를 반대해 싸웠다. 모택동의 개인숭배도 포함해서.
사회주의는 종국적으로 실현될것이다. 맑스와 엥겔스의 사상은 존경을 받아야 한다. 그러할 권위도 있다. 하지만 20세기에서 서둘러 최종 완성하려 했던것이 문제로 됐다. 사회의 발전은 인위적인 요소가 아니라 법칙에 위해 진행되는것이다. 일당독재도 문제가 있다. 서로 견제하고 감독할 세력이 있어야 한다.
오후 한국 염인호교수의 부탁으로 조선의용대창설기념사진에서 전우들의 이름을 확인하는 작업을 하셨다.
침대에서 책상앞 걸상으로 안아 옮겨드렸다. 확대경을 힘겨웁게 드시고 콩알 크기의 얼굴에서 옛 전우들의 모습을 찾기는 쉬운일이 아니였다. 63년전의 사진이다. 하지만 인간의 기억력이란 참으로 놀라운것이다. 구십여명의 대원중 얼굴이 많이 가려진 두명외에 이름을 전부 확인하셨다. 그것도 별명까지. 이름을 받아쓰면서 몇번 나누어 작업하자고 권유했지만 언제 기력을 잃을지 모른다 하시며 끝까지 견지하셨다. 절단된 다리로 균형을 잃어 몸이 자꾸 한쪽으로 쏠렸다. 아픈 눈을 비비시고 또다시 확대경으로 달려 드셨다. 옆에서 지켜보느니 흐르는 눈물을 속으로 삼키였다. 이 일을 내가 안하면 영원히 력사의 퀴즈(수수께끼)가 될것이야.
침대에 옮겨누우신후 오래동안 말씀을 못하셨다.
9월 9일 일요일
맑스와 엥겔스의 사(死)후에 대해 이야기하셨다.
맑스는 영국 하이게이트공동묘지에 검소한 무덤 하나뿐이다. 엥겔스는 그나마 묘지조차 없다. 친우들에 의해 골회함은 영국남쪽 도버해협에 해장(海葬)됐다. 나도 엥겔스처럼 아무 흔적도 남가지 않고 가게 해달라.
9월 10일 월요일
남영전선생이 장춘에서 찾아오셨다. 장춘병원으로 모시고 가려 한것이다. 단연 거절하셨다.
<<장백산>>과 인연이 깊다. 자연히 남영전선생과도 그렇고, <<장백산>>에 많은 희망을 걸고있다. 우리 문단이 그 누구에게도 못하지 않은 대오가 되기 바란다. 그 진두에 <<장백산>>이 힘차게 서달라.
이런 병환으로 쓰러지시기전까지도 <<장백산>>에 보내실 원고를 쓰셨다. 끝까지 붓을 놓지 않으셨던것이다.
남영전선생을 보내시면서 아껴쓰시던 손목시계를 벗어주셨다. 남영전선생은 그 뜻을 알겠노라고 눈물을 흘렸다.
많은 풍파를 같이 겪었던 <<장백산>>.
유서를 타자하게 하시고 열다섯장에 일일이 서명을 하셨다.
유서는 두마디기 첨부되였다.
편안하게 살려거든 不义에 외면을 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을 하라
9월 11일 화요일
오늘 커피스푼으로 한술 한술 조심스레 입에 물을 떠넣으드렸다. 호흡과 충돌이 생기면 등을 두드려드렸다. 하루에 물 세컵, 성적이 좋았다.
작가협회 손문혁선생과 단둘이 다방에서 만나 후사(后事)에 관한 아버지의 뜻을 전하였다.
부고를 내지 않는다.
추도식을 하지 않는다.
일체 부조금을 받지 않는다.
화장한후 두만강에 뿌려달라.
골회함 대신 우체국의 종이우편박스를 사서 담아라. 일부 남은것은 그대로 담아 두만강에 띄워보내라. 우편함에 다음과 같이 써주기 바란다;
마지막 가는 길에서는 조선의용군 추도가와 황포군관학교 교가를 불러달라.
두만강까지 가실분들로는 작가협회 김학천, 김호근, 손문혁/ 출판사 리성권/ 신문사 장정일/ 잡지사 조성휘/ 과학원 김종국/ 대학 김호웅/ 외지 남영전/ 친우 장일민, 조룡남, 박찬구선생 등 열두분.
아버님이 전쟁터에서 쓰신 시 한구절이 생각난다.
<<밤 소나기 퍼붓는 령마루에서
래일 솟을 태양을 우리는 본다>>
9월 12일 수요일
미국에서 일어난 인류력사상 최대의 테로비극을 뉴스화면으로 목격하셨다. 오래동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시였다.
가기전에 이러한 비극을 보고 떠나야 하다니, 탈레반과 빈 라덴은 철저한 응징을 받아야 한다.
연변인민출판사 리성권선생을 만나시였다. 리성권선생이 <<아리랑>>에 계실 때부터 아끼시였다. 출판사가 힘든 사정에서 <<문집>>(김학철문집)을 내는것은 무리가 아닌가 걱정하셨다. 리성권선생은 <<문집>> 제5권이 곧 출판될것이니 꼭 보셔야 한다고, 침대에 엎드려 손을 잡고 울었다. 성권이 차로 두만강까지 데려다달라고 후사를 부탁하셨다.
리성권선생을 보내시면서 쓰시던 파카볼펜을 주셨다. 방문을 닫고 한참이나 유리너머로 최후의 작별인사를 하는 리성권선생, 두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올해 대학을 졸업하고 북경의 한 회사에 취직한 손자 우정(友情)이가 돌아왔다. 갓 취직한 회사 일에 지장이 된다고 절대 불러 오지 못하게 하셔서 손자는 부득불 길림지사로 출장오는 길에 들렸다고 했다. 꾸중은 면했지만 가슴은 아프다.
할아버지에게는 더없는 위안이 되셨다. 속으로는 얼마나 보고싶어하셨던 손자이던가.
9월 13일 목요일
장정일선생과의 약속을 되새기셨다.
래년에는 추리구감옥에 한번 가보기로 했는데.
당시 간수의 말이 생각났다. 다른 늙으이들 퍽퍽 쓰러져나가는데 당신 아버지는 일년 내내 랭수마찰로 살아남았다.
장정일선생은 해마다 봄, 가을 동생분의 차로 모시고 산으로, 들로 소풍을 가셨던것이다. 그렇게도 시간을 아끼셨는데 장정일선생이 가시자면 꼭 따라나서시는것이 참 이상한 일이였다.
사회과학원 김종국선생께 책을 보내드렸다. 선생은 외지에 나가시고 부인께서 받으시였다.
리상각선생의 전화를 받았다. 몹시 근심어린 목소리시다. 전에도 늘 전화하시고 찾아오시여 건강을 관심해주셨다.
읽기와 쓰기에 게으르다고 큰 꾸지람을 들었다.
학문이란 곧 노력이다. 나나 고리끼나 다 자습밖에 더 있었느냐? 홍명희의 <<림꺽정>>을 외우다싶이 했다. 어느 구절이 어디 있는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홍루몽>>과 <<로신전짐>>은 또 몇번이고 읽었더냐. 오직 노력뿐이 사는 길이다. 내 일본어실력을 너에게 넘겨주고 가지 못하는것이 참 유감이구나.
9월14일 금요일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学) 오오무라교수 내외분께서 오시겠다고 전화가 왔다. 참으로 오랜 기간 집사이에 우의를 지켜오신 분들이시다. 일본을 방문하셨을 때도 늘 동반을 하시였다.
미리 집밖 마당에서 맞이하고 정황을 말씀드렸다. 교수님은 말없이 땅만 내려다보시고 부인께서는 소리내여 우셨다. 참 하늘이 두분을 때마침 보내주신 모양이다.
오오무라선생께서는 방에 들어서서는 웃음을 지으셨다. 서로 여유있는 롱담을 나누시였다. 참 넓은 마음들을 가지고계시지 않은가.
나 정판룡선생과 죽음시합을 하는 모양이지요. 그 사람 인물이지. 도량이 넓고.
오오무라선생이 <<이 시합에서는 지는것이 이기는것입니다>>라고 롱담을 받으시고는 잡은 손을 쓰다듬으시며 <<이 손으로 얼마나 많은 글을 쓰셨습니까!>>라고 한탄하셨다.
오오무라선생 내외분과 함께 찍은 사진이 일생 마지막으로 남긴 사진이 되였다.
9월 15일 토요일
손자 우정이가 큰절을 드리고 따나갔다. 대견해하시면서, 섭섭해하시면서 애써 표정을 감추시였다. 모든것이 마지막이라는 꼬리표가 붙는다는것을 의식하시는듯싶다.
한국에서부터 밀착촬영을 한 조천현기자가 마지막 방문촬영을 하였다. 한국 기자들의 끈질긴 사업정신은 정말 놀랄만하다.
9월 16일 일요일
물 세컵 드셨다.
조선의용군 추도가와 황포군관학교 교가를 들으시였다.
추도가는 전쟁터에서 가사를 쓰시고 가장 친한 전우 류신동지가 작곡하여 전우들이 희생됐을 때 불렀던 노래다. 한데 호가장전투후 김학철 등 네명의 <<전사자>>들을 위한 추도식에서도 이 추도가를 불렀다. 총을 맞아 일본군에게 끌려가셨는데 당시 전우들은 전사한줄로만 알고있었다. 후날 그 류신이가 먼저 전사하셨다.
작가협회 손문혁선생과 장춘 남영전선생의 전화가 날마다 들이닥친다. 손문혁선생 전화는 지어 하루에 두번이다. 김학천선생의 부탁이였다. 어려운 나날에 힘이 되였다. 가슴속 깊이 뜨거운정을 느꼈다.
식구들을 부르기 힘드시다고 손으로 흔드는 종을 얻어오라 하셨다. 며느리가 학교 악대에서 쓰는 작은 손종을 빌려왔다. 며느리가 효도하누나 칭찬하셨다.
9월 17일 월요일
오늘부터 또 물을 못 드신다. 못 드시는지 안 드시는지 판단이 안간다.
침대에서 할일없이 누워있다는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것인지 아무도 모를것이야. 주사따위를 맞으면 몇달은 더 살겠지. 하지만 글도 못 쓰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다른 사람들에게 부담만주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단촉해야 한다.
채택룡선생은 일생 고생은 하셨지만 가실 때는 복스럽게 가셨다.
어머니와 나를 불러놓으시고 다시한번 확인하시였다.
혼미상태에 들어간후 절대로 의사를 부르거나 주사를 놓지 말라. 고통을 인위적으로 연장하지 말라. 억지로 생명을 연장하는것은 내 고통을 천여원 월급을 더 타먹으려는 비렬한짓이다. 내 아들답게 용감하게 성실하게 처사하라.
9월 18일 화요일
나는 참 행복하다. 그 치렬한 전쟁터에서 살아남아 하고싶은 일들을 마음껏 했다. 아들, 손자 다 성실히 잘 자랐고. 집에서 침대에서 죽을수 있다는것이 행복하다. 조용히 가게 해달라.
9월 19일 수요일
한밤중에 갑자기 나를 불러다놓고 하시는 말씀.
오직 손자에게 미안하다. 손자의 가슴을 아프게 한것이 한이 된다.
9월 20일 목요일
박찬구선생을 소개하는 나의 결론을 구술.
박찬구선생에 대해 이야기하셨다.
반우파운동으로 도서관지기를 하실 때 일이다. 식량이 부족해 다들 배를 곯는 시기다. 외다리를 해가지고 량식 구하러 다닐수도 없는 형편에서 소학교 삼사학년에 다니는 외아들을 좀더 먹이려고 날마다 점심을 굶으시였다. 당시 문화처 과장으로 일하시던 박찬구선생이 몇번 책가지러 오셨다가 우연히 발견하시고 도시락을 둘씩 싸가지고 오셔서 나누어 드셨다. 그 당시 우파분자를 동정해 점심을 나누어 먹는 일이 남이 알면 철직은 둘째고 당사자도 우파분자로 투쟁맞을 형편이다.
후날 이 일을 평생 잊지 않으셨다.
장일민선생께서 전화가 왔다. 벌써 다섯번째이다. 만나지 않겠다면 안 만나마. 그러나 왜 입원을 안시키는거냐! 분노의 목소리였다.
평일 아버지와 전화련락이 제일 많은 친구분이시다.
9월 21일 금요일
머리를 아주 빡빡 깎으시겠다고 하신다. 롱담조로 최후의 분대장 머리 깎고 조선의용대에 복귀한다고 하셨다. 전우들이 다 가있는 곳으로 말이다. 깎으신 머리에 처음 보이는 칼자국이 나타났다. 문화혁명시기 홍위병들이 쇠몽둥이로 쳐서 머리가 터진 자국이라 하셨다. 그때 온몸이 피투성인데 약 하나 발라주는 사람 없었다. 피가 말라붙기를 기다릴수 밖에 없었다. 그것도 외다리로 절름거리며.
일본감옥에서의 이야기도 나왔다. 전향서를 쓰지 않는다 해서 부상당한 다리를 치료해주지 않았다. 삼년 또 륙개월 동안 피고름을 흘리면서 독방에서 지내야 했다. 상처에 생기는 구데기를 저갈로 골래내노라니 참 고된 인생이였지. 결국은 감옥장이 바뀌면서 해방전야 다리를 절단하였다. 그로써 60년 동안 외다리인생이 되였다.
잘린 다리는 일본감옥에 묻혀있다. 그러니 나는 무덤이 이미 하나 있는 신세구나. 하하하.
집에서 깨끗이 목욕을 시켜드렸다. 여윈 몸은 아프리카 난민을 련상시켰다. 내가 가슴 아파하자 강건너에서 굶어죽는 사람 많지 않으냐! 천하에 보모를 보내는 마음 다같다고 격노(激怒)하시였다.
그렇게도 사랑하던 손녀를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신다. 평소의 인자한 모습을 손녀의 기억속에 남기고싶으신듯하다.
박찬구선생께서 문전까지 오셨다가 만나지 못하시고 돌아가셨다. 옛 친우들에게 지금의 모습 보이고싶지 않아 하셨다. 보내시고 가슴 아파하셨다. 박찬구선생께서는 나를 끌어안으시고 눈물을 흘리시였다. 어릴적 선생께 심부름 갔던 일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9월 22일 토요일
아버지를 귀국하시자마자 입원시키지 않은것이 두고두고 후회될것입니다.
너는 옹졸한 인간이다. 내 뜻을 끝까지 리해하지 못하는구나.
한명(限命)을 아는것이 영웅이다.
제일 힘드시는것이 목이 마르는것이다. 물을 조금씩 입에 물었다가 조심조심 뱉어내시였다. 그리고는 어 시원해, 어 시원해 한탄을 하시는것이다.
하룡(贺龙)이 창살밖이 비물을 받아마시다 목말라 세상을 하직했는데 내가 그 신세 아닌가.
색갈이 변해가시는 외다리를 보시며 <<내 손과 발이 먼저 죽어 가는구나>>라고 태연자약하게 말씀하셨다.
9월 23일 일요일
류자명선생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류자명선생과는 남경 화로강시기 같이 있었는데 김원봉선생과 두분이 나의 선생이자 무정부주의 의렬단의 원로이시다.
해방후 류자명선생은 북조선도 한국도 갈수 없는 딱한 처지가 되셨다. 호남성농학원에서 식물학연구를 하시다가 돌아가셨는데 13년전까지 편지왕래가 있었다.
이번 김원봉, 석정선생의 고향인 한국 밀양시를 가셨던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신다.
밀양의 열정적이고 성실하고 친절한 친구분들께, 특히는 석정선생의 후손들에게 돌아와 편지를 쓰려고 했는데 이젠 네가 감사의 뜻을 대신 전해야겠구나. 이번 한국행에 너무나 많은 고마운분들을 만났다. 내가 죽으면 서영훈선생께 꼭 전화하거라.
우리 집에 은인이 또 한분 계신다.
일본에 계시는 강재언(姜在彦)선생께서 제1회 KBS해외동포상을 수상하시고 제2회에 나를 추천하셨다. 늘 나를 아끼시였다. 잊지 말아라.
9월 24일 월요일
그렇게도 강한 의지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예리하고 비웃는듯한 눈빛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참고참던 눈물이 솟아나왔다. 내 눈물을 사이 두고 두눈빛이 부딪쳤을 때 아버지는 눈을 감아버렸다. 그것으로 눈길을 피하신것이다.
사나이는 눈물을 아껴야 하는데.
9월 25일 화요일
음식을 못드신지 스무하루, 물을 못 드신지 아흐레.
말씀하시기 힘드시여 손으로 의사를 표시하신다.
어머니와 나를 한시도 옆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신다. 시야에서 안 보이면 자꾸 둘러보신다. 그리고 찬 수건으로 머리를 식혀달라 하신다. 날씨는 추운데 자꾸 덥다고 하시니.
어제밤부터 배가 아프다고 하셔서 진통제를 놓아드렸다.
새벽 두시 아픔을 견디지 못하신다. 구급차를 불렀다.
연변병원에 입원하셨다.
아버지는 명치끝에 침만 한대 놔달라고 호소하셨다. 아픔을 참기 힘드신것이다. 그러나 병원에서는 아무도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오후 2시
오래오래 저의 얼굴을 지켜보시였다.
아버지, 저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비록 오늘 처음 말씀드리지만.
눈가에 마지막 밝은 눈빛이 빛났다. 가시는 끝까지 의식은 한치도 흐리지 않으셨다.
젖은 수건으로 아버지의 얼굴과 머리를 깨끗이 닦아드렸다. 평생을 털고 닦고 깨끗하기를 그렇게도 좋아하셨는데.
오후 3시 39분
심장의 고동소리가 다시는 들리지 않는다.
사나운 비바람이 치는 길가에
다 못 가고 쓰러진 너의 뜻을
이어서 이룰것을 맹세하노니
진리의 그늘밑에 길이길이 잠들어라
불멸의 영령
김학철전집4-태항산록-(수필)세 악마의 죽음(제5권)
김학철전집4-태항산록-(부록)마지막 스무하루의 낮과 밤(끝) - 소설게시판 - 모이자 한민족 커뮤
부록 마지막 스무하루의 낮과 밤 김해양 이천일년 구월 이십칠일 밤 달도 유난히 밝았다. 달빛아래 두만강은 은빛으로 빛났다. 유유히 흐르는 두만강 물결은 지칠줄 모르는 한 령혼을 싣고 저
life.moyiz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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